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오독(실패) 그 다음은 정독(다 이루심) (시편 121)

처음은 비극 (슬픔) 나중은 희극(희락) : 슬픔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을 주셨네 ~~
 

성전에 올라갈수 없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앉은뱅이에게 우편에 그늘 되시며

눈을 들어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그 자체를 아예 바라볼수 없는 흑암의 백성인 소경에게 도움되시며

미움받고 버려진 개같은 이방인에게 새임금 새신랑으로 너를 책임지는 자로 오시는

희년의 다 이루어도다의 노래

 

 

(121: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121:2, 개역)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3, 개역)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4, 개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5, 개역)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121:6, 개역)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121:7, 개역)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8, 개역)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42:3,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2:3, 공동)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42:3, 현대어) 그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내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심지처럼 꺼져 가지도 않고 갈대처럼 부러지지도 않고 끝까지 내 사명을 완수하여 세계 만민에게 옳게 사는 방법을 전파할 것이다. 먼 섬들과 해변의 주민들까지 그가 전하는 소식을 고대하고 있다.'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0, 새번역)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12:20, 공동)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드디어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어가리니

(12:20, 우리말) 그는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을 것이다.

(12:20, 킹흠정)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공의를 보내어 승리에 이르게 하기까지 하리니

(12:20, 한글킹)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할 것이며, 연기나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리니, 그가 심판하여 승리할 때까지 하리라.

(12:20, 현대인) 그는 진리가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실 것이다.

(12:20, 현대어) 그는 약한 자를 짓누르지 않으며 가장 작은 자의 희망도 억누르지 않으리라. 그는 모든 싸움을 마지막 승리로 끌어가리니

 

 

이사야 42장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42:1, 개역)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42:2, 개역)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42:3,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2:4, 개역)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42:5, 개역)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6, 개역)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2:7, 개역)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42:8, 개역)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42:9, 개역)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42:10, 개역)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42:11, 개역)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42:12, 개역)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42:13, 개역)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42:14, 개역)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42:15, 개역)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42:16, 개역)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42:17, 개역)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42:18, 개역)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42:19, 개역)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42:20, 개역)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42:21,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42:22, 개역)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42:23,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42:24, 개역)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42:25,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그리고 그 이사야 42장을 인용한 마태복음 12장 전체는 이렇습니다.


(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2:15,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2:16, 개역)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2: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개역)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개역)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2:22, 개역)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12:23, 개역)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12:24, 개역)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12:25,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12:26, 개역)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2:27, 개역)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12:28, 개역)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3, 개역)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12:34, 개역)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12:35, 개역)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12:3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12:37, 개역)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12:38, 개역)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12:3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12:40, 개역)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12:41, 개역)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12:42, 개역)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43, 개역)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12:44, 개역)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12:45, 개역)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12:46, 개역)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2:47, 개역)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12:48, 개역)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12:49, 개역)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개역)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12:3,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삼상 21:6

(12:4, 새번역)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오직 제사장들 밖에는, 자기도 그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12:5, 새번역) 『㉡또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28:9

(12:6,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12:7, 새번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 6:6

(12:8, 새번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12:9, 새번역)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12:10, 새번역)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12:11,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2:12, 새번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12:13, 새번역)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12:14, 새번역)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12:15,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무리'가 없음

(12:16, 새번역)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12:17,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12:18, 새번역)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 42:1-3

(12:19, 새번역)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12:20, 새번역)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12:21, 새번역)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 42:4(칠십인역)

(12:22, 새번역) 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12:23, 새번역) 그래서 무리가 모두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12:24, 새번역)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 시편 121편을 보니 두 노래가 생각납니다.

 

얼마나 이 몸이 지옥갈 몸이면 몸이 기억을 해요 글쎄

 

죽으라고 주구장창 아니 주야장천으로 불렀던 노래인데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 지으신 여호와 나의 왕이여 영원 무궁히 지키시리로다

 

라는 짤막한 신나는 노래 하나와

 

약간 느린 발라드 풍의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라는 노래

 

1.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2.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후렴)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거의 시편 121편을 그대로 가사노랫말로 했지요.

 

이 시편 121편의 의미도 모르고 그저 인간의 본성대로 막 불렀다 말이죠. ~~~

그런데 이 시편 121편은 그런 의미가 아니듯이

앞의 글 시편 109편에서도
세상에 여지껏 있었던 저주란 저주를 다 모아서 퍼붓는 그 저주에

성경박사들이 기존의 해석법으로는 이 시편 109편의 저주가 해석이 안되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저주를???

 

그렇기 때문에 해석을 못하겠다고 한다 말이죠.

 

그럼 언제는 해석을 제대로 하긴 했었나요?

그 동안의 해석이 엉터리 였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 저주 속에 있어보면

그 동안 옳았다고 했던 것이 다 순 엉터리 똥떵어리 배설물이였지

진짜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사랑은 주님의 저주 까지도 감사해야 한다 말이죠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의 해석 인간의 믿음 인간의 행함은 애초부터

뭘 해도 다 거짓이였습니다.

막살아와놓고서는 막살지 않았다고 우기는 식의 해석만 했던 거지요.

 

자 시편 109편에 그렇게 저주를 해 놓고서는 그 저주에 정작 누가 놓여지게 됩니까?

다윗이 저주를 하고서는 다윗이 저주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종말을 곧 심판을 외쳐놓고서는 예수님이 그 심판에 놓여집니다. 곧 십자가의 저주입니다.

 

이것이 독자적인게 아니라

중간에 뭔가 한세트를 이루고자 뭔가 개입을 한 겁니다.

즉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이 그 저주를 피하고자

저주 라는 개념을 들고온 그 당사자를 저주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로 저주에 놓여지게 된 겁니다.

다윗이 도리어 자기가 말한 그 심판에 자기가 놓여지게 된 겁니다.

다윗이 멀쩡한 이스라엘을 가만히 있는데 괜히 시비를 걸듯이
수백년 전의 출애굽을 재현하듯이 자꾸 출이스라엘을 외치는 겁니다.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
밧세바를 취하고자 우리야 장군 살해사건과 이름없는 아이의 죽음의 사건 뒤에 말이죠.
단순히 개인의 죄 문제와 죄사함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시키면서
그 죄에 대한 전쟁요청으로 말이죠.

그래서 죄에 대한 저주에 저주를 퍼붓는 식이 시 109편인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말려드는 겁니다.
그러니 이 다윗을 이스라엘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유대인이 예수님을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저주시 시편 109편을 외치는 다윗을 또는 종말을 외치는 예수님을 도리어 저주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윗과 예수님이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누워서 침뱉기 한 식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죠.

 

이것이 인간이 바라보는 해석인, 원인에 따른 해석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럴줄 알고 내가 저주 속에 들어갔지 라고

개콘의 한 코너처럼 계속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심으로써

우리는 최종적으로 끝까지 끝까지 되받아치다가

아니 이럴줄 몰랐네 라고 당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저주 속에 들어간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저주 속으로 집어넣은 것에 성공한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저주 속으로 집어넣는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타인으로 여겨서 저주 속에 집어넣어서

나는 그 저주 바깥에 놓여졌다고 해석하는 그 눈이

이미 저주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밝혀 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은게 아닙니다.
정작 모든 인간이 이 십자가의 저주에 못 박힌 것임이
제대로 보는 시선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우리가 잘못 오독한 겁니다. 실패한 해석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다음 해석은 정독입니다.
해석을 제대로 해서 정독이 아니라
해석 할 필요 조차 없이 정독이 그냥 덮쳐지니가 해석한 적도 없는데 정독이 되어버린 겁니다.

처음 해석은 예수님이 저주 받는 십자가인줄 알았는데

그 다음 해석은 우리가 곧 모든 아담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완성한 겁니다.
십자가의 완성 자체가 정독 자체이다 말이죠.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왜냐하면 그 저주라는 십자가 속이 오히려 창조의 근본의 자리였고

우리는 그것을 어리석은 지혜라고 비웃어서 십자가의 저주 속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오히려 십자가의 저주가 창조의 근본은 축복과 긍휼의 자리이고

우리가 절대로 저주가 아니다고 저주 바깥의 자리가 축복이다고 여긴 자리가

오히려 저주의 자리였다는 팔을 어긋맞게 되는 상황인줄 몰랐던 겁니다.

 

예로 실로암 소경이 부모 죄냐 자기 죄냐 태어날 때부터 빛을 못 봤으니

이 사람이 어두움 자식(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이 된게 누구 때문이냐 라고
예수님까지 이용해서 묻는 겁니다.
이미 자기들의 결론을 미리 도출해 놓고서 예수님마저 끌여들여서 시험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해석에 동조하면 같은편, 해석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몰고자 말이죠.  

인간의 모든 해석은 이런 식입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해석 말이죠.
그 원인이 바로 자기자신 자아 입니다.
없는 자아를 그런게 도출하고서는 자아에 동조하라고 협박 공갈하는 식입니다.
왜? 인간의 자아는 이유 없이 무조건 맞다 옳다 이어야 하니까 말이죠.
과연 예수님이 속아 넘어가줄까요? 동의할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들의 그런 죄에 대한 해석이 순 엉터리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마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자리는 저주의 자리고

안 깔려 죽은 자리는 살아난 생명의 자리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차라리 진작 먼저 깔려 죽었을걸 이라고 말하게 만들어 버릴정도로

안깔려 죽은자리가 오히려 진짜 저주의 자리라는 것을 밝혀버리는 겁니다.

 

누가 봐도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실상은 헐벗어서 뭐하나 가릴 천 조각 조차도 없을 정도로 안쓰럽기 짝이 없는 발가벗은 모습이다는 겁니다.

 

사데교회에 대한 책망은 누가 봐도 살아서 생생하게 활력이 넘치는 인생인데

실상은 죽은자 이다는 겁니다.

원인을 없애버리고 결과를 수정해 버린 겁니다.
인간이 도출해낸 결과가 졸지에 바뀐 결과가 되어버린거다 말이죠.

 

(3:1, 새번역)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 또는 '천사'

 

 

도대체 무슨 기준에 의해서 이렇게 두 패로 갈려지느냐 말이죠.

 

그 기준은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바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에 의한 기준이다는 거죠.

 

결국 내 하기 나름이 아니라(성화론)

나의 행함과 상관없이 외부에서 결정된 사항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구약의 유대인처럼 모조리 실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뭘해도 다 실패 뭘해도 다 죄 입니다.

구약은 실패 이다는 거죠.

 

여기에 반발하는 자는 구약이니까 무조건 유대인이겠지요.

물론 유대인들은 인정 안할테니까 말이죠.

 

참 억울하겠지요.

지금도 부지런히 말씀을 지키고 있는데 말이죠.

꼭 오늘날 성화론자들과 같아요

 

그런데 구약이 실패했다면 아니 반드시 실패 밖에 안나오도록 되어 있다면

당연히 그럼 신약에서도 말씀을 지킬 인간이 없겠네 라는

역시나 유대인의 사고방식의 반발이 있다 말이죠.

그러니 그럴빠에 구약적으로 계속 지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예민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이 안식일날 일하는 것을 고소 고발하듯이 정죄할려고 유대인들이 달려든다 말이죠.
(제자들은 졸지에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이 아닌 자의 입장에 놓여져 버리는 범법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꼬리인 제자가 아닌 몸통인 예수 너 때문이야 라고 범법자의 원뿌리를 겨냥해서 안식일 사수에 나서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율법 사수요 곧 말씀 사수요 하나님을 사수하는 사명감으로 똘똘뭉쳐서 말이죠.)

마치 죄를 인간이 다룰수 있는냥 이 사람의 죄가 누구 죄냐고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테스트 하는 겁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고 잠시 물러갔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이 틀렸는지 잠시가 아니라 그 뒤에 안 나타납니다.

 

ㅋㅋㅋ 네 맞습니다. 여러분이 저 보다 더 낫네요

암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 마귀가 바리새인을 통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인간은 마치 껍데기와 같다 말이죠.
심심하면 반박하는 자들이 인간을 너무 무시한다고 하는데
인간은 껍데기 입니다.
바리새인을 그럼 왜 여러분은 무시하냐 말이죠. 그들도 인간인데
결국 성경 따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실상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누가 들어가느냐 로 결정이 되지

인간 자체로써는 파악할수 없지요 껍데기인데 속을 들추어내봐야 안다 말이죠.

그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들추어내는 겁니다.
이 운동력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 제자들에게 부어져서 범법자로 나서게 되는 겁니다.

당신 제자들은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 라고 말이죠.

당연히 이중적입니다. 안식일 사수 와 동시에 운동력이 있는 말씀되신 예수님에 대한 살인의지 입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일어난다 말이죠. 이 이중성을 극복할수 있겠냐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껍데기 자체에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또렷하게 밝혀지는 것은 그 껍데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귀신이 들어가느냐
(귀신이라고 하니까 천박하죠. 광명한 천사인 마귀가 들어가냐? 그 정도로 고상하기 짝이 없는 마귀입니다.)


성령이 들어가느냐 로 달려 있지
(오히려 성령이 무뢰한 입니다. 영화 무뢰한 2014 의 뜻이 
한자 뜻으로 보면 누구에게도 소속되거나 의지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 본질은, 자기가 쟁취해야 하는 목표나,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행동이 있을 때, 선과 악의 개념 없이 어느 방향으로든 나갈 수 있는 사람 이라고 되어 있는데 쉽게 말해서 괴팍하기 짝이 없는 깡패 라는 단절적인 의미이다 말이죠. 성령은 단절성입니다. 마귀는 광명한 천사이고 성령은 단절의 깡패고,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외치고. 참선지자는 이스라엘 해체 멸망을 외치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 안하면 복되도다)


마치 인간이 독자적인 존재인냥 선택할 권리가 있는줄 착각하시면 안된다 말이죠
..

 

아무리 내 꼬라지를 봐도 성령 들어간자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성령 들어간자라고 우기는 성화된 삶을 살려는 자를 보면

그 놈들은 성령이 들어가있기는커녕 마귀 자식인 바리새인의 반복

구약 실패의 반복 의문의 반복을 하는 놈으로

또렷하게 밝히 보여주시는 십자가로 알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꾀냐 말이죠. 이렇게 밝히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들어간자로써의 삶을 살아가느냐 라는 조건 갖출 생각하지 마시고
동일성 일치성을 갖출려고 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 용서인지 왠 은혜인지

저들의 사기술에 말려들지 않게 해주심이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마귀의 세가지 광야시험을 보면

우리가 그동안 바라고 바랬던 것을 마귀가 예수님에게 요구하고 있다 말이죠.

어쩜 내 마음을 잘 아는지 나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너무 너무 노골적으로 내 마음을 들킨 것 같다 말이죠.

그 세가지 마귀의 시험이 뭔고 하니

하나로 요약하면 날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이건 뭐 말이 겸손한척하는 거지

실상은 멱살잡고 협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재끼는 것이 구약의 유대인 해석인 겁니다.
날 구원해줘 날 사랑해줘 안그러면 죽여버리겠다는 거죠. 그래서 말씀을 지키는 거다 말이죠.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을 보면 실상은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재끼는 모습이다 말이죠.
얼마나 완악한지 수건을 벗지 않고 광명한 천사 모습을 한다 말이죠.

 

아니 구원은 구원자 마음대로 아니냐 말이죠.

 

에이 사랑의 하나님인데 썰마

그런 짖은 마귀가 한다고 오해를 하는데

지금 마귀가 우리를 대변해서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으니

마귀가 마귀에게 요청할 리가 있나요?

 

그러니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마귀적이면 마귀가 요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들통내시는데 이 들통남을 당한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라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것도 못 들어주냐 라고 예수님에게 멱살 잡고 구원해 달라고 한다는 자체가

예수님을 마귀로 보고 있다 말이죠. 안들어주면 죽여버리는 거죠, 뭐!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 실상은 마귀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결국 인간이 믿는
? 가능하기에

인간이 믿기에 가능한 하나님은, 인간이 믿는 예수님은 알고보니 마귀이다 말이죠.

그럼 진짜는 예수님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이죠. 내 쪽에서 안 됩니다.

 

오죽하면 바알세불에 걸려서

즉 마귀 중의 마귀

곧 마귀의 대마왕 마귀들의 대왕이 씌여서 병자를 고친다고 하겠냐 말이죠.

너무 너무 안 믿겨지기 때문에 인간의 믿음을 다 동원해서 나온 해석이 예수는 바알세불 대마왕이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해석법을 가지고 있으니

이 시편 109편을 못 보는 겁니다.

그냥 외우는 것으로 지키는 것으로 때운다 말이죠.
중언부언

이게 마귀들의 해석법입니다.
다른 해석 자체를 할 줄 모릅니다.
무슨 해석을 해도 이 해석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시편 121편도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하겠냐 말이죠.

그렇다고 바른 해석하자가 아니라
해석 자체를 포기 하자 말이죠.
뭘 해도 엉터리 해석이니 
해석 자체가 나에게 애초 부터 없다. 권리가 아예 없다 라고
해석에게 해석을 맡겨버리는 겁니다. 그럼 해석 당하는 길 밖에 없는 거죠.
그것이 두번째 정독 입니다. 무조건 다 이루심 입니다.

 

이 시편 121편 말씀은 이미 심판 속에 놓여졌다는 전제성이 깔려 있는 겁니다.
이미 심판 속에 놓여진 자가 무슨 해석 권한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뭘 해도 저주 속에 이미 놓여진 겁니다.


그럴때에 마치 욥의 세친구들처럼

그들의 해석법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당연히 욥이 애매한(심판인 듯 심판 아닌 심판 같은) 고난 속에 집어넣임을 당할 때

반드시 욥의 세친구의 사고방식이 등장합니다.

욥이 고난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오지도 않고 들통나지도 않고 계속 숨겨져 나타나지도 않았겠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기 전까지는 이런 욥의 세친구의 사고방식이 들통나지 않듯이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으라 라는 세월호 부모 조차도 외쳤고 늙어 곧 다 죽어가는 인간에게서

그 십자가의 저주 만큼은 외치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본성이 들추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는 이유입니다.
속에 있는 것들 다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에구 에구 에구 너 자신은 못 구하면서 뭐 남을 구원해?

에라이 퉤퉤퉤 라고 침뱉고 제비뽑기하고 장난한다 말이죠.

 

욥이 당하는 저주는 욥 개인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당하는 겁니다.

욥은 꿈에도 몰랐지요.

 

당연히 한세트를 이루기 위해서 욥의 세친구의 모습이
그들 개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치는 모습으로써 한세트를 이루듯이

 

욥은 꿈에도 몰랐던 주님이 숨겨놓은 비밀을

욥이 이길수도 없는 마귀를 주님이 붙이셔서

그 마귀 보란 듯이 게임을 펼치는데 있어서

욥에게 주고자 한 선물은

저주 속에 놓여짐으로써 너가 받는 그 저주를 대신 예수님이 받는다는 것이

선물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놈의 선물이냐 말이죠? 하나님의 저주가 선물이라니!!!

 

자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욥의 세친구처럼 너가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저주를 받는다고

인간의 본성대로 해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해석은 바로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이라는 선물이다는 겁니다.

 

그 선물을 처음에는 오독해서

제발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도록 벽돌로 온 몸에 난 피부병을 끍어대는 겁니다.

그 정도로 저주 속에 놓여진 거다 말이죠.

 

그래서 오독 했습니다. 처음에는

 

처음 구약은 무조건 실패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안그러면 욥의 세친구의 해석법에서 못 벗어나더라 말이죠.

틀린 것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모호하고 의문의 것을 붙잡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두 번째 읽는 것은 다 이루었다 라는 무조건 완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 처음에 읽었을때는 실패였는데

어떻게 그 다음 두 번째는 무조건 완료가 될수 있느냐 라는 것에 해석이 안된다 말이죠.

신약은 해석할 필요가 없이 해석 자체가 덮쳐버리는 겁니다.

해석할 인간이 아예 없기에 말이죠. 그것이 성령이라는 선물이듯이

욥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그냥 선물을 받아버린 겁니다. 해석 한게 아니라 해석 당해 버린 겁니다.

다 이루심의 완료의 해석이 그냥 덮쳐진 겁니다.

 

처음 실패를 수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까 선물이다는 겁니다. 공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어진 것이 선물이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욥에게 주시고자 했던 마귀 보는 앞에서 펼쳐지는 욥에게 주는 선물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선물 달라고 느닷없이 모세가 변화산에서 나타나서 이 말 한마디 하고 사라지잖아요

하도 빨리 지나가서 다시 느린재생으로 돌려봐라 말이죠.

처음에는 오독인데 그 다음은 무조건 정독입니다.

다시 돌려보니

 

주여 죽어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달려 주옵소서 라고 하더라 말이죠.

 

뭔가 생하고 지나간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십자가의 죽음 이였더라 말이죠.

 

즉 모세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단 하나를 요청한 겁니다.

 

마귀의 세가지 요청과 다르지요?

 

주님 죽으시면 안됩니다.

? 돌이 떡 덩이가 되어서 나의 가난한 경제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두손으로 한손은 안돼 반드시 두손으로 딱 밭쳐서

내가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렇게나 이렇게나 사랑받는 자인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셔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죽으시면 안되고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십자가 땍쥐 워이 워이 썩 물러가라

그리고 촛불 집회를 열어서라도 독재자 정치꾼은 다 물러나고]

내가 예수님에게 한 표를 찍어줄테니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셔서

전세계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소서 그러니 십자가에 달려 죽겠다는 생각은 아예 멀리하시고

제발 온천하 만국의 영광을 드릴테니 우리들의 왕이 되소서

 

캬 이거 뭐 이런 놀라운 신앙 봤나요?

마귀가 그 어떤 인간의 믿음 보다 더 끝내준다 말이죠.

다들 이 마귀의 신앙을 따라잡을려고 교회에서 스펙 쌓고 있다 말이죠.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백날 스펙 쌓아 봐라 말이죠.

마귀를 따라 잡을 수 있나

 

그러니 바리새인을 타 넘을 생각 말고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 오신다 라는 이 반칙이 있다는 역설에

기뻐하자 말이죠.

 

그러니 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비웃겠냐 말이죠.

그 예수? 내가 죽였어 라고 자랑하는 놈들이다 말이죠.

그런 해석을 하는 놈들이 이 시편 109편이 예수님과 연관 되는 줄 알고 해석하겠냐 말이죠.

 

그러니 해석을 못하는 겁니다. 다윗이 예수님을 보고 해석해서 나온 찬양이 시편 109편의 저주인데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이 무슨 수로 해석하겠냐 말이죠.

니고데모처럼 밤에 몰래 찾아와서 예수님을 인정하겠다고 해서 소용있냐?

예수님이 거부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구원 주시는 자 마음이다 말이죠.

 

백날 구원 조건 갖추어 보세요

목사들에게만 놀아나는 겁니다.

마음 빼앗기고 재산 빼앗기고

왜 교회를 가냐 말이죠.

딱 들어보면 사기인데

광명한 천사이기에 다 속아요 속아

안 속는다는 것이 기적이다 말이죠.

그 정도로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마귀교회는 마귀 다워야 한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교회 내에서

두 패로 갈라지는 십자가 사건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교회로부터 미움 받는 교회 말이죠.

 

이것이 미움받기로 작정된 에서와 사랑하기로 작정된 야곱을

끊임없이 두 패로 교회로 가르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우는 자가 복이 있다 말이죠

 

(6:21, 개역)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낮은데서 높은 산을 바라보는 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자리에서 도움을 바라보는자

넘어져 실족하여 버림받은 자리에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너를 지키시는 여호와를 바라보는자

모든 환란의 자리에서 네 영혼을 건지시는 자를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 처음자리가 비록 실패의 자리처럼 보이는데 두 번쩨 보게 되니 오히려 감사의 자리였다는 겁니다. 이미 넉넉하게 승리한 완료된 자리 말이죠.

그 자리를 예수님이 마련하신거다 말입니다. 성전이 마련한 자리

바로 성전에 올라가서 부르는 노래인

그 성전이 곧 인물 곧 예수님이신데

비천한 우리를 실패한 우리를 가마 태우듯이 올리셔서 말이죠. 등마 목마 태우셔서 말이죠.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피 용서이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없이

겉으로 하나가 된 조직이 바로 유대교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곧 예수님이 외부에서 개입해서 내부로 투입해 들어오니

얼마나 이 하나됨을 균열시키는 이 예수님이 싫었겠냐 말이죠.

이것도 하나냐 하나 꼬라지 좋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유대인은 이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밀어내는데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아뿔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인줄 몰랐다 말이죠.

그래서 교회지도자 빼놓고 교인들이 예수님에게 다 몰려가니

하나 됨 이라는 동일성이 얼마나 허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을 바짝 바짝 올릴려고

너무 너무 진지하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유대인에게

일부러 안식일날 병을 고치니까

교인 다 빼앗긴다 말이죠.

예배를 방해해요

교회에 덕이 안되요

짤라 내어야지요.

바깥에서 설치고 있으니

자기들 손에 피 뭍히지 않고

원수와 손잡고 예수님을 빌라도 손으로 죽이는 겁니다.

빌라도도 그것을 눈치채로 아무리 말려들지 않을려고 발악을 해도

결국 유대인들에게 말려드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에게 말려들 듯이 말이죠.

 

그러니 애초부터 우리는 저주 속에 이미 있는 겁니다.

앞으로 저주 속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말이죠.

이미 있는 겁니다.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뜻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겁니다.

잠시 보류하는 것처럼 보이지 실상은 이미 심판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럼 왜 잠시 보류하냐? 이방인들이 심판을 알때까지 보류입니다

애이 그러면 보류한게 아니라 보류 안한거네

맞습니다. 어차피 유대인에게는 보류하나 보류 안하나 그게 그겁니다.

그 정도로 이방인을 중요시 여긴다는 겁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시고자 그냥 구원이 아닌

유대인 보란 듯이 구원하시고자 보류라는 이방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미 심판은 끝났다 라는 겁니다. 완료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십자가를

기준으로 펼쳐지는 것이지

인간들이 상한갈대를 꺽지 않아 기회가 주어졌고

잠시 시간적으로 시간을 주셨다고 착각한다 말이죠.

이것은 구원 주시는 자 마음대로가 아니라

마귀의 세가지 요청처럼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의 해석법인 인간본성이지

창조의 근본이 아니다는 겁니다.

 

남은자가 7천명이 그 다음 차례인 정독이지

처음 읽을때는 오독인 실패인 여전히 구약을 연장하는 식의 해석입니다.

 

그 남은자가 이방인일줄 요나는 몰라서 오독을 해서 엘리야처럼 또 자살시위 촛불시위를 하는 겁니다.

이방인이 남은자가 될 줄 유대인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낯설기 짝이 없는 주님의 해석입니다.

그 정도로 십자가의 용서는 우주적이다는 겁니다.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이다는 거죠.

성화론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넘치고도 넘치는 용서인데

어딜 감히 용서를 남 7번 용서라는 오독으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냐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시편 121편은 엉뚱하게 신나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물에 빠뜨려서

낮은 자리에서 높은 산을 쳐다보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자작극입니다. 바로 십자가 저주의 자작극이다 말이죠.

그럼 이 십자가가 나 보다 옳았습니다 라고 나오도록 하시는 선물인 겁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는 지금 낮은 위치에 놓여진

 

마귀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이 있다는 거죠.

그 마귀를 누가 강퍅케 했을까요?

주님입니다. 주님의 자작극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자작극입니다. 십자가 쳐다 보라꼬 말이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욥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어디서 옵니까?

저주 속에서 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

그래서 욥은 재를 뿌리고 자기 생일을 저주 합니다.

밤새도록 끍어대는 것은 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은 꼴 밖에 안된다는 것을

다시는 이 피부병 고쳐달라고 안한다 말이죠.

선물을 참으로 제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부병을 참고 참을수 있는 능력을 받은게 아니라

피부병 이라는 저주가 진짜 너무 너무 감사한 것이였다 라는 제대로 된

두 번째 정독이 선물이다는 겁니다.

처음이는 오독을 해서 이 피부병 저주가 저주인줄 알았는데

은혜였다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빼 달라고 사도바울이 기도했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사랑으로 보게 된

선물을 받은 거다 말이죠.

고통은 고통 따로 기쁨은 기쁨대로 이다는 겁니다.

몸에서 고통이 다 잠식해 버려서 몸을 고통이 다 잠식하는 피부병() 사단가시(바울)

바로 이런 저주인줄 알았는데

그런 저주에서도 잠식되지 않는 몸 속에서 전혀 다른 몸이 따로 있는데

기쁨이 770번 더 넘쳐흐르더라 말이죠.

고통 지수가 10이 사망이고 해산의 고통이 7-8 정도인데

그 고통지수의 기준에 따른 지수로써 수치로써

기쁨의 지수가 7이 아닌 770이다는 겁니다.

나만 고통 받는줄 알았는데 7천명이 이 이방인에게 넘쳐 흐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만 남았아니다 라는 오독은 오독대로 내버려 두시고 실패 할 수밖에 없고

 

따로 7천명이라는 정독이

원인 없는 결과가 신약에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약의 실패를 수정보완 한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이미 다 이룬채로 덮쳐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성화론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은

뒷북치듯이

다 이루었는데

또 뭘 이루어 달라고

떡이 돌덩이 되개 해달라고

아니다 돌이 떡덩이 되게 해 달라고

뒷북치고 있어요

다 이루었는데

막살면 안된다고 뒷북쳐요

 

이게 마귀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마치 시편 121편은 마리아와 한나의 기도처럼

낮은자 높이시고 높은자 낮추시는

이미 완료된 십자가의 완료를 요청하는 기도와 같다 말이죠.

이미 완료되었기에 말이죠.

그것을 이 땅에 펼쳐달라고 전쟁 요청을 하는 겁니다.

저주를 퍼붓는 다윗의 109편 저주찬양처럼 말이죠.

이미 완료되었는데 뭘 자꾸 미완료의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마치 성전 안의 상전을 뒤엎어버리고 채찍으로 양과 비둘기 염소를 쫏아내는 것처럼 말이죠.

 

어디 마리아의 기도 뿐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허물어 버린 돌을 다시 세우겠다는 이 완악한 수건을 쓴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식과 같습니다.

 

(2:18, 개역)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2:18, 새번역) 내가 헐어 버린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나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든(미래완료가 아니라 미완료의 의문을 원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든 그 목적이 주의 사랑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가 아니라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인 바로 헐어버린 바벨탑을 다시 세우는 범법자로 사도바울을 만들고파서

예수님을 범법자로 만들고파서

그래서 막살면 안된다고 하는 거다 말이죠.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냐

십자가 지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도 마리아의 기도도 모세가 변화산에서 나타남도

비싼 향유를 발에 흘려버려 아까운 재산을 허비하는 것도

 

예수님을 장사 치르기 위함인데

왜냐하면 십자가의 저주 만이 죽음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이 기록된 유일한 거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어떻게 해서든 나의 구원을 목적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가고

번제와 제사를 반복하고

그렇게 백날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121:3, 개역)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4, 개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실족케 않게 하실려고 실족하는 그 실족의 중앙 장소

저것도 실족이냐 라고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실족이 가장 심한 장소에 집어넣고

곧 애굽에 집어넣고

 

주님이 너를 지키는 자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졸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무리 크게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곳에 집어넣고

아바 아버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곳에 집어넣고

 

지키지도 않고 원수들에게 내어주는 그 자리에 놓음으로써 지키는 자 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말이죠.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않는다 해놓고서는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아무도 햇빛에 그을린 얼굴을 역겨워서 쳐다볼수가 없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않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밤에 달이 너를 해치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밤에 늑대들이 으르렁 거리면서 달려들도록 밤마다 부르짖는 다윗이 되는 겁니다.

결국 믿음이란 현실은 흑암에 주저 앉은 앉은뱅이고

그런데 성전에 올라가고

현실은 버림받는데 실상은 지키시는 자고

현실은 아무런 대답도 없는데 실상은 아무 대답이 없거든 사랑하는 줄 알아라 너를 우편에 네 그늘이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분명 히브리서 10장의 믿음장에서도 현실은 모세가 바로왕을 보고 도망쳤는데

두 번째 정독은 믿음으로 바로왕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고

뻥을 치는데

이 뻥이 바로 믿음이신 예수님이 뒤집어 씌워서 편파해석을 해버리는 식이듯이

 

버림받았는데 지키시는 자라고 하신다 말이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도움이 온다고 말이죠.

이게 희년입니다.

사망에 주저앉은 앉은뱅이가 성전에 올라가고 즉 성전이 내려온겁니다.

흑암의 백성인 지옥 백성인 이방인이, 소경이, 눈을 뜨게 되는 희년

개같은 이방인이 정작 유대인이 신부가 되지 못하고 이방인이 신부가 되는 희년을

지금 시편 121편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암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

이 자리에 놓여진 자가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데????

 

그 자리에 지금 다윗이 놓여진 겁니다.

즉 이미 완료 때문에 우리는 그 자리에 놓여지는 줄도 모르고

처음에는 오독한 겁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이러기요?

요나도 마찬가지이지요 자살 시위를 합니다.

다 오독한 겁니다.

그 다음에 읽어보니 초과잉의 완료인 7천명이 넘쳐흐르는 겁니다.

나 혼자가 아니야 이다 말이죠

 

?

예수님이 놓여졌거든요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예수님이 먼저 계셔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반대의 자리에 놓여진 겁니다.

이 예수님의 자리

창조의 근본 자리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이 볼수 없는 분을 보게 됩니다.

저 사울왕의 사고방식에 빠져있는 전체 이스라엘 속에서 말이죠.

 

그런데 그 십자가의 저주의 자리가

하나님이 너를 지키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였고

잠잠치 않는 자리였고

버리시지 않는 자리였다는 겁니다.

 

분명 하나님도 독생자 예수님을 버렸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분인

창조의 근원이다 말이죠.

 

하나님 본인이 창조의 근원을 버려도

버려지지가 않는 구체적 보편적 창조의 근본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데

건축자들이 버린다고 머릿돌 안될 리가 없다 말이죠.

(42:1, 개역)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42:2, 개역)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42:3,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2:4, 개역)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8, 새번역)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 42:1-3


결국 마태복음 12장에서는 구원을 선민유대인 보는 앞에서

이방인을 택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해석을 비켜가버립니다.

마치 창세전에 천사가 듣는 것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비밀이야기를 일부러 흘려서

가장 미천하고 가장 볼품없는 인간과의 결혼을 비밀계획으로 삼은 것에

가장 처음의 피조물이고 가장 능력있는 피조물인 천사가 그 비밀담을 듣고

반발해서 쿠테타를 일으켜 마귀가 되었듯이

 

유대인이 하나님과 결혼하는 신부가 될 줄 알았는데

이것이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약의 해석인데

 

그 유대인 보란 듯이 이방인을 자신의 신부를 삼을때에

누가 반발하겠습니까?

 

온유란 모세가 구스 여인을 미리암 보란 듯이 결혼발표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유대인 보는 앞에서 신부 삼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심은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과 결혼하고자 하는

신부 찾기입니다.

아무도 신부가 없더라 말이죠

오히려 맞습니다. 저는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어떤 누구에게도 심지어 유대인 곧 선민사상에 물든 자칭 신부라고 하는 자들에게서도 들을수 없는

 

신랑이 찾는 신부의 고백이 나오더라 말이죠.


오히려 이방인이 앙망하더라 말이죠.

(사 40:31, 개역)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2:4, 개역)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 45:22, 개역)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며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51:5, 개역)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사 60:9, 개역)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사 64:4, 개역)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도 실패

그 실패가 그 다음에는 정독이 되는 겁니다.

이유 없이 말이죠.
이 모순의 간극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에게 까지 나타내셔야 하기 때문에
마귀 보란 듯이 마귀가 봐야 하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봐야 하기 때문에

상한갈대 안꺽고 꺼진 심지 안끄는 잠시 보류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심판하심이 마땅한데 억수로 봐 주신겁니다. 잠시 보류 말이죠.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을 선민사상이라는 마귀사상에 빠진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 보랍시고

유대인을 사단의 회를 아직까정 내버려 두신다는 겁니다.

 

심판인데 이방인은 감사합니다 라고 구원받고

왜 신랑이 찾은 신부이니까

 

심판이니까 저주이니까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거부해서, 창조의 근본을 거부해서 지옥하는 겁니다.

끝까지 자기들이 하나님의 신부이다고 우기는 겁니다.

미리암이 너 같은 위대한 모세가 저런 천한 여자요 새까만 얼굴을 한 구스여인과 결혼하면 안된다는 그 완악함 때문에 말이죠.

그러나 미리암에게 두 번째의 정독이 덮쳐져서

본인이 정작 구스여인처럼 천하디 천한 여인처럼 문둥병이 걸려서

이스라엘진 바깥에 놓여져 모세의 긍휼의 기도 때문에 다시 들어오게 되듯이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은

그 정도로 우리는 올라간다는 반대인 내려가있는 존재이지

신부깜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올가감의 의미 곧 기능 때문에

즉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의사 라는 기능 때문에

우리가 내려져 있다는 사실을 두 번째의 정독 곧 성령으로 인해서

아 이것이 이런 의미구나 라고 알게 하신다 말이죠

의사 되심 때문에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셔서 죄인을 부르시러 오신 겁니다.
이방인 곧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그러니 도움이 먼저(처음)이고 우리는 나중(둘째)에 도움을 바라는 자리에 놓여지고

지키심이 먼저이고 우리는 오독해서 버려짐에 놓여진다고 먼저(처음) 이라고 봤는데

지키심을 바라보게끔 성령으로 두 번째의 정독으로 지키심이 더 중요해서 우리는 버려짐에 놓여진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의 역사상으로는 버려짐이 먼저이고 지키심이 나중인데
묵시상으로는 이 지키시는 자가 먼저 되심 때문에 우리는 버려짐의 자리에 놓여 졌었었었어여야만 했다는 것을 정독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엔 오해했지요.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는데

저분은 우리의 허물을 덮고자 대신 십자가에 올라가셨다는 겁니다.

 

올라

 

결국 성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발로 올라갈수 있는 그런 교회의 계단이 아니다는 겁니다.

성전 자체가 예수님이고 이미 올려져 있고

그런데 내려오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리가 썩은 앉은뱅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이미 높이 올려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타 넘어 오신다는 거죠.

 

오히려 시각적으로 계단을 올라가듯이 한참 높이 올라가있는 존재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입니다.

이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말이죠

 

까막눈이고,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 저런 조건 갖출수 있겠나요?

바리새인을 본적이 없는데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실로암 소경을 자기 신부로 삼고자

즉 두 번째 정독으로 무조건 다 이루시고자

첫 번째 바리새인은 정작 이 실로암소경이라는 죄인일  뿐인데 
예수님이 신부 삼으심의 정독 앞에서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는
마귀가 창세전에 반란을 일으킨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더라 말이죠
.

 

결국 예수님은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기록인 곧 예정인 십자가의 용서 만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첫 번째 오독한 바리새인을 한 세트로 이 실로암소경을 그들 보란 듯이 자기 신부를 삼는 두번째의 정독을 펼치시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태복음 12장은 너무 너무 못땠게 예수님은 안식일 지키는 유대인 보란 듯이

안식일 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고 이방인도 고치시는 겁니다.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어기시는 겁니다.

 

그러니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는 자 보란 듯이

 

심판 속에 놓여진 니느웨 백성은 구원받고

심판이 아닌 이스라엘은 마치 요나가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자 시위하듯이 반발하기 때문에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요구한다 말이죠.

마귀의 두 번째 시험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두손으로 받쳐줌으로써 이렇게 사랑받는 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종교적인 신앙 선민구원자라는 것

이것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다 말이죠.

 

우리는 참으로 감사하게도 그런 성전 꼭대기로 올라갈 구석이 없어요.

너무 낮아서 뛰어내려도 뛰어내린 기분도 안들어서

오히려 민망해서 아예 뛰어내릴 생각조차 없을 정도로

성전이 안 높다 말이죠.
낮아도 너무 낮아요 반 지하 입니다.
뛰어내릴 높이 다운 높이가 1도 안되더라 말이죠.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사단의 가시 조차도 지금 감당이 안될정도로

온 사방으로부터 욥의 세찬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회개하라고 비방받는 판국인데

높이 올라갈 성전이 어디있냐 말이죠.

눈 씻고 봐도 없다 말이죠.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미 교회가 되어버려서

뛰어내릴 그 정도의 대형교회가 아니 소형교회 조차도 없다 말이죠.

배부른 소리인걸 아는데 뭐 ~~~

 

자 그러니 사단의 가시가 감사한줄 알아라입니다.

 

?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을 또 쳐다보게 해주시니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낮았으면 눈을 들어서 산을 보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의 죽음을 보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를 보게 하시는 섬기심입니까?

 

(고후 12:6, 개역)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말이죠.

(또 이 순종을 제사하듯이 또 지켜요 순종하기 손종 지키기로 그게 아니라 순종 그 자체가 덮쳐져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 오독 할 수 밖에 없는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순종이지 우리의 순종이 나은게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의 순종은 계속 제사를 바꿔치기 하는 식으로 의문만을 반복하니 아예 기대하지 않는

그 기대하지 않는 자체가 예수님의 순종이다 말이죠. 그러니 순종할 필요가 없이 순종 그 자체가 덮치는 것이 바로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순종 그 자체인 십자가의 죽음 곧 버림받으심입니다. 우리는 오독했다 말이죠. 버림받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나무에 달려 죽는 자 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인줄 알았는데

모든 인간이 저주 받아 마땅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십자가의 저주 받는줄 몰라봤다는

두 번째의 정독이 성령으로부터 비로소 보게 하시는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던 겁니다.

우리가 미움 받아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서 울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미움의 자리에 놓여진 것이 오히려 이제는 감사하고 기쁨이 되는 겁니다.)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61:3, 새번역)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61:3, 공동)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에게 빛나는 관을 씌워주어라.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어라.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들을 이름하여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라 하여라. 야훼가 자기의 자랑거리로 손수 심은 것,

(61:3, 우리말)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고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며 통곡 대신 찬양을 옷 입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호와께서 손수 심으신 정의의 상수리나무라고 부른다.

(61:3, 한글킹)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을 정하여 그들에게 재 대신 아름다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무거운 영 대신 찬양의 의복을 주어 그들로 주의 심으신 의의 나무들이라 불리게 하여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라.

(61:3, 현대어) 그러므로 슬퍼하는 시온 사람들아, 모두 기뻐하여라! 이제는 머리에 흙먼지를 끼얹거나 베옷을 입고 울지 말아라! 이제는 환희의 축제를 거행하도록 아름다운 옷을 입고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나오너라! 더 이상 근심하며 괴로워하지 말고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운 노래를 불러라. 이제는 온 세상이 예루살렘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울창한 느티나무라고 부르며 여호와의 영광을 드높일 것이다.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라꼬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것만 쳐다보라고

일부러 낮은자리에서 산을 보고 도움을 구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 넣었다 말이죠.

누가 지키는 자인지를 보라꼬 누가 너를 구하는 자인지를 간구하게 만들려고

 

자기 믿음이 자기가 안식일 지킨 그 행함이 너를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너를 찌른 자가 너를 고치는 자인지를 말이죠.

 

구원은 상처를 낸 그 찌른 창에서만 치유가 된다 말이죠.

(욥 1:20, 개역)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 1:21, 개역)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 1:22, 개역)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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