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충성과 둘째 사망 (2: 8-11)

 


(
2:8, 개역)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개역)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2:10, 개역)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1,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을 보여주기 위해 세워짐을 받았습니다.
곧 잃어버렸다가 되찾음 말입니다.

그냥 주님의 살리심 속에 놓여진게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 속에 놓여짐으로써
죽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다시 다시살려냄을 통해서
그 어떤 연결고리 없이
단절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주님의 교회(신부)됨을 보여주는
피 값을 치르고 피로 사신바 된
서머나교회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서머나교회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대조되는 사단의 회 곧 유대인을 보충물로써 사용하심으로써

일방적으로 그렇게 선언해 버리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는 아무리 궁핍한 가난한자로 보여도

실상은 부요하다는 겁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편파 해석, 편파 승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밑바닥에 과연 편파 승리가 깔려있는지를 볼려면

우리는 실상 속에 들어가야만 하는 겁니다.

그 실상이 뭔고 하니 둘째 사망과 그리고 대조를 이루는 실상은 부요함 이다는 겁니다.

 

(11:19, 개역)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즉 모세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세는 가시 떨기나무와 같은 햇빛에 노출이 되면 자연발화해 버리는

둘째사망이 밑바닥에 깔린 자이다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첫아담에 속한자는 다 이렇습니다.
살아있다고손 치더라도
사막의 햋빛에 노출되면
둘째사망이라는 실상을 드러내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세 곧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모세에게

여호와의 불이 이 가시떨기나무에 붙어버렸습니다.

그럼 가시떨기나무가 타 들어가서 몇초? 몇분 만에 다 연소가 되어서 둘 다 사라지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불은 여전히 계속해서 맹렬하게 불을 내 뿜고 있고

가시떨기나무는 타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부요합니까? 실상은 부요함이 넘치는 겁니다.

이 양극단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 모세였던 겁니다.

이 둘의 관계를 실상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만 그렇습니다.

 

자 눈으로 보기에는 가시떨기나무처럼 광야에서 조금만 바람 불어서 떼굴 떼굴 구르다가

그 흔해 빠진 사막의 햇빛에 노출이 되면
바로 바로 자연발화가 되어서 불타 없어지는 잿더미 모습이

겉으로 보기에는 서머나 교회이다는 겁니다.
바로 모든 인간의 바닥에 둘째사망이 깔려 있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새까맣게 태양빛에 거슬려서 탄 얼굴처럼 마치 저주받은 자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서머나 교회의 바닥을 뜯고 뜯어보니

둘째사망이 깔려있지만 그 속에서 살려내시는 여호와의 불꽃처럼

당연히 타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타도록 하시는 여호와 불꽃의 살려주심, 배려하심, 부요하심,

곧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받쳐주고 있다 보니
둘째사망이 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더라 말이죠.


오히려 넉넉히 이기더라 라는 겁니다
.

누가 섬겨서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때문에 말입니다.
그 정도로 사망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부요하다는 실상이다는 겁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을 읽으시다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강조하더라 라고 말이죠.

물론 저쪽 바리새인도 율법을 강조하는데

거기에다가 더 더 더 율법을 강조하더라 라고 말이죠.

 

그래서 어제 시편 100편을 한 것과 연결 시켜서 말씀드렸죠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이 모세 때인데

왜 아브라함 때가 아니냐 라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모르시죠

오늘날 성경신학 박사들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시겠냐 말이죠.

 

율법이 가입된 이유는 죄를 더하게 해사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 말이죠.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3:9, 개역)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7:14, 개역)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3:22, 개역)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3:9, 새번역)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7:14, 새번역)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3:22, 새번역)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 곧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 아래에 갇히는 겁니다.

죄 위에 올라서서 죄에서 자유케 되는게 아니라

말씀을 지킨 나의 육체를 자랑하는데 있어서 참을수가 없는 겁니다.

기여이 과시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것을 사망의 몸이라고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럴 때 율법은 몽학선생으로써 화살표 방향을 제시합니다.

누구 ~~~~

누구 ~~~~~~

개콘 황비호(받침 을 뺀, 비호감)의 누구 ~~~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몽학선생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때를 쳐다봤고

다윗도 비로소 예수님의 때를 봤다 말이죠.

 

그럼 율법이 지시하는 예수님을 쳐다봐야 하는데

졸지에 율법을 지켜버렸다고 우기니까
(절대로 못 지키도록 되어 있는 불가능한 법인데)

오히려 예수님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율법 지킨 자기를 쳐다보면서 살게 되니
(정작 율법의 대표자 모세가 예수님의 때를 못 쳐다보니 땡 탈락 마이너스 빵점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쳐다보게 할려고 변화산에 느닷없이 살려내 나타나는 겁니다.)

 

마태복은 곧 유대인에게 전하는 복음에서

율법으로 충돌을 하시는데

율법은 나를 가리키는데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졸지에 이 율법을 놓고

율법 지킨 자기를 예수님 앞에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게 되닌

졸지에 졸지에 경쟁자로 보게 되는 겁니다.

 

거룩을 지켰으니 당연하지요.

거룩은 저분 뿐입니다.

저분이 나를 살려주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라고

자신이 부정한 자리에 놓여진

둘째사망에 놓여진 자 라는 것을 모르고

율법 지켰으니 거룩하니까 천국 갈 자격이 있다고 봤다 말이죠.

 

그러니 졸지에 율법 자체가 두 패로 나누는 기능을 하는 줄 몰랐다 말이죠.

앞의 글에서도 자주 반복해서 언급했는데

하나의 사물을 두고서

졸지에 두 패로 나누어 진다고 말이죠.

예를 다시 들어서 성전은 하나 인데

성전에 두 사람이 들어갔는데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켰으니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이미 자기가 자기 스스로 저들과 분리 구별 구분을 해 버릴정도로

그 정도로 거룩에 자신만만했다 말이죠.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인 세리는 성전 구석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고

오히려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자 이럴때에 두 사람이 하나의 성전에서 두 기도가 나오는데

두 사람이라서 두 개로 갈라지는게 아니라

성전 자체가 이렇게 두 노선으로 갈라버린다는 겁니다.

누구하나는 반드시 율법 지켰다고 나오도록 되어 있고

반드래 누구하나는 반드시 율법을 못 지켰으니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 하도록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전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거룩도

율법도

기도도

찬양도

성령도

십자가도 다 그러합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온다는 것을 본 자는

실상을 본 자들입니다.

물론 그 실상 못 봅니다.

성령을 선물 받아야

참 앞의 글에서 선물 잠깐 언급했는데

선물은 내 쪽에서 마련 할수 없다는 의미에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뭡니까?

나를 부정한 자로 만드는 겁니다.

선물 보따리 푸니까 몽둥이가 있더라 말이죠.

부정한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선물을 푸니까

둘 째 사망이 있는 겁니다.

이 실상 속에 놓여졌기에

 

세리는 성전에서 무엇을 기도합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자기는 아무리 봐도 광야에 있는 가시떨기 나무일 뿐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말이죠.

이런 실상 곧 둘째사망을 본 겁니다.

 

여기서 잠깐 왜 둘째 사망이냐

일반적으로 개인들이 죽는 시기가 다 저마다 틀리잖습니까?

그것을 첫 번째 사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붙인적이 없으니 말이죠.

그냥 죽는다고 하지요

그러니 둘째사망은 개인으로 보는게 아니라

전체 첫 번째 아담에 속한 자들을 염두한 겁니다.

그러니 둘째사망은 첫째사망과 연관시키는게 아니라

첫아담과 연관시키는 겁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새번역)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 2:7(칠십인역)

(고전 15:45, 공동)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 창세 2:7.

(고전 15:45, 현대인)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존재가 되었다.' 라고 쓰여 있으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고전 15:45, 현대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사람 아담은 인간의 몸을 받아 났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는 영적인 분이십니다.

 

즉 첫사람 아담에 속한 인간의 바닥을 뜯어보니

둘째사망이 있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살아남고자 발버둥을 쳐도 모든 인간의 바닥에는 둘째사망이 있기 때문에

실상은 그 바닥 위의 인간이 살았다고 우기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 그건 허상이요

허무요 그런 모든 것들은 의문의 반복 뿐이며

진짜 실상은 그 밑바닥을 뜯어보니까 둘째사망이 있더라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 곧 첫아담에 속한 자들 전체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대할때에 자신이 둘째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으로써 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저주 받아 마땅한 자로써 예수님을 대해야 한다는 거죠.

저주에 속한 자로써 말이죠.

 

그런 자만이 예수님이 누구이다? 살려주시는 영인 마지막 아담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율법이 가입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죄 애래 갇혔기에

저주 속에 있기에

그 저주 속에 있는 이 저주의 나를

사망과 음부의 키를 쥐고 계신 예수님이

그 예수님만이 건져주실 유일한 구원자 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둘째사망과 대조를 이루는 의미를 알게 되면 그 차이로 둘째사망의 개념이 나타나는 겁니다.
상대적인 의미는 첫째부활 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살려주심 이다는 거죠.

(계 20:5, 개역)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개역)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 20:5, 새번역)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계 20:6, 새번역)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율법이 가입된 것은 죄 아래 갇혀있다는 실상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게 되면

졸지에 예수님과의 경쟁에 놓이게 된다 말이죠.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다 말이죠.

지키면 골치 아파요

 

살려주시는 자를 못 봐요

매일 매일 매 순간 매 초 마다

나를 살려내시는 능력으로 나는 살지

 

내가 율법을 지켜서 사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 의문의 반복을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왜 율법이 모세때에 가입이 되었는가?

 

애굽에 종 되었던 너희들을 끄집어낸 여호와이다 라고 전문을 깔고

율법 1계명 2계명 이렇게 들어간다 말이죠.

 

그러나 아브라함때에 율법이 가입이 되지 않은 이유는

오히려 애굽의 종 상태에 놓여진게 아니라

오히려 애굽의 종이 될려고 애굽으로 들어가는 입장이다 말이죠.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 이다는 겁니다.

 

법이 있어야 죄인인지 아닌지를 규정할 껀데

법이 일단 없으니까

죄를 죄로 여길수가 없다 말이죠.

죄인이 될 수가 없어요.

법이 없어서

그래서 율법 속에 집어넣고자

애굽 속에 집어 넣고자

애굽의 노예가 될려고 아브라함은 오히려 애굽으로 들어가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구원 받나?

노예도 아니요

죄인도 아닌데?

 

그래서 좀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을 했지만 1시간이나 걸렸지만

이게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다고 했습니다.

누구 누구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말이죠.

이게 약속이다 말이죠.

 

율법이 가입이 되기 전에

즉 국가가 성립이 되기 전에

족장시대에

죄인도 아니요

노예도 아닌

자유인인데

 

국가 애굽 속으로 갇힘을 당하고자 노예가 되고자 들어가는 입장이 바로

누구 누구의 하나님 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여호와의 이름이 이 애굽 속으로 들어간다 말이죠.

 

마치 이것이 잃어버림을 당하고자 들어가는 모습이고

다시 되찾고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을 할례 세례 라고 했지요.

앞의 글에서 이것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 상대적인

대비되는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이 혈통적 이스라엘로 봤는데

주님은 니느웨 백성이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이라는 겁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 곧 약속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은

모든 인간의 첫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바닥을 뜯는 겁니다.

바로 둘째사망입니다.

곧 홍해 속에 다 빠뜨립니다. 바닥을 뜯어낸 겁니다.

 

그 둘째 사망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살려내시는 마지막 아담과의 관계성을

일방적으로 맺는 겁니다.

이것이 세례요 이것이 연합이요

이것이 잃어버린 자를 되 찾는 부활 곧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쥔 분의 섬기심이다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호와의 이름

곧 누구 누구의 하나님은 살려내시는 마지막 아담과의 관계성으로써

살려주실때만 사는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원래 저주 받아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려주실때만 사는 관계성을 일방적으로 맺어버립니다.

 

이 관계성이 바로

 

죽은 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의사 구원자 이다는 겁니다.

의인은 필요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으러 왔다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이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그런데 모세 때에 모세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 없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잘 표현되어 있데 말이죠.

 

모세는 오히려 변화산에서 느닷없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예수님의 때를 봐버렸기에 구지 나타날 필요가 없고

엘리야는 죽음을 안 봤기 때문에

그것을 거꾸로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되고자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나 모세와 같이 별세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논의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엘리야는 죽음을 안 봤다고 해서

죽음과 무관한게 아니라

그것 조차도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 연합(세례)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겁니다.

 

(9:30, 개역)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9:31, 개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그러니 유일하게 죽음을 안보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인데

그렇다고 죽음과 무관한 첫아담에서 벗어나는 자가 아니라

둘째사망에 놓여진 자로써

마지막 아담의 살려주심의 관계에 놓여지기 위해서 나타난 거다 말이죠.

자기들이 나타나고 싶어서 노력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인 호출에 의해서

죽은 나사로가 살려주심을 당하듯이

둘다 둘째사망에 안놓여진게 아니라 놓여진 상태에서 호출이 된다 말이죠.

엘리야도 말이죠.

 

그러니 이 관계성

살려주심의 마지막 아담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이라는 기능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참선지자들이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는 것처럼 말이죠.

? 그런가?

그 정도로 살려주심의 마지막 아담의 부요함이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게 실상이다는 겁니다.

지질이도 가난하고

가는 곳마다 핍박 받고

누가 봐도 저주받은자 같은데

실상은 그게 부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겁니다.

긍정적인 심리학을 말하는게 아니라

실상입니다 실상

 

즉 허상과의 충돌을 염두한 거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율법을 어릴적부터 진짜로 지켰다면

그 실상이 부요하다면

그 지킨 율법

못 지키는 자들에게 무상으로 무조건으로 다 나누어 주라 말이죠.

그런데 못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부자가 아니라 죽게 된다 말이죠.

 

부요함이 실상이 아니다는 겁니다.

 

부요함이 허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하시면서

간따나 등 돌리고 돌아서는 사람

아예 다시는 돌아올 생각 말라고 등을 오히려 떠밀고 있다 말이죠.

 

그 정도로 실상을 보여주고 있기에

그것을 기뻐해야지요.

그런데 등 떠민다고 그래 가버리냐 말이죠.

결국 그 동안 허상만 가득 채웠던 겁니다.

 

제가 그것을 어머니께

거룩한 율법을 지키니까

자기가 점점점 똥으로 안 보이고

오히려 계급장 단 것처럼

자신의 존재 가치가 점점점 올라간다고 보고 있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 계급장 중에 최고의 계급장을 단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이

실상을 보게 되니

배설물을 쳐 바른 줄도 모르고

그것을 자랑했다고

실상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보게 되었다고 외친다 말이죠.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똥을 쳐 발라요

똥 쳐 발라서 냄새나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금수저 라고 자랑을 하네?

얼마나 금수저가 천국 가기 힘들다는 것을

그 실상을 보여줘도 금수저를 자랑하고 있다 말이죠.

냄새 지독하게 나는데 ~~~~~

최순실 모녀 사건 보세요

금수저로 못 태어난 너희 부모를 원망하라고

돈도 실력이라고 똥도 실력 맞긴 맞지요~~~~

 

그들이 우리의 바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최순실이든 우리든 그 바닥을 뜯어보면

즉 실상은 둘째사망이지

껍데기 백날 금수저인들 소용없다 말이죠.

그러니 금수저인게 오히려 저주 받은 모습이다 말이죠.

 

누구 하나 살려주는 마지막 아담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없다 말이죠.

 

아침에 인자하심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

 

시편 100편에 나오는데요

밤에 주의 성실하심은 곧 나를 매일 매일 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은 그 물에 빠뜨린 나를 다시 건지신다 말이죠.

 

주의 성실하심은 나를 매일 매일 잃어버리게 한다 말이죠.

마치 요셉처럼 형제들을 뺑뺑이 돌려서 간첩 만들어서 죄인만들어서 잃어버림 당한 자

죽은자 만든다 말이죠.

 

그리고서는 주여 주여 나사로가 다 죽어갑니다.

아직 안 죽었다 가만히 있어봐

하루 지나고 드디어 죽었구나

그럼 지금 가실 꺼죠?

아니 3일 뒤에 갈 거야

자 이제 3일 지났으니 가시죠

그래 가자

 

아이고 참으로 일찍이노 오시무이다

다 죽고 무덤에 있는데

억수로 빨리도 오셨네요

 

라고 다들 빈정거린다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가 믿음 있다는 것으로 가능성으로 그 3일의 간극까지 넘볼려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오히려 그 어떤 인간도 못 넘어오도록 일부러 3일의 간극을 벌려서

죽은 것을 기정 사실화 하고서

살려내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곧 이름은 그 어떤 인간도 못 믿는다

그래서 이름이 그 무능한 이름이 믿음을 만들어서 믿음이 믿음을 주는 쪽으로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라고

 

그래서 인간 쪽에서 그 어떤 것도 둘째사망을 패쓰 통과 못하도록

오로지 살려주시는 마지막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만

살려주심 당하도록 되어 있기에

 

이 관계망 속에 집어넣고자

선지자처럼

서머나 교회는 매일 매일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도록 한다 말이죠.

누구에게? 사단의 회인 유대인에게

 

그렇게 죽음을 당하도록 죽도록 충성케 만들어서

누가 봐도 서머나 교회는 저주받은자 맞네 맞어 라고 한 순간

다시 살려내어서

그렇게 저주 받은자 맞네 라고 취급했던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살려내시는 마지막 아담의 살려주심과 십자가의 죽음을 나타내신다 말이죠.

 

그렇기에 서머나 교회는 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살려내시는

마지막 아담의 살려내시는 분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환란과 죽음을 맞딱뜨리게 되어서 그 죽음을 이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2:10, 개역)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1,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밝히 보이는데

죽도록 충성 안하고 배기겠냐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 곧 사단의 회가 오히려 고맙죠

예수님과의 만남을 더욱더 빨리 재촉 시켜 주고 있으니

남 좋은 일만 해요 글쎄 ~~~~

 

그러니 서머나 교회는 어디를 가나 이 사단의 회와 충돌하도록 되어 있어

목배임을 당하도록 넘기움을 매일 매일 당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 조차 주님의 살려주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의 계획이기에

기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거죠.

 

즉 주의 오른손이 서머나 교회를 쥐고 있다는 증상으로써 반드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 동시에 놓여짐으로써

 

나타나는 두 패로 영원히 갈려지는 현상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서머나 교회에 주의 사자가 증거하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너희들에게 나타날 것이니

미리 답을 알려준다 말이죠.

 

세상에나 이런 반칙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이 반칙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계시록은 반칙 중의 반칙입니다.

미리 정답을 알려주는 겁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반칙 중의 반칙입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유대인 곧 사단의 회입니다.

정식으로 말씀을 지켜서 제대로 승부하자고

세상에나 마귀로 태어난 자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마귀 주장에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런 불법이 없거든요.

 

그러나 이 반칙이

이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는 자랑이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용서 라는 불법을 마음껏 자랑하시고

이 불법인 십자가의 용서에 죽도록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목사들의 할짓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충성하라고 사기를 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라는 말로 사기치는 자들이 하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지셨으니
죽도록 충성할 것을 가시화 된 것에 보이고자
남의 눈에 보일려고
가시적인 것에 충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자 말이죠. 상대적인 것으로써 십자가에 충성하시면 됩니다.
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