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생명 되신 인자 (1: 9-20)

 

나 생명을, 생명(참된 양식)인 나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1:9, 개역)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개역)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개역)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2, 개역)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개역)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개역)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16, 개역)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17, 개역)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개역)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20, 개역)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8절).

즉 이 말은 그 어떤 인간의 시선에서 나올수 없는

결국 인간의 시선 자체가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깡그리 무시할수 밖에 없는 표현인 겁니다.

아무리 살아 있다고 여겨도 죽어 있다고 보시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만이 살아있는 생명이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죽어있는 곧 갇혀있는 자로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서

문을 열쇠로 열고서 끄집어 냄을 당한 자만이

이 표현이 감사하게 여겨지지

독자적인 인간의 시선에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표현이게 되는 셈입니다.

나의 생명이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자체가 기분 나쁘니까 말이죠.


이것은 종교인들

특히 성화론자들일수록 더더욱 기분이 나쁩니다.

 

왜 믿고? 왜 말씀을 왜 실천했겠냐 말이죠?

나의 생명이 남의 손에 의해 좌우 되지 않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이라는 신앙을 가진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지킨 것이다 말이죠.

 

결국 나의 의지로 좌우 되어야 할 생명이, 나의 믿음이,

남의 의지로 좌우 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사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부정적인 사망이 되는 겁니다.

남으로 여겼던 예수라는 자에 의해서 생명이 좌우 될 리가 없거든요, 없다 말이죠. 부정

 

그것도 이단 중의 이단으로써, 율법적으로 십자가에 처형했다 말이죠.

그래야 유대 사회가 건전해 진다 말이죠.

 

그렇게 자기 손으로 죽였던 그 예수를

나의 생명을 좌우하는 열쇠 키를 쥔 분으로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충실하는 겁니다.

성전에 충실하는 것이고요

 

오히려 예수가 뽑았다는 자들 특히 제자들과

세리 창녀 강도 죄인의 친구로써의 예수의 사람들을 보면

율법에 충실하기는 커녕

성전에 충실하기는커녕

막사는 자들의 친구인 예수는 오히려 더 막살고 있다 말이죠.

 

과연 저런 예수라는 작자가

남의 생명을 쥐락 펴락 하는 자로 보이겠냐 말이죠.

 

아니 남을 구원한다메? 그런데 왜 너는 너 자신을 못 구원하니?

 

이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욕먹는 욕 아닙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의 삶이 왜 이 꼬라지냐 라고 말이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하고 부요한 삶을 살기는커녕

완전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느냐?

 

왜 남을 구원한다면서 너 자신은 못 구하냐 말이죠.

 

이 모순의 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꾀가 작동된 것이 바로

성화론이라는 겁니다.

 

메울길 없는 간극인데

기여이 메워버리는 겁니다.

간극을 없애 버려

 

성령이 달라요

그들의 성령은 가능성의 성령이고

 

우리의 성령은 단절성의 성령인 겁니다.

 

믿음도

생명도

그 어떤 것도 내 쪽에 없는 것이

이 단절성이 바로

남이 나의 믿음과 나의 생명과 나의 모든 것을 쥐고

쥐락 펴락 하는 것이

바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이런 교회를 사건으로써의 교회 라고 합니다.

교회란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거죠.

즉 원인이 없어요.

이미 벌써 교회가 되어버린 상태로 교회됨을 누리는 겁니다.

 

그러나 아니다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내 생명을 소중히 잘 다루어야 한다.
즉 저렇게 무모하게 방종하면서 막살면 안된다.

남에게 무책임하게 맡겨서는 안된다

라는 식의 교회가 바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가 되는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를 주장하는 성화의 교회다 라는 거죠.

 

이 두 교회의 차이가 바로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왔는데

하나는 원인을 따집니다.
원인을 따진다는 것은 결과가 부재 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결과만을 따집니다
.
결과만을 바란다는 것은 원인이 부재 되는 겁니다.
이것을 회개 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두 교회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처럼 말이죠.
이것을 좀 더 쉽게 나타낸 내용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 라는 맏아들의 주장과

이것은 독자적이요 나 혼자만이 성취한 개념이고
자기숙제를 한거죠.

 

반대로 탕자는 결과만을 누리는 겁니다.

원인이 없어요.

숙제를 한 적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롬 4장) 결과만을 누리는 겁니다.

 

맏아들교회와

탕자교회

 

맏아들교회는 의문의 원인만을 반복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만을 말이죠.

 

그러나 탕자교회는 원인은 없는채

누가 봐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만 있습니다.

인애와 자비 만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결과란 원인이 없기에 나타나는 겁니다.

단절되었죠.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데 기도내용이 달라요

한 사람 곧 바리새인은 자꾸 원인을 주구창창 나열합니다.


이거 했고 이거 했고. 이런 원인을 갖추었으니
율법이라는 조건에 맞추었으니 구원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다른 한 사람 곧 세리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결과만을 외칩니다
.

원인을 이야기 하지 않아요

?

뻔하거든요. 뭔들 죄 아니겠습니까? 그저 용서해주이소 라는 겁니다.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거든요. 그래서 사랑해 달라는 겁니다.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용서해 주이소 아무리 해도 원인을 갖출수가 애초부터 없다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회개 입니다.
무엇을 해도 다 죄 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의가 없거든요.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데

그 성전에서 한 사람은 성전에 맞게 원인을 나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성전 속에서 또 다른 성전인 결과만을 나열하기에

오히려 새로운 성전이 또 생겨버리는 겁니다.

 

성전 같지도 않은 성전이 생겨버렸다 말이죠. 이게 세리고 (탕자죠)

 

바리새인은 나야 말로 성전에 걸맞는 사람 맞지요? 라는 겁니다. (맏아들 입니다.)

 

다 이렇습니다. 맏아들도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만을 주장합니다.

희한하게 어쩜 그리고 똑 닮은듯이 같은 주장만을 한다 말이죠.

 

독자적이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기 쪽에서 선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교회는 지기 쪽에서 한 것이 없는데

그래서 그 단절성, 잃어버림만을, 끊어짐만을 직시해서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또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와 단절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더러워서 당신같은 거룩한 분이 나와 함께 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떠나소서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은 거룩한 당신이야 말로 더러운 나를, 그런 나의 생명을 쥐락펴락 하시는 자이다는 겁니다.

 

내 속에 생명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쪽에서 생명과 연결했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 생명에 연결시킨 원인 곧

생명에 걸맞는 행동들을 했다고 그런것들을(원인을) 나열하고 있다는 겁니다.

배설물을 말이죠.

 

결국 주님이 생명을 쥔게 아니라

자기가 동앗줄을 쥐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게 썩은 동앗줄이고

 

동앗줄이 탕자를 붙잡은 겁니다.

탕자가 동앗줄을 붙잡은게 아니라

 

통앗줄이 탕자를 붙잡은 것을 원인 없는 결과 라고 한다 말이죠.

오늘 계시록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른팔에 일곱 별 즉 일곱 사자와, 일곱 촛대 곧 일곱 교회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 일곱교회는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원인을 갖춘자

조건을 갖춘자가 아니라

 

탕자처럼 원인 없는 자로써 교회가 되어버린 사건이 덮쳐버린 자들인 겁니다.

졸지에 원인 없는 교회가 된 겁니다. 이미 벌써 말이죠.

교회 되도록 교회 답도록 노력하자가 아니라

 

그럼 어떻게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진 겁니까?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이가

열쇠로 문을 열어서 사망에서 음부에서 끄집어 내었다는 겁니다.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 적 없는 그 원인 그 조건, 그 모호함, 그 의문의 것과]

 

족히 비교도 안된다 말이죠.

 

어머니와 나눈 말씀으로 인해 어머니께서 며칠동안 계속 혼자 중얼중얼 거리시는 겁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라는 이사야 2장의 내용이였습니다.

 

시편 95편을 나눈 가운데서 문제는 왜 안식에 못들어가냐 말이죠.

 

완악함 때문인데

왜 완악할까요? 왜 아직도 유대인들은 수건을 벗지 않는 것일까요?

 

수건을 벗어버리면 광채가 날라가 버린다 말이죠.

원인이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오늘 새롭게 믿어야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멋들어진 나의 신앙의 공로가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진다 말이죠.

원인이 날라가 버리면 안되기 때문에 수건을 벗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뭘 해도 원인을 만들어 낼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뭘 해도 난 안됩니다 라는 그런 고백을 하는 교회는

수건을 이유가 없어요

잘 난 구석이 없는데

가리울게 뭐가 있냐 말이죠.

 

그래서 안식에 못 들어가는 이유

쉼이 없는 자들

천국에 못 들어가는 자들

사망과 음부에서 못 벗어나는 자들

이들은 모두 자력으로 신앙했다고

자력으로 원인을 갖추었다고

그 원인을 하루 아침에 다 날려버리면 안된다고

그 완악함을 고수하는 겁니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비웃음 당하는 자들은

하루 아침에 그 원인들이 다 날라가 버림을 당한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홀라당 수건이 벗겨져 버린 자가 되는 겁니다.

 

수건을 벗지 않아야 명예살인 안 당하는데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리어 수건이 벗겨짐으로 인해서 명예살인 당하는 자 같이 되어버린

졸지에 외부인의 손에 나의 생명이 좌우되는

그런 신세가 된 자를

오늘 게시록에서는 거꾸로 주의 오른팔이 쥐고 있는 일곱 금촛대인 일곱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오히려 저 가짜 교회는 이슬람을 욕하지만 역시나 그들 또한 이슬람과 같은 식이다 말이죠,

의문의 것을 지키면서 반복하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 말입니다.

원인을 조건을 기여이 갖추겠다고

 

내 생명은, 내 목숨과 같은 신앙은 내 손으로 내가 지키지 남이 좌우 하면 안된다고

오히려 이것이 독자적이였다는 겁니다.

종교()가 그것을 더더욱 부추기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에게 맡겨버리는 겁니다.

참 뻔뻔하고 무책임하죠

자기 신앙도 자기 목숨도 남에게 맡겨버리다니 말이죠.

말도 안되는 소리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맡기다니요?

 

그래서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특이합니다.

항상 두 사람을 대조하는데 있어서

한 사람은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자 라는 쪽입니다.

반대로 다른 한 쪽은 얼마나 무책임하면 예수님에게 자기 생명을 책임져 달라고

말도 안되는 생때를 부리는 작자들입니다.

 

얼마나 나쁜놈들인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막사는 놈들이다 말이죠. 무책임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들이 바로 오늘 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의 오른손에 꽉 쥐여진 일곱교회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이 성취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 보세요 얼마나 막사냐 말이죠.

상대적으로 맏아들 보세요 절대 막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잖아요.

 

우리의 시선은 누구를 선호하도록 되어 있는고 하니 맏아들입니다.

그럼 맏아들을 택해야지?

왜 탕자를 선택하냐 말이죠.

 

맏아들을 택할 것 같으면 말라꼬 성경말씀에 기록이 되겠습니까?

말라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왜 있냐 말이죠.

 

다른 종교 경전과 다를바가 없고

유대교와 다를바가 없는데

 

차이성이 없는데 왜 기록이 되겠냐 말이죠.

다들 수건 뒤짚어 쓰고 살면 되잖아요

 

수건 벗으면 창녀라고 총 맞아 죽을 필요가 없잖아요

자기 인생 자기가 관리하면서 똑바로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것을 완악하다고

안식에 못 들어간다고 하시는 겁니까?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11:7, 개역)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9:18, 새번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고후 314절에 있네요

한참 찾았네요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사라질 광채

의문의 광채

? 실상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지

예수님은 얼굴로 오시는데 우리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건으로 만나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사랑의 관계냐 말이죠.

목숨을 맡긴 관계냐 말이죠.

 

수건으로 가린다는 것은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내 생명은 내가 책임지고 너의 목숨은 너가 책임지라 라는 식이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은 아무리 잘 믿어봤자

맏아들처럼

부자청년처럼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함

실상 앞에서 이런 모든 것은 사라질 의문의 똥떵어리 일 뿐입니다 라고

실상 앞에서 다 쏟아버려야 할 꾸중물인데

그것을 뒤짚어 쓰고 그 똥물 배설물을 뒤짚어 쓰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완악함일줄도 모르고

성화론이 악마적인줄도 모르고

천국에 안식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을 붙잡고 있으니 말이죠.

 

히브리서 34장에 안식에 못 들어간다 그래놓고 뒤에 5장부터 멜기세덱을 언급하는 이유는

 

니 생명 나기 책임 지는게 아니라

내 생명을 타인이

그것도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는

그 양반을 멜기세덱이라고 하는데

그분이 샬롬왕이라

안식 왕이라

평화 왕이라

 

즉 사망과 음부에서 끄집어 내는 열쇠를 쥔 자이다는 겁니다.

원인도 없는 분이 말이죠.

 

그 분에 의해서 건짐을 받은 자를

그 분의 오른손에 꽉 쥐여진 자들을 일곱 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마치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안식의 주인이 일곱교회를 건져내듯이 말입니다.

 

안식의 주인 자체가 원인 없는 결과인데

맨얼굴로 오셨는데

다들 안식일 지킨다고 안식수건을 다 뒤짚어 쓰고 있으니

맨얼굴인 인간을 찾아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날만 일부러 고쳐요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자들의 눈에 제일 거슬린다 말이죠.

 

자 이렇게 맞물리는 겁니다.

제발 안식일 지키지 마세요

수건 벗으세요

사라질 의문의 것입니다.

맨얼굴로 맞이 합시다.

그 모습 그대로

 

뭐 하나 뜯어 고칠 생각 마시고요

안됩니다. 못 고칩니다.

그래서 주님께 뻔뻔스럽게 맡기는 자

그 사람을 주님은 열쇠를 쥐고서

사망과 음부에서 끄집어 내시는 겁니다.

 

뭐 갇힌 자가 아닌 자는 뭐 하나 아쉬울게 없으니

예수님이 필요 없는 거죠.

안식에 못 들어가는 완악한 자로써 수건 쓰기를 고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아무리 멋들어지고 경건하게 교회를 갖추었다고 우겨도

예수님의 오른손에 꽉 쥐어진 일곱교회가 아닌 겁니다.

 

신부란 신랑 앞에서 의문의 수건이 다 벗거져 사라져버린

가리고 싶어도 수건이 없는
완악하지 않는

자기 하나 자기 스스로도 깨끗하게 할 수가 없는

무능한 자로써

오로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분에 의해서만

샬롬에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인 겁니다.

 

오직 에수님을 참된 양식으로 먹는 자만이 말입니다.


(요 6:1,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요 6:2, 개역)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요 6:3, 개역)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요 6:4, 개역)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 6:5, 개역)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요 6:6, 개역)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 6:7, 개역)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 6:8, 개역)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요 6:9, 개역)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요 6: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 쯤 되더라』

(요 6:11, 개역)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요 6:12, 개역)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요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16, 개역)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요 6:17, 개역)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요 6:18, 개역)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요 6:19, 개역)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요 6:20, 개역)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요 6:21, 개역)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 6:22, 개역)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요 6:23, 개역)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요 6:24, 개역)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요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개역)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개역)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 6: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 6:44, 개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5, 개역)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46, 개역)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6:47,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개역)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7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 6:71, 개역)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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