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은 주의 날이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 찬양하라 호산나 (시편 118)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날과 호산나(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 찬양하라)

 


(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118: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8:2, 개역)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3, 개역)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4, 개역)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18:5, 개역)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118:6, 개역)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118:7, 개역)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8,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118:9, 개역)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118:10, 개역)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1, 개역)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2, 개역)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118:13, 개역)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118:14, 개역)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18:15, 개역)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118:16, 개역)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118:17, 개역)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118:18, 개역)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118:19, 개역)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118:21, 개역)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8:23, 개역)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4, 개역)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118:25, 개역)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118:26, 개역)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118:27, 개역)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118:28, 개역)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118:29,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앞의 글 계시록 5장을 통해서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시편 118편으로 치면 제목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날 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린양도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고

여기서부터 이미 단절이지요.

거기에다가 그냥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아니라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기 때문에

여기서 또 단절입니다.

즉 인간의 접근성이 차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손을 댈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는 기능의 효과가

이런 효과를 원인 없는 결과로 발휘가 되는데

 

(5:9, 개역)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5:10, 개역)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바로 나라가 되고 일종의 국가죠.

그리고 제사장이 되죠

그리고 왕노릇 하죠.

 

이것이 베드로 전서 29절에도 나옵니다.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새번역)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 43:20; 19:5-6; 43:21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19:6, 개역)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19:6, 새번역)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벧전 2:3, 개역)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4, 개역)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개역)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개역)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작년 201612월에 먼저 적었던 시편 118편은 버림받는 돌 중심으로 언급했고


http://crosslamb.tistory.com/1809

오늘은 그 버림받는 돌 곧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 때문에

얻게 된 효과인 그의 소유된 백성,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가 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 3가지를 누릴 수밖에 없는 이 노래하는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과 거룩한 나라 왕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된 백성

이 간극 사이에 오늘 언급된 바로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다 찬양하라 호산나가 개입이 되어 있는 겁니다.

주의 이름 말이죠.

이 노래 부르게 하실려고 우리를 지으셨고 이스라엘 삼으셨다 말이죠.

교회 삼으시고 24장로 삼으시고 신부 삼으셨다는 겁니다.

 

그저 노래 부른 것 밖에 없는데

사실 노래 부른다는 것은 마치 법을 지키듯이 행하는 노래 부르기가 아니라

저절로 신이 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니 부르고는 못배기는 신나고 즐거운

당위 , 존재 보다 앞선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마땅한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라고 찬양하니까

제사장들이 시끄럽게 한다고 소동을 일으키는 조용한 예루살렘을 소음으로 도시로 만드는 것에 의해 입을 다물게 만들려고 할때에

(19:35, 개역)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젖먹이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게 만들겠다고

 

협박을 협박하는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협박을 협박하는

 

마치 탄핵을 탄핵하는

비밀을 비밀로 하는

금지를 금지 하는

 

노래를 금지시키니까 그 금지를 금지시켜버리는 이것이 바로

새노래 라는 사건이다 말이죠.

 

(존재는 기능을 협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 누구 제자야 난 2천년 묵은 모세 제자야

너는 신참 예수 제자이지?

그러나 기능은 그 존재의 협박을 협박함으로 일찍 죽임 당함으로써 무능화 시키는 겁니다.
그렇기에 기능은 아무런 존재감이 없이 그 모세의 스승이 예수님이야 라고 모세가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변화산상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주여 빨리 죽어주시옵소서 일찍 죽임 당해 주옵소서 라고 외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모세는 정작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능만 외치고 후딱 후딱 이동하듯이 누락되고 사라져 버립니다.

빨리 죽어 주옵소서 라는 말만 하는 기능으로써 말이죠. 마치 24장로가 면류관 반납하고 누락 되듯이.

그래서 이 두 소욕, 존재의 소욕과 기능의 소욕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한다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오히려 노래한다는 자들이 말려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버림 받는 돌 이라는 기능입니다.

버림 받는 돌이어야 모퉁이 돌인 머릿돌이 되는 거다 말이죠.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인데 머릿돌이 되는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기능이 발휘 됨으로써

호산나 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찬양을 금지시킨 그 당사자들이 오히려 천국에 금지 당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시온에 둔다는 겁니다. 부딧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말이죠.

그러니 지금 대제사장에게 호산나 노래 부르는 어린아이들이

대제사장 에게는 거치는 반석이자 부딧히는 돌에 꽝 하고 부딧히는 효과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새노래라고 찬양이라고 호산나 라고 한다 말이죠.

 

 

자 그럼 오늘 제가 중점을 두고자 하는 내용이 뭔고 하니

주의 날에 이렇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 찬양하라 라고 외치는데 있어서

반드시 이것을 싫어하는 세력이 돌출 됨으로써

거치는 반석 부딧히는 돌의 기능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새노래가 되는데

우리 성도 자체가 바로 이런 어린아이의 호산나 찬양처럼

우리 자체가 거치는 돌이 되고

부딧히는 돌이 된다는 점입니다.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말이죠. 무능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바로 주의 날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날은 없습니다.

존재의 날은 없습니다.

 

주의 날이라면 주님이 홀로 영광 받아야 하는데

주님 혼자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함에 있어서

24장로가 면류관을 반납한다 말이죠.

? 24 장로가 앉은 보좌는 결국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보좌이지

자신들이 믿음이 좋아서 앉은 자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성화가 된 자들이라서가 아니기 때문에 반납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능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 혼자 영광 받으심에 합당함이 더더욱 초과잉적으로 확장된다 말이죠.

 

자 그럼 제가 오늘 중점을 두는게 뭔고 하면

오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왜 하필이면 주의 날인데

마치 인간이 그 주의 날의 혜택을 받는데 있어서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아직 말이 안나왔는데

왜 하필 죄인이어야만 하느냐 라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인간의 날이 아니냐 말이죠.

인간 구원의 날

그런데 인간 구원의 날이 아니라

주의 날입니다.

 

마치 주님 자신이 구원자이기 때문에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의사의 기능은 환자에게만 해당 된다 말이죠.

의사 자신의 기능을 환자에게만 발휘할 수가 있다 말이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는 오히려 필요가 없다 말이죠. 기능적으로

 

자 그래서 인간 구원의 날이 될 수가 없는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한국 기독교 특히 성화론자 개혁주의는

졸지에 인간 구원의 날이요

죄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의인을 부르러 왔다는 점에서

이 시편 118편과 안 맞다 말이죠.

그들이 오히려 교회에 시끄럽게 한다고 호산나 찬송하는 자를 쫏아내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부딧히는 돌에 부딧혔다 말이죠.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려면

의인들을 모으시면 되잖아요

실제로 성화론자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그것은 주의 날이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죄인들을 모으시더라 말이죠.

 

주의 날이기에

환자를 모으는 겁니다.

의인 모을 것 같으면 애굽인들 회개시키면 되잖아요

구지 나갈 필요도 없이

그게 한국 교회들이라니깐요

서로가 회개하래~

촛불 시위자는 맞불시위자에게

맞불시위자는 촛불 시위자에게 ㅋㅋㅋ

애굽인들을 회개 시키겠데요 글쎄

 

그런 의인들은 필요가 없어요

존재가 아닌 기능이기에

주의 이름과 안 맞다 말이죠.

 

그래서 죄인을 부르시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이들의 기능 또한 거리끼는 걸림돌이거든요.

서로가 이 폭탄을 제거하고 싶어 난리다 말이죠.

아이들의 찬양을 막고자 난리 난리

 

오히려 의인들은 이 어린아이의 찬양을 소동으로 소음으로 여겨서

졸지에 부딧히는 돌에 부딧히더라 라는 점입니다.

 

이게 새노래라는 기능이 덮쳐진

새노래 지키기가 아닌 새노래자로 태어난 자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정작 의인으로부터 죄인 취급받는 그 충돌 분류작업으로 인해서

거룩이 덮쳐져서 벌어지는 충돌의 사건으로 인해

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이름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라는 점입니다.

 

가만히 보니 그 동안 교육화 되고 신앙화 되고

교리화 되어서 알게 되었던 것은 순엉터리가 되고

 

말도 안되게

죄인에게 이 주의 이름이 덮쳐져서

정작 호산나 라고 찬양하고

마치 이방인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을 찬양하지 못하는

 

정작 실로암 소경을 정죄하듯이 했는데

그들이 도리어 소경이 되어서 고쳐달라고 하지 못함으로써

본다고 우기니까 소경으로

 

소경을 거부하는 그것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식입니다.

 

찬양 못하는 벙어리를 거부하는 그 찬양하기를 거부하는 찬양자로 태어난 자를

부딧히는 돌로 삼은 겁니다.

 

찬양하기를 거부하는 새노래(찬양자로 태어난 벙어리)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저들 찬양하기를 지키는 자는 새노래를 거부하는 자이고요.

 

결국 그 부딧히는 돌이, 버림받는 돌이 모퉁이 돌이 되도록 하셨다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의 운명이 곧 우리의 운명이다는 겁니다.

내가 죽인 예수님이 나의 운명이였는 줄 몰랐다는 것이기 때문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 돌로써 구체적 보편성인 새노래이였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 쪽으로 다가가서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운명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다가와서 뒤짚어 씌우는 운명

다윗의 운명을 거부했던 그 이스라엘이

정작 자신의 운명인줄 모르고 첫사랑의 운명인줄 모르고 발로 차다가

도리어 누워서 침뱉기 한 거죠.

그렇게 실수를 해서라도

바벨론 포로로 쫏겨나서 다시 돌아올 때

비로소 꿈만 같도다 라고 주의 날을 노래 부르는 겁니다.

 

얼마나 기뻣을까요?

꿈만 같았던 그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으니까 말이죠.

죽는줄 알았는데 살리셨으니 말이죠.

 

이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 하세 즐거워 하세

앗싸 딩가둥둥 주의 눈물 드디어 주의 병에 담았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결국 인간이 구원 받는 날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날을 우리에게 과시하고자

마치 신랑이 자기 신부를 꽃단장 시키듯이

24장로에게 흰옷을 입혀서

자기 신부를 자랑하듯이

자신의 날로 삼아서 일찍 죽임 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꽃단장 시키듯이 거룩을 뒤짚어 씌워서

자신의 날을 과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모세의 온유에서 나타나듯이

주의 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 새까만 구스여인 제일 못난 여인 구스여인을 신부로 삼아서

온유 곧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어서 과시하는 날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과시할만 한고 하니

그 신부가 이뻐서 과시할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어느 정도로 과시할만 한고 하니

천한 기집종이 왕비가 될 정도로 과시하니까

세상이 배 아파 죽을 정도가 될 정도이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안된다 저 천한 기집을 아내로 삼으면 너의 체통이 뭐가 되니

나의 체통도 좀 생각해 달라고 졸지에 존재감을 주장하다가

너도 똑같이 천한 자리에서 입음을 당하는 긍휼을 격어보라 말이죠,

이 정도로 반발성이 있어야 긍휼이요 과시할만한 정도의 거룩이다는 겁니다.

일찍 죽임 당하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거죠.

보편성으로 취급하지 않고 거부했는데 그 거부한 것이

도리어 머릿돌이 될 정도로

자신이 죽였는데 다시 살아났을 정도로면

이것 보다 명료한 것이 없다고

그 살인자 당사자가 고백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말이죠.

 

자 이렇게 될 때

바로 성전에 올라갈 때

신약으로 치면 예수 안에서 비로소 원수가 들추어진다는 겁니다.

 

이 글을 적다가 어머니께 시편 50편을 설명하던 때가 기억이 나는데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다름에서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그 다음 하나님의 구원이 된다고 라는 그 순서를

거꾸로 했다고

 

먼저 하나님의 구원이 먼저 있고

그 다음 그 행위를 옳게 여기심을 받는 자가 생기고 즉 행위를 한 적도 없는데

테어나기도 전에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된 야곱처럼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겁니다.

의로워서 의로운자가 되는 경우는 성경에 없습니다.

부자청년도 시도하다가 주의 이름의 개입에 의해 도리어 더 탈락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영화롭게 했다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해 버리고

그 다음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즉 감사하는 자의 존재가 아니라

감사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감사자로 태어난 기능이 등장하더라 말이죠.

 

존재는 존재로 보는 순서이고

기능은 거꾸로 보는 순서이다 말이죠.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기도 전에

기능이 먼저 있었기에

마땅히 나타났었었어야만 하는 비존재로 태어나는 거다 말이죠.

 

자 이것이 바로 주의 날이다는 겁니다.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은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날은 주의 날일세

 

이 날은 이 날은

나의 모든 죄 사함받은 날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이 날은 이 날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또 하나의 노래가 생각 나죠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

주의 이름 높여 다 찬양하라

귀하신 주의 하나님 호산나 높이 올리세

이건 앞에서 언급된 내용이고

 

아니 주의 날인데

주님이 얼마나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기념화 하고 싶었으면

우리를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냐 말이죠.

주의 날이 구원의 날인데

이 구원은 우리의 아이디어가 아니요

우리는 요청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원수를 붙이시니까

졸지에 간구할 수밖에 없도록 하시고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 배기도록 만드심으로써

자신의 날을 자랑하게 만들고

노래하도록 만들더라 말이죠.

우리는 추호도 노래할 마음이 없었는데

우리는 나의 날 내 생일 밖에 모르는데

남의 날 관심 없다 말이죠.

특히 주의 날은 더더욱 관심이 없는데

졸지에 내가 구원 받는 날이 됨으로써

나의 날이 아니라

주의 날로 노래부르게 되더라 말이죠.

내 입이 저절로 말이죠.

나의 입이 아니라 이 입을 창조한 자를 입 스스로가 막 불러요

내가 그 입의 주인이라고 우겨서 아무리 막을려고 해도 막을수가 없어요

호산나 찬양하는 이 어린아이의 찬양을 막을수가 없듯이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노래인기라

그냥 쉽게 존재의 노래가 아닌

기능의 노래인기라

그러니 막을수가 없어

내 입술이 저절로 막 노래해 막

내가 아무리 막고자 해도 안 돼

? 당위 이니까

마땅히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니까

이 입이 자기를 창조한 주를 찬양하겠다고

나를 거스려가면서 막 찬양을 하니

이것이 거치는 반석을 부딧히는 돌로써 시온에 두는

내 입술에 두는 식이다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거룩한 나라가 되어버렸어

 

이 한국은 탄핵이나 외치고 그 맞불로 반대나 외치는 마귀 나라일 뿐이고

그 마귀 나라에서 벗어날길이 없는 갇혀 있는

딴 나라 가도 마찬가지인 이 세상인데

 

뭐 한게 있다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거룩한 나라가 되어버렸어

그냥 된 기다 말이죠.

 

그리고 왕같은 제사장이레

우리 꼬라지 보세요

왕같은 제사장인가?

 

마치 감사로 제사 드린적 없는데 하나님을 영화 롭게 했다고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말이죠.

그 행위를 옳게 한 적 없어요

이 노래를 부른 다윗 보세요

부엉이 바위에서 우리야 장군 등 떠밀어 죽였잖아요

그것도 철저하게 계획을 짜서 말이죠.

 

(50:14, 개역)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5, 개역)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런데 일방적으로 거룩한 나라 왕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를 선물로 주셨다 말이죠.

? 다윗이 이뻐서? 아닙니다.

자신의 피 자랑할려고 피 과시 할려고

자신의 날 주의 날 구원의 날을 자랑할려고

제일 나쁜놈을 제일 많이 용서함으로써

제일 많이 사랑 하게 만들어 버리는

기능을 땅꽁껍질 까듯이 까는 겁니다.

이 속성을 드디어 주의 날 곧 주의 피를 나타내는 날을 위해서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이름 이라는 기능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주의 날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맏아들에게는 전혀 기쁜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탕자에게 이 주의 날은 그야말로 잔칫날입니다.

금가락지 낀거

새신발 신은거

살진소 잡은 거

 

이거 탕자가 기뻐하라고 준게 아닙니다.

아버지 자신이 더 기뻐할려고 준거다 말이죠.

아버지 자신의 인애와 자비를 과시하고자 말이죠.

이 인애와 자비를 맏아들이 반발 하더라 말이죠.

 

탕자는 금가락지 때문에 기뻐한게 아니라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이름이라는 이 기능 때문에

기뻐하지 않을수가 없는 겁니다.

 

탕자의 날이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의 날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어느 정도로 인자하신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그 3일의 간극 날인가?

바로 거룩한 나라를 삼을 정도로! 누구를? 탕자를

아마 성화론자들 지옥에서 다 반발 할 껍니다.

그 정도로 반발을 해줘야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또 왕같은 제사장을 삼을 정도로! 누구를? 탕자를 곧 죄인을 말이죠. 막사는 죄인을

아마 개혁주의자들 들으면 교회 질서 무너진다고 징징댈껍니다.

예루살렘을 평화의 도시를 시끄럽게 소동시킨다고 어린아이의 입을 다물게 하라꼬 하는 바리새인처럼 말이죠.

또 그의 소유된 백성을 삼을 정도로 말이죠. 누구를? 개같은 이방인 여자를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는 분이

이스라엘 속에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수가 없더라 말이죠.

이 부스러기를 외치는 자가 오히려 잃어버린 양이더라 말이죠.

이스라엘을 거부하는 새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이중강조가 된 거죠.

 

맏아들은 기껏 살찐소 나를 위해 잡아주지 않느냐 그것만 따질 뿐이다 말이죠.

존재만 따질 뿐이다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주의 인자하심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없다는 겁니다.

그분을 제대로 봤다면

면류관 반납을 해야할 판국인데 말이죠.

 

주를 노래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마땅함을 알게 될 것인데 말이죠.

 

주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 말이죠.

 

이것이 존재들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존재는 이 말을 지키고자 백날 하는 짖이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인

제사와 번제만 주장하는

뭘 해도 제사와 번제 뿐인

의문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얻은 우리에게는

이 거치는 반석과 부딧히는 돌인

이 버림 받는 돌 그 자체가

머릿돌로써

기능하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주의 날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소리 안 지르고는 못 배기는 거죠.

우리는 찬송하기 위해서

그것도 이 찬송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그 존재들이 빠글빠글한 그 정중앙에서

호산나 라고 외치는 소동을 일으키는

말썽쟁이 찬양자로써 태어난 겁니다.

 

새노래는 이렇게

잃어버렸다 다시 되찾는 사건을 일으키는

주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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