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 배제) (시편 101편)

 


(행 3:18,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 3:19,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20, 개역)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21, 개역)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2, 개역)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행 3:23, 개역)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 3:24, 개역)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행 3:25, 개역)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행 3:26, 개역)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먼저 [저의 말을 들으라]를 성경검색기에서 찾아낸 구절입니다.

 

17:5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17:5, 새번역)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벧후 1:17, 새번역)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 17:5; 9:7; 9:35

(17:5, 공동) 베드로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17:5, 우리말)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3:17

 

 

9:7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9:7, 새번역)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또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자다'

(벧후 1:17, 새번역)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 17:5; 9:7; 9:35

(9:7, 공동) 바로 그 때에 구름이 일며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9:7, 우리말) 그때 구름이 나타나 그들 위를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라!”

 

 

9:35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9:35, 새번역)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벧후 1:17, 새번역)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 17:5; 9:7; 9:35

(9:35, 공동)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

(9:35, 우리말) 그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그의 말을 들어라!”

(9:35, 현대어) 그때 구름속에서부터 음성이 들려 왔다. )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 18:15,2:8,42:1)

 

그러다가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도 검색 구절에 나오기에 또 찾아봤습니다.

시편 2:7

 

(2:7, 개역)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2:7, 새번역) "나 이제 주님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13:33, 새번역)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셔서, [조상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 2:7

(1:5, 새번역) 하나님께서 천사들 가운데서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2:7(칠십인역) 삼하 7:14

(5:5, 새번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2:7(칠십인역)

(2:7, 공동)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2:7, 우리말) 내가 이제 여호와의 율례를 선포하리라.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셨도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2:7, 한글킹) 내가 칙령을 선포하리라.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

(2:7, 현대어) 여호와께서 단호히 내게 하신 말씀을 나 두루두루 이야기하리라. 주께서 이르신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3:17, 공동)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17:5, 공동) 베드로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1:11, 공동)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창세22:2; 이사 42:1.

(9:7, 공동) 바로 그 때에 구름이 일며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3:22, 공동)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9:35, 공동)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

(13:33, 공동)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자녀 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제이편에도,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 시편 2:7.

(1:5, 공동) 하느님께서 어느 천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 시편 2:7. 2사무 7:14.

(5:5, 공동)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 시편 2:7.

 

 

이사 42:1

 

(42:1, 개역)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42:1, 새번역)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42:1, 공동)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42:1, 우리말) 내가 붙잡아 세운 내 종을 보라. 내가 뽑았고 내가 기뻐하는 내 종을 보라. 내가 내 영을 그에게 불어넣었으니 그가 민족들에게 공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42:1, 한글킹) 내가 드높이는 나의 종을 보라. 나의 택한 자, 그 안에서 내 혼이 기뻐하는도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두었으니 그가 이방인들에게 심판을 가져오리라.

(42:1, 현대어) [하나님의 종의 노래(1)]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내 종이 있다. 내가 그의 뒤에 있어서 항상 그를 붙들어 준다. 그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요 내 마음에 꼭 맞는 자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내려 주었으니 그가 세상의 만민에게 옳게 사는 방법을 전파해 줄 것이다.

(12:18, 새번역)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 42:1-3

(3:17, 공동)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12:18, 공동) "보아라, 내가 택한 나의 종 내 사랑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 그에게 내 성령을 부어주리니 그는 이방인들에게 정의를 선포하리라. / 이사 42:1-4.

(1:11, 공동)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창세22:2; 이사 42:1.

(3:22, 공동)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9:35, 공동)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

 

 

신명 18:15

 

(18:15, 개역)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18:15, 새번역)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3:22, 새번역) 모세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 / 18:15; 19

(7:37,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나를 세우신 것과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 18:15 '나와 같은'으로 번역해서 '한 예언자'에 연결할 수도 있음 , '형제들'

(18:15, 공동)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8:15, 우리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위해 너희 형제들 가운데서 나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다. 너희는 그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18:15, 한글킹)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들을지니라.

(18:15, 현대어)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예언자로 불러 세워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예언자의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합니다.

 

 

 

(9:35, 공동) 이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

(3:22, 공동) 모세가 한 말을 보면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나를 보내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예언자 하나를 세워주실 터인데 너희는 그 예언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 신명 18:15-16, 19.

(7:37, 공동)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당신들의 형제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뽑아 보내실 것입니다.' 하고 말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 신명 18:15, 18.

 

 

자 이렇게 쭈욱 찾아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정작 이스라엘민족이 순엉터리로 이 이스라엘 개념을 깽판으로 만들어 놓아도

오히려 예수님은 이 이스라엘에 대한 의미를 포기하신적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 이스라엘은 땡 탈락 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민족이 망쳐놓은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예수님 본인만이 이스라엘이 되어서

다시 새이스라엘의 의미로써 다시 세우십니다.

 

여기서 보통 다들 회복이라고 표현하는데 회복개념은 없습니다.

하나님 형상 회복이라는 것이 성화론자들의 주요구호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지음받는 그리스도의 형상이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회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돌이킨다는 의미인데

반성의 의미도 아니요

과거를 잘못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끝을, 종말을 미리 앞당겨서 심판 받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와 연관된게 아니라

미래와 연관된 겁니다.

너의 끝을 미리 앞당겨서 보라 라는 겁니다.

 

물론 현재 자체가 미래완료로써 끝이 밀어서 현재에 투입이 된 것이기에

어디까지나 회개는 현재의 문제요 미래완료가 소급되어서 침노한 것이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고 고쳐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회개치 않는 자들이 과거와 연관 시키는 겁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토색하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것이 바로 모조리 다 과거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끝을 보고서 즉 미래완료를 보고서 그 완료를 끌어당겨서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과거를 본게 아니라

미래완료를 본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구나

라고 이사야가 회개를 하는데 끝을 미리 앞당겨서 미래완료의 다 이루었다를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 회개를 외치는 겁니다.

곧 미래완료를 외치는 겁니다. 졸지에 이스라엘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더라 말이죠.

 

아마 성화론자들(개혁주의)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인간의 행함에 예민하기 때문에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회개를 운운하고

그래서 역사를 우려먹습니다.

그러니 현재와 미래를 바른역사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다윗언약에서 다 깨진 겁니다.

마치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를 쥐고 있는 완악한 모습일 뿐인 겁니다.

다윗이 그렇게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치다가

본인이 법의 모순에 빠져 본인이 범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법의 한계입니다.

 

그럼 율법이 모순된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인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거룩합니다. 절대로 모순 되지 않습니다.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인간에게서는 아무리 해도 안나온다는 겁니다.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사랑과 멀어지게 되고

남을 살리기는커녕 본인도 사망에 점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사랑에 가까워지는게 아니라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사망에 가까워 지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즉 율법은 인간의 신체와 안 맞습니다.

아무리 몸이 거룩한 율법을 지켜도

율법이 인간 몸 신체가 지킨 법을

지켰다고 취급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행함 자체가 미래적인게 아니라

모조리 다 과거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이라면

미래적이어야 하고

또렷하며 완료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점일획도 떨어지는 법이 없다 말이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불가능하다는 그 공백을

과거적인 행함으로써 채워 땡빵질 할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완악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도리어 이 율법 지켰다고 우기는 그 완악한 마음을

외부에서 누가 벗겨주지 않으면 안되는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시편 101편에서 이 분을 외칩니다.

다윗 자신의 완악한 수건을 벗겨준 분을 소개하는 겁니다.

마치 사도바울의 눈의 비닐을 벗겨버리신 분을 직접 만나듯이 말이죠.

 

그 외침이 바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을지어다 라는 외침입니다.

 

왜냐하면 왜 저의 말만 들어야 하느냐 하면

다윗도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사랑하는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다윗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예언하여 한 선지자를 보낸다고 했을때에

그 자가 바로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인데

이 분이 바로 이방에 공의 곧 정의 곧 심판을 베풀어서

의의 길로 인도한다는 겁니다.

 

그럼 다윗이 해당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그러니 다윗은 오히려 저의 말만 들어라 라고 그 저의 말만 들음으로써

본인이 오히려 건짐을 받아서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된

혜택을 입은 당사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즉 이말은 다윗은 이스라엘 왕 답게

공의나 의의 길로 인도한 적이 있다? 없다?

없다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그럼 다윗은 이 공의를 외치는 분을 소개하게 된 겁니까?

본인이 혜택을 입게 되었으니 외치게 된 겁니다.

아 그렇다면 다윗은 오히려 범죄자가 되었고

개같은 이방인이 되었고

죄인이 되었는데

 

졸지에 왠 은혜인지

저의 말을 들음으로써 회개케 돌이키게 되었다는 겁니다.

과거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용서를

미래완료의 다 이루심인 십자가의 용서를 통해서

이제는 당당하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회개를 하더라 말이죠

이게 회개입니다.

 

오히려 성화론자(개혁주의)들이나 유대인 곧 사단의 회는

마치 베드로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수갑채워 잡아버린 마귀처럼

월척을 낚았다고 좋아라 하면서 주의 발등상 위에 올라오는 겁니다.

베드로를 송사해서 심판하고자 말이죠.

 

바로 이 모습이 과거의 행함을 토대로 현재와 미래를 행함으로 몰고가고자 하는 마귀의 모습으로써

바리새인에게서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행함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도배를 하더라 말이죠.

 

도대체 여기에 저의 말만 들으라 라는 것이 어디있냐 말이죠.

저의 말만 듣는 회개가 어디있느냐 말이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천국의 말만 들으라 라는 겁니다.

천국이 누구입니까?

회개는 눈물 흘리고 질질짜고 반성하고 하는게 아닙니다

통곡의 벽에서 중언부언하면서 외치는게 회개가 아니다 말이죠.

회개란 예수님 말만 듣는 겁니다.

 

아차 내가 예수님 말 듣지 않고 목사의 말만 들었구나

주여 주님의 말만 듣도록 귀를 새롭게 만들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목사도 모조리 다 과거의 산물입니다.

유일하게 예수님만 처음과 나중이다 말이죠.

나를 심판하실 분인 공의 자는 예수님 뿐이지

나나 목사나 과거에 얽매여있는 자들을 쳐다본다는 자체가

심판자를 안 쳐다보고

나를 내가 심판하고

목사의 말을 듣고 심판자도 아닌데 그 말에 휘둘린다는 자체가

예수님의 말을 안듣는 것이고

공의를 배우지 않는거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고소를 해도 송사를 해도

밀까부듯이 어릴적부터 나도 다 까먹은 죄악들을 조목 조목 다 들고 고소를 해도

마귀는 나의 심판자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뻔뻔스럽게

여디디야를 외치면서

이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 연연하지 않고

주님의 말만 듣고 이스라엘을 해체 시키는 겁니다.

 

즉 잃어버리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되찾는다 말이죠.

여기에 동원이 되는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절대 망할 리가 없다고 긍정적인 말로 백성을 유혹하지만

바벨론 포로때 그들의 존재는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히려 참선지자는 조금전 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이스라엘 망해 바벨론 포로 되어 가니까

춤추고 막 먹고 막 마시더라 말이죠.

?

구원 되었다고

 

즉 잃어버림이 되어야 되찾게 되니까

다시 돌아올테니 표식을 해 두어라 라는 겁니다.

 

저의 말만 나를 심판하지 그 심판이 곧 구원이니 말이죠.

공의를 보여주시니까 말이죠.

 

내 행함(곧 인간의 믿음이지요)과 이스라엘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원의 장치들은

다 의문의 반복이였을 뿐이다는 겁니다.(번제와 제사를 싫어하심)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다 말이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다는 겁니다.

즉 미래완료의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의 용서만을 쳐다보는 것을

상한심령이다고 회개다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대신 죄값을 치르시니까 말이죠.

유일한 사랑은 곧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에 있는데

도대체 뭘 쳐다 보냐 말이죠.

 

저 십자가만이 나를 심판하는 유일한 기준이요 공의인데

왜 나를 심판하지도 못하는 것들에 겁먹고 있냐 말이죠.

진짜 두려워 벌벌 떨어야 할 것은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말이죠.

 

마귀를 이기지는 못해도

마귀가 고소하고 송사하는 그런 것들이

하등 나를 심판할 수가 없으니 두려워 떨 필요는 없다 말이죠.

진짜 두려워 벌벌 떨어야 할 것은

나를 제대로 심판하실 유일한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심판이다는 겁니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5:12, 개역)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13, 개역)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5:14, 개역)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5:16, 개역)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 모든 인간의 고소와 송사는 마귀처럼 모조리 다 과거의 산물을 가지고 노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외치는

즉 저의 말만 들으라 라고 저가 외치는 것은 오로지 미래완료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뿐인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을 회개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성화론자들이나 자칭 교회 곧 사단의 회들은

십자가를 쳐다보지 않고서 회개의 달인들이 다 되어버린 겁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북한의 자아비판 인민재판하듯이

남한테 보일려고 대로에서서 기도하는 것처럼

회개를 남을 의식해서 하더라 말이죠.

 

그렇게 회개의 달인들이 다 되어버렸는데

구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그의 머리 드심 그의 뿔을 드심인 부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쳐다 안 보겠다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뻣뻣한 고개를 고수하는데

그래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는 그것을 반복하겠다는데

 

하등 예수님의 피흘리신 십자가 사건을 쳐다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 말이 맞아요

 

아니 아쉬울게 없는데 왜 쳐다봅니까?

그들 말이 맞다니깐요.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형상화 한 구리놋뱀을 쳐다보라니요?

말이 되냐 말이죠.

불뱀에 물린 자도 안 쳐다 보는 판국에

불뱀에게 물리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이 왜 쳐다보겠습니까?

더 안 쳐다보지요

 

그런데 얄밉게도 그들 코 앞에서 쳐다보고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꼭 얄밉게 하는 자가 있기에

 

그 사람의 스펙과 과거 행적을 살펴보니

그럼 그렇지

매국노 세리이고

토색하는 자 이고

뭐 하나 주님앞에 꺼내놓을게 있긴 있어야 내어놓든가 하는데

전혀 없으니까

저 사람의 어리석음에 동의 할 필요가 전혀 전혀 네버 네버 없다 말이죠.

 

그러니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을 주장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외치는 강도의 말에

옆의 강도 마저도 수긍하지 못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을정도로

많은 행적들이 있기 때문에

저런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즉 요즘 이단인 한국교회가 외치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얼마나 구원을 무시했으면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사단의 회 답냐 말이죠.

죽어도 완악한 마음과 수건을 벗지 않겠다는 심뽀를 대내외적으로 선언하고 다짐하고 있으니 말이죠.

 

얼마나 그 용어로 사기를 쳤으면 대부분 세뇌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더 웃끼는 것은 조금 공부했다는 자들은 그런 무식한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또 역시나 같은 의미로 나는 저런 사기를 안친다고 사기치는 자들이 있는데

그 조작한 용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속아

안 속는 자들이 없을 정도로 유식한 단어와 용어에 다 넘어가더라 말이죠.

거짓선지자 답게 사람들의 귀에 착착 달라 붙는 평강 평강 평강을 외치더라 말이죠.

 

심판을 외쳐야 그 사람이 공의를 보게 될텐데

공의를 보도록 하는 기회조차 아예 안 줄 정도로

평강 평강을 외치더라 말이죠.

 

골목에 가로 막고서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도록 한다 말이죠.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14절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4. 이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첨가되어 있음

 

 

누구 말만 들어야 합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심판을 외치닌

종말을 외치는

끝을 미리 앞당겨 몰고 오시는

무화과 나무를 말라 버리게 하시는 분의 말만 들어라 말이죠.

 

그 분만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다윗이 얼마나 뻔뻔스럽고 당당한지

오히려 나처럼 안되면 다 작살이 난다고

 

꼭 복선? 오마주? 뭐라고 하죠? 그 영화용어가 있던데

 

꼭 사도바울이 스데반 죽여 놓고도 오히려 더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외치더라 말이죠.

너무 너무 당당해요

 

다윗이 밧세바 취한 사건으로 우리야 장군 죽이고

이름없이 아이 죽고

 

그 뒤에 이 시편 101편을 외칩니다.

 

마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언 놈이 나를 정죄하면서 꾀더냐 라는 식입니다.

공의가 있다 말이죠.

이 분만이 공의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심지어 마귀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무서울게 없는 겁니다.

 

그 공의로 이스라엘을 불도져로 밀 듯이 밀어버립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세 번 부인했다고 마귀에게 잡혀와서 고개도 못 들고 있을때에

예수님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음성에

마치 풀죽어 있던 고무풍선에 마법처럼 생명이 들어가서

숨이 넘쳐흘러 고무풍선이 터질 듯이 외치는 겁니다.

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라고

되바라지게 외친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 베드로를 꾀겠습니까? 주님 걱정하지 마이소 라고 말이죠.

 

바로 그런 식으로 시편 101편은 이 공의가 있어서

걱정 말아요 그대 우리 함께 심판 받아요 라고
심판 곧 종말을 미리 앞당겨 누립시다 라고

에이 ~~~ 전인권처럼 노래 부른다 말이죠.

 

다윗 참 뻔뻔하죠

찬찬히 읽어보세요

얼마나 뻔뻔스럽고 당당한지

 

마귀도 갈구지 못할 정도이다 말이죠.

 

주의 인애와 자비 곧 인자와 그리고 공의가 있는데

언 놈이 나를 심판해

나를 진짜 제대로 심판 하실 분은 예수님 뿐이야 라고

아예 십자가의 죽음을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이 이스라엘에게 떼려 붓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까 제대로 보라고

십자가를 막 부어요

예수님의 피를 막 떼려 붓는다 말이죠.

 

(101: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101:2, 개역)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101:3, 개역)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서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101:4, 개역)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101:5, 개역)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101:6, 개역)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101:7, 개역)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101:8, 개역)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자 그렇다면 진짜 도망치고 멀리 물러나고 벌벌 떠는 것들이 보인다 말이죠.

앞의 글 시편 114편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거 없으면 못산다고 우겼는데

오히려 주님의 공의 곧 주님의 심판을 멀리했는데

 

이 심판이야 말로

이 공의야 말로

나를 제대로 지옥에서 곧 의문의 반복에서 건지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이 인자의 살과 피를 감사함으로 기쁘게 막 먹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막 노래 부르시기를

이 인자의 살과 피를 다윗이 즐겁게 찬송했듯이

주변의 시선으로

왜 좀 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금식하시더니

기도하시더니

회개하시더니

 

왜 이제는 막 먹고 막 춤추고 막 노래 하십니까?

 

혹시 미친 것 아니신지요?

 

안 미쳤다

나의 회개

나의 눈물

나의 금식

나의 기도로

아이를 살릴수 있었다면 벌써 살렸을 것이다

 

그것으로 아이를 살릴수 없다.

오히려 아이가 나를 살린 것이다

 

라고 이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살아났는데

어찌 막 먹지 않고

막 춤추지 않고

막 노래 부르지 않을소냐?

 

이 살과 피를 나는 노래하리라 라고

막살기를 누리는 겁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막살면서 이 십자가의 용서를 노래하십시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요.

공의이며

미래완료의 다 이루심을 미리 소급해서 누리는

종말의 끝을 앞당겨서 누리는 삶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부드러운 음성에

너희는 저의 말만 듣고

네 그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끝을 미리 앞당겨서 사시길

 

끝이 십자가의 용서 뿐이기에 뭘해도 감사 뿐인 겁니다. 막살아도 감사 뿐

 

끝이 사랑 뿐이면 전부 다 사랑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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