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보좌인 다윗 집의 보좌 (시편 122)

 


(
122: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2, 개역)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122:3, 개역)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122:4, 개역)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122:5, 개역)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122:6, 개역)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122:7, 개역)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122:8, 개역)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122:9,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율법이 시온에서 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 기준이 바로 보좌 하나님의 보좌가 바로 다윗의 집이라는 보좌에서 이것을 완성하겠다는 겁니다
.

 

여기서 왜 다윗이냐 라는 점과

그리고 다윗과 다윗의 집은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먼저 왜 다윗이냐 하면 바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다고 했을때에

구원이 바로 시온에서 온다는 겁니다.

 

(14:7, 개역)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그럼 율법이 곧 구원이다 라는 뜻이냐 하는 점인데

율법이라는 거룩이 구원인데

먼저 깔려있는 전제성이 뭔고 하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된 것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 말이죠.

결국 거룩한 인간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라는 율법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나, 국가나(바벨탑:구원의 탑), 그 어떤 존재도

맞습니다 저는 마땅히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증거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하시는 율법의 가입 때문입니다
.

즉 인간이 자기 스스로 죄인입니다 라고 할 인간은 없다는 거죠.

오로지 성령이 임한자 만이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도록 되어 있고

악령이 들어간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못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신을 의인 만들기에 매진하고 곧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활동에 집중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트릭으로 종교세계에서는 그렇게 해야 생존할수 있습니다.

어쩌면 구원이야 말로 인간의 꾀가 발동하는 근본원인이 되는 거죠.

구원이 없다면 왜 꾀를 부리겠습니까?

그래서 의인이 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모든 분야가 종교화 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구원이 목적이기에

당연히 죄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죄인입니다 라고 해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까지 안합니다.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하면 종교의 세계에 드디;어 입문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종교는 대환영으로 받아 줍니다.

죄인 하나가 돌아와서 탕자로써 회원가입이 되니까

그래야만 로그인이 될수 있거든요.

안 그러면 들어갈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막상 로그인 해서 들어가게 되면

마치 세속의 자본주의를 배격하는 종교(근본주의)

오히려 자본주의 보다 더 자본주의로써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더라 말이죠.

회원가입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면서 말이죠.

 

어느쪽 종교가 가장 회원이 많냐 로써 유지되더라 말이죠.

넌 어느 종교에 회원가입 했니? 라는 식 자체가

세속을 유지시키더라 말이죠.

 

그러니 마치 종교세계에서의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 또는 회개는 일종의

회원가입해서 로그인해서 들어갈수 있는 일종의 문자요 기호이다 말이죠.

패쓰워드

이것이 바로 유대인 곧 사단의 회입니다.

유대교가 대표성이기에 나머지 종교는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렇게 유대인 용어로 로그인해야만 유대인의 세계 종교의 세계

곧 바벨탑에 로그인해서 들어갈수가 있다 말이죠.

안그러면 문 앞에서 가로막혀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비밀번호를 넣어야 패쓰 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런 유대인 사회에서 오히려 로그인해서 들어간 회원임에도 불구하고 탈락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탈락한 것이 실패인줄 알고 이제 유대인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할 판국인데

오히려 다윗은 유대인에게 도리어 탈출하자고 외칩니다.

자기민족을 자기가 배신하는 마치 기생라합의 행함이 있는 믿음과 같다 말이죠.

마치 이 세상을 어서 어서 탈출하자 라고 외치는 식이다 말이죠.

 

종교세계 유대인 세계 사단의 회 세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죽는 것 외에는 없다 말이죠

그런데 죽지 않고 어떻게 탈출하냐 말이죠.

죽는 것 뻔한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하무인격으로 다윗은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과 다윗의 집은 같지 않고 다르다고 했는데

다윗은 바로 다윗의 가문의 다윗의 자손을 보고서

이런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입니다.

미친소리로 취급받을 수 밖에 없는 외침이다 말이죠.

 

마치 일본의 오움진리교의 집단자살 그리고 미국의 이단종교의 집단자살을 주장하고 있는 듯이 말이죠.

미친 듯이 다윗은 다윗의 자손을 쳐다보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누구를 향해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이죠.

죽어라고 무조건 고 go 하듯이

죽어라고 출애굽을 외치는 출이스라엘을 외치는 다윗이다 말이죠.

 

? 다윗이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버렸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 증상물이 다윗입니다.

다윗 자손의 보좌의 증상물

그러나 이제 다윗은 더 이상 다윗이 아니지요.

스피커입니다. 소리입니다.

이것을 찬양이라고 합니다.

찬양을 깨는 찬양

입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벙어리의 찬양이 진짜 찬양으로써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찬양

아무도 듣지 않는 소리를 외치는 소리

소리 없는 소리 이다는 거죠.

 

마지막 날에 시온에 불이 나온다 말이죠.

율법이 나옵니다. 심판이 나옵니다. 거룩이 나옵니다.

거룩한 불이 모조리 다 불살라 버린다 말이죠.

안 타죽을 인간이 없어요 다 타죽어요

타 죽어야만 하는데 그 불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도 안 타죽는 자들이 있는데

본인들도 이해가 안될 정도로 안 타죽는 자들인데

바로 다윗이다 말이죠.

이 다윗이 오히려 제일 먼저 타 죽어야만 한다고 모든 이스라엘이 다윗아 죽어라 라고

외치는 가운데

오히려 다들 타 죽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안 타죽는 자가 다윗인데

다윗 본인도 놀라서 그 원인을 알아 보니

 

바로 다윗의 가문의 다윗의 자손 때문에 안 타죽는다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아 안 타죽으니까 나는 행운아야 라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 불이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오히려 이 불을 지르고 불 내고 다니는 자이다는 겁니다.

마치 대구 서문시장에 누가 자꾸 불지르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나는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불을 지르러 왔다는 겁니다.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12:49, 개역)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개역)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12:52, 개역)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12:53, 개역)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12:49, 새번역)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12:49, 공동)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12:49, 킹흠정) 내가 땅에 불을 보내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49, 한글킹) 내가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으나 만일 이미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12:49, 현대인)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이 불이 벌써 붙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12:49, 현대어) [불을 던지러 왔다;10:34-36]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나는 불이 이미 붙어 있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그럼 그 불 지르러 다니는 미친놈을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누가?

죄인이어야만 로그인 되는 유대인 곧 사단의 회에서

죄인인 이 다윗을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죄인 중의 죄인이니

앞의 죄인은 충분히 죄인이 아닌 셈이기에

죄인들에게서 죄인 취급 받는 다윗이 충분히 죄인인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죄인으로써

이 이스라엘을 탈출 출 이스라엘 하자 라고 계속해서 출애굽을 반복해서 외친다 말이죠.

 

그러니 이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가장 큰 형벌인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해야 한다 말이죠.

 

맞죠 하나님! 저 다윗을 죽여야지요?

내 말이 ~~~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사실상 유대인이 예수님을 또는 다윗을 또는 참선지자가 죽이는게 아니라

도리어 유대인을 죽이는 겁니다. 불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시온에서 불이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는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유대인 곧 이스라엘은 불을 피한게 아니라

본인들이 스스로 불을 지르는 식으로 예수님께 불을 퍼붓고

예수님을 피할려다가 오히려 불을 만난 꼴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도 불을 안 지르고 다니니까 말이죠.

이스라엘의 역할이 뭡니까? 불 지르러 돌아다니는 역할 아닙니까?

그런데 불 안지르고 싶어

너무 너무 아까워

불로 잿더미로 만들기에는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것이 너무 너무 많다 말이죠.

노아 때는 물로 심판해서 싹쓸이 했는데

불로 다 불태워 버려야 할 이스라엘이 그만 새것 보다 옛것에 미련을 두더라 말이죠.

그래서 그런 이방 문화를 수입해서 다 들어오게 되니

이제는 아예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 보다 더한 이방이 되어버린거다 말이죠.

 

이스라엘이 귀신 잡는 해병대인데 하나님의 군대인데

졸지에 마귀의 군대가 되어버린거다 말이죠.

 

그럼 주 여호와께서 손해 봤네

이스라엘이 마귀의 본부가 되어버렸으니

아니지요 오히려 그 이스라엘을 불질러 버리면

마귀의 본부인 예루살렘이 머리 로써 본부로써 짤리는 셈이 되니까

오히려 더 잘 된거죠.

 

주님이 손해 본게 전혀 없다 말이죠.

 

도리어 마귀는 이스라엘의 머리인 본부(중앙)를 차지하게 되니

하나님을 이겼다고 좋아라 했겠지요.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더 잘 도와준 꼴이다 말이죠.

설마 이스라엘을 칠 줄 몰랐다 말이죠.

아니 독생자도 버리는 판국에

이스라엘 버리는게 무슨 대수겠냐 말이죠.

 

자 그럼 이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역순으로 가보자 말이죠.

바로 예수님이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그 예수님이 자기 백성 자기 나라에서 버림받듯이

이스라엘백성으로부터 심판 받아 죽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다 말이죠.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다 말이죠.

심판을 행한자로부터 심판의 기준을 세우심이다 말이죠.

참으로 어리석은 십자가 심판이지요. 헬라인에게

참으로 거리끼는 십자가 심판이지요. 유대인에게 말이죠.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누가? 격습니까?

다윗이 격습니다.

다윗은 왜 격습니까? 다윗의 자손 곧 다윗의 집 보좌 때문에 격습니다.

이것이 약속 곧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약속 때문입니다.

 

그럼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는 약속이 시온에서 나오고, 시온에서 약속이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그 약속이 예루살렘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는 겁니다.

장소 공간의 시온이 아니라 약속사건을 시온이라고 한다 말이죠. 바로 예수 안에서 말이죠.

곧 전쟁으로 인해서 거룩한 전쟁이지요.

거룩이 전쟁을 벌려서 그 전쟁에서 포로된자 갇힌자 눌린자를 자유케 하는 구원을 이루는 겁니다. 약속 성취입니다.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누구? 이스라엘!

그런데 이스라엘이 발로 차 버립니다.

손해 되고? 약속이 안 이루어지느냐?

오히려 더 잘 되었습니다.

이방인이 새이스라엘로써 너희에게 이루어졌다는 말씀이 성취 됩니다.

줘도 못 먹는 유대인만 손해 본 거죠.

바로 십자가의 전쟁의 다 이루었다로써

전쟁에서 전리품으로써

심판 속에서 구원으로

빼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구원 받은자가 바로 다윗이니

이 다윗은 미친 듯이 불 지르고 다니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을 불 태우는게 아니라

그런 불은 생명도 못 죽인다 말이죠.

오히려 다말에게서 나온 불이 시아버지 유다를 홀라당 다 불태워 버립니다.

죄악을 아무 조건 없이 다, 모든 허물을 불 태워 버립니다.

 

출애굽하자고 출이스라엘 하자고

출 교회 하자고

이렇게 다윗은 외칩니다.

 

이스라엘에서 출교 당한 다윗이 출교 벌써 당했고

아니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도 이미 벌써 출교 당하는 운명처럼

출이스라엘(출애굽)을 외치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출교 시키는 것은
(이 노선에 참선지자들이 다 동원이 됩니다. 이스라엘 멸망)


오로지 다윗의 집에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봐 버렸기에(십자가의 언약 성취)

흔들어 버리는 겁니다.

요동치게 하는 겁니다.

불 질러 버리는 겁니다.

 

자 그럼 출애굽 사건이 또 벌어지는 겁니다.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 말이죠.

애굽이 흔들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흔들리는 겁니다.

? 보좌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문의 보좌 곧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

구원자이기 때문에

이 구원자 땜에 애굽이 흔들려야 하듯이

애굽화 된 이스라엘이 흔들려서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10가지 재앙이 벌어져야만 하고

또 홍해를 건너야 하는 사건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가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는 자체가

졸지에 세례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곧 세례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그 다 이루심을 성령으로 인해 부어주시니 말이죠.

 

그래서 세례 받은 자가 다윗의 보좌로부터 부음받은 다윗이

외치는 겁니다.

세례 받자고 즉 홍해를 건너자고

물세례를 받았듯이 죽음을 통과하자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자고

이 구원사건을 누리자고 말이죠.

십자가를 지자고 말이죠.

 

이게 말이 됩니까?

이 노선을 참선지자들이 같이 주장하다가 죽습니다.

 

유대인들도 안 믿겨져서 참선지자들을 죽이는 판국에

우리들이야 당연히 안 믿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을 오늘날에도 죽이고 있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말이죠.

 

왜 불이냐? 명료하고 인간이 막을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거짓선지자들을 우리는 따르고 있는데

그 거짓선지자가 영원하면 참 좋을지 모르겠는데

이놈의 거짓선지자들도 얼마 가지 않아서 최순실이 박그네처럼 다 죽더라 말이죠.

 

한숨 아휴 큰일났데 이러다 다 죽어 ~~~


요즘 최순실
song이 유행하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K2z1y-zW7Vs







도대체 우리를 누가 인도해 주냐 말이죠
.

참선지자도 다 죽고

거짓선지자도 다 죽는 판국에 (노무현, 박그네, 최순실이도 다 죽어 ~~~)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다는 겁니다.

 

정작 구원은 바로 이런 심판을 부어버리는 다윗의 보좌 곧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나를 찌른 칼이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구원이다 말이죠.

주신 이도 여호와 시요 취할 이도 여호와 시요.

 

왜 이런 사건들을 벌리시냐 말이죠.

이것을 사랑의 폭력성이라고 하는데 바로 에로스인데

나만 바라보라는 겁니다.

얼마나 시기와 질투가 여호와의 불처럼 맹렬한지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다 라고 한다 말이죠.

에로스는 남녀간의 사랑인데 그냥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깔고서 맹렬하게 퍼붓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혼인 잔치다 말이죠.

그럼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거죠.

결혼을 꼭 마귀 보란 듯이 펼치겠다는 겁니다.

임금님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벌린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래서 폭력적이다는 겁니다.

혼인 잔치, 에로스 잔치이다는 겁니다.

예루살렘과 결혼 하시는 겁니다.

장소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자들과의 혼인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낳은 자를 신부로 삼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을 깔아야지요.

 

보좌에서 모든 땅을 흔들어 버리는 겁니다.

? 구원이 이 보좌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 심판 조차도 카페트 배경으로 깔리는 겁니다.

구원을 더더욱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럼 구원사건은 시온에서 나오고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즉 거룩전쟁은 시온에서 나오고

그 전쟁의 종결인 평화가 이루어지는

혼인잔치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드디어 결합이다는 거죠. 바로 십자가는 예루살렘에서 달리시는 겁니다.

 

사랑의 완성이다 말이죠. 율법의 완성

 

이 둘 사이의 간극이 중요합니다.

꼭지점인 시온과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두 꼭지점의 변이 되는 이 사이가 바로 보좌

곧 다윗의 자손이라는 인물이

이 양 꼭지점을 찍어서

그 간극에서 이 일을 벌리신다 말이죠.

사건이 곧 인물인데

이 인물이 그 빈공간이라는 3일이라는 간극에서 나오듯이 말이죠.

 

다윗은 그래서 다윗의 보좌를 외치는 겁니다.

그 개시가 시온이다 말이죠.

구원이 곧 거룩한 전쟁이 시온에서 벌어지더라 말이죠.

이것을 구지 공간이라고 볼게 아니라

그냥 사건이라고 보시면

그 공간을 인간들이 차지하고 그 자리에 놓여져야만 이해하게 되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

시온 자체가 그들에게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말이죠.

지금 이스라엘 땅 시온에 가야 기온이 아니다 말이죠.

마치 십자가 사건이 구지 예루살렘에 가야만 벌어지는게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도록 되어 있듯이

어떤 곳이든 예루살렘이 된다 말이죠.

시온도 마찬가지이구요.

구원사건이 벌어지는 곳이면 말이죠.

그러니 인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성도가 있는 곳에서는 성령이 벌리시는 십자가 사건이 언제든지 벌어지는데

바로 그곳이 시온이고 예루살렘이 된다 말이죠.

유대인 곧 사단의 회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소리죠.

자신들이 장악한 공간만을 특화 했는데

딴 곳을 시온이라 예루살렘이라고 해 버리면

왜 자기들이 차지할려고 그렇게 애를 썻겠냐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언제 떠난지가 언젠데 아직도 말이죠.

이미 기차는 떠났는데

 

사실상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라

즉 믿는다는 것은 곧 오히려 거부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믿음은 차라리 반발하라 말이죠.

난 안 믿을 거야 라고 말이죠.

아무리 안 믿을려고 발악을 함에도 불구하고 믿겨지는 그것이 믿음이지

난 반드시 믿고야 말 거야 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거부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대표적인 자가 가룟유다 아닙니까

오로지 유대인의 독립해방만을 위한 마음 하나로 끝까지 믿었다 말이죠.

그런데 믿을려고 하는데 왜 죽냐 말이죠.

그럼 믿음이 없어져 버리는데

무슨 놈의 대상이 있어야 믿는데

그 대상인 예수가 자꾸 죽겠데

죽어 버리면 믿고 싶어도 못 믿고

더 중요한 유대인 독립은 어떻게 되냐 말이죠.

공중 분해 되어버리니

그 꼴 당하기 싫어서 배신한다 말이죠.

결국 아무리 믿을려고 해도 안되더라 말이죠.

내 쪽의 믿음이 문제가 아니라

믿겠다는데 그 믿음의 대상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겠다고 하니

더 미운 겁니다.

차라리 내가 죽여 줄게 라고 말이죠.

끝까지 자기 믿음을 포기 못하는 모습이 가룟유다의 모습이였다 말이죠.

오로지 이스라엘의 독립 땜에 말이죠.

부자 청년과 똑같아요 절대로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 못 버리기 때문이다 말이죠.

 

베드로 보세요 바로 장 지집니다.

바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버립니다.

바로 죄인이 되어버립니다.

끝까지 믿는 자로 남겠다고 우겨도 그 믿음 홀라당 개나 줘 버려가 되는 겁니다.

 

결국 믿음은 다윗의 보좌에서 나오는 거지

인간의 믿음이 아니다 말이죠.

그럴꺼 같으면

율법이 인간에게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인간의 믿음에서 나온다고 하면 되지

말라꼬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시겠냐 말이죠.

 

잘난 인간들의 믿음이 이렇게 좋은데

 

결국 인간의 믿음을 쓰레기로 본다는 겁니다.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자 치고

마귀 아닌 놈들이 없더라 말이죠.

 

차라리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핍박하던 자 이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런 자는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 뒤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시잖아요 라고 말할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죠.

 

얼마전에도 스쳐지나가는 생각 중에

왜 율법이 가입하기 전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을 반칙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율법이 가입 되고 난 뒤에 믿음의 조상이 과연 될 수가 있었겠냐 말이죠.

 

눈치 채셨나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어기라고 준 겁니다.

즉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래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올 때

베드로든 지금 다윗이든

세 번 부인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칠 수밖에 없고(출애굽 요청, 전쟁 요청)

(반대로 마귀들 곧 가룟유다나 부자청년이나 바리새인이나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어릴절부터 지켜 왔다는 둥 자꾸 지킬려고 믿을려고 한다 말이죠)

 

그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에 불쌍히 여기시고자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래서 죄를 대신해서 치르는 피를 흘리심으로써

 

사랑을 완성하시더라 말이죠.

 

이것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봤던 믿음이라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나의 때를 보고 아브라함이 기뻐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그럼 율법은 무슨 역할 하는가?

아브라함이 아무리 자기 능력으로 약속의 자녀를 낳을수 있는가

못 낳더라 라는 기능을 하듯이

육의 한계를 통해서 엉뚱하게 땡빵질 하는 가짜 약속의 자녀를 놓는 짖을 할 수 밖에 없는

죄만 낳더라 라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하기 전에도 이미 육의 한계성을 나타내도록 말이죠.

양심이 빨리 빨리 이 약속의 자녀를 놓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채니까

육으로 놓고서는 땡빵질 하고 있으니

오히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더라 말이죠.

 

우리는 늘 이삭을 비웃음으로써 대하듯이 핍박한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치면 지킨게 아니라 어긴 겁니다.

어길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기에 율법이 가입한 거다 말이죠.

그럼 심판이 와야 합니다.

그 심판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어딜 감히 믿었노라 지켰노라 행했노라 라고

부자청년이 외칠수가 있겠냐 말이죠.

순 엉터리 주제에

지 마음대로 지키고 싶은 것만 지켜놓고서

어딜 사기를 치냐 말이죠.

다른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니까

주장하는 겁니다.

안 속았으면 진작 하지도 않았을 텐데

모든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그런 식으로 속여왔기에

그 속임수를 예수님에게 까지 들이대더라 말이죠.

 

뭐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 굽쇼

 

단 한 개도 어기면 지옥이라는 심판 뿐입니다.

 

바로 그것이 율법 아래에 가두어 버린

인간의 실상인데

뭘 지키기는 뭘 지켜요

뭘 믿어요

다 가짜 믿음일 뿐인데

 

그냥 가짜입니다 라고 시인을 빨리 함으로써

진짜가 누구인지를 볼게 아니냐 말이죠.

가짜 붙잡고 허성세월 보낼게 아니라

빨리 포기해 버리고

진짜 믿음이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보자 말이죠.

그 양반이 글쎄 우리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토록 만드는

놀라운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모든 인간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가짜로 판명해 버렸다는 겁니다.

즉 뭘해도 죄요 뭘해도 모호하고 의문이고 미흡하다는 겁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다 빠꾸 이다는 겁니다.

 

동시에 진짜는 너무 너무 또렷하다는 겁니다.

내가 분명히 죽였는데 다시 살아난 것 보다 또렷한게 어디있냐 말이죠.

그러니 내가 죽이고 내가 세 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엎어버려써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그 물음 보다 더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안 믿고도 믿음이 오히려 또렷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더더욱 모호해지는 인간들의 믿음은 오히려 순 엉터리 였다는 것을

 

누구 보다 다윗 본인이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는 믿음의 행동이

순 뻥이였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오히려 꼬끼오(밧세바) 꼬끼오(우리야) 꼬끼오(꺽으신 뼈- 이름 없는 아기)

쓰리 희생 안타 로 인해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약속의 자손 이삭이 곧 솔로몬을 선물로 받았다 말이죠.

 

그러니 다윗의 자손이다는 겁니다.

보좌가

 

그 보좌에서 벌리신 자작극의 사건이다는 겁니다.

 

?

 

이것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창조의 근본인 십자가이고

 

나머지는 인간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쭈물딱 거리는 것이기에

이 둘을 충돌 시키는 겁니다.

 

뭐가 또렷하냐고

 

마귀의 세가지 시험은 이 창세전의 기록된 것과

인간의 믿음에서 나온 메시아와의 충돌이다 말이죠.

 

보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다 거부하는 겁니다.

빨리 탈탈탈 털리자 말이죠.

그러니 죄인만 부르시러 오신 겁니다.

부자청년처럼 저렇게 믿음 좋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 주의 보좌가 이렇게 두 패로 가르니까 말이죠.

그러니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가 조건 갖추듯이 갖출수가 없도록 되어 있어요

 

어떤 무식한 장로가 골프를 치는 것이 죄라고 하던에

아이고 두야!

 

죄인되기 위한 조건 갖추는 것이 죄인 되는 거라면 그것은 오히려 의인 되기 라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말이죠. 이러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오히려 인정 받더라 말이죠.

 

그래서 그런 놈이 뭘 주장하든 무조건 반대를 하는 것이 죄인이다 말이죠.

유일한 죄인은 결국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미움이 발생하지요.

십자가의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죄인 되기를 포기하세요

의인 되기도 포기하시구요

 

뭘 해도 다 뻥입니다.

성경말씀에 나오는 것 못 갖춥니다.

조건을 갖추려 하지 말라 말이죠.

 

뭘 해도 다 사기이니까

 

이런 인간들이 뭘 시도해도 개의치 않고

그냥 아무 상관 없이 벌어지는 것이

다윗의 가문의 보좌가 벌리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왜 성전에 올라가는 내용일까요?

성전에 올라가야 비로소 실상(믿음)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벌써 성전 자체에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성전은 예수님인데

어떻게 다윗이 이 성전에 올라가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타 넘고서 넘어오심으로써 비로소 보게 된 거다 말이죠.

 

어떤 시편에서는 악이 죽을때도 잘 죽고

오히려 시편기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죄를 씻고자 그렇게 노력해도

악인의 형통 땜에 실족하여 그만 몸이 병들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 알수 없는 형태를

정작 성전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비로소 아 이 의문이 다 풀렸다는 겁니다.

그 성소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말이죠.

오늘 표현에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보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다윗의 집의 보좌를 안쳐다보고

십자가를 안 쳐다보고 외치는 것들은 다 엉터리인데

오히려 십자가는 어리석고 걸림돌로만 들리도록 되어 있고

반대로 유대인 곧 사단의 회의 주장들과

헬라인들의 지혜만이 이 세상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오히려 주의 보좌가 알려주심에 있어서

우리는 소망을 이 세상에 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어긴적 없다고 나올 필요가 전혀 전혀 없는 겁니다.

쉽게 말해 막 살았다는 것 밖에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즉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외에 외칠게 없다 말이죠.

 

이렇게 죄인으로 만드심에 있어서

졸지에 두 패거리의 충돌을 보좌가 벌리는 겁니다.

 

의인은 절대로 이런 충돌이 없지요.

 

죄인이라야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실로암 소경이라야

 

반박하는 자들이 생기는 겁니다. 충돌이 벌어져요.

 

다윗이 죄인으로써 졸지에 보좌가 벌리는 충돌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저 다윗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죽은 사울왕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말이죠.

 

다윗이 의인이면 드러나겠냐 말이죠.

절대로 안 드러나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해야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잡혀온 베드로를 마귀 보란 듯이

반칙으로 흰옷을 입혀 버린다 말이죠.

 

주님이 흰옷을 마귀보란 듯이 입히는데

 

이미 인간들이 거룩한 행실로 흰옷을 입고 있다면

마귀는 누가 잡냐

 

소는 누가 잡냐 말이죠.

 

인간들이 이미 마귀도 다 이겨버린 판국에

 

십자가에 왜 죽냐 말이죠.

보좌가 왜 필요하냐 말이죠.

 

왜 다윗의 자손의 보좌가 왜 필요하겠냐 말이죠.

 

마귀를 이미 인간들이 다 잡았는데

 

그것이 이미 인간들이 마귀에게 장악당한 모습이기에

율법이 미리 알려주는 것이 죄 아래 갇히도록 하시는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마귀 잡을려고 율법 준 거지

율법 지키라고 율법 준게 아니다 말이죠.

죄 아래 갇혀야

마귀를 잡을거 아니냐 말이죠.

 

이미 마귀를 다 이겨버린 상태인데

왜 구원자가 필요하겠냐 말이죠.

 

그러니까 자꾸 돌을 떡덩이 되게 해 달라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게 기적을 베풀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온 동네 방네 증명토록 해 달라

온 천하 만국의 권세를 주셔서 마귀 마저도 이길수 있는 정치를 할수 있도록

영웅 슈퍼맨이 되게 해 달라 악당을 쳐 부수는 정의의 용사가 되게 해 달라

 

이것이 이미 마귀에게 장악당한 인간의 모습이기에

이런 마귀의 주장

아니 모든 인간의 주장을 거부하시는 겁니다.

 

그럼 니가 예수 하라 말이죠

왜 예수님이 필요하겠냐 말이죠.

 

니가 의사 하고 니가 메시아 하고

니가 다 해라 말이죠.

 

그러니 다윗은 바로 이런 사상(유대인 사상)에 무조건 반대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전혀 딴소리

봉창 뚜드리는

창세전의 생명책에 기록된 십자가 곧 다윗의 자손의 보좌를 외치는 겁니다.

 

얼마나 신날까요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세상에 36개월 동안 비오지 않게 해달라는 소리와 같다 말이죠.

즉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 말이죠.

 

기존의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사고하고 있는 그 생각에 대한 거부이다는 겁니다.

즉 좌하자고 하면 우 해버리고

우하자고 하면 좌 해버리는 식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곧 주의 보좌이다는 겁니다.

그때 그때 달라요

인간의 소망에 반대한다는 거죠.

그러니 다윗은 그야말로 맞아 죽을 소리를 하는 겁니다.

이것을 참선지자가 바톤을 이어 받아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고

막상 멸망하게 되니

이제는 구원받았다고 춤추면서 노래하더라 말이죠.

 

오로지 주의 보좌가 있기에

어떤 상황이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얼마나 기쁘게 이 주의 보좌를 외치냐 말이죠.

 

마치 기쁘게 주여 별세 해 주세요 라고 하는 변화산의 모세처럼

입에 발에 기뻐서 뽀뽀한 그 향유를 부은 여인이 예수님을 미리 창사치르고자 향유를 다 붓는 모습처럼

 

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다윗은 외치고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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