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뿔이 들리리로다 (시편 112)

 

바알세불 걸린 예수님? 점쟁이 보다 더 나은 용한 점쟁이 예수님?

 


(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112:9, 개역)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고후 8:9,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12: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2:2, 개역)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112:3, 개역)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112:4, 개역)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112:5, 개역)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112:6, 개역)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112:7, 개역)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112:8, 개역)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112:9, 개역)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112:10, 개역)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112:1, 새번역) 『㉠㉡할렐루야.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 각 행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자음 문자 순서로 되어 있는 시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112:2, 새번역) 그의 자손은 이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며, 정직한 사람의 자손은 복을 받으며,

(112:3, 새번역) 그의 집에는 부귀와 영화가 있으며, 그의 의로움은 영원토록 칭찬을 받을 것이다.

(112:4, 새번역) 정직한 사람에게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비칠 것이다. 그는 은혜로우며,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사람이다.

(112:5, 새번역) 은혜를 베풀면서 남에게 꾸어 주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112:6, 새번역) 그런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영원히 기억된다.

(112:7, 새번역)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주님을 믿으므로 그의 마음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112:8, 새번역) 그의 마음은 확고하여 두려움이 없으니, 마침내 그는 그의 대적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

(112:9, 새번역)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나누어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는 영광을 받으며 높아질 것이다.

(112:10, 새번역) 악인은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갈다가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욕망은 헛되이 꺾일 것이다. / 또는 '증오의 눈으로 나를 노려 보다가'

(고후 9:9, 새번역)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112:9(칠십인역)

 

 

부제를 저렇게 하면 아마 교회에서는 발칵 뒤짚어 질겁니다.

그러나 제가 어머니랑 대화를 하면서 실제로 나눈 내용입니다.

 

어머니께서 미가서를 읽으시다가 봐라 봐라

남편은 아내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말아라

이웃을 믿지 말아라

사람의 원수는 가족이다 라는 등등

얼마나 세세한지

너무 너무 꼼꼼하다고
하나님이 왠지 하나님 답지 못하고 인간 보다 더 쫌생이 같다고
막 웃으시면 이야기 하시더라 말이죠
.

 

5절입니다.

 

(7:1, 개역)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7:2, 개역)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7:3, 개역)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7:4, 개역)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7:5, 개역)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7:6, 개역)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7:7, 개역)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7:8, 개역)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7:9, 개역)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7:10, 개역)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7:11, 개역)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7:12, 개역)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래서 제가 거기에다가 한 수 더 떨어서

점쟁이 보다 더 나은 점쟁이 같은 예수님이다 라고 그 말을 듣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니?

 

구약에서는 백날 믿어본들 결국은 다 가짜라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방금 봤던 내용처럼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도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지더라 말이죠.
원인을 하나님 믿기로 만들어 놨는데 결과는 이상하게 우상숭배로 결론이 나더라 말이죠.

그럼 구약에서는 실제로 칼로 찢듯이 즉 전쟁으로 그 우상을 다 뱁니다.
모조리 다 우상 파괴해 버립니다.

파괴하고 우상의 손과 발과 목을 다 배면은 안 섬길 것 같지요?
런데 역시나 잡초처럼 결국은 섬깁니다.

안섬길께요 라고 해 놓고서는 또 결국은 섬기더라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 반대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기적으로 곧 전쟁으로 저런 우상을 다 없애버려본들 소용없는 것이

결국 인간들이 다시 찾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문제였던 겁니다.
시편에서 출애굽을 새삼스럽게 다시 외치는 이유는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우상이다는 겁니다. 애굽이다는 거죠.

그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 본인이 죽어버립니다.

 

본인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우상 숭배하는데 있어서 잔소리 꾼이 사라져서 좋다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 죽어버린 그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 동안 구약에서 백날 기적을 베풀어 주고

구원사건인 출애굽 사건을 백날 벌려도

역시나 우상을 섬기더라 말이죠.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처럼 맨날 기적 기적이나 찾더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인간 쪽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어버리고

더 이상 믿음도 바라지 않는 겁니다.

누가? 주님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할껀데

주님 쪽에서 아예 믿음을 주시는 방향으로 신약에는 바뀌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죽는 방법 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인간 빼앗기 입니다.
예수님으로 부터 생명을 빼앗긴 자만이
구원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우상 빼앗기 입니다.
인간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신 빼앗기 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뿔을 드시는 겁니다.
오로지 구원의 뿔로 빵구멍을 뻥뻥 뻥 뚫어버리기 위해서 말이죠.
십자가에 탕탕탕 모든 인간을 못 박아버리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더니 어머니께서 아 그래서 모세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예수님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한 마디 하고 사라지는 구나

 

그렇죠 딩동뎅 바로 그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되었다고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정했다 라고 했잖아요

 

그럼 야곱의 삶은 그야말로 사랑받은 모습이냐 말이죠.

백날 뜯어보세요 사랑받는 모습인지?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미움받는 것 아니냐 라고 다들 의문을 가질 정도입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서로 티를 안 내지만

속으로는 저게 무슨 사랑받은 거냐 라는 겁니다.

누가 야곱이 복받은 모습이다 라고 여기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안 본다 말이죠.

(마리아 보세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때에 복받은 여자라고 했지만

그녀의 인생을 보세요 복 받은 겁니까

아니면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안아야 할 정도로

평생을 고생만 했습니까?

그러니 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복이란 예수님과의 관계성인데

우리 쪽에서 맺은게 아니라

예수님쪽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맺은 관계인데
그냥 관계성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십자가의 피로써 맺은 관계를 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면 안되는 관계이다는 겁니다.)

 

그럼 저 예언 곧 창세전에 예정된 저 말씀은 엉터리인가?

아니지요.

 

저 말씀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하면

야곱이 사랑받기로 작정 된 것이다 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 말이죠.

 

즉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면 이루어 지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정론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해서 믿는 자들은 없어요.

아무리 장자교단 예정론을 우려먹는 장로교라고 할 지라도 말이죠.

이제는 그것도 돈이 안되니까 예정론도 돈 버는데 걸림돌이 되니 바로 버리더라 말이죠.

 

정작 야곱은 그것을 모르고 죽을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야곱은 유예해 버린 겁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죽는 나의 믿음은 어차피 가짜이니까 예수님의 믿음에 맡겨버린다 말이죠.

참으로 뻔뻔스럽죠. 자기 숙제를 남에게 떠넘기니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거짓말 쟁이 사기꾼 야곱의 믿음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때를 그래서 바라본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예정론이고 뭐고 해도 말이죠.

 

자 그럼 예수님의 죽음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저 말씀을 보게 되니

아 맞네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 맞네 가 되는 겁니다.

참 모순되지요?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단절입니다.

철저한 단절인데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누리게 되니 야곱도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백날 자기믿음으로
그래 그래 맞아 맞아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되었어
라고 우겨본들 소용이 없다 말이죠.

그럼 무슨 수로 예수님의 죽음 속에 들어가냐 말이죠.
걱정말아요 그대! 성령님이 확 등떠밀어 버립니다.

결국 야곱이 아무리 찢어지게 지지리도 가난한 삶을 살고 고생 죽도록 해도 말이죠.

그는 사랑받기로 작정된 것 맞습니다 맞고요. 

예수님이 그 천하의 사기꾼 거짓말쟁이 야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죽음 때문에 말이죠.

복받은자 맞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악인과 복받은자를 그렇게 나누시는 겁니다.
그러니 시선 자체가 달라지는 겁니다
.

 

하나를 두고 두 개의 시선이 나온다고 했죠?

이게 거룩입니다.

거룩이 덮쳐지면 둘 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한 개의 사물을 가지고서 두 가지의 기능이 발휘되는데 있어서

하나는 있는데 더 받고

다른 하나는 없는데 그 있는 것 마저 빼앗기는 식인데

이 말씀 자체가 십자가의 죽음에서 이루어지지

인간의 믿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4:9, 개역)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4:23, 개역)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8: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짧은 댓글을 앞의 글에서 달았는데

장자권 빼앗기 라는 댓글인데

다시 괄호를 쳐서 같은 의미로 어제 어머니랑 나눈 대화를 통해서 적어보면

시아버지 유다 빼앗기 라고 붙이고 싶었다 말이죠.

 

자 이렇게 말입니다.

 

장자권 빼앗기 (시아버지 유다 빼앗기)

라고 말입니다.

인간 빼앗기
종말 빼앗기
이스라엘 빼앗기

천국 빼앗기 처럼 말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가지고서 두 개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장자권을 쌍둥이 형 에서 하나는 소홀히 여기고

다른 하나는 쌍둥이 동생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사기를 쳐서라도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곧 그 불의한 재물에 충성합니다.

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는데 어떻게 바른 재물을 맡기겠냐 말이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기 위한 말씀이다 말이죠.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똑같은 양상이 바로 시아버지 유다를 빼앗기입니다.

누가? 다말이 말입니다.

막내 달라는 이야기 곧 주기로 약속한 막내 빼앗기가 아닙니다.

시아버지 유다를 빼앗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래서 점쟁이 보다 더 나은 점쟁이로써의 예수님이라고 한 겁니다.

예수님이 그 며느리 다말이요

예수님이 그 사기꾼 야곱이다 말이죠.

예수님만이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고

그 어떤 인간도 사랑받기로 작정이 안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이것이 무슨 말인지 보인다 말이죠.

당연히 성령을 주시니까 말이죠.

 

그래서 우상 보다 더 나은 우상으로써의 예수님 이다고 한 겁니다.

우상을 베고 베면 안 섬길줄 알았는데 더 섬기더라 말이죠.

그래서 아예 예수님 쪽에서 죽음으로 와 버리니까

죽고 없는데 어떻게 믿냐 말이죠.

그런데 비로소 믿더라 말이죠.

알고보니 예수님의 믿음 오게 되어서 그렇더라 라는 겁니다.

 

마침 오늘 시편 112편이 딱 그런 내용입니다.

복받은 자와 악인으로 이 둘로 나누는 기준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부요함을 곧 생명을 흩날려서 뿌리듯이 뿌리는 겁니다.

그것이 그의 머리가 들려야 하듯이 (시편 110)

오늘 시편 112편에서는 그의 뿔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겁니다.

 

즉 뭘 해도 우리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짝꿍이 바로 되찾는자 이다는 거죠.

뭘해도 잃어버린 곧 가난한 자 곧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예수님은 무조건 이유 없이 희년을 선포하는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를 구원하는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그 구원자는 죄인을 부르시러 왔다 말이죠

그의 부요함을 뿌려서 그의 가난함이 우리를 부요케 함이고

그의 생명이 뿌려져서 그의 죽으심이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다는 겁니다.(시아야 53)

 

(고후 8:9,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9절에서 다시 반복 됩니다.

 

(고후 9:8, 개역)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9, 개역)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 9:9, 새번역)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112:9(칠십인역)

 

(고후 9:10, 개역)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고후 9:11, 개역)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후 9:12, 개역)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즉 마귀나 악인에게서 바로 이것이 악하다 라고 불평케 되는 겁니다.

마귀가 들리지 않으면 저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마귀 중의 대 마왕 바알세불이 걸렸다고 마귀자식인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선언해 버립니다.

(마 12:24, 개역)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7, 개역)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막 3:22, 개역)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눅 11:15, 개역)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눅 11:18, 개역)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눅 11:19, 개역)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장이 되리라』


별명도 있지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이죠.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냥 별명이 아닙니다. 최고의 모독을 퍼붓는 겁니다.
그들이 가장 모독하고 가장 싫어하는 세리(매국노 친일파)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너희도 이런 예수랑 어울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우주가 나서서 배신한 댓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공개처형하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겁니다.


악인들이 예수님을 악으로 몰고가는데 있어서 예수의 악함은 바로 주님의 반칙인데

어떤 반칙인고 하니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가난한 우리들을 부요케 함이 되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가난이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닙니다.

 

가난이란 부정하게 취급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니 상대적인 부자들은 이 가난을 저주로 본다는 거죠.

 

그런데 반칙이 일어나서

즉 요나의 표적이 일어나서

그 판을 팔을 어긋맞게 해 버리니까

결과가 뒤짚어 지는 겁니다.

이 반칙, 이 부조리. 이 불륜을 일으키는 겁니다.

 

자 이럴 때 세상은 요동합니다. 격분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순리에 어긋하게 되었기에

그럼 법을 지킨자들이 뭐가 되느냐 라는 불평이 일어나 시기케 된다는 겁니다.
얼마전에 불공평한 여호와 라고 글을 올렸지요?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결국 지혜라는 것은

악마들이 악마라고 취급하는 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의 악마성은 이 악마 예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 아닙니까?
그 정도로 부정과 반칙과 불법과 불공평을 정당화 해 버린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그거 해 봐서 잘 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는 더 심하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그런 예수 보다. 그런 악한 예수 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불평하고 있다 말이죠.
얼마나 제대로 된 주님의 역사였으면 악마들이 불평하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했냐 말이죠.
세상이 진동하며 견딜수 없게 하는 것이 십자가라는 반칙입니다.

그래서 점쟁이 보다 더 한 점쟁이로써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신약에서 말이죠.

 

결국 자기들의 악마성은 충분히 악마적이지 못했다 라는 것이 탄로가 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충분한 악마성은 이들 악마들을 다 제거할 정도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더 나쁘죠

 

마찬가지로 악마들이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쓰고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 곧 정의를 외친다 말이죠.

그런데 막상 더 나은 선함을 보이게 되면 누가 시기를 하는고 하니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쓰고 착하고 선한 일을 하는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이 더 나은 선함을 시기하는 겁니다
.

 

바로 이겁니다. 저들은 충분히 더 선하지 못하기에 악한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뭘해도 예수님을 이길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악마로 취급을 받든 선함으로 취급을 받던 상관없이
오로지 저들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이 바로 지혜라는 겁니다.

마귀가 양의 탈을 쓰던

마귀가 악을 행사하든

무조건 이유없이 저들 마귀의 정체를 다 드러내는 폭력성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점쟁이는 맞추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더 잘 맞추니까

우상숭배 보다 더 나은 우상숭배로써 예수님을 찾더라 말이죠. 용하니까

구약에서는 아무리 점쟁이 들을 다 죽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차피 다시 찾아간다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서는 아예 예수님이 더 용한 점쟁이로 와 버리시니까

점쟁이 보다 더 용한 점쟁이로써 다 맞추시니까 우상숭배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이제는 우상숭배 하라고 등떠밀어도 안가더라 말이죠.

아니 왜? 더 용하거든. 더 잘 맞추거든 말라꼬 돈 아깝게 ~~~

저 쪽은 결국 돈 달라고 항상 돈달라고 봉투 봉투 열렸네 라고 하지만

여기 용한 예수님은 아예 공짜이거든요.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보여준 확고하게 밝히 보이는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나쁜 마귀들도 나쁘다고 하는 십자가의 무조건 용서이다는 겁니다.
나쁜 마귀 보다 더 나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이런 이야기를 보탰습니다.

십계명에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계명을 통해서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인가요 없다는 말인가요?

당연히 없지!

그렇죠? 없죠.

 

그런데 없는데 왜 다른 신이 있는 것처럼 누구쪽에서 오히려 부추기면서 지금 말씀하고 있나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말이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나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이 있단다 라고 오히려 부추기면서 다른 신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애굽을 작살내어서 완전 초토화 시켜 쫄딱 망했다 말이죠.

그런데 없는 애굽을 왜 다시 돌아갈까요?

 

그 애굽은 장소와 공간으로써의 애굽이 아니다는 겁니다.

애굽은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말하기 위한

상대적인 무조건 미움 받기로 작정된 미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상을 전쟁을 벌려서 없애 본들 누가 다시 세웁니까?

인간이 다시 세운다 말이죠.

다른 신은 없어요

없는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존재론적이고

그 다른 신을 누가 만듭니까?

없는 신을 없는 우상을 누가 만드냐 말이죠.

인간들이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안 그렇다고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안 그렇다고요?

천만의 말씀 더했으면 더했지 더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죄 아래에 가두어 버리는 겁니다.
율법이 나 외에 다른 신이 있다고 그 신에게 다 가두어 버리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그것이 바로 탐욕이라고
우상이 탐욕이라고
그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원하든 원치않든 모조리 다 십자가에 이미 못 박힌 인생이 되는 겁니다.
늘 수시로 탐욕을 들통당하는 삶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백날 제초기를 전기모터로 돌려서 잡초 제거하듯이 백날 돌려도

결국은 다시 납니다.

 

그러니 신약에서는 아예 예수님 본인이 잡초로 오시는 겁니다.

이제는 마귀들이 거꾸로 이 잡초 예수님을 뽑고자 발악을 하게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아예 죽어버리니까 도저히 믿음을 가질수 없었던 인간들이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선물이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즉 선물은 인간 쪽에서 아무리 해도 마련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믿음을 마련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을 주니까 아니 글쎄 믿음이라고 여겼던 그런 것들이 배설물이였고

믿음 아니다 라고 공격했던 것들이 도리어 믿음이였음을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보니까 모든 것이 뒤바뀐 전도되었다는 것을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래서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의 차원에서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였다는거죠.

구약에서의 믿음이란 행함입니다. 지킴입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는 게 아니였던 것이였던 겁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숨겨놓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쳐다보고 예수님에게 유예시켜버렸던 사실이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저 예수님의 때만 기다렸다는 겁니다.

그때 믿음이 나와서 참이스라엘을 구성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미가 선지자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해체를 선언할 수 밖에요

이미 완성된 이스라엘을 다 봐버렸는데 말이죠.

그래서 재앙때 곧 종말때에는 모든 것이 전도 되는 겁니다.

원수가 남의 집안인줄 알았는데 자기 집안이고

이웃이 왜 이웃이겠습니까? 서로 서로 나누는 겁니다. 어려움도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것이 이웃인데 그 이웃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종말이라는 이 부정성이 오히려 또렷하지

다른 것들은 오히려 모호하고 의문의 것이다는 겁니다.

믿을 것은 종말이(인격화) 뿐이지

종말 때에는 아내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모호한 것은 어차피 소금기둥이 될 테니 말이죠.

롯의 처를 기억하라 말이죠.

 

32절입니다.

 

(17:25, 개역)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17:26, 개역)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7:27, 개역)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17:28, 개역)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17:29, 개역)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17:30, 개역)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17:31, 개역)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 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17:32, 개역) 롯의 처를 생각하라

(17:33, 개역)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17:3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17:35, 개역)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결국 시편 112편에서 누가 진정으로 나를 종말에서

부요케 하는 자 이냐 라는 겁니다.

 

종말에서

심판에서

죽음에서

사망에서

지옥에서

 

누가 나를 살릴 자인가 라는 겁니다.

 

아주 아주 살벌하기 짝이 없는 극단적인 말씀을 지금 하시는 겁니다.

 

너 내가 너를 부요케 해주지 않으면 넌 죽어 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너를 부요케 할려고 나는 가난해져야 하고

너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기 위해서 심호흡 인공호흡하는게 아니라

내가 죽어서 내 생명을 가지라 라는 겁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믿음 백날 해도 3초입니다. 작심3

안 된다는 겁니다.

뭘 해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 이라는 하나의 사물에서

한 사람의 기도는 믿음을 과시하고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토색하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기도는 고개도 못 들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쪽에서 자기 목숨을 버려서 남을 주고자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는 이미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상하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줬는데

죄 위에 있다고 하니 응 그래 필요 없다 말이지 그럼 난 내 생명을

죄 아래 갇힌 자에게만

곧 죄인만을 부르러 온 구원자임을 나타낼게

넌 필요 없다 했지 넌 이 자기 목숨 버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소홀히 여기는 구나

그래 필요 없다고 하니 할 수 없지

 

라고 죄인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죽었다고 하는 자에게 자기 생명을 주시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잃어버린 자에게만 의미있는 뿔을 드심이다는 겁니다.

 

시편 110편 글에서 이야기 했죠?

잃어버린 자에게만 해당되는 다시 살리심의 부활의 의미라는 것을

곧 부활이란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개념으로써

잃어버린 죽은자와 짝꿍(정념)을 이루는 겁니다.

신랑과 신부처럼 말이죠.

 

그럼 재앙의 날에 (미가서 91) 곧 심판의 날에

누구랑 결혼하는 의미로써의 뿔을 드심일까요?

 

종말을 맞이한 자입니다.

즉 누가 봐도

아이구 끝난 인생이구나

인생 종 쳤구나 라고 누가 봐도 그런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미가 선지자의 외침이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미가 선지자의 외침은 전혀 상관이 없는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미가 선지자는 하나의 사물이 되고

그 하나의 사물에 의해

두 패로 갈라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런 거룩이 덮쳐진 사건

또렷하게 두 패로 갈라지는 사건

이것이 바로 뿔을 드심으로써

인자가 높이 달리심으로써

나타나는 믿음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뿔이 보이지 않는 자에게는

세상은 그 어떤 요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사건의 회오리가 덮쳐지지 않습니다.

종말이가 찾아와서 종말에 휩싸이는 자에게만 해당 되는 시편 112편입니다.

끝을 미리 당겨서 사는 자가 찬양자입니다.

 

 

시편 112편은 복있는 자와 악인을 둘로 가릅니다.

바로 뿔을 높이 드심으로 인해 말이죠.

 

누가 봐도 악인이 복을 누리고 있고

누가 봐도 가난한 자는 복과 무관한 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뿔이 들리니까

그 양상이 뒤짚어 집니다.

종말때에는

염소가 양이 되고

양이 염소가 되듯이 (마태복음 25장 종말의 비유 3종 세트)

팔이 어긋맞게 되는 양상이

종말이가 펼치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마태복음 25장 종말의 비유 3종 세트를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처럼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시편 112편입니다.

 

가난한자에게 자신의 부요함을 뿌려서 부요케 하심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보여주시는 사랑이다는 것을 말이죠.

곧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가

악이 견디지 못하는 악마들이 악으로 취급하는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부조리 만이 악마들의 가면들을 벗기는 제대로 정체를 들추어내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말이죠.

 

이 기준으로 참선지자는 오히려 이스라엘 내부를 두 동강 내는 겁니다.

딴 민족에게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스라엘을 깨는 이스라엘로 가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빼앗기입니다.

종말 빼앗기입니다.

천국 빼앗기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말이죠.

장자권 빼앗기

시아버지 유다 빼앗기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외치는 주님이 그렇게 찾고 찾고 찾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99양 버리고 그렇게 찾아 헤맸던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는 이유입니다.

다른 곳인 사마리아나 이방이 아니라 말이죠.

(장소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스라엘 개념을 가지고서 두 개의 이스라엘로 분절시키는 거룩사건)

 

그래서 이 십자가의 사건을 찬양자들은 외치는 겁니다.

 

높은자 낮추시고

낮은자 높이시는

 

마리아와 한나의 찬양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지혜가 벌리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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