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이냐? 이름이냐? (시편 115)

우리(우상숭배자인 우리)에게 영광 돌리지 마옵시고 오직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옵소서



(시 115:1, 개역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9:1, 개역)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9:2, 개역)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9: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9:4, 개역)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5, 개역)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9:6, 개역)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9:7, 개역)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8, 개역)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9, 개역)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9:1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9:11, 개역)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9:12,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9:13, 개역)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9:14, 개역)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9:15, 개역)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9:16, 개역)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9:17, 개역)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9:18, 개역)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9:19, 개역)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9:20, 개역)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9:21, 개역)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9:22, 개역)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9:23, 개역)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9:24, 개역)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9:25, 개역)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9:26,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9:27, 개역)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9:28, 개역)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9:29, 개역)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9:30, 개역)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9:31, 개역)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9:32, 개역)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9:33, 개역)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9:34,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9:35, 개역)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9:36,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9: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9:38, 개역)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115:1, 개역)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115:2, 개역)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115:3, 개역)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115:4, 개역)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115:5, 개역)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15:6, 개역)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115:7, 개역)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115:8, 개역)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115:9, 개역)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15:10, 개역)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15:11,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115:12, 개역)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15:13, 개역)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15: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115:15, 개역)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15:16, 개역)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115:17, 개역)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115:18, 개역)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 115편을 요한복음 9장과 연결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과의 차이 때문입니다.

 

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느냐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듯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일이 바로 이사야 355절의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라는 일입니다.

 

 

이것은 곧 우상과의 차이인 겁니다.

원수와의 차이인 겁니다.

원수에 대한 보응입니다.

 

(35:1, 개역)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35:2, 개역)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5:3, 개역)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35:4, 개역)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35:6, 개역)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35:7, 개역)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35:8, 개역)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35:9, 개역)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35:10, 개역)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그러나 우상은 이 예수님의 원수를 들추어낼수도 없는

손이 있어도 만질수 없는

존재로는 있는 듯 보이나 기능은 없다 라는 겁니다.

발이 있으나 걸을수 없고 입은 있으나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으나 볼수가 없고 목구멍이 있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는

 

(115:4, 개역)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115:5, 개역)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15:6, 개역)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115:7, 개역)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존재라고 우길 뿐이지

정작 기능은 없다 라는 겁니다.

 

기능은 마땅한 당위입니다.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이 당위인데

마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당위입니다.

입이 있다면 주의 이름을 마땅히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입이 있는데 말도 못하고 눈이 있는데 못 보고

귀가 있는데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우상처럼 존재 로만 우긴다 라는 우상숭배자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일인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자로 동원이 되는

실로암 소경은

정작 날 때부터 소경이라서

단 한번도 빛을 못 보고 어두움 속에서만 살았는데

이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인지

아니면 부모죄인이지를 알려달라고 했을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영광돌리기 위해서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 돌리고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본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우상과의 차이를 보여주신다는 점입니다.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즉 우상의 특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자 한다는 겁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곧 예수님은

못 보고 못 듣고 못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못 받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한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말이죠.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이것은 우상이 옳았다 라는 것이다 말이죠.

 

존재가 옳다 라는 것이 된다 말이죠.

 

이것은 이름이 벌리는 기능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름은 오히려 못듣도록 못보도록 못깨닫도록 못고침받도록 하는 것이

이름이 하는 일이다 말이죠.

 

우상은 심판을 못해요

그러나 이름은 심판을 합니다.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존재라고 우기는 존재란 존재는 다 심판한다 말이죠.

존재 이전의 당위를 내 놓아봐라 말이죠.

손이 있다면 만지는 기능이 있듯이

발이 있다면 걷는 기능이 있듯이

입이 있다면 말하는 기능이 있듯이

기능을 내 놓아봐라 말이죠.

 

그런데 정작 본다고 하는 자들이 기능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못 본다고 하는 저 실로암 소경이 더 잘 본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주의 이름이 벌리는 기능입니다.

 

존재를 이 상황에서 아무리 우겨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능을 내 놓아봐라 말이죠.

 

정작 실로암 소경은 본다는 것을 기능을 내어놓는데

왜 너희들은 소경 아니다고 하면서도 왜 보는 기능을 내어놓지 못하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이 벌리는 기능입니다.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일 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영광 돌릴 것이 아예 없습니다.

면류관을 반납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만 높이 영광 받으소서 라는 겁니다.

 

왜 다윗이 미친 듯이 계속해서 출애굽을 외칩니까?

다윗 본인이 이 애굽에서 포로가 되었고

갇혔고 억눌렸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으라고 부르짖습니다.

주여 건져달라고

 

이 외침을 이스라엘 왕인 다윗이 외치는데

백성은 왜 다윗이 출애굽을 외치는지를 알수가 없다 말이죠.

옛날 이야기고 주변의 정세가 그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안정적인 국가 시스템을 갖추었는데

왜 출애굽을 외치냐 말이죠.

뭐가 불안해서?

 

그런데 다윗은 본인이 실로암소경처럼 죄인이라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본인은 갇혔고 포로되었고 억눌렸고

이 애굽이라는 존재와 같은 애굽의 기능을 의식하고서 외친다 말이죠.

아니 애굽이 어디있고 애굽이 누구냐 말이죠

즉 원수가 누구냐 말이죠.

없는데

 

그런데 다윗은 존재로 본게 아니라

기능으로 봤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이요

본인도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고 있다 말이죠.

 

왜냐하면 우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과의 차이로

주의 이름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거쳐서 주의 이름을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외치지 않는 가운데

이스라엘 속에서 혼자 우상과 원수를 언급하면서

이 우상을 타파하는 주의 이름을 외치는

출애굽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우상 숭배라고 말이죠.

 

우상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에게서

바로 그런 이스라엘이 우상을 믿는다고

그 이스라엘로부터 주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은

이스라엘로부터 돌삐 맞아 죽을 일이다 말이죠.

 

? 우상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이 바로 우상숭배자임을 주의 이름이 들추어내니까 말이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거부하는 교회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친다는 것은

이 교회사람들 곧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돌삐 맞아 죽을 일이다 말이죠.

 

괜히 기독교냐 복음이냐

교회냐 복음이냐

교리냐 복음이냐 라고 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존재라는 우상숭배와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 곧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이 벌리는 사건입니다.

이름이 벌리는 사건이다 말이죠. 주의 이름 말입니다.

 

보세요 이 실로암 소경 하나 죽이고 싶어서

우상을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이 부글 부글 끓지 않냐 말이죠.

수준낮은 돌삐로 우상조각만드는 자들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말이죠.

 

제가 어머니께 자신있게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우상숭배자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 하나님을 존재로 믿고 있지

주의 이름을 믿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이죠.

이름은 존재가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기호다 말이죠.

누가 문자 기호를 믿냐 말이죠.

 

즉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왜 거냐 말이죠.

이름인데 기호인데

 

그런데 우리는 이 이름이 기호로써 문자로써의 이름이 아니라

기능으로써

비존재로써 존재 보다 더 존재인 초과잉적 존재로써

눈먼자를 뜨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지요.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이라는 기능은

그것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한 세트를 이루죠.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회가 한 세트로 이루어져야만 하듯이

 

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 일곱교회와

주의 발등상 위에 놓여진 원수들이

이 주의 이름 때문에

주의 이름에 영광돌리고자

그 기능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 자로

이 둘이 한 세트를 구성하듯이

 

소경이 눈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는 것만 있는게 아니라

한세트를 구성하기 위해서

 

본다는 자들이 소경이 되고

듣는다고 하는 자들이 귀머거리가 되고

말한다고 입이 있다고 우기는 자들이 벙어리가 되는

 

반드시 주의 이름에 상대적인 우상숭배자가 동시에 분류가 되어 나타나는

사건이 바로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기 위해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결국 우상은 이것을 못한다 라는 거죠.

우상은 이 거룩을 곧 분류 분별을 못하는 겁니다.

둘로 나눌수가 없는 겁니다.

이 차이를 구별시키지 못하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결국 좋은 밭과 그 나머지 가시밭 돌짝밭 길가 라는

 

밭의 속성 땅의 속성을 씨앗이라는 기능이 밝혀내는데 있어서

또렷하게 구분이 되지만

 

우상은 이런 둘로 나누는 기능이 없기에

존재 라고만 우기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조각된 우상을 보세요

쉽게 생각해서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인형을 생각해 보세요

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움직입니다.

입이 있어요

말을 못해요

발이 있어요

걷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들 쉽게 이해하지만

정작 유대인들이

그것도 우상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우상숭배자의 대표자들로써

예수님이 들추어내었다는 겁니다.

아무도 못 들추어내었고

꽁꽁꽁 감추는데 다들 성공했는데

유일하게 예수님이

복음의 씨앗을 막 뿌리니까

그제서야 땅의 속성이 씨앗으로 인해서 들추어지듯이 나타난 것처럼

 

유대인들이 우상을 배격하는 가장 우상숭배자의 대표성으로써 나타나더라 말이죠.

 

이것은 오늘날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상화 하면서 자신의 탐욕에 이용하고자 예수님을 믿더라 말이죠.

그러니 우상숭배자 라고 하면

교회사람들 말처럼 천주교가 마리아상을 섬기니까 우리는 배격한다

불교가 부처상을 섬기니까 그런 우상숭배자를 배격한다

그런데 정작 교회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손이 붙어 있는 자신의 존재는 우상화 하더라 말이죠

그런 자기 존재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믿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더 심한 우상숭배자들이 교회에 다니는 겁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왜 이런 외침을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로부터 탈출 출애굽을 왜 외치느냐?

 

교회로부터 출교회를 왜 외치느냐?

 

갇혔고 포로되었고 억눌렸고

듣지못하고 보지못하고 듣지못하는

오로지 주의 이름을 봐 버렸기 때문에

주의 심판을 봐버렸기에

주의 이름에 긍휼을 바라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본다고 하는 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보게 해달라고 외치며

듣는다고 하는 자들이 뭐가 아쉬워서 듣게 해 달라고 외치겠냐 말이죠.

 

주의 이름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결국 주의 이름이 외부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상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위할 뿐이기에

우상숭배자일 뿐이다 말이죠.

 

다윗이나 우리나 지금 우상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다고 외치고 있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라고 할 지라도

역시나 우상숭배자이다는 겁니다.

우상숭배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우겨본들 여전히 나 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 손에서 해결 될 우상 문제가 아니다는 거죠.

그래서 우상에게 갇혀 버렸기 때문에

내 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외부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

바로 부르짖음입니다.

나 여기 빠졌어서 벗어날수가 없어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우상과의 차이로써 주의 이름의 개입을 요청하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상에서 벗어나본들 소용이 없어요

어차피 의문의 반복이라 또 역시나 우상에 벗어났다고 우기는 나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거기에다가 유대인처럼 하나님까지 들먹이면서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우상숭배 하지 않는 나를 우상숭배하게 되니까 말이죠.

 

자 그렇다면

우상에게 갇혔다면 구해달라고 출애굽을 요청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갇힌자가 없는데 뭐가 아쉬워서 건져달라고 외치겠냐 말이죠.

 

그러니 본다고 하니 소경인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고침받고자 할 텐데 말이죠.

 

자 이렇게 주의 이름이 자기 영광을 받고자 이런 사건 사태를 벌리시는 겁니다.

 

그러니 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있는 자는 더 받고 즉 3060100배 결실을 아니 맺고는 못배기는 당위가 나타나며

 

반대로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가시밭 돌짝밭 길가 라는 존재만을 우기는

자기 존재를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는

우상숭배자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상을 배격하면 할수록 더한 우상숭배자로써 드러나더라 말이죠.

 

이것은 우상을 배격하는 문제가 아니라

갇혔다 라는 겁니다.

 

박그네를 물리치면 갇혔다 라는 것에서 해소가 될까요?

박그네 보다 더한 것이 등장할텐데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의문의 반복이니 해도 소용없어요

계속 반복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이름 곧 주의 이름입니다.

 

마귀를 물리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천지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

이 이름을 바라는 겁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만 높임 받고

우리에게 영공돌리지 말고

오로지 주의 이름만 영광 받고자

이렇게 두 패로 나누시는 이름만을 찬양하는 것이

주의 일하심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하나님의 이름인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그 이름이

곧 예수님이 두 패로 나누어서

자신의 이름에 영광 받고자 하심이니까 말이죠.

 

다윗은 그래서 출애굽을 또 들먹입니다.

마치 오늘날 십자가를 자꾸 들먹이듯이

 

교회 목사들이 비웃습니다.

 

왜 자꾸 죄 죄 죄 카느냐

이제 십자가만 외칠게 아니라

부활도 외쳐야 한다고

 

이 소리를 배부른 목사들이 하는게 아닙니다.

다 과거에 배를 쫄쫄 밥먹듯이 굶어봤던 목사들이 외친다 말이죠.

더 이상 돈 안되는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부활을 이야기 해야 교회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거죠.

 

십자가는 존재에 하등 도움이 안됩니다.

존재로써의 교회에 하등 도움이 안됩니다.
교회에 덕 될 생각 하지 말라 말이죠.

 

오로지 기능적인 교회에서만 십자가는 기쁨이요 능력입니다.

다윗은 존재로써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미 새이스라엘의 완성을 다 봐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출이스라엘 하자 라고 외치는 것이

자꾸 출애굽을 들먹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상과 주의 이름의 차이를 외치는 찬양자의 모습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