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거짓된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 (계 2:14-17)

 

 

(2:12, 개역)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13, 개역)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2:14, 개역)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개역)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6, 개역)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17,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마침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으시다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그렇게 챙기시더라 라고

 

그 말을 하시니까

제가 반문 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누가 제일 지금 밉습니까?

순실이 곧 무당이 제일 밉지

 

어떤 기자는 순실이는 무당이 아니다 라고 무당들에게 물어보니 무당이 아니라고

교회 다녀서 제일 많이 헌금하고 했다네요
무당들은 오히려 전남편이 진짜 무당이라고 하던데 ~~~

 

그게 무슨 성도고

 

물론 급할때는 점보고 무당찾고 했다더군요.

 

제가 그렇게 누가 제일 밉냐고 물어본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는 제일 미운 사람이 있다 말이죠.

 

곧 일종의 원수죠 개인적인 원수 말이죠.

 

이 사마리아인을 그냥 단독적으로 챙기시는게 아니라

반드시 누구 보란 듯이 챙기시더라 말이죠. 사랑하시더라 말이죠.
상대적으로 챙기시는 겁니다.

 

누구 보란 듯이

 

바리새인?

 

딩동뎅 맞습니다.

 

왜 바리새인 곧 유대인의 대표성이니까 유대인 보란 듯이 챙기실까요?

 

원수!!!! 라고 말씀하시면서 눈을 동그랑게 저를 쳐다보시더라 말이죠

맞추면 억수로 좋아라 하시기 때문에

저를 빤히 쳐다보더라 말이죠.

 

! 딩동뎅 맞추셨습니다.

 

맞추었다고 어린아이처럼 아주 좋아하시던데

 

그럼 왜 원수일까요?

 

그건 모르겠다 라고 웃으시면서 빨리 포기 하시더라 말이죠.

 

딩동뎅 그것도 맞습니다. ? 맞다고!!! 난 모르는데??

 

원수 됨은 이유가 없어요.

당연히 사마리아인도 왜 챙기시느냐 이유가 없어요.

편애 이거든요.

 

미움도 사랑도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튼 사마리아인은 원래 이스라엘로써 남유다 북이스라엘로 나누어지면서

북이스라엘을 앗시리아가 점령함으로 인해서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강제 결혼케 됨으로 혼혈화 되었다 말이죠.

 

그리고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포로 당하게 되니까

 

그 예루살렘에 사마리아인이 거주하게 되고

그리고 사마리아 교 까지 만들고

유대인 입장에서 같은 동족이였지만 배신자로써 원수로 자리 잡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는 거죠.

유대인은 저들과의 거리감 구별감으로 유대교를 따로 만들고 말이죠.

자기들이 정통이고 저들은 배신자 라고

어쩌면 유대교라는 정통성을 저들 사마리아교랑 대조된 의미에서 그런 종교적인 표현들이 나왔다고 생각할수 있다 말이죠.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성전재건을 중심(B.C 5세기)으로 형성된 사상에서

유대교가 그 뿌리를 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곧 바리새파(에스라 계열)의 기원이다 말이죠.

물론 이스라엘 12지파를 다 염두하고 있지만

그 정통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아래에서 정작 유다지파로 좁혀지게 되는 거죠.

(또 에스라는 바리새인과 무관하다 말이죠. 바리새파가 에스라 계열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신천지처럼 진뜨기처럼 달라 붙은 겁니다.)

제사장 직인 레위지파을 몰아내고 사두개인이 제사장직을 맡고

BC2-3세기에 바리새파 에세네파가 개입한 후에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는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사라진 후에

바리새인만이 지금까지 내려오니

유대교의 기원은 바리새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죠.

바리새파만 남아서 유대교를 유지 시키고 있으니 말이죠.

(물론 더 넓게 보면 모세로 출발하는 더 큰 테투리가 있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계시록에서는 사단의 회(모임) 라고 한다 말이죠. 바리새파를 말이죠.

 

그러니 사단의 철천지 원수가 사마리아인이다 말이죠.

사마리아인을 독자적으로 챙기시는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챙기시는 겁니다.

 

그럼 악의 악이니까

원수의 원수이니까

사단의 사단이니까

예수님이 이들 사마리아인을 구지 멀리 하실 이유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삥둘러서 가지만

예수님은 가로질러 가신다 말이죠.

누구 보라꼬

 

그래서 어머니께 말씀드렸지요

예수님은 결국 원수 곧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원수 된 자만이 예수님의 긍휼을 본다 말이죠.

 

의인이 의사를 찾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과거를 따지지 않는데

인간은 과거에 스룹바벨성전을 짖는데 방해했던 이 사마리아인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말이죠.

사실상 일종의 사건이 이슈화 되고 이데올로기가 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아무리 나쁜짓을 해도

이 놈들 보다는 덜하다는 식이니까 말이죠.

최악을 만들어 놓고서는 차악책을 즐기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 트라우마로 배신자로 남아 있는 그 사마리아인을

유대인 곧 바리새인 보는 앞에서 편파긍휼을 베푸시니

누구까지 죽이고자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까지 죽이고자 한다 말이죠. 사마리아인이나 예수님이나 유유상종으로 몰아서 말이죠.

 

역시나 그럴줄 알았어 이 성전을 헐라

그래 그래 사마리아인이 그렇게 했던 짖을 너 예수도 하는구나

우리가 제대로 맞추었군 이런식이다 말이죠.

 

자 문제는 우리입니다.

바리새인을 역사적인 순서로 파악했을때에

아무리 들따 봐도 사단의 자식이 아니다 말이죠.

 

그 이유를 알길이 없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알길이 없다는 것~~~

 

이것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언 때문에 알게 된 것이지

우리는 백날 따져봐도 왜 사단의 자식인줄 모른다 말이죠.

그럼 후차적으로 거꾸로 역사의 역순으로 보고

시간의 역순으로 봤을때에

왜 사단의 자식인지를 당연히 알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방해하니까 말이죠.

 

바리새인이 사마리아인을 원수로 여겼다면

그럼 자신들도 원수 짖을 하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자신들도 원수 짖을 하고서는

공론화된 공인된 원수가 있으니

바지사장 앞 세우고서는 자신들은 정당화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을 예수님이 모르시겠냐 말이죠

그래서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뭔고 하니 니느웨 라는 이방민족 곧 이스라엘의 원수를

용서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졸지에 이 용서에 반발하는 방식을 취하는 겁니다.

 

뱀에게 물렸는데 뱀을 쳐다 보라고 하니 지금 장난하냐 라는 반발성

걸림돌을 제시하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남이 아닌 나의 원수를 예수님이 용서하심으로써

나 또한 그 원수와 다를바 없는 원수임을 들추어내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그럼 지난 시간에 버가모 교회를 왜 사단의 왕좌에 왜 집어넣었겠냐 말이죠?

한편으로는 너도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백성처럼 심판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따지지 않고 용서하신 원수를 사랑한 십자가의 용서를 누리게 함이였고

 

이것이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이 원수로써 용서받은 니느웨 백성이다면

요나선지자가 반발하도록 되어 있는 요나의 표적이 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코 앞에서 원수 철천지 원수 사마리아인을 용서하시니까 말이죠.

 

이런 십자가의 두 가지 일

하나는 주의 오른팔에 붙잡힌 바 된(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의 아신바 된 교회)

것과 동시에

또 하나는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원수로 들추어지는(베드로가 미끼로 잡혀야 마귀가 들추어지듯이)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게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든 서머나 빌립보 교회든

즉 일곱교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들 일곱교회가 주의 오른팔에 놓여짐과 동시에(이것도 이유 없는 비밀입니다.)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존재들도 비밀로써 들추어진다는 겁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버가모 교회에 책망꺼리가 있는데

잔소리 듣는 관계에 놓여졌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지

사생아가 아니다는 거죠.

그 매를 드심에 있어서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원수된 모습이 뭔고 하니

발람의 꾀를 쫏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니골라당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때에도 나왔는데요

교회 안에 또 따로 따로 끼리 끼리 당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원인 없는 결과를 자꾸 원인 있는 결과로

조건을 따지고자 하는 인간의 결핍성을 채우고자

그 외로움을 달래고자

그 빈공간을 채우고자 자기자신의 생각과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겁니다.

그렇다 보면 당이 생기고 정치가 되고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머리가 하나가 아니라

몸도 하나가 아니라

몸이 둘이 됨으로써 머리가 둘이 되는 거죠.

그러니 조건을 따지는 겁니다.

조건을 따진다는 자체가 조건을 갖추겠다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 구원의 조건을 갖추겠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구원이 무조건이 되면 안된다는 식입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이 그런 식이지요.

 

또 발람의 꾀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고 있는데

이 원수가 들어오는 것을 방치하게 되니

행음이 퍼지게 된다는 겁니다.

 

민수기 20장대 초반 장부터 나오는데

이 발람의 꾀를 살펴보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해석을 보니

발람이 왜 거짓선지자인지를 제대로 된 해석이 없더라 말이죠.

 

왜냐하면 원인이 없어요

그냥 결과만 있다 말이죠.

 

그리고 원인을 후차적으로 뒤짚어 씌우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 거짓선지자에 대한 해석을 오늘날 엉터리 해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거짓선지자이면서 거짓선지자에 대한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엉터리죠.

 

요나의 표적이다 말이죠.

 

원수를 해석 불가입니다.

자기가 원수임이 드러나야 원수에 대한 해석이 풀립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자신을 원수라고 보겠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자꾸 죄인 죄인 죄인이니까 라고 정당화 한다고 비꼰다 말이죠.

즉 자기는 그런 죄인이니까 라고 변명하고 정당화 하지 않으니까

너희들 하고 다르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에 걸려든 우리들의 모습이다 말이죠.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을 원수로 본다는 자체가

나는 원수가 아님으로써

원수 됨을 정당화 하는 저 사마리아인과 같지 않다고 본다는 자체가

원수이다는 증거이다 말이죠.

 

뭘 해도 원수임이 드러나는 장독대 안에 갇혀 있는줄 모르니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발람에 대해서 살펴보니

주님이 시킨대로 했는데 시킨대로 했다고 진노하시더라 말이죠.

 

 

(22:20, 개역)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2:21, 개역)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22:22, 개역)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이 부분을 제대로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없더라 말이죠.

앞뒤가 모순 되거든요.

시키는 대로 행했는데 그 행함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말이죠.

 

그런데 이 앞부분을 봐서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

왜 이스라엘 내부의 선지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외부의 선지자가 필요하냐 말이죠.

이 외부 선지자의 등장 자체가

이미 너는 거짓선지자이다 라고 먼저 깔고 가는 겁니다.

 

앞부분은 웃끼게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 불뱀을 쳐다보면 낫는다 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함을 받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철저하게 죄인으로 만들어 지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이들을 원수로 보고서 발락 왕이 용한 점쟁이 발람선지자를 데리고서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장면이 얼마나 낯섭니까?

이스라엘은 정작 하나님의 원수로써 들통나는 입장에 놓여있고

 

외부에서는 이 이스라엘을 보고 겁이 나서 이 원수들을 갚겠다고 발람선지자까지 동원해서 저주를 하는데

하나님이 개입해서 저주를 못하도록 막아서시는데

이스라엘에게 야곱에게서 흠이란 흠을 죄란 죄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고

축복하더라 말이죠.

 

이 두 장면이 서로 매치가 되느냐 말이죠.

그야말로 요나의 표적이다 말이죠.

 

하나는 원수가 되어서 용서함을 받고

또 하나는 원수 갚겠다고 저주를 하겠다는데 저주가 먹혀들지 않는 축복받는 자 이다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생각난 것이

구원 그 이후 라는 많은 사람들이 답을 못찾고 있는 부분인데

출애굽 이후에

구원 그 이후에 요단강 까지 가는데

여러 민족과 부딧힐 수밖에 없는데

이들 민족들이 순순히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우겨도

구원 그 이후는

내 구원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 용서가 중요해서

마귀들이 순순히 가만히 두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예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왕좌 속에 집어넣는다 말이죠.

마귀란 순순히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 라고 마귀를 수셔대면서

마귀를 격동시키더라 말이죠. 빨리 빨리 이스라엘을 버가모 교회를 괴롭히라고

누가 수셔대냐 말이죠.

 

그러니 이 두 장면이 얼마나 기가막히냐 말이죠.

 

발람은 아무리 저주 할려고 해도 저주가 안되고 도리어 축복을 말할 수밖에 없고

정작 내부 이스라엘은 늘 원망할 수밖에 없는 길로 놓여지게 되더라 말이죠.

 

이 두 장면을 누가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자 그럼 발람은 그냥 영매로써 하나님을 약속의 하나님이라서 대변하는게 아니라

자기 보다 센 존재가 오면 온대로 그냥 말할 뿐이다 말이죠.

 

그럼 시키는대로 했고 저주 하라고 발락이 아무리 돈을 주어서 꼬득여 대어도

돈은 탐나지만 어쩔수 없이 저주를 못하고 축복할 수 밖에 없도록

자기 보다 쎈 존재에 의해서 그냥 중간 영매 밖에 안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발락과 다를바 없는 놈이다 말이죠.

그리고 이 사건 뒤에 발람의 본색대로 이스라엘에게 스며들어서 음행이 퍼져서

이스라엘이 이들 여자들까지 다 죽이라고 했는데 못 죽여서 병이 퍼져서

나중에서라도 죽여버려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표본으로 발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시키는대로 해요

시키는대로 했는데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행함을 해도 믿음이 근본적으로 주님이 준 적이 없기에

그 근본은 믿음이 깔려있지 않는 거다 말이죠.

믿음은 요나의 표적으로 인한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지

인간의 신앙심 종교심 신념과 오기가 믿음이 아니다 말이죠.

 

그 계기로 후차적으로 뒤짚어 씌워서 돈에 삯에 따라 예언하는 거짓선지자의 표본으로써

성경말씀은 언급하고 있다 말이죠.

 

예수님 당시의 거짓선지자는 바로 바리새인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들이 성전을 통해서 돈 장사를 하니까

역시나 거짓선지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는 자체가 거짓선지자인 겁니다.

돈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괜히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게 아닙니다.

 

그런 사단의 회가 있는 곳에 버가모 교회를 투입한다는 것은

 

이들과의 충돌이다는 겁니다.

 

교회냐 아니면 십자가냐(요나의 표적이냐)

 

니골라당 그리고 발람의 꾀

는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의미를 두는 모임이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요나의 표적으로 모인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표적의 싸움이요 충돌이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유대인, 사단의 회)가 요구하는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이런 흐름이 흐른다면 사단의 회가 되는 것이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게 없다면

교회 내에서 이런 흐름이 흐른다면 매일 매일 십자가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교회는 껍데기요

정작 알맹이는 십자가가 나타나느냐 라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드러나느냐 하느냐 말이죠.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거든요.

 

설교의 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의 양상도 마찬가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던가

아니면 교회가 왜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인가 하는 이 둘의 충돌이 되는 점입니다.

 

앞의 글 버가모 교회를 언급하면서

 

원수와의 충돌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원수란 개인의 원수도 아니요

국가와 민족의 원수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아 아니다

천사도 흠모하겠네 라는 글에서

주이상스에 대해 언급하고

원수의 의미를 말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 빠뜨렸는데

마침 이 내용에 딱 맞는데

개인 원수도 아니고

인간 원수도 아니고

국가와 민족의 원수도 아닌데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도 아니다 말이죠.

이 하나님의 원수로 본 자들이 바리새인이지요.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이 구원한다?

철천지 원수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신다?

요나로써는 도저히 못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요나의 표적으로써

주이상스 불편한 십자가의 용서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납득이 안가는

 

바로 그렇게 너가 원수로써 용서 받았다는

납득이 여전히 안 풀리는 그대로 납득불가로써의 십자가 용서가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한 유대인처럼

발람도 니골라당도 결국 이런 사적인 구원과

사적인 원수갚기로 그것을 하나님의 원수까지 확대해서

투사를 했지만

 

십자가 상에서는 정작 실상은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원수관은 하나님의 원수를 따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의 원수를 따진다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는 오히려 유대인에게서는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럼 버가모 교회가 사단의 왕좌에 투입이 되어서 십자가의 용서를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시기와 질투가 만연한 곳에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곳에서 증거함과 같은데

정작 본인들이 저렇게 예수님을 오해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말이죠.

그러니 이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데 더 즐거움이 넘치는 겁니다.

 

에이시 재수 없게 사단의 왕좌에 배치되었구나 언제 제대하냐?가 아니라 말이죠.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사단의 왕좌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교회요? 교회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 곧 사단의 회와 같습니다. 강도의 소굴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나누어지는 곳이 아니라

교회가 돈으로 구성되고 돈으로만 이야기 되고

돈 되는 하나님

돈 되는 인간만 의미를 두는 곳으로써 돈 돈 돈 이야기만 하는 곳이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의 피를 증거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맞아 죽을 일이 되는 겁니다.

 

다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정신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회에 미쳐있는 놈들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사단의 왕좌에 강도의 소굴에 우리를 십자가의 증인으로써 배치되는 겁니다.

절대 교회와 십자가는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등떠밀어 밀치는 두 소욕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게 없다 말이죠.

 

이기는 자에게 흰돌과 그 흰 돌에 새긴 새이름을 준다고 했는데

다들 부담이 되는게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하시는데

 

(2:17,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긴다는 말은 저들을 다 굴복시키라는 말이 아니라

절대 못 이겨요 오히려 실패해서 죽임을 당한다 말이죠.

그 죽임을 당한게 이기는 것이다 말이죠.

이김은 내 쪽에서 행할 숙제가 아니라

이미 이겼기에 배치되는 겁니다.

 

(2:13, 개역)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이김 속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넉넉히 이겼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음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함으로써 벌써 마귀에게 넘어갔다고 본인 스스로도 여겼다 말이죠.
그런데 왠 반전!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붙잡아서 놓치지 않겠다 라는 믿음을 발휘하신거다 말이죠.)

 

그리고 흰 돌이 뭔가 해서 살펴보니

다들 흰 돌이 계시록 밖에 없어서 해석하기 힘들어 하던데

뭐 과거 중동 지방에서 재판할 때에 무죄가 판결 되면 흰돌

유죄가 되는 자는 검은돌 의 풍습을 가지고 흰 돌을 언급하던데

 

그것보다

 

(3:5, 개역)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희다 라는 것은 깨끗하다 거룩하다 영광스럽다 라는 거죠.

상대적으로 더러운 검은 것과 대조가 되구요.

 

그러니 대제사장 여호수아처럼 제사장 옷인 에봇을 더럽혔다고

사단이 고소를 하는데

흰 옷을 입히신다 말이죠.

 

그러니 우리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왕좌에서 오히려 더러운 옷

검은 옷을 입은자처럼 매일 매일 마귀로부터 고소 당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흰 옷이 입혀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옷이 입혀졌기에 발생하는, 벌어지는 사건이다 말이죠.

물론 역사와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는

마귀들이 흰옷을 입고 있고

버가모 교회는 더러운 옷 검게 된 옷을 입어서 정죄 당하고 있지만 말이죠.

밀까부듯이 까부는 마귀로부터 매일 매일 정죄 받듯이

 

누가 원수인줄도 모르고

원수가 원수를 고발하는

 

사마리아 철천지 원수를 바리새인(사단의 회)가 고소를 하는 식인

요나의 표적이 벌어지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사건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흰 돌에 새겨지는 새 이름입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쳤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 되는 것을 더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마귀를 떨어뜨리는 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열심이 특심????

다 과거의 일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아닙니다.

 

요나의 표적은 오히려 그랬던 내가

내 열심히 특심이라서 마귀까지 갈멜산에서 17 1로 싸워

아니 850 1 로 싸워 이겼는데

마귀까지 하늘에서 떨어뜨렸는데

 

내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 꼬라지가 뭡니까
?

 

그런데 7천명을 남겨놓았다는 그 말씀에

과거가 아닌

미래완료가 당겨줌으로써 그 과거의 잘난 것 못난 것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음성


7천명 앞에서, 미래완료로써의 7천명이 땡기고 있는데

그 따위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것을 내세운 것이 오히려 원수짖이였다는 것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 맞군요

남이 아닌 내가 주님의 원수 맞구요
뭘 해도 나는 죄 뿐이군요.

이런 원수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시냐 라고

다른 것 일체 안 묻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자가의 용서만 바라보게 하시는

이 요나의 표적이 나 보다 옳았습니다 라고

 

이 주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만으로 영광돌리는

다른 기쁨이 없는

다른 이름이 아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임을 받는다는 것에

 

마귀 보란 듯이

코 앞에서

주의 십자가의 용서만을 찬양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버가모 교회가 잘 이겨 싸워 승리해서 이기는게 아니라

이미 주의 십자가의 승리가 덮쳐졌기에

마귀 소굴에서 배치되어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소위 유대인의 회

또는 성전

또는 요즘으로 치면 교회 속에서

 

교회를 주장하는지

아니면 요나의 표적을 주장하는지

 

이 두 양상이 나타남을 미리 계시록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 곧 마귀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고

우리가 늘 다니고 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왜 옳았는지를 사단의 회에 배치되면서 새록 새록 알게 하심입니다.


누가 진짜 예수님의 원수인지를 말이지요. 

오로지 긍휼만을 바라는 자만이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지
교회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아 이런 허물 마저도 덮으시는 요나의 표적이였군요 라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뜨거운 피를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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