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찬양 (4, 5장 요약)


먼저 인간은 찬양할 줄 모릅니다.

즉 이 말은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적어도 주님을 찬양할 줄 안다면

주여 빨리 죽어 주세요 라고 되바라진 소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싸가지 없는 모습인거죠.

 

이마에 발에 뽀뽀하고 껴안고 했던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예수님을 미리 장사 치를줄 아는 자가 예수님을 찬양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인간은 오히려 정죄하기 바쁘죠.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절대 사랑 못하는 이유 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렸거든요. 우상이 된 겁니다.

그 아까운 향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호산나 찬양하는 아이들을 호통칩니다.
여기는 조용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니까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윤리와 도덕으로 또는 신념(종교,신앙)으로 채우는게 바로 사단의 회입니다.

 

결국 사랑이 없다는 것이 전제된 상태를 깔고서 보게 되면
찬양이란 노래가 아니고 사건이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들통당하는 사건을 찬양이 주체가 되어서 들추어내는 겁니다.

즉 사랑은 사랑이 없음을 들통내지 못한다면 사랑이 아니지요.


그 사랑이 없음을 거쳐서

뭐뭐 아니요 뭐뭐이다 라고
뭐뭐 아니요를 거쳐서 
나오는 것이 사건 곧 찬양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여 나는 찬양할수 없는 입이 없는 자입니다

저는 벙어리오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고 고쳐주소서 라고

외치도록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말이죠.

이것이 찬양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저 개같은 이방인 맞습니다
.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먹지 않습니까?

바로 이 외부, 정작 이스라엘 내부에는 이스라엘 곧 찬양자는 없고

이스라엘 외부 곧 개같은 이방인이 찬양자 였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거친 외부이지 단독적인 외부 이방인이 아닙니다.

반드시 개 같은 이방인 즉 개 같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손가락질을 거치는 외부입니다.

더 나은 외부 율법 외에 한 의가 등장해서

외부에서 침략하는 찬양이어야 터지는 사건인 찬양이다는 겁니다.

가짜 찬양자를 거쳐서 나오는 찬양이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저 모든 인간은 자기만을 위할 뿐이기에

자기에게 좀 잘대해주면 그 사람을 좋아라하고 찬양하고 좀 놀아주다가

뭔가 자기유익과 충돌하면 그만 멀리하고 헤어지고 이별하게 됩니다.

모두다 자기 유익에 따라 주변 사람들을 배치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을 임금삼고자 끝까지 따라잡을 려고 할 때

예수님은 도망 치다 도망치다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임금 삼고자 하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우상숭배하고자 함이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도망치시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도록 한 표적인데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봐 싶어서 두려워서 도망치시는 겁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임금이 되기 싫다고 도망치시겠다는 겁니다.

즉 경배 드리는 자 중심이 아니라

찬양 경배 받는 자 중심인데 그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십자가의 표적 곧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함이다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3일 만에 다시 살아남인데

 

인간들은 그거 때려치우고 찬양해 줄게

믿어줄게 구원자로 인정해 줄게 라고

임금 삼고자 달려드는데 있어서

도망치시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찬양사건입니다.

 

이런 인간의 우상 경배성을 들추어내는 사건이 찬양이다는 거죠.

예수님 마저도 우상으로 만들겠다는 심뽀

유대인 곧 사단의 회가 하나님을 우상화 했는데 성공했잖아요

이런 모든 인간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사건이 바로 찬양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이 입이 있어도 말할 수 가 없는 우상과 같이 된 인간입니다.

신이 된,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을 아는 인간인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으로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으로 해석하는 우상이 된 인간입니다.

 

즉 때려죽어도 인간이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존재죠.
물론 종교를 가진 인간들은 신이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우상 곧 존재죠.
그런 신은 인간의 손에서 지어진 자기투사가 된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이 바로 완전정반대인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먼저 있었다입니다.

 

찬양이란 존재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능만이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입을 다물도록 막으면

돌들이 소리지르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다는 거죠.

즉 기능을 존재가 막을 수 가 없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을 막을 수 없는 거죠.

 

존재 보다 먼저 존재한 일찍 있었고

그러니 존재는 자기 존재 보다 먼저 일찍 있었다는 것에 벌써 자기유익이랑 안 맞아서 거부를 할 수 밖에 없고요

여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죽임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그럼 존재 한다는 말입니까? 존재 안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교회의 신비를 이야기할까 하는데

교회란 존재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삽니다.

아벨이 비록 죽었으니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럼 왜 아벨이 죽었습니까?

가인 이라는 존재 때문에 죽었지요 아벨을 살인했거든요.

그런데 가인은 더 이상 믿음의 세계에 없습니다.

오히려 아벨이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벌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지요?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있다고 말하냐 말이죠.

존재는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기능은 말귀를 알아먹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너무 너무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니까
오히려 더 또렷하다 말이죠.

 

그렇다면 교회는 눈에 보이는게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교회이다는 겁니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잇고 이어서 뭐 교회 역사가 100년된 교회라는 둥 그런 사기를 일단 성경에서는 안 먹힙니다.

문제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죽은 아벨을 무슨 수로 잇느냐 라는 겁니다.
믿음으로만 잇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지
예수님 믿음이지 인간 믿음 아닙니다.
존재로 이을수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보세요 이을수 있나

인간의 믿음요? 이어 보세요 과연 이어지나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쓸데 없이 교회 창립 100주년 이딴 것을 자랑한다 말이죠.

그런 가짜 교회를 다들 부러워 죽는다 말이죠.

또 아벨을 잇는다고 쳐도

즉 그 말은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처럼

같이 죽어야 하는데???????

죽는 것이 잇는 것인데??????

그럼 단절 아닙니까?

잇는 것이 아니라
단절을 무슨 수로 잇습니까?
아귀란 틈인데 틈이 없는게 아니라 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간극이 없는 것 처럼 빈틈없이 착착 맞아떨어지더라 말이죠.
믿음이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도 맞아 떨어지는게 없었는데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믿음의 표현이지

인간의 언어논리의 표현이 아니다는 겁니다.

단절을 잇는 겁니다.

죽임당함을 잇는 겁니다.

자살은 혼자 지스스로 자기 몸을 상해하는 것이고요

상대방이 있어야 되요

자살사이트클럽에서 서로가 연탄불 켜게 해서 자살하는게 아니라

아주 아주 적대적인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죽임 당함이지, 죽는 독자적 죽음이 아니다 말이죠.

맞물려 있는 겁니다.

나 라는 존재의 손에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한 세트를 구성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불가능성을 잇는(연결) 것이지

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눈에 안 보이는 교회이고 말이죠.

눈에 안보이는데 어떻게 연결 시키냐 말이죠.

 

점점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를 첩첩산중으로 말하고 있으니 원

 

자 그렇기 때문에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먼저 있었고

그 어린양을 찬양하고자 네 생물인 천사가 보좌를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에 24장로가 있고

그 주변에 천사들 무리가 있고

그 주변에 백성들이 있고

그래서 이 어린양을 찬양하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 순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고요

반대로 배치하면 이해 된다 말이죠.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때문에 나타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당위가

존재 보다 아니 존재를 반드시 끌여들여서 그 차이로써 등장 곧 나타났었었야만 했고

동시에 누락 된다 말이죠. 참 허무하죠.

아벨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저 형 가인에게 돌삐 맞아 죽기 위해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이것을 잇는 겁니다.

아니 죽었는데 잇다니?

 

그럼 안죽고 버티는 가인을 곧 존재를 잇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인데

가인이 좋아서 잇는게 아니라 다른 것이 없어요 가인 밖에

이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아벨을 잇고 싶어도 이을수가 없어요

일찍 죽임 당해 버려서 뭐 있어야 잇지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앞의 글들에서 언급한 일곱교회는 어디서 파생되어서 나온거다?

그것도 가능한 교회 또는 눈에 보이는 교회로써가 아닌

말도 안되게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에서 파생되어 나온 일곱교회는 어디서 파생된 겁니까?

앞의 23장에서의 일곱교회의 출처는 결국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상대적인 사단의 회로써의 가짜교회는 마치 가인을 잇는 식으로써 나오는 겁니다.

 

이런 배치 조차도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부터이다는 거죠.

? 일찍 죽임 당할때에 혼자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니깐요

누가 죽였다 말이죠.

 

그 숨겨진 누구와 한 세트를 이룸으로써 일찍 죽임 당했다는 겁니다.

 

오늘 화요일 아침에 아주 재미있는 사건이 뉴스에 나오는데

한국은 전혀 안 기쁜데 독일은 기뻐하는 소식인데

종편 뉴스를 보다가 이놈의 종편들은 심심하면 홍상수와 김민희를 지겹도록 몇 달 동안 다루더라 라고

원래 연예계 뉴스가 정치 시사 뉴스에 나온다는 것은 다른 것을 카바하기 위해서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저게 진짜 사랑인줄도 모르고 여론조작을 해서 다수를 세뇌시키는 이데올로기 윤리 이념화 한다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니도 머슴아라꼬 남자 편 드냐고 ㅋㅋㅋㅋ

 

아 그때 잘됐다 싶더라 말이죠.

 

물론 존재의 사랑은 어차피 다 가짜입니다.

영원하지가 않으니깐요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하니까

존재의 사랑이 아니라 기능의 사랑을 1초 보여준 겁니다.

 

어머니 우리 주일날 나누었던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왜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서 예수님께 데리고 올까요?

지 혼자 잡아서 지옥에서 베드로를 괴롭히던가? 고문하던가?

물론 그럴 권리가 없기 때문이고

결제를 받아야 지옥으로 데리고 갈수가 있는데

그럴 권리가 쥐뿔도 없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자신만만 했던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껄랑요

그러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에

그 거부당한, 부정 당한 그 당사자 예수님께 고자질하듯이

예수님 억울했지요? 배신감 느꼈지요? 제가 이 놈 잡아왔습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마치 예수님 나의 임금님이 되어주세요 라는 식이다 말이죠.

 

그래야 자신이 잡은 것이 의미가 있잖아요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이니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마귀에게는 관심 없고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

창세전에 먼저 기록이 되었다 말이죠.

즉 주의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요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말씀을 먹어라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같이 달도다 라는

이 주의 머리 들리심이 먼저 있었다 말이죠.

 

물론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린적 없고

주의 쓴잔을 마신적도 없고

없고 없고 요즘 개콘에 나오는 개그우먼의 외침처럼

없고 ~~~

 

오히려 너의 쓴잔을 내가 마시었고

나는 너에게 단잔을 주었노라

라고 어느 장애인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없다 말이죠.

이것이 찬양자 이스라엘의 기능인데

이 처음사랑을 발로 차버리니까

자꾸 있다 있다 라고 우기니까

개같은 이방인이 찬양자 이스라엘의 기능을 외치는 겁니다.

 

마귀에게 잡혀온 베드로가 오히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외치더라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세상이 요동치는 겁니다. 배아파 죽습니다.

견디질 못해요

천한 기집이 왕비가 되는

지혜가 벌리는 사건을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표적의 기능입니다. 사랑의 기능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으로 치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먼저 있었다 말이죠.

그 증상으로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나타났기에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심이 먼저 있었기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환자를 부르러 오신 의사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어야 하기에

반드시 마귀는 의인 베드로를 잡는게 아니라

죄인 베드로를 잡아야 한다 말이죠.

 

아니 그게 이거랑 무슨 관계이니

바로 그겁니다.

 

어머니! 본처를 버리고 간 저 놈이 바로 진짜 사랑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존재는 볼꺼 없고 기능을 봐야 한다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리냐?

 

성경 전체에서 항상 먼저 된 맏이 또는 첫 번째가 사랑이 아닙니다.

본 자식이 아니무이다.

항상 둘째가 본처요 둘째가 기업을 이어받은 진짜 자식입니다.

 

첫째 맏아들은 가짜예요

그래서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은 한 세트를 이루어야 하듯이

진짜 자식은 둘째 야곱이다 말이죠.

 

진짜 사랑하는 부인은 둘째가 본처이다는 겁니다.

야곱의 아내 보세요 레아와 라헬 누가 진짜 아내입니까?

시어버지 유다의 진짜 부인은 누구입니까? 며느리 다말 아니냐 말이죠.

 

아브라함의 아내는 사라 맞습니다.

하갈이 아닙니다. 그것은 씨받이 였구요

오히려 두 번째로 태어난 이삭이 기업을 이을자입니다.

두 언약이다 말이죠.

종의 자식이 아닌

자유하는 하늘에 속한 자의 자식이 둘째로 태어나는 겁니다.

첮째로 태어난 자는 먼저 되었다고만 우기는 존재를 말하게 되고 하갈도 마찬가지

두 번째로 태어난 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기능적으로 언약을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왕 사울왕이 아닌 두 번째 왕 다윗왕이 진짜 이스라엘 왕이듯이 말이죠.

그 뒤에도 마찬가지 아무리 진짜 왕 다윗왕을 잇고자 해도

사고방식 자체가 존재를 따지기 때문에 사울왕을 잇게 되는

두 번째 왕을 의도적으로 잇고 싶어도 안되는 불가능하다 말이죠.

? 다윗왕 본인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다 라고 외치는 기능이기에

왕이 아니무이다.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을 말하기 위한 욍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의 그 어떤 믿음이든 행함이든 따라하거나 흉내조차 못내더라 말이죠.

 

자 바로 그런 이유로 마귀는 첫째 부인으로써 첫 번째 피조물로써 이 둘째 부인인 베드로를 잡아 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귀가 베드로를 잡는 이유입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마귀는 때려죽어도 이런 짖을 못하거든요.

자기가 창세전에 최고의 피조물인 천사로써 자기가 예수님이랑 결혼해야만 하는 본처였다고 주장하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가장 미천한 그것도 제일 마지막 피조물 6일째 만들어진

그것도 가장 힘도 없고 연약하고 나약하고 심지어 사기꾼 야곱처럼 진실함도 추호도 없는

저 사기꾼 야곱을 저 배신자 베드로를 예수님의 본처로 삼겠다는

그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을 엿듣고 반란을 일으켰듯이

베드로를 잡았을때에 얼마나 기뻤겠냐 말이죠.

 

자신의 행동이 틀렸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 보라 말이죠.

베드로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의 반란이 커버가 되는 거다 말이죠.

 

마귀는 자기가 본처 자격 맞잖아 라고 우긴다 말이죠.

그것 때문인지 말라꼬 베드로 잡아서 예수님께 오겠냐 말이죠.

이것이 존재 곧 모든 존재의 주장입니다. 존재의 함성입니다.

 

항상 앞에 먼저 있는 것은 먼저 존재했었었었었다고 유세를 떨기 마련이다 말이죠.

그런데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먼저 있었다는 이유로

맏이는 이 피흘리심과 안 맞아요

맏이 가인의 제사는 이 피흘리심과 안 맞더라 말이죠.

둘째 아벨의 더 나은 제사가 이 피흘리심과 맞더라 말이죠.


그렇다고 둘째 아벨이 자기가 드린 겁니까?

아니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먼저 있어서

가인 보란 듯이 아벨에게 피흘리심을 뒤집어 씌운 겁니까?

기능은 둘째 아벨에게 덮쳐지는 겁니다.

 

첫째 부인은 사랑은 없고 그저 가정부와 같다 말이죠.

그러나 둘째 부인은 이유 없이 무조건 사랑스러워

니가 나의 여자라는게 사랑스러워

 

워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워워 니가 나의 여자라는게 자랑스러워

기다림이 즐겁고 이젠 공기마저 달콤해

이렇게 너를 사랑해

 

이 찬양을 우리가 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다 말이죠.

마귀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약을 바짝 올린다 말이죠.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스러워 한다 말이죠.

 

그래서 이 두 여자가 아이 낳기 싸움을 하다가 그만 라헬이 졌다고 실패 했다고 하지만

야곱은 누가 뭐라해도 본처가 라헬이다 말이죠.

 

그러니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말하기 위해서는

죄인과 의인이 한 세트를 이루어야 한다 말이죠.

 

맏아들 의인이 진짜 기업을 물려받을 아들인가?

아니면 둘째 아들 죄인 탕자가 진짜 아들인가?

 

제가 지금 불륜을 조장하는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불륜이다 말이죠. 존재가 아닌 기능이다 말이죠.

존재는 불륜 자체를 못해요 존재감을 상실 당해버리거든요.

사회에서 매장시켜요.

 

십자가는 부조리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피조물 마귀 보세요

과연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잡아 왔습니다 라고 한 것일까요?

과연 예수님을 사랑해서 저 비싼 향유를 땅바닥에 허비하지 말고

가난한자에게 주어야 했다고 화를 내는 것일까요?

참 가난한자 디기 생각한다 말이죠.

국수 뿔어터진 국수 먹는 국민이 불쌍하다고 디기 생각한게 국민걱정 나라걱정 한게 과연 맞을까요?

항상 마귀는 윤리와 도덕으로 자신의 우상숭배 자기를 위한 것을 감추는 가면으로 활용한다 말이죠.

그런 의문의 번제와 제사는 거짓이다 말이죠.

 

차라리 베드로처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저 보세요 예수님 말씀처럼 예수님을 부인했잖아요

그러나 긍휼히 여겨주시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우는 자가 복이 있는 주의 인자하심만이 영원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아니라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나 베드로 대신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그 혜택을 누리는 자유자로써 고백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식으로 나오는 기능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자에게 의사가 찾던 기능이다 말이죠.

 

이 기능에 존재가 말려들어요

이 기능에 이 성령의 은사에 마귀가 말려든다 말이죠.

베드로는 아무것도 몰랐지 뭐

그저 새우 등에 고래 ㅋㅋㅋㅋ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인

 

잃어버림을 당할 뿐이다 말이죠.

죄인이 될 뿐이다 말이죠.

? 의사가 먼저 있었기에

환자로 맹글어짐을 당하는 겁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위해서

입에는 꿀처럼 달기 위해서

말이죠.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런데 왜 정작 첫째아들인 유대인에게서는 이런 자를 찾을수가 없느냐 말이죠.

그저 존재의 함성은 이것 뿐입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 죄인과 같지 않음을

저 강도만난자를 손으로 만지지 않음을

부정타지 않게 됨을

거룩을 그대로 유지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이게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

아니 전세계 기독교의 외침이니

사탄교죠 사단의 회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게 아니라

 

이들을 거쳐서 그 속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출애굽 했듯이

다윗의 외침인 이스라엘에서 탈출을 노래한 시편이듯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유대교에서 빼내었듯이

다시 천주교에서 뻬내셨듯이

다시 기독교에서 빼내시듯이

종교에서 무신론자들에게서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 복음이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을 그들은 교리나 종교로 대체를 한다 말이죠. 우상으로 곧 인간의 손으로 세운 것으로 대처를 하기 때문에

늘 끊임없이 탈주 하는 겁니다. 도주 해야 한다 말이죠.

임금 삼고자 하는 자들로부터 도망치는 예수님이시듯이 도망치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네 생물의 천사가 가마 보좌를 어깨에 매고서 눈을 여러개 가짐으로써 인간의 신념에 포착되지 않고자
재빠르게 퍼뜩 퍼뜩 이동하는 겁니다.
스텔스기 처럼 레이더 망에 잡히질 않는다 말이죠.

 

인간의 손에 절대 포착 되지 않아요

아무리 신학 지식을 쌓아도 안 잡힙니다.

쭐꾸덕 미끄러져서 빠져나간다 말이죠.

계시록은 한마디로 어린양을 잡았다 놓쳐버린

빠다발렸나? 리마리오 복음이다 말이죠.

미끄러지듯이 ~~~~

 

절대 마귀가 아무리 월척 베드로를 잡아도

마귀에게 안 잡히는 복음이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죽어라고 싫어하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주여 저 개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님 자신의 기능 때문에 이 여인이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도록 하셨겠냐 말이죠.

백날 잡아봐라 안잡힌다는 겁니다.

잡아서 죽여버려도 다시 삽니다.

그 죽음이라는 무기 조차도 그 사망의 권세 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정도이다 말이죠.

 

바로 이렇게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곧 십자가의 피를 과시하고파서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바리새인 보란 듯이

일부러 바리새인이 그런 별명을 아예 붙이라고 미리 보여주듯이

세리(매국노)와 강도(살인자)와 창녀(부도덕)와 죄인(지옥갈자)을 친구이다는 겁니다.

누구 보란 듯이?

자기자신이 세리요 강도요 창녀요 죄인인줄 모르는 자들 보란 듯이 ~~~~

 

차라리 제가 죄인입니다. 고쳐주소서 라고 하면

예수님이 보일텐데

눈이 있다고 우기니까 예수님이 안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땅에서 해석해 하늘로 올라가는 해석이 아니라

하늘 문이 열려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펼치는 해석이다는 겁니다.

 

(4:1,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하늘이 열려서 내려오는

이 말만 들어라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를 흘린적도 없는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은 자들의 말을 듣지도 말라 라는 겁니다.

 

저의 말도 듣지 마세요

저 김대식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린적도 없으니까 말이죠.

 

도리어 나의 쓴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신 것을 저 김대식을 누려할 판국일 뿐이니까

저의 말을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반드시 한 세트로써

가짜 교회인 사단의 회가 먼저 있고 그 다음 둘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피에 의해서 발생해야만 하고 십자가의 피만을 증거하고 누락 되어야 하는 일곱 교회가

 

이 둘이 한 세트 쌍둥이 로써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거다 말이죠.

 

한 쪽은 주의 발등상에 놓여진 원수로써의 사단의 회로써

다른 한 쪽은 주의 오른팔에 사로잡힌 일곱 교회로써

 

말이죠.

 

이것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곧 주의 병에 담겨진 것만 기록이 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십자가 피흘리심 때문에

 

나타나야만 하는 증상물로써 한 세트를 구성해

등장하는 겁니다.

 

주의 병에 담기지도 않는 것들

주의 책에 기록되지도 않는 것들은 심각한 것 축에도 안듭니다.

탄핵 백날 해 보세요

심각한게 아닌데 양쪽으로 갈려져서 심각한것처럼 우긴다 말이죠.

 

어딜 감히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앞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주장하냐 말이죠.

모조리 다 기능인데 말이죠.

 

그러니까 24장로는 면류관을 반납하는 겁니다.

우리는 영광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홀로 영광 받으소서 라고 말이죠.

 

천국이 이런 분위기로써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찬양인데

 

어딜 감히 임금삼고자 나의 대통령은 박그네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라고 임금 삼고자
이데아를 건설하겠다고 인간들이 땅에서 상상하던 것을 하늘에까지 이어 보겠다는 심뽀로

존재를 주장하냐 말이죠.

천국에는 존재는 없어요.

존재는 모호하고 의문덩어리요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인데 왜 천국에 있겠냐 말이죠.

그것이 가인의 제사요 의문의 번제와 제사요 바벨탑 사고방식이요

원수 애굽 나라의 모습이였다 말이죠.

 

천국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었어요

오로지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만 찬양해요

 

천국가고 싶다

구원 받고 싶다

그렇다 칩시다

아마 다들 천국 괜히 왔다

괜히 구원 받았다 라고 어차피 자진해서 다들 등 돌릴꺼 뻔하기 때문에

미리 조치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천국 가고 싶다고 천국가는게 아니라

구원 받고 싶다고 구원 되는게 아니라

어차피 천국 가 봤자 싫어할 것 뻔히 알기 때문에

미리 천국에서 탈락 시킨다 말이죠.

 

아니 진짜입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ㅋㅋㅋ

영화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 라고 외칠께 뻔해요

광야에서 다들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외쳤다 말이죠.

왜냐하면 존재를 떠받들어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없어요.

약속의 땅은 오로지 약속만을 위한 기능 뿐이다 말이죠.

존재는 백날 들어가봐야 존재감을 상실 당할 뿐인데

존재감 없이 어떻게 존재가 살아가겠냐 말이죠. 그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인 거죠.

지옥이 땡기는 자에게는 천국은 어차피 가봐야 지옥이구요

천국이 땡기는 자에게는 지옥에 가봐야 어차피 존재감이 없어서 지옥 스스로가 뱉어버린다 말이죠.

존재만이 지옥에서 앗뜨거 죽겠다고 외치지

존재하지도 않는데 지옥에 가본들 지옥에 어떻게 다룰수가 없어서

지옥이 뱉어버린다 말이죠.

 

결국 천국이 땡기는 자만 오라는 겁니다.

일찍 죽임 당한 피 흘리심만이 땡기는 자만 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것을 미리 누리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일곱 교회의 찬양사건입니다.

 

구약에서 다윗이 찬양대를 결성하는데

사울왕이 죽자 사울왕의 장수들이 다윗에게로 넘어오는 것을

다윗이 받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찬양대가 곧 군대가 배치되는데

그 배치가 동서남북 3333 3333 3333 3333 십 사만 사천 이라는 찬양대열이다 말이죠.

 

그 정중앙에 다윗이 있는게 아니라 다윗은 하나의 의자이고

참 존재감 없이죠 다윗은 존재하지 않고 의자로써 누가 앉으십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일 뿐이니 말이죠.

안 그러면 그냥 나무죠

의자란 누가 앉으라 라고 있는 기능이지요.

 

그 다윗이라는 의자에

여호와의 이름이 앉는 겁니다.

 

그 다윗은 다들 싫어했던 다윗입니다.

그 찬양대열에 사울왕의 장군들도 있었다고 했지요.

또 다윗의 아들까지 다윗을 죽일려고 달려들 정도로

 

(109:4, 개역)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이스라엘 전체가 다 사울왕 편에 서서 다윗을 이스라엘에서 쫏아내었던 그 다윗이다 말이죠.

그런 버린 돌이 머릿돌로 만든 자가 바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였다 말이죠.

 

마치 여리고성 13바퀴 돌면서 외치는 찬양대 같아요

주여 저는 광야에서 주를 10번 이상 원망한 자들이였습니다 라고 하루에 한 바뀌 뺑뺑이 도는

이상한 전쟁을 하는 찬양대 말이죠.

마지막날 일곱 번째 날에 7번 돌면서 죄사함 받았다고 기뻐 찬양하는 겁니다.

6째 날 동안 슬피 울면서 씨를 뿌리고

7번째 날은 일곱 바퀴 돌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 전쟁이다 말이죠.

 

이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의 피 용서만 영원하다고 외치는 찬양전쟁이다 말이죠.

 

다윗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존재 보다 앞선 기능으로써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처럼 단, 눈물로 씨를 뿌림으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바로 주의 인자하심 때문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리한 계수대로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것만 기록 되지

그 이외의 것은 기록이 되지 않는다는

창세전에 기록 된 것을 나타냄이다는 겁니다.

무엇이? 주의 인자하심을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 말이죠.

 

이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고

이 십자가의 피 흘리신 주의 인자하심만 곧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만 찬양 경배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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