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빛과 어두움)은 십자가를 이길수 없다. 그의 머리를 드심.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시편 110)

 

그의 머리 드심(인자가 들려야 하심)을 욕망하기

 

보편성(제사)은 구체적 보편성(더 나은 제사)를 이길수 없다.

어설픈 빛과 어설픈 어두움은 하나님의 저주 십자가를 이길수 없다.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22:44,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 110:1

(12:36, 새번역)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친히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110:1

(20:42, 새번역)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 110:1

(2:35,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 110:1(칠십인역)

(1:13, 새번역)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 가운데서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110:1(칠십인역)

(5:6, 새번역)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110:4

(7:17, 새번역) 그를 두고서 말하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서, 영원히 제사장이다" 한 증언이 있습니다. / 110:4

(7:21,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맹세로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맹세하셨으니, 주님은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영원히 제사장이다" 하셨습니다. / 110:4

(10:12, 새번역)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 '이분께서는' 또는 '오직 한 번 제사를 드리신 뒤에 영원히' 110:1

(10:13, 새번역) 그리고서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 110:1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종교성이 바로

빛은 어두움을 이길수 없다는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순진한 아이들의 노랫말로

마치 자신들은 빛이고 촛불의 빛처럼

바람 불면 꺼진다 라는 김진태에 반박에 더욱더 남을 이기고 싶어서 말이죠


그 동안 참고 참아서 져주니까 머리 위로 기어오른 독재세력에 맞서서

어두운 독재는 이 촛불의 빛을 이길수 없다고 아이들을 앞장세워 시위를 하더라 말이죠.

 

마치 가룟유다의 하나님 나라 운동인 유대회복운동 아닙니까?


전국민이 사실상 갑질하는 사기치는 국민이 다 되어버렸는데

나 보다 더 사기 잘 치는 놈은 나 보다 더 나쁜놈이기 때문에 견딜수가 없어서

아이들을 앞장세워서 이 아이들도 세월호처럼 빠뜨려죽일려고 하느냐 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시위를 하더라 말이죠.

 

박그네라는 독재 문화도 마귀적이지만 이런 촛불시위는 더 마귀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선악판단 즉 촛불시위는 선이고 박그네의 독재 문화는 악이라는 이 사고방식이

과연 인간들에게 먹혀드는 보편성인줄은 몰라도

주님에게는 안 먹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더 나쁜 부정한 십자가로
더 나은 구체적 보편성을 이루시는 겁니다.
곧 모든 인간이 부정해 버리고 거부하는

십자가를 완성하셨으니까요

 

로마의 독재체제인 빌라도 시스템 곧 박그네 체제와

결국 기여이 그 동안 원수처럼 으르렁 거리면서 촛불시위하던 유대인의 관계가

이 십자가 만큼은 거부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서로의 필요에 따라 손잡더라 말이죠.

 

그런데 자신들의 선악 기준이 보편화를 이룰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거부했던 버렸던 버린돌이

건축물의 가장 초석 처음이자 마지막인 머릿돌이 되는

구체적 보편성이 되었더라 말이죠.

자신들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진리가 안되고
오히려 쓸모 없다고 버린 그것이 옳고 그름보다 더 구체적인 진리가 되더라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고

나머지 촛불집회는 생명책에 기록되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말이죠.

 

주여 주여 제가 촛불집회를 통해서 박그네를 물리쳤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썩 물러가라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더 기뻐하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그의 머리를 드심입니다.

 

시편에서 왜 다윗은 출애굽을 왜 자꾸 반복해서 강조를 할까요?

자꾸 탈출하제

어디로? 예수님에게로

그런데 다윗 자기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니까 탈출 그동안 불가능했는데

이제 보이게 되니까 자꾸 탈출하자 라고 하지만

다른 이스라엘은 사람들 국민들은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 소리는 봉창 뚜드리는 황당한 소리가 되는 겁니다.

 

마치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라고 하니까

자꾸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주님은 운운하시더라 말이죠.

틀린 말이 아니라

주님은 보이지만

우리는 안 보이는데

보이는 가능성의 이야기를 해야지

안 보이는 불가능성의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되냐 말이죠. 단절이지

 

바로 이 단절성을 느끼라고 외치는 것이 성령의 외침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자꾸 출애굽을 외칩니다.

언제적 이야기인데

그런데 다윗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라고 외친다 말이죠.
즉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보편성일 뿐이지 구체적 보편성이 아니다 말이죠.

역사적 사건이 아닌 묵시적 사건이기에 미래완료를 소급해서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서로가 얼마나 소통이 안되냐 말이죠.

그래도 다윗은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출이스라엘 하자 라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이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가 애굽이다는 겁니다. 마귀본부 이라는 거죠.
강도의 소굴에서 출교회 하자 라는 겁니다.
 

그럼 나갈때 누울 자리를 보고 뛰어내려야지 무턱대로 뛰어내리면 뒷감당은 누가 하냐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묵시적 사건이다는 거죠.

이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왜 나가지 못하느냐 하면 아직까지 지옥으로 애굽으로 안보이는 겁니다.

설사 애굽이라고 손쳐도 자기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아직이다는 거죠.

만약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면 당장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는거야 당연하죠

그러니 아직 버텨볼 때 까지 버텨보는 겁니다.

그리고 가고 깊은 곳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만약 더 좋은 곳이 보이면 당장 떠납니다.

여건이 안되니까 말이죠.

이래 저래 따져보면 아직 시기상조 이다는 거죠.

 

그렇다고 주님은 곧 다윗은 멈출수가 없습니다.

그건 그거대로 나는 나 대로 일단 먼저 본 자로써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 이것이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참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보이니까 기능이 덮쳐지니까 어쩔수가 없다 말이죠.

더 좋은 이스라엘 곧 새이스라엘을 봐 버린 겁니다.

새이스라엘이 덮쳐졌다는 거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아예 쳐다보지를 않는 겁니다.
아예 미련이 없는 거죠, 더 좋은 것을 봐 버렸으니 의문의 이스라엘을 가차없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멸망을 외치고
.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문자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멸망이 없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외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사수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머리를 드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또다시 바벨론에 탁란하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성령의 은사는 사랑이 바로 에로스입니다. 즉 결혼 입니다. 신부찾기 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 말이죠.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러나 마귀가 외치는 성령의 은사는 아가페입니다. 평강 평강을 외치는 겁니다. 
희생하라입니다. 희생(아가페)은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유대인의 해석이 여기를 못 벗어나는 겁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때에

너는 아가페야 그러니 어서 굻어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돌이 떡덩이 되게 해

너는 아가페 메시아야 그러니 성전 아니 그냥 성전이 아닌 거룩한 성전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너를 두 손으로 받쳐서 발이 상하지 않게 할 거야 왜? 너는 그런 기적을 베푸는 메시아 이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야

너는 아가페 왕이니까 나에게 절하라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줄테니 마음껏 아가페를 펼쳐라

 

이것이 마귀 곧 광명한 천사가 외치는 성령의 은사 아가페이다 말이죠.

오늘날 성화론자들 주장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명한 천사는커녕 오히려 괴팍하기 짝이 없는 에로스 은사를 펼칩니다,.

곧 사랑의 폭력입니다.

 

니 뭔데 하나님을 시험하니 오직 하나님 말씀만 들어라 라고 말이죠.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즉 선악은 기록되지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마귀들은 기록되지도 않은 말씀을 말씀이다고 우깁니다.

그것도 문자라는 증거물을 가지고서 말이죠.

이 문자주의가 세대주의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뭐 안식교라든지 뭐 그런 이단들 말이죠.

 

유대인이 그러한 해석에서 못 벗어나는데

오히려 안식교 욕하면서 요일만 바꾸었지

주일성수교 라는 이단들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주일성수교 요? 오늘날 모든 한국교회가 그러합니다.

똑같은 문자주의입니다.

그렇다고 의역 곧 껍데기가 아닌 진짜 속내의 뜻을 알기에는

모든 자들이 이미 단절된 상태 이다 말이죠.

성경박사가 되면 좀 달라질줄 알았는데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독재가 되어버리고

독재가 되면 그 독재와 맞서서 가룟유다와 같은 민주주의 운동 인간성 회복 운동을 펼치는

촛불시위를 하는 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인 거죠.

그러다가 정권 바뀌면 그 민주주의를 외쳤던 놈이 또 독재가 되고

또 다시 의문의 반복의 제사인 민주주의를 외치는 촛불시위를 하는 놈들이 생기는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의문의 반복이지 마침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민주주의 라는 꿈을 현실이 되게 할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라는 꿈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보편성일 뿐이지 그냥 제사일 뿐이지

더 나은 제사 곧 구체적 보편성이 아니다 말이죠.

생명책에 기록이 되지 않은 겁니다.

 

마귀가 요구하는 시위는 그냥 꿈같은 허구인 보편성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는 또 의문의 반복이 된다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은 그런 의문의 보편성과 족히 비교도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신경 조차도 안 쓴다 말이죠.

 

독재 백날 되어봐라

7천명이 남아 있다 말이죠.

 

오히려 개같은 이방인이 이 7천명의 구체적 보편성을 누리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완악한 수건을 벗지 못하니까

7천명을 못 누려요 글쎄

 

엘리야를 죽일려는 이세벨 보다 엘리야는 자기가 적어도 이세벨 박그네 보다 나은 인간이고

적어도 최순실 보다 괜찮은 인간이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문의 보편성만 완악하게 주장하지

 

구체적 보편성인 7천명을 못 누린다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집요하게 엘리야를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그런 마귀를 무슨 수로 이깁니까

그러니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하나님 이렇게 배신 때리기요?

배신은 무슨 배신 자기가 배신해 놓고서 말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심지어 엘리야 선지자도 다윗도 모조리 다 애굽에 갇혀 버린 겁니다.

마귀에게 갇혀버린 겁니다. 그러니 몸부림 치는 거죠. 촛불시위로

그런데 엘리야에게 다윗에게 저런 되도 않는 의문의 촛불시위가 아닌

더 나은 십자가를 보여주게 되니까

졸지에 부끄 부끄 부끄

방금 내가 한 말 취소 취소 취소

주님 제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지요 라고

방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짖을 한지 3초도 안되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거짓말을 하더라 말이죠.(거짓말의 행함이 있는 믿음 기생라합 야고보서)

(2:25, 개역)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도대체 십자가를 보니까 왜 이런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인간의 최선책인 하다 하다 안되어서 마지막 발악으로써 최후의 행동이 바로

촛불집회인데 그것이 나의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더라 말이죠.

나의 죄를 이길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용서 밖에 없는데

그것만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 이후로 다윗은

방금 밧세바를 취하고

방금 그것을 모래로 덮어 숨기고자 우리야 고의적으로 죽여놓고

방금 밧세바 우리야를 모래로 덮고자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회개 기도 금식 눈물을 흘린다 말이죠.

 

과연 그런 의문의 것이 아이를 살릴수 있을까요?

과연 나의 죄를 씻을수 있을까요?

택도 없습니다.

 

어두움이 충분히 어둡지 못했어요

빛도 빛이기는커녕 인공조명처럼 충분히 빛답지 못했어요

 

어설픈 회개 눈물 금식 기도라는 빛같은 행동 선한 행동이 과연 선이라면

아이를 살려내어야지요. 나의 죄를 씻어내어야지요.

주님 안 들어주십니다. 결국 주님 탓하지요.

그게 무슨 선이고 그게 무슨 빛입니까?

충분하지 못한데

 

어두움? 뭐 박그네가 어두움이라고? 최순실이가 어두움이라고?

근처도 못갑니다.

적어도 주님이 강퍅케 해야 어두움 근처로 갈까 말까인데

 

그래놓고 그 어두움을 이기겠다는 어둠 근처도 못한 충분하지 못한 어두움을 보고

어두움을 이기겠다는 빛을 주장해요? 얼마나 어설픈지

오히려 그 선이 그 빛이 어두움이랑 너무 너무 닮았다 말이죠.

선과 악이 결국 하나 이더라 말이죠.

빛과 어두움이 결국 하나이더라 말이죠.

그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보는 시각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해석에서는 십자가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 그냥 버립니다.

? 선이 악을 이겨야 하는데 선에 쓸모가 없다 말이죠.

빛이 어두움을 이겨야 하는데 빛에 십자가는 쓸모없다고 버려버린다 말이죠.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는 이 선이 있으니 이 빛이 있으니

무슨 놈의 십자가가 필요가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의인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듯이 십자가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 의문의 보편성에 아직까지 안 속은 사람은

다윗이 왜 저렇게 외치는지를 이해를 못하면

의문의 보편성에 속아본 사람은 다윗의 외침을 듣게 되지요.

 

이스라엘은 이해도 못하면서 다윗의 시편 110편을 외침을 볼 마음이 없이 그냥 외워요

이게 더 나빠요 나빠

 

그러니 박그네 독재로 나쁜 어두움이지만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판단하고 빛을 외치는 촛불 집회자들을 보면 독재 보다 더 나쁜

바리새인과 같은 마귀자식들이다는 겁니다. 똑같은 놈들이 서로 마주 보면서

서로가 나쁘다 라고 외친다 말이죠.

여기에다고 오늘 2017년 첫 촛불집회에 세월호 가족까지 앞장세워서 시위를 하겠데요

우와 이 완악함의 수건을 누가 벗겨줄까요?

아무도 못 벗겨준다 말이죠.

마귀가 그 수건 하나 만들려고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그 정도로 광명한 천사인데 말이죠.

 

그 완악한 수건에 속아본 자 만이

곧 다윗이지요.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친 자신의 정의로움에 자기가 속아보니까

아뿔가 이게 아니구나 이것은 쥐뿔도 그 어떤 생명도 살릴수가 없구나

세월호 가족들은 죽은 가족을 더욱더 물에 빠뜨리는

이 촛불시위 참가자들과 같이 죽은 사람 더 죽이는 꼴이다 말이죠.

그렇다고 독재가 옳다고 한적 없어요. 저들은 저절로 망하도록 되어 있는데

자꾸 손대면 손댈수록 더욱더 커지는데 그것을 저들은 바란다 말이죠.

설사 기여이 박그네를 최순실을 물리쳤다 드디어 빛이 이겼다고 외쳐보세요

더한 놈이 나타난다 말이죠.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일이다 말이죠.

 

자신의 선함에 자기가 속아 봐야 그 선함이 그 빛이 거짓인줄 알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백날 해봐요 죽은 아이가 살아돌아오나

 

그의 머리를 드심이란

곧 잃어버림 속에서 되찾음은 오로지 율법 네 배나 갚으라도 아니요.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고자

내 눈물 내 금식 내 회개 내 기도로는 절대로 못 살립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럼 뭐 어쩌라고

아이가 아닌 저를 이 다윗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이 다윗을 불쌍히 여기기 위해서

아이를 대신 죽인거다 말이죠.

박그네가 죽인게 아니라

세월호 부모를 불쌍히 여기기 위해서 말이죠.

부모를 불쌍히 여기기 위해 아이를 죽인거다 말이죠.

이것이 7천명이라는 구체적 보편성입니다.

 

자기 때문에 죽은것도 모르고 박그네 탓하면 되겠냐 말이죠.

박그네를 탓해서 살려낼수 있다면 제가 동의를 하겠다 말이죠.

박그네 수천명 죽여보세요 아이가 살아돌아오나

안 돌아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의문의 헛된 짓을 마귀에게 속아서 하냐 말이죠.

 

세월호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왜 오래전에 유치원 아이들 놀러간 수영장에서 화재가 나서 죽었잔아요.

안 살아 돌아옵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자기가 눈물로 기도한 아이가 살아돌아오냐 말이죠.

좀 매정하고 차갑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십자가라는 머릿돌을 우리는 그 동안 버렸다 말이죠.

버린다고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머릿돌 안 될줄 압니까?

 

오히려 넉넉하고 충분하게 넘치도록 머릿돌이 됩니다.

오히려 그것 보라고 아이들이 죽은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회구조 인간의 사고방식 국가체제

국가안전망을 탓해본다고 안 살아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2살 밑으로 아기가 다 죽었습니다.

모세가 등장해야 하기 때문에 2살 밑으로 아기가 다 죽습니다.

부모들은 망연자실하지요.

 

어디 하소연 할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여기서 원수 갚아달라는 보이지 않는 원수를 등장시키는 겁니다.

보이는 원수는 원수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의 사고방식이 세월호 부모나 독재 박그네나

지금 저나 여러분이나

뭐가 다르냐 말이죠.

 

그러니 원수 갚아달라는 소리가 안 나온다 말이죠.

그것을 알면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원수가 아니라

그렇다고 하나님의 원수도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원수 곧 건축자들이 너나 여러분이나 버린 돌이 머릿돌 됨으로써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그의 머리 드심이다는 겁니다.

 

안그러면 이 원수 문제 흐지브지 그냥 돈 받고 보상금받고 다 잊어버리는

그 정도로 원수 문제 또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이런 것은 예민하지도 못하면서

촛불시위는 왜 그렇게 예민하냐 말이죠.

 

그래서 제대로 해결해 달라고

내 손에 의해 버림 받은 분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 바로

그의 머리 드심 곧

애굽 속에 집어넣어

 

그 애굽 곧 원수를 주의 발등상에 놓고자

우리 자체를 미끼로 삼아서

 

인자가 높이 들리게 하심이다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인자가 높이 들린 그 인자의 오른팔에 다윗이 붙잡혀 있으니

 

다윗은 마치 사울왕의 손에서 건짐받아서

한 쪽 강도처럼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죽는 마당에 외친다 말이죠.

 

누가? 한 쪽 강도가 아니라 다윗이 말이죠

 

그러면 다른 한 쪽 강도가 비웃습니다.

어차피 죽는 마당에

어차피 내가 이 이스라엘 다 개판으로 만들어 놨지 라고 사울왕이 비웃는 가운데

 

예수님이 이 말도 안되는 말을 외치는 다윗에게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동의를 사울왕 보란 듯이

오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네 네네네 라고

 

그럴줄 알고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도록 해놨지

 

사울왕 왈 그럴줄 몰랐넹 라고

 

에로스를 구체적보편성으로 이루신다 말이죠.

 

결국 바로 이 그의 머리를 드심이 구체적 보편성이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거다 말이죠.

 

다른 것은 기록되지도 않은 것이기에 의미를 두면 안된다 말이죠.

말씀에 기록되지도 않은 것을 왜 신경쓰냐 말이죠.


다윗은 욕망하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 드심을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남을 7번 용서하는 것

내 열심히 특심인 것

그딴 헛된 허상을 욕망한다 말이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를 욕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어두움은 빛을 이길수 없다 라고 남을 7번 용서하는 것을 욕망하시겠습니까?

 

제대로 된 구체적 보편성인 남이 아닌 내가 770번 용서 받는 것을 욕망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그의 머리 드심을 욕망하는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의 머리 드심 곧 잃어 버렸다가 되찾는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선악은 이길수가 없는 겁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합시다.

 

어두움은 빛을 이길수 없다가 아니라

어두움은 십자가를 이길수 없습니다.

 

어두움 보다 더 나쁜 빛의 아들들의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빛은 이 십자가의 용서를 이길수 없습니다.

 

빛은 십자가를 이길수 없습니다.

 

? 십자가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것이기에

 

인간은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두운 죄인들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자칭 빛들은, 광명한 천사는 이길수 없습니다.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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