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치 못한 자여!! 너는 즐거이 노래할 지어다! (시편 113편)

잉태치 못한 여자로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1:11, 새번역)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비록 그는 늙고,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그는 생식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아브라함),……'

(11:12, 새번역)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11:13,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1:14, 개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23:29, 새번역) 보아라, '아이를 배지 못하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이 복되다' 하고 사람들이 말할 날이 올 것이다.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7,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54:1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54:1, 새번역)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는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를 높여라.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113:1, 개역)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113:2, 개역)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113:3, 개역)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113:4, 개역)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113:5,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113:6, 개역)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113:7, 개역)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113:8, 개역)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113:9, 개역)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잉태와 연관된 의미를 찾아서 조금 올려봤습니다.

즉 생명을 창조하는 창조자는

그 잉태로 인해 부정한 자가 되는 겁니다.

 

여자는 그래서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창조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니까 말이죠.

 

(딤전 2:15, 개역)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 2:15, 새번역)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6:21, 개역)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하니까 이것이 성경난제로 분류되어 있더군요

이게 무슨 난제일까?

 

그 정도로 구원을 인간의 행동 여부로 본다는 것이 들통이 나니까 그런 겁니다.

문자적으로 보니까

즉 논리 또는 이성적으로 보니까

앞 뒤가 안 맞다 말이죠.

 

앞뒤가 안 맞아야 정상인데

그렇게 되면 논리를 이끌어 갈수가 없게 되니까 난제로 분류하더라 말이죠.

앞 뒤가 안 맞으니까 말이죠

 

오늘 시편 113편은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잉태치 못한 여자로써 구원이 된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다가 논리나 앞뒤 맞기는커녕

논리를 뛰어넘는 겁니다.

잉태치 못하는 불임 여성인데

원인 없는 결과로 아이를 가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미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빠진게 있어요

바로 남자입니다.

남자 없이 아이를 가진 불임여성이다는 거죠.

 

도대체 논리를 집어넣을수가 없어요

오히려 논리를 의도적으로 빼버리는 식입니다.

남자는 끼일 구석이 없다 라는 겁니다.

 

(딤전 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딤전 2:2, 개역)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딤전 2:3, 개역)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딤전 2:4, 개역)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5,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6, 개역)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딤전 2:7, 개역)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딤전 2:8, 개역)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9, 개역)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딤전 2:10, 개역)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딤전 2:11, 개역)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딤전 2:12, 개역)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딤전 2:13, 개역)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딤전 2:14, 개역)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5, 개역)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2장 전체를 보면

남자의 구원과 대비된 여자의 구원으로써 증거가 되는데

곧 지위의 개념, 머리의 개념을 언급하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자 이렇게 문자적으로 봐도

마지막 구절에서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역시나 논리가 안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번역을 또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번역문제를 따져보니

다른 번역은 잘못 되었고

킹 제임스 번역에 여자가 그냥 여성이 아니라

젊은 과부로써 정절을 통해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된다

? 머리된 남편이 있어야 하는데 남편 없는 여자가 되었기에

곧 머리가 없는 여자, 구원자가 없는 여성이 되었기에

바르게 살아서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 구원받는다 라는 식으로

킹제임스 번역을 가지고서 역시나 문자적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저는 개별적으로 이 부분에서 마침 며느리 다말이 생각이 났던 겁니다.

즉 정절에 특이점을 잡아서 보게 되니 딱 며느리 다말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정절과 무관해 보이는데 그것이 진짜 정절이다는 겁니다.

거룩 말이죠.

 

자 그럼 전체적으로 잉태치 못한 여인이 즐거운 어미가 되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잉태와 무관한 여인이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정절과 무관한 여인이 정결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여인은 다말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온 여인들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오히려 여성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구원된 셈이지요.

머리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가요?

아니지요

 

시아버지 유다는 비로소 엉터리 약속관에서

진짜 약속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나 보다 옳았다가 아니라

그가 나 보다 옳았다고 남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다말의 하나님이 옳았다는 겁니다.

머리의 역할 디모데전서 2장 전체가 말하는 머리 개념

지위 개념에서의 머리는

바로 나 시아버지 유다의 하나님이 아니라

다말의 하나님이 머리 되셨다 즉 구원자였다 라는 겁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시편 113편에서 말하고 있는 찬양이라는 의미는

곧 찬양의 사건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 이라는 약속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부활이라는

구원이라는 개념은

 

십자가라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도 없이

그냥 딸랑 구원이라는 개념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임여성이 많은 자식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죽은자와 방불한 자가 많은 자식의 어미가 되는 거죠.

이것이 믿음의 세계인데 무슨수로 믿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믿음 다 동원해 보세요 믿어지나

오히려 샤머니즘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문제 무슨 수로 해결하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 문제 말입니다.

 

철학자들은 샤머니즘을 공격합니다.

그럼 공격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 문제 해결할까요?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문제 해결 못한채

구원문제로 사기를 치는 자들을 공격하고

거기에 그네언니처럼 말려드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공격할 줄만 알기에

 

어리석음을 공격하는 지혜를 가졌다고 우쭐댈뿐

근본적인 구원문제 곧 죽음문제를 해결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샤머니즘이 십자가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또한 십자가를 어리석다 라고 공격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점쟁이 보다 더 더 더 나은 점쟁이로써

저들은 더 심한 샤머니즘으로 보고 있다 말이죠.

 

소위 철학자들이 외치는 과학적 사고방식 이성적 사고방식 자체가

오히려 더 종교적이다는 겁니다.

 

괜히 모든 철학계를 유대인들이 쥐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들 역시나 완악이라는 수건을 벗지 않는 것은

자기들이 욕하고 있는 샤머니즘과 다를바가 없다는 거죠.

 

머리 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남을 가르치는 권리가

남자든

샤머니즘과 싸우는 철학자든

유대인(제사장 나라)이든

역시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그들이 부정하다고 욕하는

여성을 통해서 도리어 머리가 누구인가를 보라는 취지인 겁니다. 디모데전서 2장이 말이죠.

 

자 그래서 시편 113편을 올림에 있어서

여러 구절들

곧 이사야 541

이 구절을 다시 인용한 신약의 갈라디아서 427

또 히브리서 11장 그리고 누가복음 2329절 등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구원 곧 죽은자의 다시 살리심은

바로 이렇게 여성의 부정성인

잃어버린 자를 다시 되찾는

부정하기에 더더욱 여성에게 더 많이 탕감하고

더 많이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더 많이 사랑하시는 죽기까지 섬기신 그 머리를 말하고자 함에 있어서

 

(11:13,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1:14, 개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구절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아이를 낳으면 구원의 조건에 맞다는 말이 아니라

외국인 나그네 떠돌이 잃어버린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기쁜소식의 희년으로써

예수님이 머리 되심이자

본향이자

참실상이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고자

99마리 양을 버리고서

찾으시는 목자를 말하고자 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이들이 바로 약속을 말하는 증인이다는 거죠.

약속은 바로 이 분이야

여자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야

라고 여성들이 잃어버림에 놓여져서

남자들에게 너의 머리는 이분이야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찬양사건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생명을 쥔 분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사건


곧 그의 머리를 드심과 (시편 110편 
http://crosslamb.tistory.com/1784 )

그의 뿔을 드시는 사건 ( 시편 112편  http://crosslamb.tistory.com/1791 )

 

곧 십자가 사건은

인자가 높이 달리는 사건으로써

남자들에게 여성이 선지자로써 외치는 겁니다.

남자들아

이 첫아담에 속하는 자들아

너의 머리는 저분이야 라고 외칠때에

부정한 여성이 외치는 그 외침을 그 찬양을

고지 곳대로 듣겠냐 말이죠.

안듣는 것 알고 외치는 겁니다.

 

뻔히 무시할 것 알면서도 외치는 겁니다.

그런 기능적인 면에서는 선지자이지요.

 

여성의 신체구조는 모두다 아기탄생

생명탄생으로 모아집니다.
생명을 위한 구조이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생명이 누구로부터 왔는가 라는 머리를 쳐다보라는 취지입니다.

 

그러니 여성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을 뛰어넘어서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1초 잠깐 구원자

결국 머리는 저분입니다 라고 보라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믿어주마 라고 다 믿지

누가 짐승밥통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믿겠냐 말이죠.

믿지 말라는 소리와 같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진짜 복되다

진짜 복된 여성이다는 겁니다.

 

더더욱 아이를 낳을수 없는 불임여성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임여성인데

곧 개같은 이방인이데?

그런데 수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 하라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말때에

심판때에는

모든 가치판단이 뒤바뀌는 겁니다.

곧 성령의 때에는 전도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속에서 보게 되니

여호와의 불 속에서

심판 속에서 보게 되니

 

부정한 자가 복된 자고

의롭다 라는 자들이 마귀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정한 개같은 이방여자 다말 같은 자를 만나야 합니다.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결하기 짝이 없는 지혜로운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종말때에 구원받는다 말이죠.
마지막 심판때에 불의한 재물에 죽도록 충성하는 불의한 청지기인 요셉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머리가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선지자 입니다.

 

백날 의로운 정의로운 청지기로 살았다고 자부하면서 외쳐본들

종말때에 살아남을수 없다면 그것은 헛똑똑이 였던 것이 드러난 겁니다.

허당이였던 거죠. 허구/ 허깨비/ 허상/ 안개/ 의문의 반복/ 똥 떵 어 리

 

그 실상을 보고서 헛똑똑이였던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보고 그가 나보다 옳았다고

그녀를 아내로 삼는 겁니다.

 

누가 누구를 구원한 셈입니까?

남자의 역할인 여자의 머리로써의 남자는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머리입니다 라고 이야기 해야 할 머리기능을

 

엉뚱하게 완악한 수건을 쓰고서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머리라고 외치게 되니까

그 엉터리 약속관에 (시아버지 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아

불의한 재물(십자가)에 죽도록 충성함으로써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나 목사에게 하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에게 죽도록 충성하라 입니다.
수많은 자들이 이 의미로 사기를 칩니다. 조심하라 말이죠.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것 다 알지만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의 완악한 수건을 벗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시아버지 유다는

 

부조리한 편파 죄인만들기 시험을 하는 불의한 청지기 요셉의 시험에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아니!!
이제 더 이상 며느리가 아닌 정식 부인 정실부인인 본처로써 정절한 아내 다말을 통해서
낳은 자식을 통해(십자가로 낳은 자식이기에 안 죽는 자식을 통해)

그 시험을 통과하는 겁니다. 구원 받는 겁니다. 해산함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무슨 시험일까요?
요셉이 얻고자 한 답은 무엇이기에 그런 시험을 한 겁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약속의 의미인 십자가의 용서를 아느냐 라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의문의 반복이 아니라, 명료하고 또렷한 밝히 보이는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3일(도장 도장끈 지팡이) 이라는 간극의 십자가의 능력을 아느냐 라는 겁니다.
모든 허물을 덮는 피흘리심을 아느냐 라는 겁니다.

 

무시험 합격이라는 부조리한 십자가의 능력을 아느냐 라는 시험입니다.

이것 때문에 형님들 보다 앞서서 보냈다는 겁니다.
종말을 대비하라고
심판을 대비하라고

똑똑한 빛의 자녀 보다
종말을 대비한 불의한 청지기가 훨씬 더 지혜롭다고
이 십자가의 지혜가 바로 머리이다고

그렇게 외쳐야 할 여자의 머리인 남자가 
그 기능을 못할때에
여자가 머리를 외치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옳지 않느냐 라고 말이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의 사랑을 아느냐 라는 겁니다.


이 무시험 합격이라는 시험을 치르는 겁니다.

말이 되나요?
무시험이란 시험을 안 친다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시험은 시험인데 무시험을 확장 확대 증폭하기 위한 시험인 무시험입니다.

무시험 합격이라는 답을 쓰기 위한 시험을 치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시험이지요?

 

그런데 앞의 글 요한계시록 서머나 교회가 바로 그 시험을

무시험 합격한 자로써 시험을 치르는 겁니다.

이미 벌써 이겼는데

무시험 합격했는데

그 무시험 합격을 증폭시키는 시험을 치는 겁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사망에서 건짐을 받는다고 말이죠.

 

무시험 합격했는데 다시 시험치는 이유는 뭘까요?

나 구원 받았잖아 라는 것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둘째사망에 속한 자들을 까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무시험 합격 해 놓고서 다시 불합격하는 자도 생기겠지요.

 

그러니 둘째사망을 들추어냄으로써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임을 더더욱 확장 확대 증폭시키는 것이지

인간 개인 구원을 과시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의 끝까지 섬기심 곧 인애와 자비인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편 11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된 남자 조차도 머리가 누구인가를 못 보여줄 정도이면

나중된 여성은 오죽하겠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탕자 같은 여성이

많이 탕감받음으로써 많이 사랑하시는 분을 보여주는

머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에 있어서

곧 십자가 사건

요나의 사건

 

요놈이 아니요 저놈입니다 라고 팔을 어긋맞게 하는 사건을 통해서
(요나의 표적,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혈통 이스라엘이 아니요, 개같은 이방인 니느웨 백성이다는 겁니다.
회개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구원을 자기소유화 하기 위해서

조건을 갖출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점점 현대에 속할수록

모든 것이 자기 숙제가 된 시대입니다.

 

즉 선물이 없는 시대입니다.(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이 3일의 간극이 없는 시대)

그러나 이런 종말의 시대인 성령의 시대에

가뭄과 물이 없는 저주가 점점더 가시화 되고 구체화 된 시대일수록

오히려 선물은 넘치고도 넘치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나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더 풍부하고 더 부요한 실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잉태치 못한 여성으로써

찬양한다 라는 것은

곧 신부된 교회의 입장에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무시 받을것 뻔히 알면서도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내쫏겨남을 뻔히 알면서도

내어줌을 당한다 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증거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저 분을 보라고

너희들의 머리 되신다 라고 찬양하는 겁니다.


보라! 세상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이것으로 모든 되도 않는 의문의 반복들을

완악한 수건들을

모조리 다 깨뜨리는 겁니다.

 

이 구원의 뿔을

신부된 교회는 찬양하는 겁니다.

 

의문의 것들은 다 가라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말이죠.

 

두 소경이 고래 고래 고함지르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치듯이

잉태치 못한 자가 생명의 주 되신 머리되신 주를
죽도록 목숨걸고 외치는 겁니다.

이 부정한 자가 진정으로 정결한 자로써
즐거운 어미가 되는 겁니다.

한나와 마리아의 찬양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 113:9, 개역)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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