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 당한 어린양이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5:11-14)

 


(
5:11, 개역)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5:12, 개역)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5:13, 개역)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5:14, 개역)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성경은 그야 말로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즉 말도 안되는 소리로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임 당했는데 어떻게 합당하냐 말이죠.
죽임 당함 그 자체가 합당하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말이죠.

오히려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냐 말이죠. 지혜롭지 못하다는 겁니다.

엄청난 부조리요 불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거다 말이죠.

시편에서 감사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제사 그 다음 주님을 영화롭게함 그 다음 그 행위를 옳게 여기심
그 다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심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일종의 하나님의 구원이 최종목적이 되는 거죠.

그 최종목적을 위해서 결과를 위한 원인들을 하나 하나 달성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 그 다음 그 다음 이런 순으로 차곡 차곡 최종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서 도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사유방식입니다.

즉 인간의 언어처럼 과거를 거쳐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나아가는 식이고

언어의 구성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한 단어 단어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이 되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회문처럼 컨택트 영화에서 나오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말이죠.

 

마침 며칠전에 이런 상상을 해 봤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말이죠.

주로 공상 과학 영화에서 자주 다루는 타임머신과 같은 시간을 다루는 영화라든지

또는 초고도의 과학기술로써 인간의 삶이 윤택해지는 기술 문명 기계 라든지

등등 앞으로 미래에는 충분히 이루어질수 있겠다 싶다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왜 지금을 그것을 못 누리고 과도기 속에 놓여지게 되느냐 말이죠.

 

예를들어서 멀리도 말고 50년 뒤에 자율주행차 또는 드론 자동차가 보편화 되어버린 세상이 온다 치자 말이죠.

 

그럼 지금 현재 그것을 못 누린다 말이죠. 5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막상 그 50년 뒤를 가게 되면

이제는 아니 그때는 나이가 많아서 기계고 뭐고 몸을 가눌수 있는 신체가 되지 못한다 말이죠.

그럼 의료과학의 힘을 또 빌려야 겠지요.

 

자 이런식으로 반복을 했다 치자 말이죠.

그럼 확실하고 명료한 명쾌한 최종목적지에 다달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더더욱 미로 속을 해메게 되는

 

이렇게 적다보니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나네요 나비효과 라는 영화

뭐 하나를 수정하면 다른데 빵구멍이 나고

그 빵구멍 난 것을 과거로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서 수정하면

또 다른 빵구멍이 생긴다 말이죠.

그러니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유일하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아예 미래 완료

완료된 미래 자체를 누리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조차도 오히려 세상 것이 부러워서 스스로 그 미래완료를 발로 차 버릴정도로

아 이것은 아무나 못 받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죠.

 

이스라엘 본인들도 존재가 되길 바라지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 곧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그 기능에 사로잡힌 증상물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말은 곧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아는 일에 신과 같이 된 거다 말이죠.

그러고 보니 모든 영화는 결국 인간들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바라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구지 구원이고 뭐고

긍휼을 바라고 뭐고

인애와 자비를 바라고 뭐고 하는 것이 구지 구지 필요가 없는

그냥 신 자체가

신의 존재가 되는 그 자체가 인간의 꿈이다는 것이

실재계의 욕망인 영화를 통해서 알수가 있다 말이죠.

 

박그네 보세요 때려죽어도 본인은 공주이다는 겁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배신때리지 않는 진실한 사람이니 라고 말이죠.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와서

왜 시편 50편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 고 하니

 

제가 오늘 계시록 5장의 본문을 보니 딱 눈에 띄이는 점이 뭔고 하니

 

합당하도다 라는 표현입니다.

 

제가 서두를 이렇게 전개한 이유는

합당하도다 가 도대체 뭔가 하는 점입니다. 말이 되냐 말이죠.

 

합당해서 합당하다면 그것은 합당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죠.

그것은 조건을 갖추게 되니까 합당해 졌다 라는 거죠.

그러나 합당해졌다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합당하도다 로 출발한다는 겁니다.

 

합당 자체는 그 어떤 누구로부터 합당하니 안하니 라는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적어도 판단할려면 먼저 존재하던가 말이죠.

합당 이라는 존재 자체도 스스로 존재성을 거부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로 남아 버리니까

합당함은 그 누구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합당하도다가 사실상 제일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시간의 순서대로 차곡 차곡 쌓여서 합당함이 되는게 아니라

합당하도다가 먼저 있고 그 증상물로써 거꾸로 증상물이 나타났었었었어야 했었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가 먼저 있고 그 다음 제사가 있고 그 다음 영화롭게 함이 그 뒤에 나오고

그 다음 그 행위를 옳게 함이 나오고 그 다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심이 나오는게 아니라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심이 먼저 있고 거꾸로 그 뒤에 그 행위를 옳게 여기심이 있고(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용서를 받는 자의 행복에 대해서 로마서 4장에 사도바울은 스데반을 죽여놓고도 주의 용서함을 보고서 다윗의 고백을 보았고 그 다윗의 고백은 아브라함을 보았고 그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보았듯이 말이죠.)

그 다음 하나님을 영화 롭게 그 다음 제사 그 다음 감사 이렇게 된다 말이죠.

즉 거꾸로 반대의 순서대로 했다는 표현은 차이성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 이다는 것이지
순서를 바꾸어 역순으로 한다고 해서 역시나 역사에서 벗어난게 아니다 말이죠.

역사와 차이가 난다는 의미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한 문장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뒤죽 박죽 마치 잡곡강정처럼 말이죠.

양자학 세계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했다죠.

과거 현재 미래가 구분 없이 막 썩여있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과 나중이다는 겁니다.

 

자 그런식으로 시편 50편을 언급했듯이

오늘 합당하도다 라는 표현 자체도 그러하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영광이 되니까 합당한게 아니라

찬송하니까 합당한게 아니라

부요하니까

권능이 있으니까

지혜가 있으니까

힘이 되니까

존귀하니까 합당한게 아니라 말이죠.

그런것은 다 존재이고

 

역설적이게도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그렇다는 건데

역사 속에서는 사실상 그 반대로 취급했습니다.


다들 꼴보기 싫다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 말이죠
.

모든 질고를 지고 가니까 싫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아름다움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모양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었고

태양빛에 얼굴이 새카맣케 타 버려서

같을 꼴, 같은 운명이 될까봐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합당하도다 라는 말은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분명히 그를 쓸모 없다고 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전제가 된 겁니다.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를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임 당한 어린양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이름을 앞장세우듯이 말이죠.

아무 유익이 안된다고 말이죠.

당연하지요

자기유익을 구하는 것이 우상 숭배 아닙니까
자기를 위하여 말이죠.

그 우상숭배에 예수라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존재감이 없어요

나를 우상시 하는데

나를 내가 하나님되기 라는 최종목적지를 달성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예수는 거리끼는 걸림돌이였다 말이죠.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된 겁니다.
교회 짖고 성전을 세워서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바랬지
번제와 제사를 드리기를 바랬지
긍휼을 바란게 아니다 말이죠.

구원을 바란게 아니다는 겁니다.
구원도 내가 신이 되기 위한 구원이기에

하나님 같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합당하다니

그런데 머릿돌이 되다니

말이 되냐 말이죠.


그런데 

아 뿔 사

어찌할꼬 ~~~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개역)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자 이런 의미에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합당하도다 라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말이죠.

 

즉 아무도 이 합당하다는 것에 동의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다 예수를 죽이는데 참여 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사는 자들인 존재들의 함성입니다.

못 박아라 못 박아라 라고 외쳤다 말이죠.

 

그런데 말씀은 역사와 반대로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가운데

그 전제를 깔고서 그 배경으로써

유일하게 동의하는 겁니다. 아멘 이라고 말이죠.

 

24장로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합세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였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24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합세한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말이죠.

그렇게 외쳤던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들이 이제 역사 밖에서

역사 속에서는 아무도 아멘 하지 않았는데

합당하시도다 에 동의 하지 않았는데

이제 역사 밖에서는 아멘 이라고 네 생물의 천사들과 함께 아멘이라고 외친다 말이죠.

아무도 경배 하지 않았는데 경배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정할수 있냐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인데

 

또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어린양에게 합당하다는 소리는 누구든지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치지도 않았고

십자가 라는 사건도 발생하지도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합당하지 않다 말이죠.
그것은 성경말씀과 맞지 않고요

기록된 말씀이 아니다는 겁니다.

 

먼저 합당함이 먼저 있었기에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기에

십자가가 무한 영광으로써 십자가는 합당하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외치는 한국교회는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당하다고 우기지

그것이 개혁주의요 성화론이듯이

졸지에 인도종교(성화론)가 한국교회를 다 장악한 식이다 말이죠.

구지 인도에 가서 우상숭배의 실태를 볼게 아니라

한국교회를 보면 다 우상숭배 하는 것을 볼수 있다 말이죠.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자들을 구지 멀리 이방나라에 가서 본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손으로 세운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 보셨다 말이죠. 강도의 소굴을 말이죠.

조폭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없이 말이죠.

 

그러니 그들에게서는 합당한 조건 갖추기에 지금도 여전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구원 받을 필요가 없이

긍휼 얻을 필요가 없이

본인들이 하나님이 되면 되듯이 말이죠.

존재가 되고자 말이죠.

 

제가 지금껏 만나본 유명한 목사 특히 성화론자의 대가라고 하던 자들도

사실상 마귀였음을 보게 되었다 말이죠.

안 그런 놈이 없어요

괜히 목사가 되어서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게 가로막아서 삥이나 뜯더라 말이죠.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합당하도록 조건을 갖추자 이다는 거죠.

그런 원인 있는 결과는 없어요

 

원인이 생기면 결과 자체가 없어요

결과만 있다면 원인이 없다 말이죠. 원인은 사라져요
그것이 바로 24장로의 면류관 반납이다 말이죠.
24장로의 등장은 오로지 이 기능만을 나타낼 뿐이다 말이죠.

존재감이 없어요.

 

결국 그 결과로써 즉 합당하도다 가 앞의 것들을 증상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래서 죽임 당한 어린양 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지킬 말씀은 아예 없는 겁니다.

지켜봤자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이라서

오히려 지킨 것을 과시하고파서 우상숭배하고파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존재를 과시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지키는 것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인자하심이 안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백날 해도 인애와 자비가 안 나타나요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의문의 반복이라서

사랑은커녕 남을 구속하고 결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너를 7번 용서했는데 너는 나에게 왜 이런식이냐 라는 조건과 원한과 한풀이 말이죠.

저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데 왜 저에게는 살진소를 한 번이라도 해준적이 없냐 라고 맏아들이 탕자의 금가락지 살진소 새신발을 보고 배아파 요동치듯이 말이죠.

긍휼이 없습니다.

 

그냥 저는 긍휼이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해야할 기능이

이스라엘인데 말이죠.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구원자랑 짝궁이 되니까 말이죠.

 

의인은 구원자랑 짝꿍이 안되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만 외칠 뿐이다 말이죠.

합당한 조건을 억지로라도 갖추고자 세리와 자신을 구별시키는 겁니다.

 

건강한 자는 의사랑 짝꿍이 되지 못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의사에게는 환자만이 합당하다 말이죠.

? 의사가 먼저 있었기에 말이죠.

 

자꾸 방종을 조작한다고 우기는데

사실상 그들이 방종을 조작해요

의사가 먼저임을 거부하는 겁니다.

 

? 조건 갖추겠다는 식이다 말이죠

원인을 갖추어야 결과가 나타난다는 식입니다.

 

천만의 말씀 결과가 있으면 원인은 사라지는 겁니다.

누락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퍼뜩 퍼뜩 누락 되지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은사란 개인의 특이한 재주가 아니다 말이죠.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한 증상물로써의 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누구는 심장 누구는 팔 누구는 다리

손이 발이 더럽다고 너 나가죽어 라고 할 수 없다 말이죠.

오히려 더러운 발을 손이 씻어주어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는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 지킬수 있는 말씀이 없이

다 이루었다는 결과만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킬 말씀이 없어요

다 이루었다 말이죠.

숙제가 다 끝났는데

숙제하겠다는 놈은 그 자는 주님을 안 쳐다 보는 자이다 말이죠.

 

그래서 막살아라 라는 의미가

지킬 말씀이 없으니

주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말씀을 마음껏 즐기고 누려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라고 표현 된 겁니다.

앞의 글에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라는 3가지를

아무것도 한 것이 막누릴 수밖에 없는 죄사함을 받은 행복한 자처럼 말이죠.

금가락지 살진소 새신발을 막 누리는 겁니다.

여기서 누린다는 것 조차 존재인 내가 누리는게 아니라

기능으로써 아니 누리고서는 못배김으로써

오히려 존재가 말려드는 겁니다.

맏아들이 여기에 말려들 듯이 말이죠.

이것이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세 번씩이나 고백하면서 누리듯이 말이죠.

 

맞습니다. 마귀 보란 듯이 말이죠.

 

그래서 합당하다는 겁니다.

우와 우와 놀래면서 우리는 하루 하루 이 합당함을 흠뻑 누리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와 우와 감탄과 감탄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말이죠.

 

바로 죽임 당한 어린양이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의 먼저 있는 결과 때문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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