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복음의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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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생산
강사: 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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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 수련회 교재

 

 

복음의 생산

 

 

서론

 

 

1. 진공에 주목하는 과학

 

 

우주가 운영되는 법칙의 저변에는 대칭성이 깔려 있다. 변환을 가하면 대부분의 양()들은 일제히 변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고 원래의 값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변하지 않는 속성을 대칭성symmetry이라고 표현한다. 물리학자들은 우주 속에서 이 대칭성의 잔해를 찾아서 우주를 설명하려 한다. 계속 유지되는 상()과 갑자기 달리지는 상()의 대비를 통해서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대칭적이지 않다. ‘시간의 강()’의 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네 시계는 우리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조차도 범우주적인 표준이 되지를 못한다. 우주는 지금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 외에 대체로 대칭성과 균질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앞으로 우주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우주의 기본 속성은 열과 대칭성의 긴밀한 관계 속에 함축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려는 기본적으로 텅 빈 공간 empty space’완전한 무() nothingness’의 차이를 생각해 봐야 한다. (완전한 무는 관념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다)

 

 

어떤 물체이건 간에 뜨겁게 달궈지거나 차갑게 식으면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의 정도가 너무 심하면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는 것조차 어려워 질 수도 있다. 차가운 얼음 조각에 열을 가하면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얼음의 온도는 올라가겠지만 겉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얼음에 계속해서 열을 가하여 온도가 섭씨 0도에 이르면 갑자기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위상전이(位相轉移) phase transition'라고 한다. 온도가 변하는 폭을 충분히 넓게 잡으면 대부분의 물질들은 얼음--증기와 비슷한 위상전이를 겪게 된다.

 

 

위상전이가 일어나면 물체에 존재했던 대칭성은 큰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임계온도에 다다랐을 때에 격렬한 변화를 겪으면서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많은 대칭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어떤 장field이 출현하게 된다. 전기장과 자기장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전기장이 요동하면 자기장이 발생하고, 자기장이 요동하면 전기장이 발생한다. 이리하여 전기장과 자기장이 일단 요동하기 시작하면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이 주위에 연쇄적으로 계속 펴져나가는 것이다. 이 현상이 전자기파, 즉 빛의 정체이다.

 

 

이제 물질이 없다는 진공이 장()개념으로 새롭게 이해되는 것이다. 진공 속에서 물질이 아닌 그 무엇이 원격력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 빛과 소립자도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현대물리학에 따르면 그렇지 않고 물질과 빛을 제거해 얼핏 완전히 빈 상태가 된 것처럼 보여도 진공에는 힉스Higgs암흑에너지등 여러 가지 것이 가득 차 있다.

 

 

힉스장은 그야말로 모든 곳에 가득 차 있다. 당신 문 앞에의 공간에도, 원자 안의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에도 힉스장이 가득 차 있다. 만약 힉스장이 없어진다면 원자 안의 전자는 공간 속으로 똑바로 날아가 버려 원자는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원자로 이루어진 우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도 힉스장 덕분이다.

 

 

힉스장은 입자마다 다른 강도의 저항을 부여한다. 강한 저항을 받는 입자일수록 그 입자를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사실은 이 입자를 움직이기 어려운 정도가 바로 질량의 정체이다. 원자 속의 전자는 비교적 약한 저항밖에 받지 않기 때문에 쉽게 움직인다. 즉 질량이 작은 소립자라고 할 수 있다.

 

 

2. 소용돌이치는 진공

 

 

이 힉스장에는 절대 관측할 수 없는 소립자가 존재한다. 극미 세계는 요동(양자장)의 요동에 지배된다고 한다.

 

 

진공을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소립자의 수도 0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극미 세계에서는 소립자의 수도 요동해서 소립자의 수를 0에 머물도록 둘 수 없다고 한다. 극미 세계에서 소립자는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해 소립자의 수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이다.

 

 

입자가 나타나거나 사라지고 있다면 순간이나마 물질이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그 공간은 진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입자는 보통 입자와는 달리 결코 직접 입자로서 검출할 수 없으므로 상자 안을 조사하면 진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입자는 보통의 검출 가능한 실-입자와 구별해 가상 입자라고 한다. 물리학자들은 이 가상의 입자와 씨름해서 우주를 규명하려 한다.

 

 

과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거기에 에너지(=)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힘을 발휘하는 어떤 존재자가 따로 있는 것인가?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자들을 에너지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3. 에너지의 모방과 답습

 

 

미술에서 데칼코마니décalcomanie란 물감을 칠한 그림을 접어서 대칭적인 형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형 그림을 찍어대는 면(지평)에 따라 그림이 변형되어 다른 그림으로 전사(轉寫)된다는 사실이다. 에너지장 안에서 어떤 파닥거리는(요동치는) 잠재성 판이 수시로 활동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세상의 숱한 다양한 존재들은 비로소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에너지의 장이 자체적으로 유발시킨다는 말이다.

 

 

단순히 사물이 등장할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이란 아직 현실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잠재성이란 이미 그것마저 현실의 일부라는 점이 강조된다. 결과가 원인 안에 벌써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입도 없다. 이도 없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도 없다. 배도 없다. 항문도 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간이 나온다(3:19). -개인적인 것이 인칭적인 차원의 사건으로 돌출하는 것이다. 흙에서 나온 자(아담)가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 자신의 근원을 흙에서 탐구할 수밖에 없다. 흙은 결국 에너지장으로 설명된다.

 

 

이미 유기적 존재가 되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을 알기 위해 물질(무기無機)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거기서 유기(有機)성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3:4)

 

 

자기 현존재가 품고 있는 미스터리(비밀)를 일단 물질성과 결부시켜 보는 것이다. 나는 동물이 아니라 왜 인간으로 태어나야 하며, 죽어서 나의 어떤 요소가 도로 물질로 변하는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정립하게 된다. 즉 자신을 다시 물질()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힘에 맞서서 나름대로 따로 장만하는 식으로 버티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살다가 결국에는 죽어 흙이 된다는 이 순수잠재성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비록 신체라는 물체는 에너지장 속으로 소실되더라도 한평생 살면서 따로 건져낸 것에 의미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만의 얼굴곧 주체이다.

 

 

4. 나의 탄생

 

 

라는 신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이 세상은 타인에 의해서 점유당해 있다. (=권력장) 나의 등장 이전에 타인의 무리들이 먼저 등장되어 있다. 이 타인이 나에 대해서 타인이라고 느끼면서 나와 타인은 쌍생아적 출현을 보이게 된다. 자신의 갓난 아이 때의 사정은 본인이 어른이 되어야 비로소 회상을 통해서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시간의 비대칭성을 스스로 깨트려버리는 비-진리적 모순된 행태며 독단적이다. 이 독단성은, 성인이란 이미 철저하게 타인의 안목에 길들여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처럼만

 

 

시선이란 단순히 눈과 같은 것이 아니다. 눈에 띄는 사물을 보는 식이 아니다. 물질적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인격성을 띤다. 내가 보기에 그는 누구다.’는 식이다. 동시에 그는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상대자의 시선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럴 경우에는 진정 나는 하나는 신체를 지닌 물질(동물)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인간이 된다.

 

 

만약 타인의 시선을 피한다면, 나는 도로 자신의 신체성으로 돌아와 언제든지 자기마저 처분해서 없앨 자세가 되어 있다(=자살).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이면 자아는 항상 타인 안에 자리 잡게 된다. 남들의 요구하는 대로 따라주고, 묻고 하면서 주체는 자기 정체를 모자이크 식으로 땜질하듯이 정립하게 된다.

 

 

타인들의 시선은 곧 권력이다. 타인들의 표정이 곧 권력의 얼굴이요, 이 현실 사회의 얼굴이다. 이 얼굴들 안에서 주체는 사람 되기가 수립된다.

 

 

5. 사람다움(=사람되기)

 

 

사회는 타인들이 조성해놓은 기억의 바다다. 이 기억의 바다 속에서는 숱한 비밀들이 떠다니고 있다. 이 비밀스러움 때문에 자아는 무한히 증식되는 가짜에 시달려야 한다. 정작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오늘날 타인들의 기억을 언어로서 받아주면서, 그 언어성에 합치하는데 부단히 실패한다. 이로서 정신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늘 배회하게 되는데 이 불안감으로 인해 인간들은 매일 유죄(有罪)성을 갖는다.

 

 

누설된 비밀에 관한 해석들이 새로운 비밀이 되어 정보처럼 쏟아지니 이 정보 누적으로 인한 피곤이 몰려온다. “(=절대적 어른)을 버린 대가인가?” 지각 불가능한 비밀이 가시적 표상으로 전환했다고 소문난 곳을 찾기 마련이다. 이것이 교회 놀이. 거기서 초월적인 타인의 시선을 감지하고 그 절대적 자리(=신의 자리) 안에 자기 자리를 편다. 절대적으로 고정된 자리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구원받았노라고 그 표상에 칭찬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무한히 변주되는 해석의 일부일 뿐이다.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자의 오류는 본인의 참된 자리(=0의 자리)를 자신의 행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데 있다. 모든 중독자가 다 그러하고 모든 이가 중독자들이다. 구원 중독자(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13:9), 기도 중독자, 말씀 중독자, 선교 중독자, 선행 중독자, 건강 중독자, 살림 중독자, 여가 즐기기 중독자 등등.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 진정한 비밀은 누설해봤자 소용없는 비밀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 수상한 권력 안에는 비밀이 봉인되기 때문이다.

 

 

6. 비밀의 봉인과 개봉

 

 

수상한 권력에 구멍이 뚫렸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5:1-6)

 

 

이 말씀에서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에 주목해야 하고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와 결부시켜야 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증명하고 확인해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은 곧 에너지 차원으로 이해하는 현실세계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죽음이란 단순히 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시적, 물질적으로 모든 설명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과 연결 되므로서 낯선 숨겨진 비밀의 세계로 통한다는 사실이 성령에 의해서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2)

 

 

골로새서는 이 성령에 의해서 소개되는 비밀스러운 복음 이야기다.

 

 

. 본론

 

 

골로새서의 줄거리

 

 

이미 복음이 전해진(1:5) 골로새 교회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사도에게 들려왔다. 그것은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다(1:6). 이제 사도가 교회에게 당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 필요한 지혜와 총명을 계속 공급하여 지금보다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는데 있다(1:9-11).

 

 

그 뜻은 어떤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내신 분이 가지는 역사 속에서의 위치는 신성神性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형상이요 즉 하나님 그 자체요, 창조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또 그분을 위하여 창조 되었으므로 그분으로 정향된 속성이 있으며, 피조 된 세상 속에서의 그분은 전 우주보다 먼저 나셔서 우주를 선도해 나가시는 분이고, 구원에 관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 최초로 살아나시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다(1:15-17).

 

 

이와 같이 그분의 개념 정립은 골로새 교회가 고통 받고 있는 이단의 공략에서 어떤 확실한 해결점을 던져 주려는 시도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보다 정확히 정리되기를 교회에게 원했던 것이다.

 

 

그분이 역사 속에 오셔서 하신 일로 인해 교회는 그분을 우두머리로 여길 뿐 아니라 그분은 만물의 구심점이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만물과 화해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그분 안에서 비로소 제 위치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으로 돌아선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풍성한 지혜를 이제 교회는 전파할 책임을 갖고 있다(1:24-29). 그리스도가 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이제 성도에게는 다른 학문조차 판단할 능력을 소지한 것이다(2:6-8).

 

 

어떤 것이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비추어서 해명되어야 하고 그분의 주 되심이 포함되지 않는 학문에 정신이 팔릴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할례 같은 것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 할례를 받은 것이 된다(2:11).

 

 

비거룩한 존재로 살던 우리를 거룩한 분으로 말미암아 함께 죽고 다시 살게 되므로 거룩한 참된 할례인이 되는 것이다(2:12-13). 이것 뿐 아니라 그 밖의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천사 숭배하는 의식이나 환상이나 계시나 그런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릴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승리의 증거인 십자가와 거기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우리를 죄인으로 몰 수 있는 근거가 되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들을 철폐하기 위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2:16-19).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하고 자기를 학대하고 스스로 겸손하려고 하는 종교적 행위에 자기가 속박 당하게 되는 것이다(2:23).

 

 

그렇다고 하면 이미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지상에서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실존이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후의 실존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면을 보여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것을 염두에 두는 생활이다(3:2).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관심이 있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생명이 있는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나님 안이다(3:3).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외형으로 나타날 때는 탐심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을 부정하는 모습이다. 그 사람이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3:10)

 

 

새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에 풍성해야 하며,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서로 교제해야 한다(3:16).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3:18-2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내 됨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남편 됨은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을 서로의 관계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복종의 주체와 사랑의 주체는 예수님이 가지는 의의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요소다. 종과 주인 사이에도 마찬가지다(4:1).

 

 

하늘 나라만이 가지는 이미지image를 서로의 관계에서 고백의 형식으로 등장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빗대어 대인관계를 진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전도할 문을 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4:3). 왜냐하면 그것이 사도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기와 관계한 성도들을 열거하면서 그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쓰고 있음을 안다(4:11). 성도끼리의 안부는 바로 동일한 목적 아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 결론

 

 

언약판이 요동친다. 세상을 털어내면서 차이가 만들어지고 복음은 여기서 생산된다. 없었던 공간도 죄와 합산된 형태, 핍박당하고 버림받지만 구멍 뚫린형태로 새롭게 나타난다. 새롭고 이질적인 것이 발생된 것이다. 그동안의 신의 응답은 사실은 백성들의 욕망이었다. 백성들 자신이 원해서 현실을 꿈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욕망을 인정하시면서 그들의 꿈도, 백성도 버리신다.

 

 

성전 파괴는 언약적 기호의 파괴며 새 언약이 요동치는 징후다. 범람했던 꿈들을 걷어내고 그 속에서 심판과 저주의 증거물들을 배치하시고 계열을 만들어내면서 이 적대적인 이질성에서 내뿜는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된다. 낯선 이질성은 성도 내부에 탑재되어 성도 본인의 구원으로 전환되는 것을 극구 저지하시므로 서 성도는 수시로 자기 부정을 맛본다. 이것이 언어적 형식을 띠고 전달되는데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소리가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그 어디에도 소유 당함이 없이 독자적으로 이주를 반복하면서 세상의 모든 이념들을 관통한다. 이는 세상이 제공하는 할당된 직위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서 죄를 생산하고, ()를 생산하고 죽음을 생산한다.

 

성도는 공무원이다.

복음에 복무한다.

땅에 대한 모든 희망은 연거푸 소진해야 한다.

마분지 도시에서 모든 관계에서 박탈당한 금기의 존재.

시간 여행의 멀미가 가라앉을 때마다 새삼스레 말씀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2-3)

 

죽은 자가 살아 돌아 온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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