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저희]로 가르는 시편 찬양, 저주의 십자가 죽음 (시편 109편)


(시 109:4, 개역)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5, 개역)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시 109:6, 개역)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약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약 3:10, 현대어) 『그래서 축복과 저주가 같은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시 109:7, 개역)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시 109:8, 개역)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시 109:9, 개역)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시 109:10, 개역)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시 109:11, 개역)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시 109:12, 개역)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시 109:13, 개역)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시 109:14, 개역)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시 109:15, 개역)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시 109:16, 개역)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행 1:20, 공동) 『시편에, '㉠그의 집을 폐허로 만드시고 아무도 거기에 드는 이 없게 하여주십시오.'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시편 69:25. ㉡시편 109:8.』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3, 새번역)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 ㉧말 1:2; 3』

(롬 9:13, 공동)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 ㉠말라 1:2-3.』

 

찬양이란 노래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 이 사건 또는 찬양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하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처럼 구원을 바라고 사건을 보고 있고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 씩이나 깔려 죽게 되니까

자신은 안 죽게 되었으니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는 해석에

예수님까지 끌여들여서 나는 복 받았지요? 라는 사건을 볼 때

찬양은 그럴 때 나온다 말이죠.

마치 감사가 언제 나오는가 하면

저 토색하지 않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그 다음 차례로써의 실로암 망대 깔려죽는 저주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넌 허구의 해석에 빠졌구나 실상을 알려줄께 그 다음 너 차례야 라고 말이죠.
이건 뭐 저들 18명이 깔려죽은 저주 보다 더 심합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그런 소리를 듣고

근심하고 등돌려서 돌아서는 것처럼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지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안깔려 죽었다고 노래까정 불렀는데
이건 뭐 깔려 죽는 것 보다 더 심한것에 깔려있는줄 모른다고 잔소리를 들으니

노래 부를 맛이 나지 않는다 말이죠.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그 다음 너 차례인데 우짜노 라고 하실때에

그렇게 말씀하신 기준과

 

예수님께 예수님까지 끌어들여서 저주와 축복을 해석하던 자의

저주 축복 기준과 뭐가 달라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정도로 예수님의 해석은 인간의 해석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올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해석을 하신다 말이죠.
곧 인간은 그 어떤 해석을 내어놓아도
예수님 앞에서는 무조건 틀리는 엉터리 해석을 내놓을 수 밖에 없음을

들통내는 해석이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보다 백배나 똑똑한 부자 청년 유대인 조차도 근심하기는 커녕
어릴적 부터 지켜온 말씀이 얼마나 보람스러워서 찬양이 저절로 넘쳤을테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말이죠.


 

앞의 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계시록 말씀에서도 살펴봤듯이

 

예수님의 기준은 바로 인애와 자비 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이 기준입니다. 곧 십자가의 피 용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육은 어디까지나 육이니까 육의 한계성만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해석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의 피 용서가 누구에게 가치가 있겠습니까?

마치 의사는 누구에게만 의미가 있냐 말이죠.

환자입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원수에게만 해당 됩니다.

원수 아닌 자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보는 시선이 바로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자

안 깔려 죽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자 라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내가 뭘 했느냐로 판가름 난다 말이죠.

마치 앞의 글에서 인간 하기 나름이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실로암 망대 깔려 죽은 사람 18명 이라고 하니까

세월호 사건이 생각납니다.

 

세월호에 빠져 죽은 사람은 남이지 나의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상 한국 전체 국민이 빠져 죽은거나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일종의 복수심입니다. 곧 촛불집회입니다.

세월호에 아이가 죽든 말든 남의 일이였습니다.

아직까지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맛물려서 이러다간 나의 처자식까지 죽는

사회적인 갑질문화 독재문화 분위기가 되니까

그때부터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런 계산은 어디서 올까요?

 

이미 먼저 그런 사회구조인데

참 늦게 계산한 이 사고방식이 어디서 올까요?

바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고

안그런자는 축복 받았다는 그 사고방식에서 온다 말이죠.

나의 위치가 세월호에 있지 않았고

그들은 세월호에 있었고

나를 기준으로 하는 운동에너지의 배치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운동위치가 행함입니다.

 

바로 그 행함에 육체가 어디 있느냐에 대한 그 행함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너 거기 없었다고? 아니야 그 다음 니 차례야 라고

너는 거기서 벗어난게 아니라 그 위치에서 못 벗어났어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그 장소가 너가 저주라고 보고 있는 그 저주가 바로

너의 위치야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럼 이 소리를 듣고 인간이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그 말을 뒤집어 버려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나야 말로 저주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저에게서 나온 저런 사고방식 자체가 저주입니다 고쳐주소서 라고 나올까요?

 

아니면 그 소리 한 사람을 없애 버리면

자기가 말한 것이 결국 옳도록 계속 유지시킬수 있게 할까요?

 

뭐가 쉽겠습니까?

 

자기가 말한 것을 유지하고

남이 말한 기준을 배제시키는 겁니다.

 

타인은 곧 이웃은 나를 위한 이웃이어야 하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웃은 이웃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이든 예수든 부처든 알라든

나를 위한 신이 아니면 그거 죽여버리는 겁니다.

안그러면 나의 말을 뒤집어서 자꾸 꼬투리 잡는다 말이죠.

 

더군다나 같은 기준이 아니라 정반대의 기준이니까 말이죠.

바로 이것이 사건 곧 찬양입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니라 계시입니다. 곧 말씀입니다.

말씀은 내가 듣고 읽고 보고 하는 문자해석능력에 따른 행함에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백날 안식일 지켜본들 안식의 주인을 도리어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말씀을 죽이도록 되어 있지

말씀 지키지 않는 자는 말씀을 죽이지도 못해요.

그러니 말씀 지킨다는 것이 말씀 안 지키는 자 보다 더 낫다 라는 사고방식은 애초부터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지킨다는 것은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게 아니라

번제와 제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곧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의 주인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지키는 나를 원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이 나를 둘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나와 저희로

 

다윗을 둘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는 율법을 찾는 다윗과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만을 바라는 죄인 원수 다윗으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찬양은 이렇게 둘로 나는 것이 찬양입니다.

나와 저희로

 

자 그렇다면 시편 109편에서 이 저주는

거부감이 들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이 저주가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십자가의 저주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보다 어리석은 짖이 어디있겠냐 말이죠.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라는 저주 곧 죽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당연히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지혜이니까

인간의 지혜를 요리죠리 피해서 이루셨으니

그 어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낯설고 낯설기 짝이 없는 지혜인 겁니다.

 

오늘 시편 109편의 저주를 보세요

세상에나 이런 저주가 없을 정도로 심하디 심합니다.

당연히 이것을 오용 잘못 사용하는 자들이 생깁니다.

주로 목사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교인을 길들일 때 사용합니다.

 

그런 목사는 저주를 하면서도 감사가 나오는게 아니라 씩씩 거립니다.

그런 목사에게 저주를 듣는 교인은 또 말려들어서 겁먹고 그 협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 저주가 얼마나 감사한 의미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의 저주를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지셨으니까 말이죠.

 

결국 십자가의 저주가 아니면

물에 물 탄 듯 뭔가 또렷하게 구분 구별 되는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 저주를 통해서 나와 저희로 또렷하게 구별 구분 지는 이 사건에 오히려 기뻐 감사하는

기쁜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기쁜 소식이냐 말이죠.

 

왜냐하면 또렷하게 둘로 나누어 질 때 명확해 지는 겁니다.

 

물에 물 탄 듯 해 보세요

얼마나 헷갈리고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에서 마침이 없게 되니

알수 없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또렷하게 구분 되어 보세요

속이 뻥하고 답답한 구석하나 없이 시원하게 뚫리는 겁니다.

속이 다 시원하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저주로 갈라지는 거룩이 되는 겁니다.

 

요즘 시국이 암울하고 어둠고 차갑고

살기가 넘치는 자들을 대통령이랍시고 세웠다고

공포를 느껴

마치 트럼프가 당선 될까봐

어떤 미국 국적의 유대인들은 나치 히틀러가 연상이 되어서

우울증과 공포로 심신이 약해져서 병원에 까지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촛불집회로써 고함이라도 질러야 스트레스가 풀리고
촛불집회를 통해서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상 더 답답한 짖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모호하고 흐릿한 의문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하냐고 ~~ 말이죠.

 

그게 답이 되면 적극 추천하겠지만

더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시국이 아주 아주 신나고 재미있습니다.

역시 애굽은 애굽 다워야 한다 말이죠.

국가는 짐승입니다.

그렇다고 짐승하고 맞짱 뜨라가 아니라

빌어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역시 짐승은 짐승 다워야 함을 봐야 하기에

그렇게 보여주시는 주님이 감사하다 말이죠.

 

그러니 살려고 발악할게 아니라

이미 죽었기에

살려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보자 말이죠.

역시 대통령도 국가 시스템도

심지에 촛불집회 나가는 교회들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지는 자들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에

감사가 넘쳐나와 신나기 까지 하다 말이죠.

 

제가 주로 얼마전부터 정치 경제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다가

주님이 눈뜨게 해주셔서 조금 보게 되었는데

주로 정치 문제는 음모론자의 방송을 자주 듣고

경제문제는 진보주의자 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일단은 사실을 말할려고 노력하니까 말이죠.

사실과 진리는 다릅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맞다고 옳잖아 라고 우겨도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듣습니다. 마귀사상을 말이죠.
마귀는 거짓말을 안하는 광명한 천사이기에 다들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실을. 맞다는 것을, 옳았다는 것을 피해간다 말이죠.

아무튼 그런 내용을 들으면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인간이 보기에는 너무 너무 옳은 일만 하더라 말이죠.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독재와 싸우는 열심당원처럼 말이죠. 가룟유다가 그랬죠.

그리고 자기들 내부에 친일파 세력이 있으면

당장 공격하는
불의를, 세리를, 거부하는 그 정의감

바리새인이 그러합니다.

독재는 참으로 꼼꼼합니다.
그러나 그 독재와 맞서는 정의 또한 더 꼼꼼합니다. 바리새인 보세요 얼마나 꼼꼼한지

그런데 이 보다 더 더 더 꼼꼼하게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것이 진짜 꼼꼼합니다. 저들은 충분히 꼼꼼하지 않았던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그것이 알고 싶다.)

결국 선이 곧 악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니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그 이명박과 박근혜가 타인으로써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의 모습으로써 이명박과 박근혜이다 말이죠.

그러니 그들을 백날 없애본들

역시나 자기자신들이 그 빈자리를 대신 차지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개혁해서 앉는 겁니다.

자기가 곧 박그네요 이명박인데

그런 자기를 개혁시켜서 앉히겠데요 글쎄 
이런 순 엉터리 사기가 어디있냐 말이죠.
유럽 방식이 사람 중심이라고 그 방식을 따르겠데요 글쎄 ㅋㅋㅋㅋ


개혁은 커녕 더 완악해 집니다. 그럴 때 우짤려고
? 자살할려고?

노무현처럼 뛰어 내릴려고?

 

가룟유다 보세요 자신의 옳고 옳은 이상주의에 예수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 말이죠.

도움이 될 줄 알고 3년 따라 다녔는데 얼마나 억울합니까?

보상 받아야지요

그래서 팔아버리는 겁니다.
돈 받고 팝니다.

3년이 아깝기 때문에 그 보상의 댓가 입니다.

그 돈으로 자신의 이상 곧 꿈 곧 유대독립자금으로 사용해야지요

독재타도 사회개혁에 돈을 총알자금으로 써야지요.

그런데 누구 한데 놀아난 겁니까?

대제사장 곧 로마와 손잡은 유대 정치꾼들에 의해서 속아 넘어갔다 말이죠.

예수님이 그의 곧 가룟유다의 꿈 이상을 깨뜨린게 아닙니다.

돈을 주었던 독립자금 하라고 돈을 준 대제사장에게서 꿈이 깨진 겁니다.

아니 독립자금을 주었는데?

왜 독립자금으로 사용하지 않을까요?

비싼 향유를 깨뜨린 여인에게 그 돈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는다고 가룟유다가 그렇게 화를 내었잖아요.
얼마나 정의롭습니까? 가난한자를 위한 그 마음
너무 너무 애뜻하지 않나요?

왜 예수님을 판 돈으로 가난한자에게 주지 않을까요?

악착같이 살아서 가난한자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쳐야 하지 않나요?

소용없습니다.

 

성경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20살 즈음이 문자가 유독 띄이는 겁니다.
군대 다녀와서 이 이야기를 교회청년들에게 하다가
엄청 미움 당했습니다. 얼마나 눈치 없이 굴었는지
지금도 여전하지만 말이죠. 

가룟유다가 그냥 자살한게 아니라

깨닫고 자살했다는 겁니다.

안 깨달았으면 자살하지도 않았다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 깨닫지 마세요

주로 종교에서 또는 학문 철학에서 깨달아라 라고 자꾸 이야기 하잖아요

깨달으면 자살합니다 깨닫지 마세요 ㅋㅋㅋㅋ

 

깨닫지 마세요 밀려오는 죄책감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불교식이다 말이죠. 모든 종교의 외침인 자기 하기 나름인데

그 자아가 무너질 때 해탈(깨달음)을 핑계로 등신불 될려고 한다 말이죠.

핑계죠

죄책감이 밀려와서 자아가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아가 안 무너지도록 하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자아가 없었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유일한 분에게 배우자 말이죠.

자기에게 속지 말자 말이죠.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것이
자꾸 없는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아를 꿈꾸지 마세요

자아가 없는데 뭘 깨달아요


자아가 없으니 자아를 죽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살할 필요조차 없다 말이죠.

 

그러니 그런 자아에게 깨달음은 아예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식으로

죄책감을 키우는 식입니다. 양심 키우는 깨달음이니까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깨달음이 허구라는 것을 깨닫는 공부를 하자 말이죠.

자아가 허구라는 것을 깨닫는 공부 ㅋㅋㅋㅋ

 

역시나 깨달음이네?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ㅋㅋㅋ

 

제가 말하고픈 공부란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자아 이구요

마치 자기 계발서와 같은 트릭이구요.
마치 철학 요즘 뜨는 인문학은 트릭입니다.
트릭을 알아야, 공부해야 트릭이라는 것에 안 속는다 말이죠.
아무도 그 속임수에서 건져줄자 없다는 것을 알자 말이죠.


결국 누가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그 누구 와의 관계성을 말하고픈 겁니다.

즉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내 죄를 책임지실려는 분은 이세상에 단 한 분 밖에 없어요.
오히려 아니 왜? 
바로 그겁니다.
나도 내 죄를 책임 못 지는 판국에
왜 나의 죄를 책임지실려고 할까 라는 낯설음

너무 너무 낯설어서 우리는 처음에는 오독을 합니다. 다음에 정독을 하게 되죠.
처음에는 다 실패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라고
그래서 두번째가 되어야 7천명을 남겨놨다고 비로소 보게 됩니다.
이 사이 간극에서 십자가가 개입한 겁니다. 창세전의 창조근원이 개입한다 말이죠.
곧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이 개입하는 겁니다.

내게 와서 배우라 라고 하신 분에게서만 배우는 공부입니다.

딴 놈들은 사기꾼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배우지 말고요.

저에게서도 또 목사에게서도 배우지 말고요

그저 이용만하시고

오로지 내게 와서 배우라 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은 예수님 뿐이니까요.
온유와 겸손은 앞의 글에서 물에서 건지다가 바리새인 나타나면 물에 빠뜨리는 것이 온유라고 했습니다.

마귀보란듯이 말이죠. 물 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 구원하랴 ~~~ 생명줄 던져 ~~~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앞의 글에서 흰 옷을 돈주고 사라 라고 하셨잖아요.

왜냐하면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가 돈은 많아 부요한데 실상은 헐벗어서

따뜻한 온기 하나 못 누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이 옷을 사라 라는 겁니다. 흰옷 거룩한 옷

(사 55:1, 개역)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현대어) 『[영원한 은혜의 언약]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의 포로생활에만 얽매여 실망하지 말고 옛날 다윗 시대처럼 번영하는 나라가 다시 온다는 것을 믿도록 은혜의 계약을 선포해 주셨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모두 이곳의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오너라! 너희는 사서 먹되, 돈 없이 와서 사라! 너희는 쉬고 전혀 값을 내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두 개로 분절 시키는 옷

알고보면 돈으로도 못 사죠

즉 너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그 돈 보다 더 가치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솔로몬의 황금 옷도 이 들풀 보다 못하더라 더 가치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 구원을 못해주니까

쉼을 주지 못하니까 안식을 못 주니까

평화를 못 주는

썩은 동앗줄이니까

위기때 나를 건져주는 밧줄이 아니더라 말이죠.

아무도 나를 쉬게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내게 와서 쉬라 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말이죠.

 

구원의 밧줄은 오직 위기때 심판때 종말 때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한다 말이죠.

평상시에는 꿈에도 몰랐죠. 그래서 무시했다 말이죠.

그런데 내가 무시했던 그 닭이 나를 대신해서 세 번 울어주는 닭인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영화 곡성에서 수정된 극장판 시나리오에서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절대 가지 말라굽쇼?

아닙니다. 세 번 울어야 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죄책감은 자꾸 조건과 법칙과 행함을 유도합니다.


사랑은 그 어떤 조건 갖출필요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방종을 유도한다 굽쇼?
제가 보기엔 오히려 의문의 반복을 유도하고 있다 말이죠.

교회 장사 안될까봐

비양심적인 인간이 될까봐 불안한 겁니다.

 

그러나 인애와 자비는 그 어떤 조건을 내세웠던 것도

눈 녹듯이 다 녹여버립니다.
조건 일체 없습니다.

무당은 조건을 내세웁니다.
마귀들은 조건을 내세워요
오늘날 교회나 목사들이 무당인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바로 예수님 아니였으면 사단의 회 라는 것이 들통나지 않았을 정도로

남을 속이는데 귀신들이다는 겁니다.

 

뭐 율법의 네 배가 갚으라꼬? 그 조건 내세우면 구원되냐 말이죠? 그 조건 갖추면 되냐 말이죠?

 

그 놈이 바로 너다. 그 조건 그 법칙 그 행함 다 눈 녹듯이 다 녹여버립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이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안식의 주인이 와야 밝혀집니다.
어떻게? 안식일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주인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서 말이죠.


그것도 율법정신이냐? 겨우 네 배? 그게 겨우 인간본성의 율법해석입니다.

율법은 사랑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오히려 7번 남을 용서하는 꼬라지를 못 봅니다.

그것도 용서냐 말이죠. 적어도 7에 70번 용서받아야 함이 진짜 용서 아니냐 말이죠.

얼마나 용서를 모독했으면 겨우 7번 용서했다고 방종하지 않는 삶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7에 70번 방종하는 삶이기 때문에 남 용서 할 생각 말고 너나 용서 받아라 라는 겁니다.

어딜 감히 뻔데가 앞에서 겨우 7번으로 사기를 치냐 말이죠.

그것도 저주냐 말이죠. 그것도 용서냐 말이죠.
적어도 7에 70번은 되어야지 ~~~~~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이 십자가의 용서인 7에 70번을 왜 겨우 7번으로, 인간본성으로, 행함으로 깍아 내려서 해석하냐 말이죠.
그것은 창조의 근본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게 아닙니다.

왜 생명책에 기록 되지도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냐 말이죠.


오히려 창조의 근본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용서는 

내 쪽에서 그 어떤 조건도 못 갖추도록 탈탈탈 털리도록 한다 말이죠.

자아를 녹여버려요


저들은 비웃죠 방종케 한다고

그러나 저들은 오히려 장대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보겠다고 하는 완악한 수건을 쓰는 유대인 곧 사단의 회 라는 것이

계시록의 일곱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가룟유다든 영화 곡성의 아비든

조건을 갖추겠다는 그 인간의 트릭에
(귀신들린 여자와 일본인, 그리고 무당은 결국 조건 갖추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자꾸 뭐를 자꾸 해라 해라 해야한다고 행함을 유도합니다. 이게 사단의 주장입니다.)


인간의 촛불집회에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가십니다
.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구나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주님은 애굽을 애굽 답게 하고

우리는 그 애굽에서 이 짐승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는 갇힌자로 만드셔서

그 애굽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애굽으로부터 영광 받으신다 말이죠.

짐승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 말이죠.


이것이 창세전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여기에 나의 행동으로 그 상황에 대처하는 행위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행동을 백날 이 구원을 위해서 파라오 애굽 왕을 강퍅케 할 수 있겠냐 말이죠.

10가지 재앙을 퍼부을수 있겠냐 말이죠.
오늘 다윗처럼 저주를 퍼부을수 있겠냐 말이죠.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겠냐 말이죠. 엘리야.

옆으로 몇년 눕고 또 반대로 누워서 빨리 빌어먹어라 라고 기도할수 있겠냐 말이죠. 에스겔.

참선지자는 합니다. 예수님은 합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망할리가 없다고 외칩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을 깨작 깨작 열받게 열번 이상 시비를 걸수 있겠냐 말이죠.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죽임을 당한다고 말리죠.

 

안식일 지키는 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안식 지킴을 통해서가 아닌

안식일 지키는 자가 안식의 주인을 죽이는 그 강퍅함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자 되심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죽으러 가시는데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라고 가로막고 있으니

절대 가지 말라고 촛불시위하고 있으니

그냥 심심해서 놀려고 참석한다면 말리지 않겠는데

꼭 의미를 두고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참석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니까

마귀새끼들이다는 겁니다.

 

시편 109편이 지금 저주를 구체화 하고 있다 말이죠.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에 가고 있다 말이죠.


이 저주는 앞의 글에서 나는 화친을 원하나 저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시편 120편 글에서 말이죠.


(시 120:6, 개역)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와 함께 오래 거하였도다』

(시 120:7, 개역)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저희는 싸우려 하는도다

오늘 시편 109편에서도 나오죠.

나는 사랑을 주었는데 저들은 미움을 퍼붓더라 말이죠.


(시 109:3, 개역)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시 109:4, 개역)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5, 개역)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그래서 예수님이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화평이니 말이죠.


막힌 담을 쌓고 있으니 그 막힌담 헐어버리고자 말이죠.

죄 문제? 막힌 담? 제대로 해결해 주마 라고 말이죠.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뭔가가 또렷하게 보여야 하는데 중간에 뭔가가 가로막고 있어서 흐릿하고 모호한 짖을 반복케 하더라 말이죠.

그럼 그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야 하는 겁니다.


안약을 돈 주고 사서 발라야 또렷하게 보이는 겁니다.

부요하나 헐벗었기에 흰옷을 값주고 사야 합니다. 그래야 따뜻하다 말이죠.

십자가의 저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을 보지 못하면

실상을 보지 못하면

 

자꾸 인간 본성대로 허구를 쫏게 됩니다.

사기꾼들이 처음에 달콤한 말로 다가와서 결핍된 마음을 채울려고 달려들어서
등쳐먹고 단물빨아먹고 버리잖아요.

다윗이 괜히 저주를 외치는게 아닙니다.

모조리 다 허구에 빠져서 삐딱한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외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이 시편 109편을 보고 절대로 저주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말하지 말자

말이 씨가 된다고 저주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두지 말자 라는 조건을 갖추고자 하기에

시편 109편을 해석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유대인 해석도 이 시편 109편을 해석 못해요.

그 동안 시편을 잘 해석하다가 이 시편 109편에서 그런 해석이 먹혀들지가 않더라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고 욕을 먹어도 끝까지

양심적으로 외치고 싶어 한다 말이죠. 저주를 말하고 싶지 않다 말이죠.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치르는 짖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양심적인 오히려 그런 여인을 정죄하고 가난한자를 위해서 비싼향유를 바치기 바란다 말이죠.


아니 누가 천년 넘게 시간을 초월해서 갑자기 나타나서 주여 제발 죽어주옵소서 라고

모세라는 사람이 그 한마디 외치고 다시 사라지느냐 말이죠.


창조의 근본만을 외친 겁니다.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주여 죽어주옵소서

즉 모세 자신도 모든 인간도 저주 속에 있다는 겁니다.

갇혀 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저주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떄문에 저주를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실상을 안 볼려고 하고

허상에 빠져 살고파 한다 말이죠.

 

그런데 시편 109편은 바로 그렇게 우리는 갇혀 있기 때문에

양심적이고 싶고 죄책감을 가져서

어떻게 해서든 저주에서 피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는 그 죽음에서 피하고

예수님도 이 십자가의 저주를 피하도록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시편 109편에 저주 속으로 돌진하고

이 저주를 구체화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본성과 창조의 근본과의 충돌에 부딧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치니까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를 원하겠습니까?

창세전에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원하겠습니까?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원하는 자는

자신이 뭘 해도 갇혀 있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뭘 해도 말이죠.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주의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긍휼의 자리에 놓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아니 누가 저 세리, 매국노, 친일파 와 같지 않음을 원하지

저 세리와 같습니다를 저는 마귀에게 갇힌 자 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를 원하냐 말이죠.


다윗이 지금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는게 아니라

반대로 주여 저 갇혔습니다 건져주세요 제발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기도 이다는 겁니다.


(시 10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내가 찬양하는게 아니라 찬양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아니 하나님이 찬양이기에

잠잠하면 찬양이 아니시다는 거죠.
분명 며칠전에 시편에서 하나님 본인이 찬양이다라고 나왔는데 말이죠. 당장 찾지를 못하겠네요
노래되시기에 인물이라는 찬양이시기에 아무리 벙어리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어요.

반드시 찬양이시기에 잠잠치 않고 찬양을 들려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미래완료를 소급시켜서 과거를 수정하는 식입니다. 곧 죄를, 모든 죄를, 모든 허물을 고치신다 말이죠.

그래서 찬양이 뭔지 보여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의사에게 치료가 뭔지 보여주세요 라고 하듯이 말이죠.

의사 곧 치료자 이시니까 잠잠하지 못하고

몸이 건질 건질해서 못 견딘다는 겁니다.

병을 보면 말이죠. 치료자는 가만히 못 있습니다.

병 중앙 속으로 들어간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마소서 라고 외치는 자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환자 뿐이다 말이죠.

의인이 외치는게 아니라 죄인이 외친다 말이죠.

주의 찬양 되심을 말이죠.


병에 갇혀버렸으니까


그런데 저들은 소경이면서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

고쳐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고쳐달라고 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저 부모 죄이냐 자기 죄이냐 조건을 따지는 겁니다.
부모 죄이면 정죄를 조금 덜하고

자기 죄이면 율법을 말하는 자로써 이 사람을 정죄하고 싶어서 입이 건질 건질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본다고 하는 자가 저주 속에 있는 줄 모르는 저주 받은자이다는 겁니다.


저주 받아 저주 속에 갇혀 있는데 

저주 받지 않았다고 하니

저주 속에서 건져줄 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옵소서 라고 외치는 환자는 없고

주여 절대로 십자가 저주 받으시면 안됩니다. 제가 끝까지 십자가 못 지시도록 끝까지 챙기겠습니다. 

장지 지겠습니다.


인간본성은 그 말 듣고 기분 좋겠지요?

그러나 창조의 근본은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고 욕하고 있는 겁니다.


저주를 피한다고 저주가 해소 되냐 말이죠
.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 라고 아예 저주 중앙 속으로 주님이 들어가십니다.

저주의 실상을 낱낱이 까발려 버리는 겁니다.

 

감추인 것 없이 모조리 하나 하나 그 민낯을 공개해 버린다 말이죠.

 

공개 해 보니까

 

우리가 평상시 부정하다 기피했던 그 십자가의 저주가 오히려 영광이였고

오히려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해서 힘과 권력에 똘마니 짖을 했는데

민낯을 보게 되니

무시했던 십자가 보다 더 천하디 천한 것이 그 동안 갑질을 왕노릇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알고보니 헐벗어도 너무 헐벗은 최순실과 박그네와 이명박이였더라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가난하다고 우리 스스로가 움츠러들었는데

알고보니 부요함이 넘쳐흘렀다 말이죠.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겁니다. 거꾸로

 

사람이 결핍상태가 되면 잘 속는다 말이죠.

촛불집회가 부요해서 외치는 겁니까?

아니면 불안해서 결핍성을 느껴서 외치는 겁니까?

정의를 외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마약장사꾼들에게 다 속고 있다 말이죠.

 

부요해서 부요함이 넘쳐서 촛불시위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불안하니까 이대로 갔다간 나도 당할까봐 그래서 외친다 말이죠.

 

서머나 교회가 가난하나 실상은 부요하다고 합니다.

그 어떤 핍박과 고난에도 오로지 주의 사랑만 쳐다보고 있더라 말이죠.

죽은자 같으나 산 자다 말이죠.

 

그러나 책망받는 교회는 부요하고 살았다고 여겼다 말이죠.

그러나 부요하나 실상은 헐벗었고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자 이다고

 

완전 정반대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저주를 기준으로 해서 보는 시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촛불은 정작 자기자신에게 비추어야 한다 말이죠.

왜 어둡거든요.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 라고 굽쇼???

빛은 어두움을 이길 필요가 없이 이미 빛입니다.

그런데 이길려고 하는 빛은 가짜입니다.

이미 이긴채로 태어나는 것이 빛 그 자체인데

빛이 얼마나 아니였으면

어두움이였으면 어두움의 사고방식인 자꾸 이길려고 하냐 말이죠.

안 이겨도 어두움은 어두움인데

어두움을 이길려고 하는 것 보니까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다 말이죠.

아이들까지 내세워가면서 합창케 하면 그것이 빛이다고 속아넘어갈줄 아냐 말이죠.

 

인간은 속여도 마귀는 못 속인다 말이죠.

마귀가 웃어요 마귀가

가룟유다 편에서 마귀가 힘주거든요.

마귀도 못 속이면서 예수님을 속일려고 하니 말이죠.

마귀 이길 생각 말고 주님이 이런 일들을 벌리시고 있다는 것을

배우라 말이죠. 공부하라 말이죠. 알려주시고 있잖아요.

 

다들 말고의 귀를 짜를려고 한다 말이죠.

주님은 다시 귀를 붙여버립니다.

검으로 흥한자 검으로 망한다고

촛불로 흥한나라 촛불로 망한다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치에 대해서 진보쪽인 김어준이 방송을 몇 년째 자주 들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김어준이가 가장 싫어하는 이명박과 박근혜

이명박근혜 와 김어준이와 뭐가 다른지? 둘이 너무 똑같이 닮아 있다 말이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이명박과 박근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너가 그 마귀다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너가 그 놈이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지요?

여기 한 명 추가요~~ 19명 이다

 

실상을 못 보게 하는 것들은 다 마귀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런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들을 가지고 와서

실체를 못 보게 하냐 말이죠.

 

 

다윗은 미래완료라는 실상을 보고서 지금 현재의 허구에게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저주 속에서 우리는 실상을 보게 됩니다.

 

찬양은 곧 계시는

우리를 십자가의 저주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저희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엉터리 기준으로 나누지 말고

 

저 세리(매국노 친일파, 저 박그네, 저 최순실)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그런 엉터리 기준으로 주님을 속일려고 들지 말고

 

오히려 최순실 보다 더 악한 자가 나임을

내 대신 아이들이 세월호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아이들이 촛불집회에서 퇴진하라고 외치는 너가 바로 박그네야 라고

너가 퇴진하라 라고 외치는 세월호 아이들의 외침을 들으라 말이죠.

 

종말때에

미래에 우리 아이가 이런 환경에서 살게 할수 없다고 핑계댈게 아니라

지금이 종말이고

지금이 나 예수를 위해 울게 아니라

나와 나의 자식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

나를 퇴진하라 나를 즉각 사퇴하라 라고 외치는

십자가의 음성을 만들고자 예수님이 죽으시러 가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대립물은 동일한 같은 거다 말이죠.

시편 109편은 차이물로 만드는 겁니다.

 

나와 저희 라는 차이물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으나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된 것처럼

 

구별시키는 겁니다.

 

어둠과 빛을 대립물로 보는게 아니라

차이물로써 이길 필요가 없이 이미 이긴채로 태어난 것이 빛이라는 차이라는 것

그러니 의도적으로 옆에 세우는 겁니다. 차이 나라꼬

 

둘 다 불 속에, 용광로 속에, 저주 속에 집어 넣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차이물을 도드라지게 구별케 하시는 겁니다.

 

자칭 의인들의 완악한 해석은 대립물로써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해석을 하지만

 

주님이 부르시는 죄인은 대립물이 아니라

차이로써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는 자입니다.

 

다윗은 저희와 차이물로써 그 증상물로 외치고 있습니다

반명에 저희는 마치 욥의 세친구처럼 대립물로써 그 증상물로 외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가 펼치는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어 있고

그 차이로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되어 있는

 

바로 옆에 세워두고서 둘의 차이를 나타내는 겁니다.

죽을 맛이지만

이 보다 영광 스러운 배려는 없을 정도로

초과잉적으로 심하디 심할 정도로 저주를 퍼붓는 것 아닌가 싶은데

실상은 그 정도로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써

시기와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8:6, 현대어)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시샘이 장난이 아닙니다.

저주가 장난이 아닙니다.

질투가 장난이 아닐 정도로

 

사랑은 시샘, 저주, 질투를 맹렬하게 불처럼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를 어설프게 용서하고 어설프게 징계하심이 아닌

제대로 죄를 미워하시는 사랑 진짜 사랑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정도로 말이죠.

 

어설픈 의인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의 사랑이 아닌

죄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는 진짜 사랑입니다.

이 미래완료를 다윗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원수사랑인 십자가를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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