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치 않는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의 행음을 쫏는 자 (계 2:18-23)

 


(계 2:18, 개역)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계 2:19, 개역)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 2:20, 개역)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 2:21, 개역)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계 2:22, 개역)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 2:23, 개역)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오늘날 교회사람들을 보면은 대부분 최순실과 같다 말이죠.

최순실이가 교회주보에 나온대로 헌금봉투에 적은 그 내용들처럼

남의 것 빼앗아서 복받게 해 주심에 대한 감사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자기에게 복 된다 싶으면 무당이든 예수든 부처든 다 찾습니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사단의 회 유대인과 너무 닮았다 말이죠.

자 이런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 모습이 아니냐 말이죠.

 

[검은 유대인]이였던가요 작년에 에디오피아 계의 유대인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차별에 견디지 못해서 한사건으로 인해 폭발했는데

언제는 이스라엘이 피해자라고 유럽으로 부터의 죄책감을 유발케 하더니

이제는 자신들이 가해자로 변해서 소수자를 핍박하더라 말이죠.
팔레스타인의 인구가 급속도로 올라가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에디오피아 내전으로 인해 만명 넘게 이스라엘로 이주시켜놓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국외로 홍보를 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는 온갖 핍박을 다 해버리는 겁니다. 사마리아를 삥 둘러 가는 식 처럼 말이죠.
(글로벌 정보쇼 세계인.E11.150523 를 보고서)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875366


소위 소수자 운동을 펼치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튼 무슨 운동 펼치는 자들은 시이소처럼 한 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죄 뿐이기에

한 쪽을 주장한다고 해서 다른 한 쪽이 감추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곧 대립물은 곧 일치물이다는 거죠.

 

아무튼 예수 믿기 라는 운동 도 결국은 예수를 우상화 할 뿐이다는 겁니다.

물론 조금 어릴적부터 교육화 된자들은 무당 부처 다 제거해서

예수로만 복을 찾습니다.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 처럼 말이죠.

그러나 종교 용어만 달리 했을 뿐이지 사고방식은 똑같다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사고는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인데 그것이 오늘 이세벨이 믿는 바알입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 대부분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같은
그들 역시나 예수를 통해서 힘을 추구하는 별반 다를바 없는 모습입니다.

힘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쪽의 힘이라고 보시면 안되고

선해질수 있는 힘을 달라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선함도 나 보다 선한자가 나타나면 졸지에 시기심으로 바뀌는 법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어느 정도로 선해야 선함인지 그 기준이 결국 없는 겁니다.

그때 그때 달라요


자 그렇기 때문에 교회도 목사도 교인들도 모조리 힘을 달라는 식으로

예수를 찾기는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예수를 우상화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행음이라고 합니다.

우상을 신약에서는 탐욕이라고 합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이다고

자기를 위한 예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아무도 힘 빼주세요 라고 기도 안하니까 말입니다.

지금 아 이것 틀렸구나 해서 힘 빼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안하니까 그게 옳은거다고 그것이 또 힘이 된다고 여긴다 말이죠.

그냥 생긴대로 사시면 됩니다.)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특히 목사 사모들 그리고 장로 권사

대부분 돈에 환장한 자들입니다.

 

돈이 힘이 되고

돈이 신앙이 되고

돈이 생존을 주고

돈이 개혁도 준다 말이죠.

돈 없으면 개혁도 못한다는 식입니다.

힘을 모아야

즉 광화문에 150만명 모아야 개혁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딸랑 한 명으로는 안된다는 식이지요.

 

150만명 모아도 안되는 판국에 자꾸 짤라내서 300명의 군사를 왜 만드실까요?

세 번씩이나 3차 탈락시켜서 300명만 모으시는 겁니다.

 

만약 돈이 힘을 빼게 하고

돈이 믿음을 훼방하고

돈이 죽음을 주고

돈이 원수 철천지 사마리아인으로 만든다면 누가 돈을 좋아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돈은 그렇게 절대 못하지만

불의한 재물 십자가는 그렇게 합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는 반드시 그렇게 합니다.

 

십자가는 오히려 힘을 빼버리게 하고

십자가는 인간의 믿음을 받지도 않고 물론 행함도 안 받고요

십자가는 죽음을 주고

십자가는 철천지 원수 사마리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힘을 쫏는자를 이세벨의 행음을 쫏는 자들이라고 나옵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안 그러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방금 교회 다니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세상은 더 하지요. 다들 도찐 개찐입니다.

 

마치 누가 누가 돈에 더 환장해 미친 자인가를 내기 하듯이

누가 누가 잘하나

기독교 불교 종교 할 것 없이 달음박질 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섬유산업이 발달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섬유산업(염색.자주빛)이면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패션 산업의 메카인거죠,

 

(16:14, 개역)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그러니 가장 유행하는 것이 장사가 잘되니까 자본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는 겁니다.

이 돈 욕심에서 벗어날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환경이 이미 그런데 말이죠.

 

솔로몬이 입은 영광이 넘쳐나는 환경인데? 누가 마다 하겠냐 말이죠.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2:27, 새번역)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백합꽃을 생각하여 보아라'

 

특히 목사들은 교회 욕심을 평생 끊을수 없습니다. 마약이요 중독입니다.

교회를 포기 못해요.

사업성공 해야하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듯이 목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부흥시켜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 잡혀 있다 말이죠.

 

자 이런 환경 속에서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의 팔이 나타났습니다.

깨끗한 의인이라서 나타난게 아니라

죄인이라서 주의 오른팔이 나타난 겁니다.

마치 사단의 왕좌에 투입된 교회인 버가모 교회와 같은 양상입니다.

주의 오른팔로 붙잡은바 되었습니다. 일곱교회 모두 말이죠.

 

저런 행동을 안해서가 아니라

저런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돈 사랑에 환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주의 오른팔을 붙든적이 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붙잡아 버리는 겁니다.

 

즉 사마리아인을, 철천지 원수를 억수로 챙기는 예수님이 나타난 겁니다.

 

그렇다면 동시적으로 주의 발등상에 나타나는 원수의 모습도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의 행음으로 원수의 모습이 보충물로서 등장합니다.

이세벨은 바알종교를 믿는 자입니다.

바알은 곧 남근숭배라는 힘을 믿는 자들이 만든 우상숭배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알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도 힘을 쫏습니다. 돈을 쫏고 있습니다.

돈에 다들 환장한 목사 장로 교인들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도 바알종교를 따른다는 겁니다.

실제로 구약 때에 이스라엘이 그랬지요 바알화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내 왕비가 이세벨인데 바알문화을 들고 왔는데

얼마나 허술했으면 이 문화가 대 히트를 칩니다.

 

누가 돈 되는 인간인지 돈 냄새를 기가막히게 잘 맡는 개코들입니다.

하루살이는 빨리 걸러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약대(낙타, 고급승용차)를 삼키키 위해서 말이죠. 23:24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4, 개역) (없음)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7, 개역)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23:18, 개역)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9, 개역)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3:20, 개역)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3:21, 개역)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3:22, 개역)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3:2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개역)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곧 선지자와 파송된 자 곧 찬양자는 이 이세벨과 같은 우상숭배자와 늘 부딧히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부딧히게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속에 있던 자들을 빼낼때에 그들은 화를 냅니다.

출애굽이 그런식입니다.

자기들의 노예가 있어야 하는데 없어지면 그 노동을 자기들이 해야하는데
(시이소처럼 자유를 누릴려면 상대적으로 반대편은 희생하는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놓아주겠냐 말이죠. 절대로 안 놓아줍니다.

자유를 주면 자기들의 자유가 빼앗겨 사라지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절대로 노예를 놓아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케 함을 로마가 아닌 유대인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희년을 선포하니

과연 유대인이 그런 희년 선포를 하시는 예수님을 가만히 놓아줄 리가 있을까요?)

보통 범죄자가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발뺌 할려고 할 때

범죄자는 다시는 그런 범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무사히 넘어가길 바랍니다만

 

정작 그런 다짐과 무관하게 범죄 자체가 그 범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죄가 사람의 주인이기 때문에

 

다시 재범을 할 수 밖에 없는 습관화 된 몸(육체)인 것을 알고서

미끼를 던지는 겁니다.

 

끊을수가 없어요 중독 되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손가락 짤라도

결국 발가락으로 화투를 치니까 말입니다.

 

과연 선지자를 또 안 죽이나 보자

과연 또 지혜 있는 자를 안 죽이나 보자

라고 주님 쪽에서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막 죽어 나가는 겁니다.

이미 그들에게 덮쳐진 중독이니까 말입니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누가 더 과격합니까?

주님 쪽입니까? 마귀 쪽입니까?

마귀는 주인공 예수님을 돋보이도록 등장하는 동네깡패 171로 싸워 지는 그 17명에 해당되는 부정적인 도구입니다. 빛을 더욱더 빛 답게 돋보이도록 동원이 되는 엑스트라다입니다.

그러니 철처한 복음의 보충물입니다.

 

자 이렇게 주의 오른팔에 붙잡힌 바 된 교회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주의 발등상에 잡힌 원수까지도 주님께서는 부각시키는 겁니다.

주인공은 교회도 아니요 마귀 원수도 아닌 주의 오른팔 이다 말이죠.

이 주의 오른팔의 자작극입니다.

 

과연 숨은 그 놈 마귀가, 과연 안 나타나고 배기겠느냐 라고 미끼를 자꾸 던지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에 붙잡힌 두아디라 교회는 회개를 해서 참고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미 회개를 주님쪽에서 다 했고

이미 넉넉히 이기신 주님이

일방적으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주의 오른팔이 붙잡은바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저들 이세벨의 행음을 쫏는 자들과의 차이성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주여 저는 저 이세벨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들 이세벨처럼 행음을 쫏지 않고

토색치 않고

회개를 이레에 두 번 아니 매일 매일 회개했으며

참고 이기기를 이레에 두 번 아니 매일 매일 이기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자들이 두아디라 교회가 아니라

 

두아디라 교회는 뭘해도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미래완료가 끌어당김만

주님의 넉넉히 이기심만이 끌어당겨주시길

주님의 회개 곧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만이 자기를 끌어당겨주시길 바라는

그저 개요 이방인이요 세리 매국노 친일파요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주님의 인애와 자비만을 바라는 자가 바로 회개하는 두아디라 교회이다는 겁니다.

 

다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 간판으로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책망을 많이 들으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저런 환경이 두아디라 교회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우리가 사는 이 환경 자체가 이미 두아디라 교회가 처해있는 환경입니까?

 

그러니 뭘 해도 죄 밖에 없으니까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승리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게 아니라

이미 승리의 삶이 누리고 있는 내가 도리어 용서를 받아야 하는 770번의 용서의 세계 속에 들어 와 있다는 것을 누리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 누림이 사단의 왕좌에 투입되는 빌라모 교회이든

이세벨의 행음이 내부 속에서 넘쳐나는 두아디라 교회이든

 

이미 승리했기에

이미 이겼기에

이미 770번의 용서를 받아야 할 관계 곧 주의 오른팔이 붙잡음 속에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고 책망받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770번을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인 것을 모르게 된다면

 

사단의 깊은 것 곧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또는 십이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이세벨 종교의 사마리아인처럼

또는 저 세리 돈 때문에 민족과 하나님을 팔아먹은 저 친일파처럼 토색치 않게 해 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이 모습이 바로 사단의 깊은 것에 빠진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예수님이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표적에 의해서 나타난 다는 거죠.

 

그렇다면 상대적인 예수님의 깊은 것은 뭡니까?

바로 방금 언급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십자가입니다.

 

저들 악한 세대는 기적을 요구할 때 사단의 깊은 것을 요구할때에

예수님은 이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깊은 것을 곧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고자

이런 환경에

이런 이세벨의 행음이 넘쳐나는 바알을 쫏는 환경 속에

다들 바알을 쫏고 애굽을 쫏는 이 환경 속에서

우리 또한 거기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빼내셔서

구원사건을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의 부요함을 넘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오른팔의 능력을 과시하시는 겁니다.

 

마귀는 이미 두아디라 교회가 힘을 쫏아 모조리 바알화 애굽화 된 입장에서

이미 유대인을 다 장악해서 메시아의 조건을 3가지 달아놓은 입장에서

 

예수 너가 백날 설쳐본들 구원 못 시킬 것이다 장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역할이니까 말이죠.

 

우리는 포로 되었고

갇혔고 억눌려서 빠져나올수 없는 입장에서
(어제 글에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만 강조했는데
역시나 중요한 것이 땅에서도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도록 하시는 이 자유)

주님이 자신의 오른팔로 어떻게 끄집어 내시는지

이미 완료된 입장에서 다시 그 감격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완료된 입장에서 다시 책망을 받는 겁니다.

 

얼마나 이 용서의 사랑이 넘치십니까?

맞습니다. 제가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진 자이군요 라고

하나님의 깊은 것 곧 십자가의 부요함을 또 누리게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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