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요하나 벌거벗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계 3:14-22)

똑 똑!! 넌 문 열 필요 없단다 ~~ ♡ ♡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3:14, 개역)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개역)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개역)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개역)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개역)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개역)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1, 개역)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란 장소 개념도 아니요 주님 본인이 하나의 관계성으로써
자신의 피 흘리심으로 맺은 관계입니다.
자신의 머리되심과 연관되어서 자신의 몸을 자기가 관리하시는 차원에서

책망하십니다.

즉 이 책망이란 사랑 때문입니다
.

그러니 책망을 피할 생각하지 말라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종교는 곧 믿음이 아닌 우상숭배는 이 책망 자체를 받지 않고자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지요.

처음 교회로 삼으신 그런 취지의 교회가 아니다는 겁니다.

교회가 처음과 똑같이 일관성 있게 가면 참좋은데

뭔가 개입이 되어서 교회가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즉 처음모습이 아니라 두 개의 모습이다는 것은 당연히 사랑이 개입해서 처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해서 책망하는 겁니다.

그러니 책망을 두려워 할게 아니라

아 이렇게도 사랑하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교회의 모습이고

반대로 가짜 교회는 그 책망받을만한 것을 미리 자기들이 책망받지 않고자 자신들의 노력을 가미시키는 입장에서 처음모습의 교회가 아니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개혁적이고 가장 성화적인 교회들입니다. 곧 가짜 교회입니다.

 

주님이 책망할 필요 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갖춘다 말이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게 해 주시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게 해 주시고 말이죠.

 

그런데 원래 교회가 처음사랑의 하나이어야 하는데

둘로 나누어 진다는 것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이 의도적으로 두 개로 나누는 겁니다.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두 언약을 두 여자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땅의 예루살렘 곧 육적 교회 조직이죠.

또 하나는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자유하는 성도 입니다.

 

바로 앞의 글에서 다윗이 시편 108편을 외칠때에

두 개의 예루살렘 두 개의 이스라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말이죠.

하나는 땅의 이스라엘 곧 육적 이스라엘, 신약 표현으로 하면 손할례당, 사단의 회, 유대인 모임

또 하나는 하늘의 이스라엘 곧 영적 새이스라엘, 신약표현으로 하면 마음판의 할례자들, 무할례자들 말이죠.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행함이냐 믿음이냐 로 표현하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철학자들이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이냐 라고 공격하는데 있어서

신학자들이 방어를 할줄 모르는 겁니다.

바보 같이 방어할게 아니라 공격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저들 철학자들의 말이 맞다고 여기는 겁니다.


맞기는 뭘 맞아요

도리어 공격해야지요

저들은 왜 하나가 아니라 둘이냐 라는 모순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왜 이 모순이 맞지 않냐고 공격할 줄 모르냐 말이죠.

사랑 자체가 모순인데

물론 저들이 말하는 모순은 앞 뒤가 안 맞다 라는 개념인데


우리는 앞 뒤가 안 맞아야 된다 말이죠


방금 제가 교회가 처음의 모습이 아니라 둘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중간에 뭔가 뒤틀려서 엉뚱한 것이 개입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두 개의 모습이 되니까 처음의 모습이 아닌 것에서 모순이 되고

이 모순을 철학자들이 공격하고

그 공격에 반박을 못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니까 오히려 이 모순이 사랑인데 우짭니까?

그러면 저들이 말한 일관성이라는 하나 됨이 뭔지를

과연 기준이 되는 하나가 뭔지를 이론이 아닌 실제성을 가지고 오라 말이죠.

그 실상이 된 것을 단 한 개라도 있으면 가지고 와 보라 말이죠.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들도 없어요.

막연하기 짝이 없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오늘날 교회들이 휘들려서 하나가 될려고 하다가

인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려고 하다가

도리어 사기꾼들로 들통이 나니까

철학자 마귀들에게에 놀아나고 있다는 거죠.

 

저번에 말했던 선이 곧 악이라는 것을 모른다 말이죠.

하나가 오히려 둘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로 보는게 아니라

저들처럼 선은 선으로 봐야 하고 악은 악으로 봐야 한다는 그렇게 둘로 보는게 아니라

 

한세트로 본다 말이죠.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인 두 언약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둘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곧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하나와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보냈다는 또 하나의 사랑

이 두 사랑이 한 세트를 이루어야 한다 말이죠.

 

 

그러니 앞의 시편 108편에서도 구원을 둘로 나눕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구원장치들 곧 사람의 구원이 헛되도다 라는 헛된구원이 반드시 하나 있어야 하고
그 차이로 그 헛된 구원장치를 깨뜨리는 또 하나의 구원이 반드시 있어서

한 세트를 이루는 겁니다.


반드시 인간의 헛된 구원을 깨뜨리는 구원이 곧 두개가 있어야 한다 말이죠.

즉 전혀 구원자 같아 보이지 않아서 싫어버린바 된 구원

건축자들에게 버림받는 돌로써의 구원이 머릿돌이 되는 구원

 

자기들의 구원장치인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구원장치)이 아닌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머릿돌 주가 되는 구원이 따로 있다 말이죠.

이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구원은 인간들이 싫어해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말이죠.

니가 무슨 구원자이고 자기도 자기를 구원 못하는 판국에

뭐어~~~ 남을 구원해

괜히 로마병사들이 놀려먹은게 아니다 말이죠.

우리들 모두가 놀려먹은 겁니다.

그정도로 십자가 라는 구원은 시답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구원답다고 본다 말이죠.

그것이 애굽의 피라미드 아닙니까?

영원히 사는 부활사상

자본주의든 민주주의든 모든 것이 다 구원장치로써 작동하는 기계이다 말이죠.

그것을 깨뜨려 버리지 못하는 복음은 그게 과연 복음이냐 말이죠.

인간의 구원을 헛되게 만들지 못하는 구원은 가짜 구원이다 말이죠.

 

오늘 일곱교회의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언급하는데 있어서도

앞의 교회들처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두 개로 쪼개어서

앞의 책망 중에 산 자 같으나 실상은 죽은자 라고 했듯이

부요한 것 같으나 실상은 벌거벗었으니

흰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라는 책망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미지근하지 않도록 열심을 내라고

엉뚱하게 교회에 대한 열심을 내라고 사기를 치는데 사용되고 있다 말이죠.

 

그런 열심이 도리어 주님을 삼키면 어떻게 하실려고요

주님을 삼키게 되더라도 이 열심이 깨어지게 하는 또 다른 외부의 열심을 그 뜨거운 열심을 보라 라는 겁니다. 그것이 어찌할꼬 회개케 만드는 열심 곧 주님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곧 나의 사랑 나의 열심히 순 엉터리요 헛되다를 들통내는 열심이다는 겁니다.

 

열심을 내지 말라가 아니라 헛되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주님의 열심히 따로 있다는 것을 기뻐하자 말이죠.

 

이것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식의

미래완료를 미리앞당겨서 누리고 과거 곧 죄를 고치는 회개입니다.

열심 따로 있고 회개 따로 있고 그런게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하나의 종합선물세트처럼 와르르 쏟아져서

그 피에 흠뻑 발리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엉터리 헛됨이 들통나게 하심으로

뭘 해도 다 죄인 것을

뭘 해도 다 용서로 바꾸시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열심으로 뜨겁게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쫏아내었다고 이 보다 더한 열심히 어디있고 이보다 뜨거움이 어디 있겠냐 말이죠.

그러나 그것을 기뻐하지 말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금 자신들의 열심으로 부요함을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뜨겁게 일했겠냐 말이죠.

그런데 정반대로 책망받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반대죠. 가난한데 부요하다고 합니다.

심심하면 핍박받고 고난 받고 있는데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하신다 말이죠.

(계 2:9, 개역)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미지근 하냐고

즉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왜 뜨겁게 기뻐하지 않냐고?

왜 흰옷으로 기뻐하지 않느냐고

왜 발가벗었냐고

왜 엉뚱한 옷으로 가득 치장을 했냐 라고

아무리 부요한 옷으로 온 몸을 감싸면서 구원장치로 도배를 해도

내가 보기에는 넌 벌거벗었구나 라는 겁니다.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자 로 구나 라고 하신 사데교회에 대한 책망처럼 말이죠.

(계 3:1, 개역)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왜 헛된 것을 쫏느냐 헛된 교훈을 쫏느냐

실상을 봐라 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낙망하고 또 기뻐하고 그런 것은 다 허구다

왜 최순실 게이트로 낙망하고 촛불시위를 하고

왜 헛것을 심각하게 보느냐

실상은 전혀 심각한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쳐다봐야할 진짜 실상은 창세전 생명책이고, 흰옷인데 말이다 라고 책망듣는다 말이죠.

 

그것이 오늘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3:14, 개역)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이 창조의 근본에 맞지 않는자는 내치신다 토해버리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이 창조의 근본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고

반대로 이 창조의 근본이 아닌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인데

이것이 이 세대 곧 세대마다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모습으로써의 인간의 본성이다는 겁니다.

 

뭔가 푯대가 정해져 있지 않고

이리 바람 불면 이리로 흔들리고

저리 바람 불면 저리로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미지근함이다는 거죠.

 

남이 하니까 그냥 따라합니다.

세월호 때에 촛불집회 300만명 왜 안 모였을까요?

아주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안 당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낸 세금이 엉뚱하게 쓰이는 내가 격게 되는 문제에 부딧힐때는

추워 얼어죽어도 나가서 뜨겁게 온도를 높이겠다는 겁니다.

그때 갑자기 미지근함으로 모인 자들끼리 이웃이 됩니다.

이웃이 졸지에 지 마음대로의 기준에 의해서 형성이 된다 말이죠.

남의 일이 아니거든요.

최순실이 하나가 아니라

최순실들만 모여서 촛불집회 한다 말이죠.

되도않는 미지근한 촛불로써 말이죠.

이것이 미지근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방금 세월호 힙합이라고 해서 한번 들어봤는데

다들 울더라 말이죠.

생각난 것이

너의 너 자식을 위해 울라고

남들이 울어주는 그 모습을 거부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겁니다.

왜 일까요? 너와 너의 자식을 위해 울게 만들려고

뜨겁게 만들려고

 

아무도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때에

울지 않았습니다.

목놓아 울지 않았어요

그 세월호 부모들이 제발 살아오라고 울부짖을때에

그들 부모 조차 예수님이 죽을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안우는 것은 양반이지요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다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창조의 근본을 모르는 미지근함입니다.

아무리 뜨겁게 울었다고 해도

미지근함입니다.

 

왜 이 미지근함을 기분으로 사십니까?

 

세월호 부모의 뜨거운 눈물 조차도 미지근함으로 보는 판국에

목사들은 자기들 교회에 열심을 안낸다고

이 덥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또 협박공갈 칩니다.

그 역시 창조의 근본을 모르는 미지근함입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이런 창조의 근본을 모르고

 

엉뚱하게 미지근한 것을 기쁨으로 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부요하나 실상은 벌거벗은 자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창세전에 생명책이 기록된 뜨거운 열심인 십자가의 용서를 쳐다 안보고

미지근한 것들로 기쁨으로 삼고 살아가지 말라 라는 겁니다.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인간의 본성대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이 인간의 본성이 사람의 구원이 헛됨처럼

그런 것을 기쁨으로 그런 것을 구원장치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고

반드시 토해서 내쳐버리겠다는 겁니다.

 

아들은 위한 혼인잔치를 베푸는 임금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토해서 내쳐버리지 않습니까?

 

(22:3, 개역)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개역)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22:6, 개역)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저마다 자기 일이 있어서 바쁘다 말이죠.

남의 결혼식에 왜 가냐 말이죠.

노아의 때처럼 자기 결혼식이 더 중요한데 왜 남의 결혼식에 왜 가냐 말이죠.

저 마다의 자기 일이 있다 말이죠.

이것이 미지근함입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일을 생각지 않는다 말이죠.

그래서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된다고 한다 말이죠.

사단아 물러가라 말이죠.

 

겨우 결혼식에 참석해도 예복을 입지 않네 그려?

그저 인간본성의 옷만 고집할 뿐이지

흰옷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옷을 원치도 않고

입을려고도 안한다 말이죠.

 

바로 이런 인간의 본성을 창조의 근본으로 돌이키고자

예수님은 창조의 근본에 일체 양보함이 없이

토해서 내쳐버리시는 겁니다.

 

(22:7, 개역)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개역)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22:9, 개역)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22:10, 개역)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말을 들은 오늘날로 치면 교회 목사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하더라 말이죠.

이게 진짜 복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교회교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성도를 죽일려고 할꺼다 말이죠.

? 미지근하기에

인간의 본성을 건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의 근본

곧 창세전에 예비된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때문에 화를 내며 죽일려는 겁니다.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2:1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22:17, 개역)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22:18, 개역)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22:19, 개역)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2:20,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2:21, 개역)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22,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자 그렇기 때문에

시편 108편은 다윗이 누구에게 원수라고 하는 겁니까?

거기서 빼내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 지긋지긋한 인간구원의 장치라는 지옥에서 빼내주세요 라고 말이죠.

여러분은 교회라는 인간 구원 장치에서 빨리 건져주세요 라고 기도하신적 있냐 말이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택함을 받은 자들은 늘 이렇게

교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말이죠.

 

어떻게 하면 교회는 예수님을 죽일까 라고 협력하고 있다 말이죠.

 

그러니 땅의 예루살렘인 하갈 종 여자와

하늘의 예루살렘인 자유하는 여자 사라는

같은 교회 속에서 두 패로 나누어지면서

복음에 의해 배치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두 모습의 야누스적인 교회가 아닌

하나의 모습인 교회의 모습이라면

가짜죠

늘 수시로 교회 속에서는 이런 사건들이

즉 두 언약의 부딧힘이 발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곧 창조의 근본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 때문에도 서로 싸움 붙도록 되어 있지요.

마치 로마와 유대인처럼 하나는 독재유지이고

또 하나는 유대독립을 위한 투쟁 곧 독재로 부터의 싸움 말이죠.

그러나 이 둘 조차도 미지근함입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이 로마를 물리쳤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니 이름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것은 창조의 근본이 아니무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미지근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성령은 철저하게 단절적입니까?

 

누가 성령을 개방적이라고 외치냐 말이죠? 성령이 미지근 하던가요?

십자가에 대해서 양보하던가요?

교회와 양립불가인 것이 십자가 이다 말이죠.

 

토해내쳐야 한다 말이죠.

 

또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하도 하도 사기를 쳐는 목사들이 말하는 내용이 뭔고 하니

 

(3:19, 개역)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개역)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왜 문 밖에서 예수님이 두드리고 계시는데 왜 문을 열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개그맨 누구세요? 이름 뭐더라 갑자기 까먹었는데

아 김국진 보다 못한 사기꾼 목사들입니다.


똑똑똑 누구세요?

넌 두드릴 필요 없단다


캬 ~~~~


신랑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만을 쳐다보는 것이 열심 입니다.

뜨거움 입니다.

그런데 미지근함 이란 자기 쪽에서 하니까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밝히 보이질 않아요

그 정도로 미숙하기 짝이 없는 일처리 입니다.

깔끔하게 제대로 완료한 것은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러니 신랑만 쳐다 보라 말이죠.


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단다 ~~~~

신랑이 다 알아서 한다 말이죠.

그야말로 불타는 사랑입니다.

미지근할 틈이 없어요 없어!



유명한 그림 있잖아요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 그림 말이죠.






(그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그림이 있길래 ~~ 이 얼마나 잘못된 해석을 인간본성대로 즉 미지근한 해석을 했냐 말이죠)
 

그런데 그 그림 놀랍게도 틀렸습니다.

문 고리가 안이 아니라 밖에 있습니다.
안에는 자물쇠 자체를 채울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즉 세상의 미지근함으로 해석한 문은 손잡이가 안에서 열고 닫도록 되어 있는

안에서 열쇠 키를 쥐고 있지만

정작 이 말씀은 문 바깥에서 열쇠 키를 열고 닫을수 있어요


(이 그림도 수정해야 하는데 반대로 우리가 놀라면서 문 열어준적 없는데요? 어떻게 들어왔나요 라고
마음대로 문을 벌컥 벌컥 열어재키는 것에 놀라는 우리 모습이거나? 혹시 도둑놈 아니냐 라고 반문하는 모습이거나????)


 

그럼 왜 이렇게 말씀하시느냐?
뒤짚어 씌우기 위해서 입니다. 편파해석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


믿음은 항상 거꾸로 입니다. 인간본성을 뒤집어 버린다 말이죠.
예수님이 자동문으로 인해 놀라는게 아니라
우리가 저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동문에 의해서 우리가 놀라는 겁니다.


결국 왜 너는 문을 열어주지 않느냐 라는 식의 해석은 불교입니다.

부처나 예수나 구분이 없이 모든 종교는 그런식의 해석을 하는 겁니다.

철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 하기 나름이다고

이것을 공격할 줄 알아야 해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겼는데 토 토 토 달고 있으니
이 승리를 마음껏 누리기 때문에 약올리기 위해서 말이죠.


어떻게?

라면광고 선전에 나오던데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예수님 살과 피(창조의 근본,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사먹지 ~~~

너가 아무리 문 열어줘 봐라! 내가 문으로 들어가나 ~~~

그럼 왜 이렇게 말씀하시느냐?
관계성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창조의 근본이고
그 나머지는 인간의 본성으로 해석한 겁니다.

불교란 결국 관심사가 나 입니다. 나는 나 예요!!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요요요 청바지 입고서 ~~~

내가 나를 연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아로 까지 나아가는 겁니다.
자아도 초월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되더라 말이죠. 
지금 불교는 무자아를 추구한다 말이죠 초월하는 자아
곧 기관없는 신체, 초인, 신 인듯 신 아닌 신과 같은 너 ~~~~
정상 인듯 정상 아닌 정상 같은 너
어 아닌데 원래 뭐였더라
비정상회x을 너무 봤나 ㅋㅋㅋ
아 내꺼 인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관계성인에 그 원수를 사랑하는 이 십자가의 용서라는 관계에 관심이 없으니까

불교는 자기 하기 나름 즉 모든 초등학문(인간 본성)은 다 이런 식입니다.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이고요.


불교는 결국 그래서 나온 것이 교리 플러스 실천입니다
. 모든 종교가 이런 식입니다.

교리와 실천이 없으면 그들은 나 가 곧 자아가 형성이 안되는

혼란에 빠진다 말이죠. 

자아를 형성하고 그 자아를 초월해 버리고자 나를 내가 연구하는 겁니다.


지젝이라는 철학자가 불교를 이렇게 비판해 놓고서는

역시나 불교와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모든 관심사를 나 곧 인간에게 두더라 말이죠.
내가 나를 연구 하는 겁니다.
결국 구원은 인간 하기 나름이다 라는 식입니다.
구원자들에게서 구원을 구출하는 나 에 대한 관심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문을 내가 열어주면 예수님이 바깥에서 문 두드리다가 덜커덕 들어오고

내가 문 열어주지 않으면 예수님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절대로 못 들어온다 말이죠.


세상에 이런 엉터리 해석이 어디있냐 말이죠.
그런데 한국교회 아니 모든 교회가 이런 식의 해석으로 장사합니다.
그래야 전도가 된다 말이죠.
이게 땅의 예루살렘의 특징 곧 인간의 본성입니다.

창조의 근본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게 아닌데
저런 것으로 자기존재성에 가치를 두고 있더라 말이죠. 

이게 불교식 해석입니다.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문을 열어주고 안열어주고의 권한이 애초부터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어디!! 똑똑똑 넌 문 두드릴 필요 없단다 뿐이겠어요???

넌 문 열 필요 없단다 이다 말이죠.

두드릴 자격도 애초부터 없을 뿐만 아니라 문 열어줄 자격도 애초부터 없어요.
인간은 문고리가 없어요.
외부의 인물이 열어주냐를 보여주는 증상물일 뿐입니다.
마귀가 열면 마귀자식이고
예수님이 열면 예수님 자녀이고
이런 마귀자식인 우리를 십자가 전쟁으로 피 값을 치르고 사셨다면 양자가 되는 겁니다.
토 토 토 달지 말라 말이죠.
원가지도 버리시는 판국에 누가 힐문 하겠냐 말이죠.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분인데
그 정로도 원수를 사랑하는 십자가의 용서의 관계만 창조의 근본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겁니다.

문 두르리는 예수님이 들어오시겠다 하면 그냥 들어오십니다.
마가다락방에서 벽도 통과해 버리는 영이신데
문이 없어도 통과하는 판국에, 무슨! 문을 열어주면 들어가고 안 열어주면 못 들어갑니까?
그런 사랑이라면 가짜죠
사랑은 조건을 맞추어 주지 않습니다.

육에게 물어보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배려와 섬김이라는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폭력에 의해서
관계성으로써 표현하신 겁니다.
사랑은 조건 따지지 않아요 무조건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오히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분에 의해서만 열리고 닫히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었다고 했잖아요 앞에서?

 

(1:17, 개역)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됨이 먼저이지

내가 주의 이름으로 사단을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지근함 곧 의문의 제사의 반복이다 말이죠.

인간의 본성이지 창조의 근본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만약에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도루묵 아니냐 말이죠.


왜 또렷한 것을 봐야지

그런 미지근하고 의문의 것을 쫏냐 말이죠.


사단의 회인 유대인이 바로 의문의 것을 쫏는

완악한 마음이다는 겁니다.

절대로 수건을 벗을려고 하지 않는다 말이죠.

사라질 영광을 벗지 않으니까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무슨 수로 영접합니까?


자기 얼굴에 광채가 나는데

예수님의 태양빛에 거슬려 새카맣게 타버린 싫어버린 얼굴을 무슨 수로 보냐 말이죠.

얼굴에 광채나는 놈들은 절대 못 보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새까맣게 탄 얼굴로 오신 거다 말이죠.

과연 불뱀에게 물렸는데 장대높이 달린 구리놋뱀을 쳐다 볼수 있겠냐 말이죠.

 

주여 저는 문을 열고 닫을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권리는 주님께 있습니다 말이죠.

바로 이런 자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겁니다.

 

(3:20, 개역)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혼인 잔치 참석하라고 아무리 종을 보내어도

문을 두드려도

이미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흰옷을 입은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들만 혼인잔칫상에서 함께 더불어 먹을수 있다 말이죠.

 

그렇지 않은 자는 내쫏겨난다 말이죠.

청함을 받은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말이죠.

출애굽을 통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말이죠.

광야라는 죽음을 통과해 보니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이 다 떨어져나가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단절이고 불가능했으면 요단강 건널때는 아무도 없어요.

죽음을 광야를 통과 못하더라 말이죠
.

딸랑 한명 갈렙 뿐이였씁니다.

그 정도로 단절성인데
인간들은 이 단절성을 무시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 더 시켜줄려고 환장해 한다 말이죠.

실상은 돈 때문에 발버둥 치는 것인데 ~~~

갈렙은 그것도 정식 유다지파가 아니라

접붙인 당한 이방인 갈렙이 유다지파에 배정받아서 말이죠.

다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미지근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으로만 된다 말이죠.

여호수아는 갈렘의 바지자락 붙잡아서 통과했을 뿐이죠.

모세도 탈락 그러나 주님이 하도 봐줘서

변화산에서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회개를 하고
(회개란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돈 주고 사는 겁니다. 눈물 짜고 반성하는게 아니라 ~~)

오늘 본문에 회개해서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 때문에 무시험합격

탈락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뺴돌려서 입시부정과 동일한 특별사면으로 합격시킨겁니다.

모세의 믿음이나 행함에서는 나올수 없는 합격이니 이것 보다 모순되고 편파합격이 어디 있냐 말이죠?

정유라? 정유라는 쨉도 안됩니다. 저리가라 할 정도로 편파합격이다 말이죠.

그 정도로 모세도 탈락 할 정도로

창조의 근본인 십자가에 일체 양보가 없다 말이죠.

 

오히려 이 입시부정인 십자가가 옳았다고

이 십자가를 돈 주고 사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래야 가난함을 가릴수 있는 부요함이 되고

곤고함과 가련함 즉 불쌍함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가릴수가 있다

고칠수가 있다 말이죠.

불뱀에게 물렸는데 구리놋뱀 쳐다보라꼬? 웃끼시네

이런 자는 토해버리는 겁니다.

 

(3:17, 개역)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누가 안약을 사거 발라야 한다고 또 성경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던데

자기가 미지근한 모습인줄 모르고

눈 먼 것인줄 모르고

안약을 남보고 사라고 하던데

자신이 안약을 발라야 할 정도로 죽은자인줄 모르는 겁니다.

 

자꾸 살았다고 우기고

부요하다고 우긴다 말이죠.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말이죠.

 

우리는 지금 남의 가난 남의 곤고함 남의 벌거벗은 모습을 볼 입장이 못 된다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늘 수시로

가난하게 곤고하게 벌거벗기는 겁니다.

? 흰 옷의 가치를

십자가의 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아 그랬더니만

벌거벗겨졌다고 비웃는 자들이 생기네???

다윗이 언약궤가 돌아오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자기혼자 발통이 달린냥 걸어오는 언약궤를 보고

기뻐서 춤추다가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기뻐 춤추니까

왕비 미갈이 아이고 왕이시여 왕 꼬라지가 이래서야 됩니까?

체통을 지키옵소서 라고 비웃다가 불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깔려 죽으니까 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서 그렇고

나는 복받아서 안 깔려죽었다고 예수님까지 이용해서 그렇죠 예수님 이라고 하니까

그 다음 니차례인데 우짜지 라고 하셨말이죠.

 

본인이 그 다음 차례인줄 모르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불뱀에게 물려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불뱀에게 물려야 한다는 겁니다.

?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게 하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만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

창조의 근본만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이유로

불뱀에게 물려야만 했다는 겁니다.

내가 중요한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중요해서

그분만을 쳐다보라꼬 말이죠.

 

이것이 죽음을 이긴 예수님과

죽음 속에서 광야 속에서 우리는 그런 예수님과 근처도 못가고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 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런 죽음을 통과케 해 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게 해주심으로써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게 하신다 말이죠.

 

자 이렇게 불의한 죽음에 충성치 않는데

어떻게 정결한 생명을 맡기겠냐 말이죠.

 

맞습니다.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꼬물을 먹지 않습니까?

 

정작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들은

정작 아무리 예수님이 찾아도 잃어버린 자가 아니고

날때부터 소경

날 때부터 흑암의 백성

날 때부터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날 때부터 개같은 이방인 자가

오히려 예수님의 밥상에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심은

바로 예수님이 열쇠를 쥐고서

뜨거운 하나님의 일인 십자가에 충성하셨기에

불뱀 물린 자들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창세전에 생명책을 사고

전재산을 바쳐서 흰옷을 사고

비싼 향유를 깨뜨려서 예수님의 장례식 비를 사는 겁니다.

 

? 나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수가 없거든요.

깨끗하고 거룩한 분이 제물이 되어야만 죄를 사함 받는다 말이죠.

이 죄 값을 치르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말이죠.

이 분을 사는 겁니다.

나는 더럽기 때문에

나는 살았다고 우기지만 실상은 죽은자 이기 때문에

부요하다고 우기지만 실상은 헐벗은 자기이기 때문에

그래서 돈주고 생명을 주고 무엇을 바치든 간에

사는 겁니다.

이 말은 교회에 재산 바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절대로 돈 한푼 내지 마세요

십일조도 내지 마세요

이런 기쁜소식이 있나~~~~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줄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미지근한 겁니다.

 

내가 눈으로 본다고 하니 못 본다 말이죠.

소경이 아니라고 하니 고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안약을 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나야 말로 못 보는 소경이기에 안약을 사라고 하신다 말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말만 듣고 목사말 듣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말만 들어라 말이죠. 그러면 감사함이 저절로 넘칩니다.

 

우리의 심판을 미리 사서

그 끝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바로 세상의 모든 끝은 내가 아니라

미지근한 모호하고 의문의 것이 아니라

그 끝이 십자가로 마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 십자가를 미리 돈주고 사서 앞당겨서 사는 삶 뿐인 겁니다.

이것이 주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천국혼인잔칫상에 참여한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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