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을 행하심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시편 126편)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 개역)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126: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126:2, 개역)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126:3, 개역)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26:4, 개역)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126:5, 개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6, 개역)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43:7, 개역)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43:8, 개역)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43:9, 개역)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43:1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43:11, 개역)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12, 개역)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3:13, 개역)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43:14, 개역)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43:15, 개역)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43:16, 개역)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43:17, 개역)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43:18, 개역)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43:19, 개역)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43:20, 개역)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3:22, 개역)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

(43:23, 개역)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43:24, 개역)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43:25, 개역)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43:26, 개역)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43:27, 개역) 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역하였나니

(43:28, 개역)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

 

먼저 시편 초반부에 다윗이 이스라엘로부터 쫏겨나서 이방에 떠돌아다니는 가운데서 시편의 기록을 언급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죽은 사울왕의 속성을 이어받아서 다윗을 쫏아내는 것일까요?

물론 유익이 된다 싶으면 이용해 먹고

손해 본다 싶으면 뱉어버리겠지만

그런 일방적인 정치성을 넘어서면서 까지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런데 다윗은 이것이 이스라엘이 한 짖이 아니라

원수가 했다고 그 원수에 대한 탄원시로 시편 전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의 글 계시록에서 시편 전체는 탄원시라고 했는데

울부짖음이다고 했는데

그 울부짖음 자체가 이미 승리했기에 눈물을 흘리는

주의 병에 눈물을 담는 것이다 말이죠.

? 그것만이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것은 기록이 안된 것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주의 병에 유리한 대로 계수해서 눈물을 담는 것은

일종의 연기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앗싸 눈물 한 방울 드디어 나왔다

주의 병에 담아야지

이야 이제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구나

이렇게 되니까 뭔가 장난치는 느낌이 든다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 말이죠.

이것이 앞뒤 모순되잖아요

역설적이지요.

눈물이 기쁨으로 된다 말이죠.

부정의 부정인데

이것을 히스테리 라고 한다 말이죠.

연기인지 장난인지 진짜인지

이렇게 했다가 다시 정반대의 극으로 저랬다 하는 것인데

이랬다 저랬다

그 간극 사이에 도대체 뭐가 개입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이라는 기능이다고 했습니다.

 

눈물이 먼저 있어서 그 원인으로 어떻게 기쁨이 되느냐 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이름의 개입 때문에

이름이 먼저 있었기에

이랬다 저랬다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름이 먼저 있지 않으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 없거든요.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인데

이스라엘에게 악담을 합니다.

이스라엘 멸망당해 포로 되어 간다고

그러면 정작 이스라엘이 울어야 하는데

자기가 웁니다.

그 우는 자를 이스라엘이 좋아라 할까요? 싫어하지

그래서 거짓선지자의 말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진짜로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바벨론 포로 되어 잡혀 갔을때에

오히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제는 기쁨의 선지자가 되어서

신나게 춤추는 겁니다.

너희들 이제 구원 받았구나

아니 지금 망해서 포로 되었는데 뭐 구원이라고

또 장난치는가?

너희들 구원 받아서 기쁘다고 춤을 추면서 포로 잡혀 당하는 길에

따라가면서 춤추고 노래 부르고 있으니

아까 보다 더 기분 나빠서 더더 싫어할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런데 거짓선지자의 말을 쫏다 보니 자기들도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춤추면서 노래부르고 너희는 이제 구원 받았다

표시해 두어라 다시 돌아올테니까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이 다시 돌아오는 길이니까

헨델과 그레텔처럼 표시해 두라는 겁니다.

 

그 삐꼬는 듯 비꼬지 않은 비꼬는 것 같은 말이

지금 오늘 꿈만 같도다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뭐야 그 말이 환상이 아니라 정말이였어? 사실이야 진짜야

어 어디서 듣던 말인데 개그맨 누구였지? 검색하니까 이런 내용이 나오네요

그냥 보시고 넘어가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fO9Owjem6w

 

계시록에서 보이는 환상들이 진짜 현실이 되고

눈에 보이는 현실들은 욕조 마개 뚜껑을 여는 순간 다 빨려 사라지는

이 두 현실의 충돌로써 나오더라 말이죠.

 

아 그런데 이것이 구약에서 이미 예레미야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

다윗을 하나의 개인으로 취급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쫏아내었지만

정작 그 다윗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으니

자기 얼굴에 자기가 누워서 침뱉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을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물론 인간 구원은 의미 없습니다.

구원의 탐심이라는 우상숭배를 왜 주님이 하시겠습니까? 하실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아무리 개판으로 만들어도

주님이 부여한 의미이지 인간의 의미가 아닙니다.

존재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존재 보다 더 존재적인 초과잉적 존재인 비존재 말이죠.

 

그러니 이 이스라엘을 자기들이 발로 차버린 다윗의 운명과 똑같이 맹글어 버린다 말이죠.

 

자 그러니 예례미야는 다윗언약 때문에 세워진 선지자이기 때문에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앗싸 좋아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드디어 다윗의 운명처럼 되더라 말이죠.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쓰리 희생번트를 만들어서 뻔뻔스럽게 주의 긍휼을 노래하는 새 노래를 부르게 되었듯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듯이

이제 이스라엘 본인들이 주의 긍휼을 노래하는 새노래를 부르게 되니까

진짜 진짜 꿈만 같은 진짜야 사실이야 라는

계시록의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처럼

말씀이 현실로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돌아오게 되니

표시한 대로 헨델과 그레텔처럼 돌아오는 그 길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더라 말이죠.

예레미야가 했던 행동들을 그때는 욕했고 거부감이 들었는데

그 욕한 행동들을 자신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쁘게 말이죠.

눈물로 씨앗을 뿌렸는데 기쁨으로 거두는 겁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그럼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름

이름 때문에 벌어진 언약 약속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개판으로 살았어도 막살았어도

졸지에 이 예수 라는 이름 때문에

우리가 싫어버린바 된 그 얼굴을

우리의 얼굴로 삼아버리는 그 운명이 덮쳐져 버린 겁니다.

그것을 새노래라고 했지요.

새노래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큰 일 곧 대사를 행하셨도다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이제 나타났으니 너희가 보고 앎이라

 

정녕히 내가 사막에 샘물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들과 시랑과 타조도

 

나를 존경할것은 광야에 샘물을

사막에 강물을 내 백성에게 주리라

 

나의 택한 백성으로 마시게 할 것이라

나의 택한 자들로 마시게 할 것이라

 

 

성가대에서 이 노래 박자 맞춘다고 발을 엄청 굴렸었죠

 

어떻게 사막에 샘이 넘쳐 흐릅니까?

왜 앞 뒤의 정반대의 상황을 짝으로 만들까요?

그래야 새 일이 아니냐 말이죠.

이것이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이름이 개입해서 벌어지는 구원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새노래죠.

 

그러니 부정의 부정으로써 증거 되는 겁니다.

사막인데 지옥인데 생명이 넘쳐나는 에덴동산이고

정작 에덴동산 같았던 애굽은 졸지에 지옥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역시나 구원사건인 출애굽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 출애굽 사건이 다시는 안 벌어질줄 알았죠 뭐

어 그런데 그렇게 외쳤던 다윗을 왕따 시켰는데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외쳤던 예수를 말이 씨가 된다고

지 원하는대로 십자가에 죽였다 말이죠.

 

아 그런데 그 십자가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이 아니라

구원받는 우리들의 운명이였더라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다윗에게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울려다가

도리어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이다 말이죠.

 

이런 구원을 교회에서 거부합니다.

심지어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둥 사기를 칩니다.

 

앞의 글에서 말했던 24 장로 중에

아브라함 조카 롯 같은 자도 24 장로 중에 속한다면

한국교회는 아마 촛불 시위 하고 난리칠 겁니다.

그야말로 사단의 회 이니까 말이죠.

 

24장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쳤던 그 모든 인간들의 외침을 함께 외쳤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받고 천국까지 합격해서 심지어 24 보좌에 까지 앉게 되었는가?

그 원인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는 겁니다.

 

아 그런데 이것을 한국교회가 외치지를 못해요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해요

그야말로 우상입니다.

 

그 핵심을 빠뜨린채

12 더하기 12 그래서 24장로

 

12 곱하기 12라는 144천 그런거나

계산하고 있더라 말이죠.

 

그러니 계산 되는 줄 아십니까? 백날 계산기 두드려 보세요 안 나옵니다.

계산 하고픈 마음이 들도록 하는 그 결핍에 말려들도록 하기 위함이니까 말이죠.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이런 조건을 따지듯이 계산기를 두드리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겁니다.

그 올무에 말려들라고 올무를 친 거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은 노동의 댓가이거든요.

인간의 신앙은 트릭입니다. 사기치는 겁니다. 속임수죠.

그 속임수 나올줄 알고 주님이 안 속는 겁니다.

 

그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눈물 흘리는 자

곧 잃어버림을 당하는 자 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무것도 한 것이 덮쳐지는 것이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한 사람인

세리 이다 말이죠.

이런 자가 24 장로이다는 겁니다.

 

아마 마귀가 극심한 반발을 할 껍니다.

주여 저 24 장로 중에 한 사람은 가만히 보니 베드로 같은데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던 예수님을 부인한 배신자입니다 라고 시위를 할 껍니다.

 

그 정도가 되어야 24장로가 될만한 자격이 된다 말이죠.

마귀가 극렬하게 반발 할 정도로 말이죠.

 

아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런 반발을 한다 말이죠.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둥

얼마나 어마어마 무시한 구원을 폄하하고 깍아내렸으면

구원이 엄청난 일인줄도 모르고 감히 그런 용어를 만들어내느냐 말이죠.

 

그래서 마귀보란 듯이 펼치는 구원사건이지

그래야 시종이 왕비가 되어야

세상이 배 아파 하지

 

마귀가 배 아파 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다윗의 운명 여자를 취할려다가 그 남편을 고의적으로 죽이고

아이까지 살려내지 못하면서 왕이라는 자리를 앉고 있으니

그런 자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 라고 발로 찼는데

마치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 라고 찼는데

주님께서 그게 너의 운명이야 라고

너도 한번 발로 차임 당해봐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잃어버림 당했을때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되돌아 오는 사건 이라는 겁니다.

 

이게 꿈만 같더라 말이죠.

 

그 다윗이 나의 운명과 별개인줄 알았는데

나에게 딱 맞는 나의 운명이였던 거죠.

너는 내 운명처럼 말이죠

 

아 제목을 이걸로 해야겠군요 부제목으로 할려고 했는데

 

자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은 나의 운명입니다 라고 한게 아니라

그것은 벌써 들통났죠 다윗을 쫏아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24 장로에게서도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너는 나의 운명이라고 찾아오심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를 싫어했지만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가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주님의 믿음이

주께서 기도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벌써 다 떨어진 탈탈탈 마귀에게 다 털린 베드로를

다시 살려내시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이죠.

 

요즘 노래로 치면 너는 내 취향저격 취향저격

아 이것도 한 참 지난 노래라구요 ㅋㅋㅋ

 

자기 피를 발라서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하는 겁니다.

24장로에게 흰옷을 일방적으로 입혀 버리듯이

마귀 보란 듯이 베드로에게 거룩한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버리듯이 말이죠.

 

그러니 이것 뭐 내 쪽에서 반발해서 안 일어나는 일, 대사 큰 일도 아니요

내 쪽으로 끌어당겨서 수용한다고 해서 벌어지는 큰 일도 아니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의 일방적인 편파 숙제 완성입니다.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이죠.

그 혜택을 그 완성의 혜택을 우리는 그야말로 뻔뻔스럽게 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분명 일체 인간들은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환상입니다.

계시록에서 아무리 별에 별 전쟁과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져도

이 세상은 고요합니다.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그저 계시록의 일들은 환상일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환상이 이스라엘 만큼에서는 현실이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꿈만 같도다 라고 외치겠냐 말이죠.

큰일이 덮쳐버린 겁니다.

 

실로암 소경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이 된 것이

이제야 예수님의 개입으로 인해 벌어집니다. 그 영광의 일이

 

절대로 벌어질 리가 없다고 단언해 버렸던 바리새인과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소경을 눈뜨게 하니까

그 환상이 꿈만 같이 실제로 벌어지니까

오히려 당황하셨어요

바리새인 쪽이 당황해서 이 환상을 어떻게해서든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하고자

갑자기 너 이름 뭐니 너 누구 제자니 라고

존재를 운운하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2천년 묵은 모세 제자야

넌 누구 제자니 라고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돌려 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평상시 우리가 이런 심뽀로 자기가 믿고픈 것만 믿는다 것을 스스로 들통내는 식인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예배드린다는 둥 기도 한다는 둥, 찬양 했다는 것이 다 거짓으로, 우상숭배로 들통이 나서 그런거다 말이죠.

실제계가 넘어오지 않도록 했던 짖들이였었었었던 거였다 말이죠.

 

스크린 안의 공포 영화든, 전쟁 영화든, 스크린 밖으로 그 환상들이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극장 안에 돈 주고 들어가는 거다 말이죠
.

교회가 그런 짖을 해요

극장 가듯이 오락 즐기러

그런데 극장의 스크린 안의 그 영화들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면

극장이 어떻게 되겠냐 말이죠.
말씀이 실제로 튀어나와서 활개치고 다니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잭 블랙 나온 영화 구스범스(핵소름) 였던가 그 영화에서 아니 최근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처럼 말이죠.

그것이 너는 내 운명 내 다리 내 놔라 라고 달려오시는 예수님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 꿈만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겁니다
.

오히려 그것을 막고자 넘어오지 않도록 하고자

신앙하고 믿고 예배드리고 찬양드렸다 말이죠.

이것이 존재

곧 찬양하기입니다.
의문의 제사의 반복인 겁니다.

그런데 찬양으로 태어난 찬양자가 스크린 밖으로

존재 밖으로 튀어나와

기능으로 작용해 버리면

이름으로 개입해 버리면
마치 책을 펼자가 없어서 눈물 흘렸는데
이미 눈물 흘린 자체가 책을 연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고

물론 아무도 열자가 없어서 그런 거죠.
이 이름이 책을 열기 때문에 책에 기록된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찬양으로 태어난 자가 그 증상물이니
신비한 동물 사전의 신비한 동물 같아
막 쏟아져 ~~~~
꿈만 같이 이 땅을 잠식해 버리며 땅은 요동하고 질식해 버릴 정도로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이 말씀이 막 쏟아져 보세요
아무도 안 온다 말이죠.
아니 교회 자체가 말씀이 쏟아내는 증상물로써
신비한 동물이 되어야 하는데
세상 오락에 빠져 살기 때문에
촛불 시위 맞불시위 그 재미로 돈벌고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에
환상 같은 말씀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조용한 거다 말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꿈만 같은 그 일이

영화 같은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거다 말이죠.

 

이스라엘의 의미를 정작 혈통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개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야 이스라엘 기능아 나 이스라엘 존재야

너는 이 스크린 밖으로 나오면 안돼

? 나는 이스라엘 존재니까 라고 우겼다 말이죠.
그래서 번제와 제사의 달인들이 된 거다 말이죠.

말씀이 튀어나오면 안되니까 말이죠.


그렇게 이스라엘 개판으로 만든다고 해서

예수님이 이 이스라엘을 포기할까요?
말씀이 튀어나오지 않을까요?

막 쏟아집니다.

자신들도 몰랐던 환상같은 기능적 이스라엘이 스크린을 찢고 밖으로 막 나와 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기능은 이스라엘 존재 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그야말로 괴물이다 말이죠.

그 괴물을 가두고 나오지 말라꼬 교회에서 우상숭배 짖만 골라서 했다 말이죠.

존재끼리 만나서 존재끼리 오락을 즐겼다 말이죠.

말씀도 영화 구경하듯이 봤다 말이죠.

엑소더스 라는 그 유명한 영화처럼 영화관에서 보듯이

교회에서 영화 보듯했는데

아 그런데 아뿔사 실제로 스크린을 찢고 막 넘어오게 되면
애굽이 딴데가 애굽이 아니라 교회가 애굽이고
그 교회를 탈출하는 출교회가 벌어지면서 교회는 홍해바다로 넘치는 물에 빠져죽는 교인이 생기고
그 속에서 홍해를 갈라서 세례받듯이 나오는 교회 속의 교회가 나오더라 말이죠.

오히려 눈물을 흘렸던 자들은 기뻐하고

교회에서 오락하던

이스라엘 속에서 오락을 즐기던 자들은

졸지에 망해버리더라 말이죠.

 

요즘 한국교회는 촛불집회라는 오락거리를 찾아서 완전히 미쳐있더라 말이죠.

맞은편 반대편의 맞불집회 또한 돈을 받고 그 오락에 미쳐있더라 말이죠.

둘다 똑같다 말이죠.

독재와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은 결국 같은 거니까 말이죠.

부모들이 하루살이로써 돈 벌고자 나올수 밖에 없고

그 돈으로 촛불시위하는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자 한다 말이죠.


문재인을 죽이고자 했다고 자수한 사람이 기초생활 수급자이다 말이죠.
돈 주는 사람이 시키면 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인 거다 말이죠.
24장로와 다를바 없는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이 뫼비우스의 띠를 누가 끊으리요?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런 선악이라는 존재성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개입하게 되면

졸지에 내가 욕했던 다윗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라고 내가 욕했던 예수가

나의 구원자가 된다는 말은

그 구원이 단순히 편안하게 만드는게 아니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게 되는

눈물로 주의 병에 담는 것만 기록하는

즉 주의 인자하심만 나타내는 일을 나타내고자

우리를 사막 속에 집어 넣는다는 겁니다.

그랬을때에

불순물이 쪼옥 빠져나와서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사막 속에 지옥 속에 있는 자라고 욕했었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지옥자식이라는 것을

그 지옥에서 빼내시기 위해서

번제와 제사 라는 그 지옥에서 빼내시기 위해서

인애와 자비를

손종이 제사 보다 나음을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본인이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기쁨으로 거두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 운명에 같이 동참이 된

예수님이 거두시는 씨를 뿌려서 거두신 열매라는 겁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생각 말고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열매

긍휼히 여기심의

순종이 제사 보다 나은 그 예수님의 순종의 열매로 태어났음을

그래서 주님이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포기하신적 없었다는 것을

 

성전에 올라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윗이 말이죠.

그 다윗의 운명을 이스라엘이 직접 자신들 집단이 격음으로 인해서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요

예수님의 운명이 나의 운명인줄도 모르고 싫어했다는

그래서 더더욱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신다는

그런 뻔뻔스러움으로

이 꿈과 같은 주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것도 내가 가는 것이 아닌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여서 주님에게 질질 끌려가는

신나는 길을 말이죠.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표시해 둡시다 다시 돌아오게 되니까 말이죠.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름 때문에 이름의 개입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진 기능이니까 말이죠.

 

얼마나 꿈만 같을까요

십자가로 표시 해 두는 겁니다.

앗싸 눈물 한 방울 흘렸다

주의 병에 담아야지 라고

기록하는 겁니다.

표시하는 겁니다.

이 흔적이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이다 말이죠.

 

신나게 눈물을 담고 신나게 춤추면서 표시해 두는 겁니다.

이 꿈만 같은 그 큰 일이 이미 벌어졌기에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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