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넘어서는 새이스라엘

 

복음을 위한 기독교인가? 기독교를 위한 복음인가?

예수 라는 이름을 위한 나 인가? 나를 위한 예수인가?


이스라엘을 정작 이스라엘은 포기해 버렸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이 새이스라엘은(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정작 존재 이스라엘은 거부해 버린다.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은 새이스라엘로써

철저한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이다.

곧 죄인으로써의 새이스라엘이다.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죄인이 되는 새이스라엘

기쁨으로써 죄인이 되는 새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존재로써의 이스라엘은 이 복음을 위해 죄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 존재는 어디까지나 선을 추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지 못한다.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존재와 기능의 차이를 이렇게 또 어머니께 설명했다.

 

10명의 문둥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셨다.

그런데 9명의 유대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한 사람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돌아가버리지 않는다,

 

왜 너도 돌아가지 왜 남았니?

주께서 여기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갑니까?

 

이 사건은 아주 역설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유대인은 정작 이스라엘 기능을 버린다.

그러나 유대인의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은

오히여 이스라엘이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사마리아인이 곧 원수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손 할례냐 마음판의 할례냐 라는 것이다.

손 할례는 존재적인 이스라엘을 주장하는 식이다.

그러나 마음판의 할례는 바로 그런 이스라엘로부터

원수 취급 받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다윗이 안식일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드디어 원수를 갚을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사울왕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

율법을 무시한 하나님의 원수를 드디어 갚게 해 주시는

이스라엘 왕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소원이 덮친자이다.

마치 말씀을 인간이 지킬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존재의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원수 갚기라는 사건에

다윗은 원수로써 놓여짐으로써

이 다윗이라는 미끼를 무는 진짜 원수인

예수님의 원수가 드디어 밝혀지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판의 할례이다.

 

개인의 원수 갚기가

사실상 이스라엘 기능의 포기이다. 그리고 존재가 되어버린다.

딱딱한 이스라엘 그러나 사실상 애굽이다.

그래서 바벨탑 쌓기에 집착한다.

구원의 탑 쌓기

교회라는 집단에 집착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개인 존재가 아닌

집단 이스라엘의 기능은

단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게서 나타난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서 나타난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꼬물을 먹지 않습니까 라는

이방여자 사마리아인에게서 나타난다.

 

오히려 99마리 양은 집단을 이루었지만 철저히 개인 존재이고

기능 곧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집단은 형성했는지 모르지만 복음은 나오지 않는다.

 

복음을 위한 기독교인데

기독교 라는 집단이라는 존재를 위한 복음이 되어버린 다른복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손 할례이다.

 

주의 이름은 긍휼 곧 인애와 자비가 나오지만

존재는 제사와 번제에만 사활을 건다.

왜 구원의 탑이기에 구원의 마일리지 쌓기이기 때문이다.

 

구지 이름이 필요가 없다.

구지 사건이 필요가 없다.

사건은 오로지 주의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수시로 죄인의 자리에 계속 놓도록 하는 이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으로 못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라인은 이 기능(주의 이름=십자가의 사건)을 어리석다 라고 하고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된다.

 

왜 걸림돌일까?
구원받은 존재 곧 선민이라는 존재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불편한 기능인 십자가의 표적 요나의 표적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탐욕인 우상 숭배 때문이다.

자신이 첫사랑이였는데 그 기능을 다시 컨텍트 접촉할 길이 없기에

그 잔상으로써 손 할례 등등으로 더더욱 존재로써 집착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사랑(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함께 동행한 사건)을 스스로 발로 차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곧 예수의 이름은 이 새이스라엘에 대해 포기 하신적 없으시고

다 이루셨다.

이미 다 이룬 새이스라엘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 라는 이름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 이름이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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