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하기가 아닌 찬양자로 태어난 열방의 찬양자 (시편 117)


 

(15:11, 새번역)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 117:1

 

(117:1, 개역)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117:2, 개역)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15:1, 개역)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5:2, 개역)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5:3, 개역)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15:4, 개역)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15:5, 개역)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6, 개역)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5:7, 개역)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15:8, 개역)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15:9, 개역)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5:10, 개역)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5:11, 개역)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5:12, 개역)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5:13, 개역)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14,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15,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15:16, 개역)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15:17,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5:18, 개역)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5:19, 개역)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15:20, 개역)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15:21, 개역)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15:22, 개역)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15:23, 개역)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15:24, 개역)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15:25, 개역)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15:26, 개역)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15:27, 개역)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15:28, 개역)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15:2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15:3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15:31, 개역)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15:32, 개역)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5:33, 개역)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오늘 시편 117편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15장에서 인용합니다.

즉 모든 열방 모든 나라가 주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이방인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한다는 내용인 시편 117편을 인용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닌

이방인의 선지자로써 세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아 그럼 이방인 하나 하나를 구원케 하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것인데

문제는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오래 오래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살아남아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많고 많은 시간을 부여받아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16장으로 넘어가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퍼뜩 퍼뜩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갑자기 선회를 해서 로마에서 뭐 그리 급하게 죽어야만 하는지

이방 나라 로마에서 죽어야 만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더라 말이죠.

 

마침 앞의 글에서 세례요한의 주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사실상 조금 요란스럽게 예언이 되었던 인물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야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게

복음이 시작 되자 마자 세례요한은 퍼뜩 퍼뜩 죽어버리더라 말이죠.

 

도대체 성경말씀은 왜 이런 내용으로 전개하는 것일까요?

 

마치 주의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았다면 뭔가 제대로 된 성과를 나타내는 모습을 띄여야

우리가 이해가 되는데

이것은 뭐 우리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식으로

성과는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퍼뜩 퍼뜩 죽어버리는 모습으로

누락 되는 식이다 말이죠.

 

무대에 올라오자 마자 뒤로 빠져버려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인물은 안 보이고

자꾸 이름만 남기고 뒤로 사라져 버리는 식이다 말이죠.

 

우리는 존재 곧 눈에 보이는 존재를 보고 싶고

그 존재를 통해서 나의 존재에게 적용하고파 파악가능한 것을 원하는데

 

존재는 안 보이고 이름 딸랑 남겨버리고 곧 기능이지요. 사라져 버리면

나의 존재에는 하등 도움이 안되더라 말이죠.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찬양자 다윗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 도움이 이름에서 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하등 도움이 안된다 말이죠.

 

바울이 살아 남아야 그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모자라는 점을 배우고

삶의 모습을 지적 당하면서

오래 오래 곁에 있어서

뭔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을 해 나갈수가 있는데

이건 뭐 붙잡을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빠르게 죽어버리더라 말이죠.

 

이것을 제가 어머니께 찬양하지 말고 찬양자로 태어났다고 설명했습니다.

왠 뚱딴지 같이 갑자기 왠 찬양을 언급하느냐

전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도 않는데

이방인의 사도가 됨과 찬양이 무슨 연관성이 있길래

 

그러게 말입니다.

 

당황하셨어요 저는 더 당황하였습니다.

 

이방인이 주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찬양을 한 민족에게만 해당된다고

성경 말씀 자체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머니 이방인이 찬양을 하면 누가 싫어할까요?

 

당연히 유대인 곧 이스라엘이 싫어하겠지!

아니 왜요!

 

그들은 이방인이 지옥 백성이라고 여기니까 당연히 지옥 백성이 찬양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이방나라 백성들이 주 여호와를 찬양하게 되었으니

이스라엘은 어쪄죠?

 

말씀이 틀리잖아요

 

과연 말씀이 틀린 것일까요?

우리가 여기서 억지로 말씀을 틀린 것을 맞도록 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이 문제이지 라고 인간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치더라도

 

정작 당사자 유대인들은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라는 점점 찝찝하게 남을 꺼다 말이죠.

 

이런 비유를 예로 들었습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찬양대에서 찬양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놀고 있는 사람을 보고 당신 뭐하느냐

아무도 나에게 노래를 시키는 자가 없어서 그냥 놀고 있다

아 그래? 그럼 당신 여기 찬양대로 와서 찬양해라

 

또 지휘자가 가만히 놀고 있는 자를 발견하고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중간 중간에 들어와서 딸랑 4시간 딸란 3시간 딸랑 1시간 딸랑 30분 찬양하는 자로 만들었다 말이죠.

 

그래서 다 마치고 자비를 베푸는데

똑같이 딸랑 30분 찬양한자도 수고했다고 밥 한그릇 주고

딸랑 1시간 찬양한자도 수고했다고 밥 한 그릇 주고

 

자 이러다 보니

처음부터 와서 찬양했던 유대인 이스라엘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밥 두 그릇을 주겠구나 싶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어라

맹 마찬가지로 밥 한 그릇만 주더라 말이죠.

 

아니 그래서 지휘자에게 따졌죠

우리는 만땅 다 채워서 찬양했는데

왜 딸랑 한 그릇만 주느냐

 

지휘자 왈 너와 처음부터 말했잖느냐

매끼 밥 한 그릇 주기로 말이다.

 

그러자 당신은 악한 지휘자이다 라고 반발하더라 말이죠.

 

자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찬양입니다.

즉 찬양이란 노래가 아니라 사건 곧 묵시입니다.

이렇게 두 패로 갈라야 찬양이 뭔가 라는 기능을 보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찬양하지 말고 찬양자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이 찬양이다는 겁니다.

 

노래를 엄청 잘 부르는데

그런 사람들 속에서

벙어리나

언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성가대 속에 집어넣어

박자 다 틀리고 엄청 고성을 지르고 하면

노래 잘 부르는 성가대원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과연 기뻐할까요?

 

성가대 자체가 그런 사람 박치 음치 언어장애인을 이미 쏙아 내어서 뽑았는데

지휘자가 그런 자를 일부러 심어버리면

기존의 음정박자 잘 맞고 콩나물 대가리 잘 볼줄 알고 노래까정 잘 부르면

과연 지휘자를 좋게 볼까요? 악하다 라고 할까요?

 

진짜 찬양이라는 사건은 이렇게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가 나오도록 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찬양이다 말이죠.

 

한 쪽은 입으로는 찬양의 달인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입으로 저주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 찬양사건이 덮쳐지는 겁니다.

 

오히려 벙어리라서 노래 한 번 불러본적 없는 자를

찬양자로 세워버리니까

 

비로소 반발하도록 나오는 것이 찬양이 임한

그래서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는 사건이 찬양이다 말이죠.

 

마치 세례요한과 사도바울이 찬양자로 세움 받았으면

찬양이라는 노래를 들려주고 죽던가

노래 한번 불러보지도 않고 들려주지도 않은 상태로

퍼뜩 퍼뜩 죽어버리니까

과연 찬양자로 세움을 받기 받은건가 라고 할정도로

이해가 안된다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왜 저 이방인을 찬양자로 세우냐고

우리 이스라엘만 주님을 찬양케 하도록 세웠다메????

 

약속이 틀리잖아

계약 위반이요

배신이잖아요

 

왜 딸랑 30분 찬양한 자도 찬양한 자로 취급하냐?

우리는 12시간 불렀는데

 

약속이 틀리니 당신은 악한 지휘자이다.

 

(6:22, 개역)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아 쏘리 검색 오류 ㅋㅋㅋ

 

(20:1, 개역)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0:2, 개역)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20:3, 개역)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20:4, 개역)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20:5, 개역)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20:6, 개역)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20:7, 개역)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20:8, 개역)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20:9, 개역)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20:10, 개역)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20:11, 개역)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20:12, 개역)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20:13, 개역)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20:14, 개역)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개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왜 악하다 라고 할까요?

약속한 대로 줬는데

 

찬양이란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도록 하는 사건이다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찬양 불러 보라 말이지

찬양 해 보라 말이다

 

어 그런데 이스라엘이 찬양을 못하는 겁니다.

찬양할려고 하니까

도저히 이 십자가의 저주 곧 하나님의 저주를 찬양 못하는 겁니다.

 

헬라 이방인들은(지혜를 쫏는 철학자 중심의)

하나님의 저주인 이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찬양을 못하겠다고 하고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걸림돌이라서 찬양을 못하겠다고 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영광 스러워서 아주 신나게 찬양을 한다 말이죠.

 

왜 찬양 못하냐 말이죠.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들이 아무리 찬양하고파도 이상하게 안나온다 말이죠.

그렇게 벙어리를 하나님을 찬양 못하는 자라고 정죄를 했던 자들이

갑자기 본인들이 벙어리가 되어서 입만 뻥끗 뻥끗

마치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는

우상처럼 되더라 말이죠.

 

아니 성경말씀에 이스라엘만 찬양토록 했다 말이죠.

그럼 말씀이 틀린 거네?

 

천만의 말씀

문제는 이스라엘이 유대인이 아니무이다.

존재적 이스라엘은 가짜요 우상이다고 했지요

 

기능적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이방인이다 말이죠.

그냥 이방인이 아니라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라고

찬양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노래하더라 말이죠.

 

껍데기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우겼던 자들은 정작 불러 보라고 해도 안나와요

찬양을 그 동안했다고 우겼는데

그럼 불러 보라 말이죠.

안 나와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인데 어떻게 찬양합니까?

퍼뜩 퍼뜩 죽어버리는데

누가처럼?

예수님처럼

누락이 되는데

자아라는 존재감이 없어져 버리는데?

이름 아무것도 아닌 이름이 남아서 뭐하게?

나의 존재가 중요하지

그 존재에서 나오는 찬양이 찬양으로 나오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동안 존재감이 없다고 여겼던 자가

나의 존재감 때문에 그 가치를 의미두기 위해서

전혀 존재감이 없는 자들을 찬양할 줄 모른다고 했었었는데

도리어 그들이 내 눈 앞에서 찬양을 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찬양이 주체가 되어서 벌리는 사건이다 말이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던 맏아들은

죽었던 동생 탕자가 돌와 왔을때에

아버지의 용서의 사랑을 찬양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찬양하지 못할까요?

 

저 때려죽일 탕자 동생 때문이다 말이죠.

 

그러니 찬양이란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의 피 사건입니다.

 

인자하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3일의 간극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찬양이 덮쳐지지 않은 자는

입으로 찬양하기만 할 뿐 마음으로는 저주하는 자이다 말이죠.

이것이 존재로 감출 뿐이지 기능은 이 존재를 깨고 튀어나오는 겁니다.

형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기도 전에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기능으로써 말이죠.

 

그러나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이 인자하심이 덮쳐진 자에게는

아무리 단 한번도 노래 부른적 없고

노래할수 있는 입이 없는 벙어리 일지라고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기도 전에 찬양하기로 작정이 된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차라리 주여 저는 찬양할 줄 모릅니다 라고 했다면

주님의 찬양이 덮쳐질 텐데

 

찬양할 줄 안다고 하니 찬양할 줄 모르는 자였었었었었었던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왜 세례요한과 사도바울이 찬양자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서

왜 퍼뜩 퍼뜩 죽어버리는 줄 아시겠습니까?

물론 자기가 죽고자 해서가 아니라

억지로라도 로마에서 죽이시고자

주님이 갑자기 선회 시켰던 것처럼 말이죠.

 

그럼 이방인이 주님을 많이 찬양 할 수가 있었을텐데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바울이 빨리 죽는 바람에

열방이 아니라 쪼매 몇몇 안되는 이방인이 찬양하겠군요 라고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많이 찬양자로 찬양이 덮쳐지더라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지

사도바울이 원인이 안되더라 말이죠.

결과가 먼저이지

원인이 먼저가 아니였더라 말이죠.

 

이것을 또 제가 구약에서 생각난 부분이 있어서 알려드렸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 삼손입니다.

사사들이 모두 그러한데

 

삼손이 머리 땜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가 있었는데

머리가 짤려서 눈도 뽑혀서 다 잃어버렸을때에

오히려 다시 머리가 자라나니까

더 많이 구원하더라 말이죠.

 

늘 그 부분을 보면서 왜 이렇게 오바 액션하지?

왠 오바일까?

너무 지나치게 과장하는 뻥쟁이가 아닌가 하는

왠지 그 부분이 억수로 삔떼가 안 맞더라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머니께 설명하다 보니 다 풀리는 겁니다.

 

퍼뜩 죽어버리는 세례요한 사도바울을 보면서

주님이 손해 보시는 것 아닌가?

인재를 아깝게 낭비하는 것 아닌가?

 

아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말이죠.

오히려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였다 말이죠.

갑자기 얼마 되지도 않은 빈약한 쌀을 뻥튀기 기계에 집어넣어

뻥이요 라고 펑 하고 튀어나오는 것들이

웰컴투 동막골의 팝콘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온 하늘을 장식하는

하늘에서 주의 인자가 내려와요 가 되더라 말이죠.

 

즉 찬양 자체가 과분해요

가끔 티비를 돌리다가 종교방송의 찬양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들은 과분한 찬양으로 안 보여요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아무리 오케스트라 무슨 파이프 오르간 억수로 비싼거 까지 동원해서

수많은 성가대원들을 동원해서

그야 말로 웅장하게 기죽이듯이 찬양을 불러대어도

 

참으로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더라 말이죠.

 

제대로 과분한 찬양이 덮쳐진 자는

퍼뜩 퍼뜩 죽어나가 버리는 겁니다.

잃어버림을 당해 버리더라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진 찬양자입니다.

 

그러니 삼손이 머리 짤리고 다시 길게 자랐을대에

살아있을 때 보다 죽었을 때 더 많이 구원했더라 라는 표현이

아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사사들 다 그래요

 

(16:30, 개역)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16:31, 개역)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적들을 죽인 것을 가지고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라고 표현하더라 말이죠.

 

붙이시는 전쟁이듯이

붙이시는 찬양이다 말이죠.

 

자 그럼 이스라엘은 이 사사들로부터 구원 받아서 제대로 삶을 살았다?

아니지요

사사들 퍼뜩 퍼뜩 다 죽어버리니까

다시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이였더라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 끊임없이 한 명 죽으면 또 한 명 투입하시는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일하시는 것일까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로 가르기 위함이다 말이죠.

자꾸 사람의 일로 돌릴려고 할때에

기드온이 의도적으로 사람의 손으로 구원이 된게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자꾸 자꾸 누락 되는 겁니다.

일부러 그런 사사를 뽑았구요

딸랑 일회용 컵처럼 소모품으로

그것도 모잘라서 퍼뜩 퍼뜩 죽여버리는

 

그야말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인자하심의 기능을

즉 너는 죄인이고 나는 구원자야

넌 환자고 난 의사야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라는 기능을

그래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인자 하심 이라는 이 기능을

머리를 드심

구원의 뿔을 드심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를 하시는데 있어서

인간들은 답답해서 못 견디는 겁니다.

나의 존재를 위한 하나님이 되어달라고 우길 뿐이지

주의 이름

아무것도 아닌 이 이름을 위한 기능으로써의 찬양자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결국 찬양 조차도

두 패로 갈라버리는 겁니다.

 

또 재미난 이야기를 어머니께 했지요.

 

주여 주여 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아왔습니다.

라고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오더라 말이죠.

 

이게 참 신기하지 않나요?

왜 마귀는 자신의 기능을 망각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자꾸 주장하는데 있어서

자꾸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할까요?

결국 마귀 조차도 피조물이기 때문이기에

반드시 맡은바 그 역할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심지어 타락한 천사로써 찬양의 천사였다는 말도 들은적 있는데

패쓰하고

그래서 베드로를 잡아왔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누가? 누구긴 누구이겠습니까 마귀가 말이죠.

마치 성전에서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자처럼

기도 자체가 두 패로 가르는 기능이요

성전 자체가 그런 기능입니다.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마귀는 주님을 배신 때린 베드로를 잡아서

자신의 이런 찬양의 행동을 인정받고자 열심히 잡아왔더니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그 맏아들 앞에서

 

예수님은 그래 그래 잘 잡아왔다

안그래도 내가 밤새도록 잠 안자고 베드로가 믿음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나의 피 옷을 손바느질로 짜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맞는지 안 맞는지 마쳐보자

보자 조금 큰가? 작은가? 아 딱 맞넹

 

마귀는 칭찬은커녕 베드로 좋으라고 한 셈이 되니

부글 부글 끓어오르더라 말이죠.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베드로 배신자 보다 예수님이 얼마나 얄미운지

예수님을 악하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져서 벌어지는 찬양사건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그야말로 왕뻔뻔이입니다.

 

마귀가 돌아버립니다.

이런 뻔뻔한 놈

그래서 아벨이 맞아 죽었잖아요

이래나 저래나 우리 찬양자로 태어난 자는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의 찬양이 덮쳐진 겁니다.

이것이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기도 전에 찬양자로 작정된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모든 열방이 찬양하는 이 사건을

이 십자가 사건을 노래 못하는 이유는

 

사실상 이스라엘이 아니였고

이스라엘만 찬양한다는 말씀 자체는 원래 기록된 대로 맞았다 말이죠.

본인들이 이스라엘이 아닌데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니까

더더욱 그런 갭이 생기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스라엘로 안 보이는 이방인이 원래 처음부터 이스라엘로 태어난 자였던 겁니다.

원래 거위로 태어났었던 미운오리새끼처럼 말이죠.

 

그러니 주의 인자하심 곧 찬양이 덮쳐진 자는

미움을 받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찬양 이라는 기능은 곧 은사는

존재라고 우기는 자들로부터 미움받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래서 퍼뜩 퍼뜩 죽어나가는 누락됨으로써

주의 이름을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도록 태어난 겁니다.

 

이것을 글쎄 다윗이 찬양합니다.

본인이 바로 열방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주의 인자하심을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말이죠.

 

 

(15:1, 새번역)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15:2, 새번역)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69:9

(15:4, 새번역)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15:5, 새번역)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15:6, 새번역)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15:7, 새번역)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15:8, 새번역)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 유대 사람을 가리킴

(15:9, 새번역)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삼하 22:50; 18:49

(15:10, 새번역)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 32:43

(15:11, 새번역)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 117:1

(15:12, 새번역)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하였습니다. / 11:10(칠십인역)

(15:13, 새번역)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15:14, 새번역)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15:15, 새번역) 그러나 내가 몇 가지 점에 대해서 매우 담대하게 쓴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15:16, 새번역)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5:17,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5:18, 새번역)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15:19, 새번역) 표징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영의 권능으로'

(15:20, 새번역)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 또는 '기쁜 소식'

(15:21, 새번역)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 "그의 일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요,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52:15(칠십인역)

(15:22, 새번역)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15:23, 새번역)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15:24, 새번역)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 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15:25, 새번역)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15:26, 새번역)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15:27, 새번역)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15:28,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15:29, 새번역)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으로 압니다.

(15:30, 새번역)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 , '형제들'

(15:31, 새번역)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15:32, 새번역)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15:33, 새번역)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 고대의 한 사본에는 여기에서 16:25-27이 이어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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