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2: 1- 5)

 


(
2:1, 개역)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2, 개역)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개역)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개역)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개역)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먼저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한다는 말은

교회의 목사에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사에게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 편이 아니다는 거죠.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편지를 해 버리면

그 교회는 인간의 손에 좌우가 되는 겁니다.

 

교회는 주의 오른팔에서 좌우 됩니다.

주의 오른손이 붙잡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무이다.

 

그래서 천사는 영으로써 영되신 주님의 명령대로만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 여부에 따라서 교회를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바른 교회 하겠다는 둥

바른 목사 바른 목회를 하겠다는 것 등등이

천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천사는 인간 말 안듣거든요.

주님의 사자이지

인간의 사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만 지시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천사는 무슨 일을 하느냐 말이죠.

주님의 편지를 전달하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붙잡은 사람이냐?

예수님이 붑잡지 않은 사람이냐? 로 나누는 거룩을 선포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붙잡는 교회냐?

예수님이 오른손으로 붙잡지 않는 교회냐?
로 나누어지지

 

즉 이 말은 다시 인간이 예수님을 붙잡느냐?

인간이 예수님을 붙잡지 않느냐? 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세워진 교회의 특징은 바로 인간이 예수님을 붙잡냐 안그러냐로 결정되고 있다는

육의 특징입니다.

 

천사가 필요가 없어요

주의 사자가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한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말이죠.

주의 오른팔이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팔이 예수님을 붙잡냐 안붙잡냐로 결정이 되니 말이죠.

 

자 이렇게 때문에

벌써 인간은 배제 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특징은 인간 배제입니다.

주님 혼자 북치고 박치고 혼다 다 해요

이것이 다 이루었다 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다 이루었다 라는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상대적인 덜 이루었다 라는 인간의 행함 곧 의문의 반복들이 보충물로 동원이 됩니다.

즉 육이 영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부정적인 보충물로써 동원이 되는 도구가 되죠.

 

야곱이 사랑받기로 작정되었다는 생뚱맞은 원인 없는 결과를 말하기 위해서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되었다는 에서의 사고방식인 원인 있는 결과가 보충물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천사의 일방적인 통보로써의 편지가 바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는 주의 간섭에 놓여진 주님의 오른팔이 붙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웃기게도 오늘날 교회들은 이 계시록의 일곱교회 중에 취사선택을 해요

취사선택을 하는 마귀 짖을 해요

그래서 가장 책망이 덜한

부정성이 가장 덜한

긍정성이 가장 많은 것을 취사선택해서

교회 이름으로 정하더라 말이죠.

이것은 주님의 오른팔이 필요가 없고

주의 사자가 필요없는

 

인간들의 작당들에 의해서 모이는 종교동아리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에베소 교회가 칭찬들은 것이 바로

거짓 사도를 쫏아내었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어떤 목사가 복음적이냐 그렇지 않냐를 물었습니다.

 

그런 목사를 평가할때의 기준은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다 이루었다 라고 해 놓고서는

말로는 십자가 십자가 라고 해 놓고서는

자꾸 교회를 교회 답게

자기자신인 목사를 목사 답게

자꾸 손 대기를 한다 말이죠.

 

거지 나사로가 되어야지

바리새인이 되면 안된다고

거지 나사로 되기 운동을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답은 간단했습니다.

 

거지나사로 되기를 하는 복음은 없어요.

이미 거지 나사로로 태어났는데

거지 나사로 로 태어난 성도가 다시 거지 나사로 되기 운동을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에서 태어난게 아니다 말이죠.

 

자 이렇게 답변을 했더니

 

소위 안 그러는 자가 어디 있냐 말이죠.

 

불가능한 소리를 한 셈이 된 겁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한 거다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한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받아적을려고 메모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해 버리면

에이씨 받아적을만한 것이 없게 되었다고 투덜 거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인간이 아니지요.

반드시 받아 적을만한 것들을 자기가 맹글어서 받아적는척 합니다.

그렇게 받아적은 것이

주의 사자의 편지와 달라요.

 

주의 사자는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받아적은척 한 것은 번제와 제사를 여전히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입니다. 다 이루었다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 이루었다가 되어 버리면

할게 없어서 방종케 되기 때문에,
방종치 못하도록 정신없이 뺑뺑이 돌려야 한다는 겁니다
.
그래야 막살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게 막살고 있는 목사들의 트릭 아닙니까? 

뭔가 자꾸 일할 꺼리를 줘야 하고

뭔가 자꾸 믿을 꺼리를 줘야 인간들은 딴데로 새지 않는다고
막살면 안된다고

 

자기들이 옆길로 새고 있으면서 남보도 옆길로 새지 않도록 인도하겠다고 우기는거다 말이죠.

 

즉 남들 보고 옆길로 새지 말라고 하는 그것이

자기가 옆길로 새는 것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활동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기여이 교회를 교회 답게 하겠다고

성화라는 둥 개혁을 해야 한다는 둥 하는 겁니다.

 

대상물이 아니다 말이죠.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상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꾸 자기가 현미경으로 관찰해서 봐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아닙니다. 도리어 나의 대상물로 여겨진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그 현미경 유리에 놓여진 그 벌레가

도리어 나를 대상물로 관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 에베소 교회가 칭찬듣고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을 잘 가려내었다 라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요

원인 없는 결과인데

 

여기에 자꾸 덜 이루었다

원인 있는 결과를 주장하는 거짓사도들의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의 반복을

이 에베소 교회는 거부를 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또렷하게 다 미래 완료 된 사랑이 있는데

어딜 감히 꾀냐고 말이죠.

 

그런 거짓사도들의 꾀임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고 칭찬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당연히 책망받는 간섭이 있어야 겠지요.

그것은 처음사랑을 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 처음 사랑을 버리면 언제든지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교회란 언제든지 교회 아닌 것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면

촛대를 언제든지 옮겨지게 되는

주의 사자에 의해서 좌우되지

바른목회를 하는 목사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것에 조금이라고 미흡되다 라고 자꾸 뭔가 손댈려고 하는 목사가 있다면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처럼 언제든지 그런 목사를 쫏아내는 그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에베소 교회가 처음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즉 이 말은 남에게 그렇게 제대로 가차없이 적용하던 그 끊어버림이

정작 자기자신에게는 무 짜르듯이 단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이런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엘리야의 모습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합이 850 대 엘리야 단 한 명 1로 싸우는 싸움에서

참 제대로 거짓선지자를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화가난 이세벨이 이스라엘 선지자를 다 죽이니까

엘리야가 도망치다가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워서 여호와께 원망하게 되더라 말이죠.

 

바로 이것이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는 처음사랑을 잊었다는 책망인 겁니다.

처음사랑을 자꾸 시간상에 놓는 과거의 처음 그때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시간상의 처음인 과거가 아니라

그 처음을 누가 개시했냐 라는 누구 라는 인물이다 말이죠.

 

그 인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있는데

그 인물이기 처음과 나중이기에

그 인물이 지금 너가 우기고 있는 나만 남았나이다

거짓선지자를 쫏아내니까

그 후폭풍은 자기 혼자 남고 에베소 교회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이것을 책망하사 일곱 교회나 남아있다는 겁니다.

칠천명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세벨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명 말이지요.

그러니 인간의 계산법에 의하면 칠천명이 남아 있을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주의 사자가 통보해주는 원인 없는 결과는 칠천명이 있다는 겁니다.

 

결국 거짓선지자를 쫏아낸 그 칭찬과 같이 연결된 책망이다는 겁니다.

 

칭찬 했으면 책망하지 말아야지

칭찬 해 놓고 책망하면

이것은 하나 마나 한 것 아니냐

줘 놓고 뺏으면 결국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냐

 

바로 이 아무것도 없다면 사랑인줄 알아라 말이죠.

 

여기에 거짓선지자는 거짓성도들은 거짓은 견디질 못하고

거 봐라 우리 말이 맞지

뭔가를 남겨야지 결론적으로 손에 쥔 것 아무것도 없으니 방종하게 되지 라고 우기는 겁니다.

자기들이 맞다고 우기는 거죠.

 

그러나 믿음은 이 손에 아무것도 아니 쥐는 겁니다.

? 다 이루었기에

오로지 남은 것은 주의 오른팔이 붙잡은만 뿐이며

다 이루었다 뿐이다 말이죠.

 

그 빈공간을 저들은 견디질 못해서 자꾸 뭔가를 채워넣는 겁니다.

빈공터를 견딜수가 없어요.

 

빈공터 아무것도 없는 것

하나 마나 한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무조건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에베소 교회는 엘리야처럼 자꾸 따지는 겁니다.

내 손에 아무것도 쥔 게 없다고

그러나 아무것도 없기에 그것이 사랑인줄 알아라 라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결국 처음사랑은 엘리야 너가 손댄적 없는 칠천명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무조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도 많은지

 

결혼하는 사람이 무슨 놈의 조건이 많은지 결혼에는 사랑만 있으면 되는데

사랑 빼고서 조건을 따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결혼하고자 함이 아니라 사랑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혼할려고 결혼하고 있는 셈이다 말이죠.

 

결과적으로 저들이 오히려 하나 마나 한 짓이다 말이죠.

 

저들이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 십자가 인데

십자가가 하나 마나 한 것이다 라고 욕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꾀가

누워서 침뱉기 식으로 너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데 주님이 대신 달린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꾀가 오히려 더 작동토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랑은 이질적인 겁니다.

십자가는 이질적입니다.

오죽하면 믿음의 달인들 조차도 이 십자가는 못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질적이거든요.

 

무조건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달인들의 세계에서는 조건으로

그놈의 조건들을 갖추어서 그 자리에 앉게 된 갑질의 세계인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곧 사랑은 그런 조건 따지는 꼴 못 봅니다.

다 부서버립니다.

 

그래서 여인이 시댁에 오면 시댁의 법도를 따르는게 아니라

그 놈을 죽을 사랑 때문에 이질적으로

시댁의 법도를 해체시키는 겁니다.

 

여자 하나 잘 못 들여서 집안이 망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사랑은 이질적이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 여인이 곧 그 사랑이

시댁을 망하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게 바로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사랑 곧 혼인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시아버지 유다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 시아버지 엘리야의 눈에 거스리는 것이

바로 며느리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따집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내 조건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금수저 중에 금수저인데

 

졸지에 며느리 예수님을 잘못 만나서 흙수저 중에 흙수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배신 때리기요?

 

엘리야야 ~~~~~~ 그래 니가 잊어버린 도끼가 이 금도끼냐

아닙니다. 저는 솔직하게 금도끼는 아니였습니다.

 

어허 그럼 ~~~~

 

엘리야야 ~~~~ 니가 빠뜨린 은도끼가 니 도끼냐?

아닙니다. 저는 솔직하게 은도끼도 아니였습니다.

 

어허 그럼 ~~ (짜식 그냥 그렇다고 하지 억수로 심부름 시키네 ~~)

 

엘리야야 ~~~~ 니가 빠뜨린 동 도끼가 니 도끼냐?

아닙니다. 저는 솔직하게 동도끼도 아니였습니다.

 

어허 그럼 ~~~(아 짜식 디기 귀찮케 하네 ~~)

엘리야야 니가 빠뜨린 것이 처음사랑이냐? 칠천명이냐? 주의 오른팔이냐? 다 이루었다냐?

네 맞습니다. 제가 빠뜨리고 잊어버린 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입니다.

 

자 왜 이렇게 하나 마나 한 것을 하실까요?

주의 오른팔이 바알과 아세라 850명을 이긴 것이지

내가 이긴게 아니다 말이죠.

 

그럼 아니다를 주장해야 하는데

빈공터

아무것도 아니요를 주장해야 하는데

 

나만 남았다고 외치게 되니까

주님께서 그 빠뜨린 금도끼 은도끼 동도끼 다 내버려 두고

그거 찾아 주시는 겁니다.

 

내가 잊어버린 것 무슨수로 찾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픈팔오 내가 잃어버린 것 조차도

금수저도 아닌 십자가수저를 찾아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 과정 자체가 처음사랑이다는 겁니다.

이 관계성은

에베소가 우찌 우찌해서 놓쳐버려서 조심하라가 아니라

이 관계성을 말하고자 처음부터 책망으로 간섭으로 매를 대심으로써

처음부터 이 관계성에 놓여졌다고 책망하시는 것이지

 

무슨 행동을 잘못해서 책망하는게 아닙니다.

 

이거 말귀 잘 알아 먹어야 해요

 

관계성 곧 이미 자녀이기에 책망하는 겁니다.

사생아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는 책망입니다. ? 처음부터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에

 

 

그렇다면 책망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실 줄이야 매 맞으면서 너무 너무 기뻐 춤을 출 정도로 말이죠.

 

처음부터 그랬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래서 에베소 교회라고 이름 짖는 교회가 잘 없어요.

가장 치명적인 책망으로 보고 있기에

가장 덜 책망받는 교회 빌라델비아 아니면 서머나 로 교회 이름을 짖는 이유죠.

 

그러나 주의 오른팔은 이 일곱교회를 자기 피를 발랐기에

주님은 뜨겁게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책망하시고요

 

이것을 우리는 곡해하고 있습니다.

 

제발 저주 받자 말이죠.

제발 책망 받자 말이죠.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무화과 나무를 부러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머니께 어제 이야기 하니까 얼마나 기뻐하시든지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은 것만 볼게 아니라

누가 저주했냐 말이죠.

예수님 아닙니까?

모호하고 흐릿한 것을 드디어 끝내시는

의문의 반복을 드디어 마침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이 왔다는 사실이 기쁘기에

그 빈공터에서

그 불 속에서

다니엘의 세친구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덩실 덩실 춤추는 또렷함이

그 저주 속에 더 또렷한 예수님을 드디어 불 속에서 만나게 되어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그 어떤 조건 없이

그 꼬라지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덩실 덩실 춤추는 겁니다.

 

이 이질적인 사랑의 일방적으로 쳐들어옴이 낳은

태어나게 한 에베소 교회 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될 필요가 없이 교회로 태어난 에베소 교회입니다.

 

 

주님! 아무리 봐도 우리는 교회 될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개같은 이방인이 율법 하나도 못지키는 판국에

뭣이 중한게 있어서?

도대체 주의 오른팔로 교회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뭐 볼게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봄이 아니라 나에게 발린 피를 보고자 하심에

그 어떤 이유도 원인도 따지지 않는 복음을 기뻐하면서

 

이 십자가의 용서 외에는 말하지 않는

더 이상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넘어서는

에베소교회와 같이 간섭 받는 교회임을 즐겁게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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