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을 원치 않으시고, 막사는 죄인 다윗을 부르러 왔노라 (시편 103)

 

하나님의 원수 다윗(사마리아인,탕자)을 예수님의 원수 마귀(바리새인,맏아들)로 부터 부르러 오신 주의 이름 예수님을 송축하라

 


(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시 103:1, 개역)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 103:2, 개역)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3, 개역)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 103:4, 개역)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5, 개역)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6, 개역)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시 103:7, 개역)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 103:8, 개역)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9, 개역)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10, 개역)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시 103:11, 개역)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2, 개역)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3, 개역)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개역)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5, 개역)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6, 개역)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7,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시 103:18, 개역)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9, 개역)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시 103:20, 개역)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1, 개역)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3:22, 개역)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1:50, 공동)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 시편 103:13, 17.

(103:13, 새번역)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103:13, 공동)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야훼께서는 당신 경외하는 자를 어여삐 여기시니

(103:17, 새번역)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고, 주님의 의로우심은 자손 대대에 이를 것이니,

(103:17, 공동) 그러나 야훼의 사랑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처음부터 영원히 한결같고 그의 정의는 후손 대대에 미치리라.

 

(1:67, 개역)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1:68, 개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1:70, 개역)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1:71, 개역)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누가복음 150절 마리아의 기도에서 시편 103편이 인용이 되었다고 어떤 번역서에서 언급했고

같은 맥락에서 다윗의 자손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사가랴(세례요한의 아버지)가 찬양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손에서 세워진 겁니다. 즉 우상이다는 거죠.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신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 신을 의식해서 복음은 전개가 되는 겁니다.

그런 종교 중에 모든 종교의 대표성인 유대교는 사단의 회로써 우상숭배 교 가 되는 겁니다.

 

다들 기독교의 뿌리가 유대교 라고 아는데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서 뿌리를 찾으면 안된다 말이죠.

정통성을 주장하고 싶어서 자꾸 그러는 겁니다.

역사가 아닌 묵시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묵시는 정통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늘 당장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제까지 아무리 잘 믿었다고 소문이 났다고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자꾸 역사 역사 우려먹다가 공중분해 되어버린 겁니다.

자신들은 역사적인 존재가 아니라

묵시적인 존재로써 처음사랑에 뿌리를 두도록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자꾸 역사로 눈을 돌리는 순간

제명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가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가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묵시란 인물입니다. 누구 라는 인물 말입니다.
그 분과의 관계성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과거를 들먹이는 맏아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손에서 세워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국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와 충돌하는 복음이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뿌리를 운운하느냐 하면

모든 종교의 목적은 의인 구원입니다.

즉 우상숭배의 목적은 의인 구원입니다.

 

결국 의인 구원이어야 사람들이 납득이 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복음만큼은 그 반대입니다.

의인 구원이 아닌

죄인 구원입니다.

 

착한 인간 선한 인간 천국 보내기가 아니라

나쁜 인간 악한 인간 죄인을 천국 보내기 이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늘에서 오신 분이 직접 말씀하신바 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가본적 없는 인간들끼리 만들어낸 종교가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내려 오신 분이 말씀하신바 이기에

모든 인간의 종교와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유대교든 카톨릭이든 이슬람이든 힌두교 불교

모든 종교의 주인공은 결국 인간입니다.

인간의 자기투사로써 신일 뿐이지

그 만들어진 신은 결국 인간의 하수일 뿐이다는 거죠.

 

그런데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인간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뭐가 아쉬워서 인간을 구원해야만 합니까?

예수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영광 뿐이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에서 시편 103편이 인용된 구절을 보니까

딱 생각난 것이 뭔고 하니

 

(1:50, 공동)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 시편 103:13, 17.

(103:13, 새번역)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103:17, 새번역)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고, 주님의 의로우심은 자손 대대에 이를 것이니,

 

(103:13, 개역)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03:17,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이 불쌍히 여김이 뭐냐 하는 겁니다.

즉 보통 부모 자식 개념에서의 사랑개념은

불쌍히 여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 이다는 겁니다.

모든 종교도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오히려 부모 자식의 관계 의미로 안보이고

주종관계처럼 안 보이냐 하는 점입니다.

아니 주종도 아니고 뭔가 형사와 범죄자의 관계?

재판장과 피고인의 관계?

아니 아니 이것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표현인데

 

하나만 더 거쳐서 생각해 보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노래 불러야

우리가 이해하는 부모 자식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반대로 당신은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노래 불러야

복음이 이해가 된다는 거죠.

 

자 이제 성경에서 나온 의미로 설명해 보면

바로 탕자 비유입니다.

 

오히려 맏아들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란 노래가 딱 맞고

반대로 탕자는 당신은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딱 맞다 말이죠.

 

자 불쌍히 여겨주심이 무슨 의미냐 하는 거죠.

성전에서 하나는 불쌍히 여겨주세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가는 부모자식의 관계성을 나열합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치 않게 살게 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라고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나열합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다른 하나는 불쌍히 여겨주심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일체 나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자신에게는 오로지 저주 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저주로, 자랑꺼리가 전혀 없는

오히려 저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자로 대대손손 자손대대 자자손손 영원히 잇도록 하겠습니까?

 

당연히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 같은 자를 영원히 살도록 천국보내시겠지요.

이것이 모든 종교입니다.

인간이 만든 사상입니다.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사고는 없습니다.

이게 정답이다 말이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이지요.

 

여기에 무슨 벌벌 떨고 두려워 할게 뭐가 있나요?

얼마나 긍정적이냐 말이죠.

 

그런데 유일하게 복음 만큼은 다릅니다.

물론 성경문자를 해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조차

모든 종교의 사상과 똑같이 주장합니다만

복음 스스로는 아니다는 겁니다.

 

저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저주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들은 뭘해도 아버지의 저주 속에 놓여졌기에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토색하지 않는 삶 따위를 나열할수 없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관계이다는 겁니다.

 

즉 아들은 아들로써가 아닌

저주 받아 마땅한 하인이요 노예요 죄인이요 범죄자요 개요 멍멍 개요

개같은 이방인 곧 마땅히 버림받아 마땅한 이방인이요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 로써 아버지 앞에 서 있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없음입니다.

무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고아요

남편이 없는 과부요

임금이 없는 나그네 이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저주 중에 저주인 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을 은혜의 해를 인애와 자비의 날을 선포하실때에

그 대상이

 

이스라엘 속에서 외침인데

정작 이스라엘 중에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겁니다.

 

즉 인간의 믿음 인간의 행동 인간의 실천에서 좌우 되는 부모자식관계가 아니라

예수님 본인이 희년을 선포함에 있어서 관계성을 설명하시는데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 자에게

 

자신이 왔다 아버지가 왔다 라고 했을때에

 

정작 아무도 이 아버지를 경외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야 당연히 다들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있는데 왜 구지 예수라는 아버지를 왜 따라야 하냐 말이죠.

 

여기에 예수님은 아버지 라는 부모자식관계를 재편성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로 오신게 아니라

아들로써 오심으로써

 

이스라엘 속에서의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이스라엘의 관계를 깨뜨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관계로써

부모와 자식 개념을 새로 설정해 버리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니까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라는 저주 속에 집어넣었다는

새로운 부모자식 개념이 설정이 되니까

 

이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느냐 말이죠.

아무도 안 받아들이지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과 수제자 베드로와의 관계를

물 위를 걷는 기적의 관계로 설정하시는게 아니라

물에 빠뜨려 죽였다가 다시 3초 만에 물에서 건지시는 관계로 설정합니다.

 

베드로는 이 새로운 관계가 몸에 배여있는 법칙에 맞지 않아서

몇 번씩이나 격게 됩니다.

 

예수님 예수님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정 가시겠다면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라고 욕먹는다 말이죠

 

부모와 자식 관계를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식으로 생각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관계를 깨뜨리러 왔으니

당연히 안맞지요

인간의 행동 여부를 볼게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 여부에 새로운 관계가 설정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저주로써 맺는 관계를 새로 설정하기 위해서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막아서니까

 

너는 나를 닭 울기전에 세 번 날 부인할 것이다 라고

 

이건 섭섭해도 보통 섭섭한 소리를 하시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 정도로 밖에 나 베드로를 안 보시니까

3년 동안 따라다닌 것이 뭐가 되느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인간의 행동 여부로 본 부모자식관계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저주가 끼여들 틈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의 일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인간의 생각에 의한 부모자식관계에 흠집을 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행동을 집어넣기 위해서 흠집을 내는 거다 말이죠.

바로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느냐 즉 왜 십자가라는 흔적을 남기시느냐?

그것은 우리 몸에 이미 장착된 부모자식이라는 관계에 흠집을 내는 것은

예수님만이 마귀를 보시고 그 마귀를 상대로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귀도 안보이고 마귀를 상대로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 부모자식이라는 관계가 맞다고 본 겁니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게 봤다 말이죠.

그것을 깨뜨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줄 알았는데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 덮치니까

사랑은커녕

저주 받아 마땅한 자임을 보게 됩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제가 늘 계속해서 눈에 클로즈 업이 되면서 중요하게 보이는 곳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바로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라는 이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목사를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설명한 그대로 그 설교자의 삶 자체가 그렇게 나타날테니 말이죠.

그런데 다들 결론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빠지더라 말이죠.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것이 축복이고

예루살렘에서 사는 것이 축복이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축복인줄 알았는데

그게 저주이다는 겁니다.

부정하다는 겁니다.

 

보통 개인의 부정을 알고 그것을 전체 집단에 확대시키지 않습니다.

개인의 부정 함 거기까지 멈추죠

그런데 이것은 거꾸로입니다.

전체가 부정하니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본들 항아리 자체가 부정한 그 속에서

나 라는 개인은 당연히 따져볼 것도 없이 부정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시선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야한다는 것이고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저주로 보고 있고

 

반대로 베드로는 개인의 행동 여부로 그 십자가에 같이 따라 죽겠다고

아니면 예수님 절대로 가시면 안된다고 본 겁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우리도 같은 심정이라 백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지만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도통 이해할수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바로 이사야가 본 시선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개인의 부정이 아닌

전체의 부정

전체의 저주 상태 놓여진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종교와 모든 사상 철학사상은

실천개념으로써 목표를 달성하는 인간의 행동으로 보는 반면에

 

정작 예수님은 그 정반대의 방향 벡터로써

그것을 깨뜨리는 식으로 반대방향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꾸 우리를 고아 과부 나그네로

잃어버린자 만들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물 위를 걷는 관계가 아닌

물 아래로 빠뜨려서

잃어버려서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들어서

새롭게 되찾는 관계라는 겁니다.

 

어차피 건질꺼면 그냥 건지면 되는데

왜 구지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잃어버림을 구지 만드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15일 길 밖에 안되는 광야의 길을

왜 구지 40년 동안 뺑뺑이 돌리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즉 두려움 즉 불쌍히 여기심 또 경외함 이라는 의미는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곧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모자식관계가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게 부모자식관계인데

주님은 고집스럽게 아니다고 합니다.

 

그럼 뭔데?

주님은 물 아래로 빠뜨려서

죽여버린후 3일 만에 다시 살리시는 관계로써

그 간극으로써 부모자식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경험을 격게 된 자는
(물론 자력으로 택도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인한 경험이니 말이죠)

왜 주님께서 십자가라는 저주로 부모자식관계를 설정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두려움, 불쌍히 여기심, 경외함의 의미가 확 달라지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한후 다시 건지셔서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달라 보이는 겁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세요 라고

자신의 열심으로 다가가 친하게 지내는 노력으로 형성된 관계가 다 깨어지니까

도저히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길이 없는

포착불가능한 말도 안되는 분을 내가 그동안 막대했구나 라고

오로지 오로지 불쌍히 여겨달라고

오로지 오로지 경외를 할 수 밖에 없는 분으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보통 경외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존경심의 조건에 맞아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단 하나도 안 맞는데

오히려 그 조건을 다 날려버릴 정도로 나를 장악해 버리는 그 앞에서

그저 살려달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어마 어마하고 대단대단하신 분을

얼굴만 봐도 타 죽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못 알아봤다 라는 탄복이 절로 나게 하는 경외감이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의 만들어낸 존경심 경외감이 아닌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압박감에 저절로 허걱 거림이다는 겁니다.

 

여섯날개를 가진 천사 조차도

안 타죽을려고 몸부림 만부림 칠 정도로 감당이 불감당인 압박감이다는 거죠.

그저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심인데

타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 타죽는 것에

타죽어 마땅함을 외치는 경외함이다는 거죠.

 

? 내가 부정해서?

아닙니다.

나 뿐만 아니라

전체 다 가 부정하다는 겁니다.

그분 앞에서 정결함이란 것은 일체 없을 정도로

감히 내세울게 단 하나도 없어서

그저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만 외칠 수밖에 없는 경외함이다는 거죠.

감히 그 앞에 정결함을 내세울 꺼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이 관계가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시는 방식입니다.

내 쪽에서 효도 하겠다는 식으로 주님 쪽으로 다가감이 아니라

그런 부모자식관계를 일체 허용치 않으시고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맺어버리는 부모자식관계인데

그것이 샬롬 곧 간밤에 주의 얼굴을 뵈고도 안 타죽었다는 그 관계가

주님쪽에서 형성한 관계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맺은 관계이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맺을수 있다면 구지 십자가 지실 필요가 없다 말이죠.

그런 부모자식관계는 우상숭배입니다.

 

놀랍게도 인간 쪽에서 맺을수 있다 라고 만들어낸 것이 유대교요 곧 사단의 회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화론자와 개혁주의가 따라하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맺을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부정합니다. 나만 부정한게 아니라

이 최순실 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부정합니다 라고

 

주님의 영광 앞에 다 불타 죽어 마땅한 부정함을 보게 되는 겁니다.

저주 속에 놓여졌음을

이것이 진짜 실상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왕의 자리에서는 절대로 볼수 없는 관계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동산 중앙에 선악나무를 놔두었듯이

다윗 속에 있는 마귀가 형성한 관계를 깨뜨리고

물에 빠뜨리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쓰리 희생안타를 치게 함으로써

밧세바를 취하고(욕심이 잉태한즉)
우리아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이고(죄를 낳고)

이름없는 아이를 아무리 살리고자 기도해도 안되는(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뭘 해도 죄 밖에 안되는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윗이여

이 나라에 이런 자가 있습니다.

이 자에게 어떤 손님이 왔는데(마귀)

이 손님을 대접하고자

부자의 양을 잡아서 대접하는게 아니라

가난한 자의 딸같이 여기는 양을 빼앗아서 대접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원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당장 그 하나님의 원수를 능지처참하여라

율법대로 4배나 갚도록 하라

 

바로 이것이 인간 왕이 맺는 부모자식관계 임금백성관계이다는 겁니다.

다윗왕의 판결이 뭐가 잘못 되었나요?

뭐 하나 잘못 된 것 하나 없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전혀 이상한게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정상적이고 이상한게 없는, 문제가 전혀 없는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는 겁니다.

 

문제 없는 것이 문제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완벽한 제대로 된 판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뭐가 빠졌습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과 실천은 결국 누워서 침뱉기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심판하는 그 자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심판하는데 있어서

항상 그런 자신은 예외로 한다는 점에서

이미 법이 모순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다윗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부정하다고 보시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이 사건을 개인으로써 격는게 아닙니다.

앞으로 격게되는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미리 앞당기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 전체가 부정한데

이 부정함을 어떻게 제하게 하시느냐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관계로써 부정함을 제거하시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해체 시키고

예수님이 다시 되찾아 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스라엘을 찾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이스라엘 자체는 대대손손 자자손손 영원합니다.

계시록에 보시면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7:4, 개역)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그렇다면 예수님이 새롭게 형성한 새롭게 재설정한 부모자식관계인

불쌍히 여기심과 두려움(2:12)과 경외함인

바로 십자가의 피로 맺은 관계로써

 

다윗은 의인으로써가 아니라

죄인으로써

불쌍히 여겨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인 다윗을

예수님의 원수인 마귀의 손에서 건지시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 받은 마귀보란 듯이 펼쳐진

원수(다윗)를 원수(마귀)의 손에서 건지신 원수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마리아인을 바리새인 손에서 건지시는 원수사랑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유대인은 거리낌이 되는 겁니다.

헬라 이방인에게는 미련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죄인 중의 괴수인 막사는 우리에게는

십자가는 영광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송축 안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송축 노래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널리 널리 전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103:1, 개역)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103:2, 개역)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3, 개역)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편 103편을 읽다보니 어떤 느낌인고 하니

죄악을 다 없애버린다는 의미라기 보다

허물을 다 덮어버린다는 의미로 보였습니다.

 

이 차이가 뭔고 하니

양자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들만이 부를수 있는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수 있는 관계를

내가 아닌, 인간 쪽에서가 아닌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하시는데 있어서

죄가 없는게 아니라

죄를 아예 보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저들 바리새인 저들 유대인들처럼 묻거나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의인이 되어서 송축하는 것 보다

죄인으로써 주님의 송축하는 것이

더 나은 두려움이요

더 나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이고

더 나은 경외 이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더 나은?

번제와 제사 보다 더 나은

의인의 번제와 제사 보다 더 나은

 

인애와 자비를 베푸시는 주의 이름에 대한 송축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 시골 구석에서 벌어진

기생 둘의 아이가 깔려 죽은 사건이

아무도 쳐다 볼 필요가 없는

기생 천하디 천한 부정한 자의 억울한 사건이

그 어떤 누구의 지혜도 풀수 없는 사건이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가서

 

솔로몬 왕의 지혜를 만방에 자랑하게 된다 말이죠.

십자가의 피 지혜를 우주에 외치는 겁니다.

온 천하만국은 이 지혜를 노래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를 두 조각 내라 라는

그 심판에

그 저주에

반응하는 자는 죽음에 처한 자로써 불쌍히 여겨달라고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두려움으로 벌벌 떨지만

 

마귀는 박수를 치면서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겁니다.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마귀의 박수

왕의 판결에 아멘 하는 그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왕의 판결에 반발하는 그 인애와 자비를 원한다 말이죠.

 

다윗은 왕이 아닌

의인이 아닌

그 죄인의 자리에서

인애와 자비를 구하고

그 저주에 뛰어드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기뻐 노래하면서 온천하만국에 이 십자가의 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보다 먼저 앞서서 봤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은 아무리 봐도

다윗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를 노래했다고 안 보이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저 하나님의 원수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자신임을 어떻게 알수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자만이 이런 꾀?(저 세리 곧 하나님의 원수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 감사삽니다.)에 빠지지 않는 겁니다.

 

마귀는 이것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뭘 해도 하나님의 원수 같은 저 세리의 삶은 절대로 살지 않기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정작 다윗은 뭘 해도 하나님의 원수임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원수인 마귀가 덮썩 물게 되는 미끼가 되는 거죠.

 

이것은 더더욱 다윗을 더욱더 불쌍히 여겨달라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바라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로 만드시는

십자가의 지혜였던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우리 예수쟁이는 기뻐 자랑하는 즐거움이 되는 겁니다.

 

오죽하면 모세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주여 죽어주세요

별세해 주세요(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했냐 말이죠.

그것을 다윗은 모세 한 참 뒤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모세 보다 먼저 노래했습니다.

! 순서는 중요하지 않고요

모세가 그 정도로 이 십자가의 죽음에 참예되어야만 할 자로써

주님이 일으키셨다는 거죠.

얼마나 사랑받았으면

율법 외에 한 의로 불쌍히 여김을 받았냐 말이죠.

 

얼마나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싶었으면

이 죄인 다윗을 부르러 오셨을까요?

다윗은 의인이 되면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어야만 주님이 부르시는 겁니다.

 

? 의인은 안되나요?

인간의 필요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흘리신 피 자랑 때문에

의인은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만 필요하신 겁니다.

 

의인은 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지

 

그러나 죄인은 자기 죄를 자랑하는게 아니라

자기 죄를 덮어버리는 그 피 담요를 자랑하는 겁니다.

 

다윗의 노래는 이 인애와 자비 라는 담요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자랑합니다.(인간 쪽에서 불가능한 주님 쪽에서 다 이루신)

그러나 마귀는 번제와 제사를 자랑합니다.(인간 쪽에서 실천가능한)

 

이 두 노선이 천국과 지옥으로 각각 영원히 자자손손 영원히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물론 자손은 다윗의 뿌리와 다윗의 가문에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걸 또 오해를 해서 난 다윗의 가문이 아닌데요?

역사로 자꾸 본다 말이죠.

죄인이면 모조리 다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문제는 죄인에게 발라줄 피를 아무리 준비해 놓아도

죄인을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 라는 거죠.

최순실 보다 더 나쁜 죄인이 없어요.

박그네 보다 더 악한 죄인을 찾을 수가 없어요.

다들 그런 원수 잡겠다고 설쳐대는 바리새인 밖에 없다 말이죠.
주님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바로 주님의 또렷한 십자가의 피입니다.

이 죄인 다윗만을 대대손손 자자손손 대를 잇게 하는 천국에 들어갈 자 라는 겁니다.

딴 사람은 안 됩니다.

 

 

찬양합시다

 

아버지여 이 죄인을 용납하여 주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소서

아버지를 떠나 산 지 벌써 오래 되었고

험한 길에 곤한 몸이 이제 돌아 옵니다

 

전에 하던 일을 애통하게 여기고

겸손하게 엎드려서 용서하심 빕니다

은혜 감당 못하오나 회개하는 영혼과

나의 약한 육신까지 감히 드리옵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려 주님 죽으셨으니

그 공로를 의지하여 주만 의지합니다

아버지여 용납하사 나를 품어 주시고

주의 사랑 품 안에서 길이 살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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