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라 (시편 128)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수태치 못한 자여 복이 있도다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6, 개역)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128: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28:2, 개역)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3, 개역)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128:4,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128:5,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128:6, 개역)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시편 127편에서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업이다 라고 합니다.

 

(127:3, 개역)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그런데 그 자식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식이라고 앞의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언급했습니다.

만약 인간의 자식이라면 이것은 원수 문제와 연결되지가 않습니다.

결국 자식은 원수 문제와 연결된 의미에서 솔로몬의 지혜가 펼쳐지는 겁니다.

즉 헛되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헛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원수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업입니다.

원수와 맞딱뜨렸을때에 화살통에 화살이 없다면

원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식 곧 후손은 마치 사람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과 같이 헛되다 라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이요 모호하고 미완료이다는 겁니다.

원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127:2, 개역)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럼 진짜 자식은 뭡니까? 원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후손이다는 겁니다.

 

그 시편 127편의 연장에서 오늘 자식의 자식까지 언급 되고 있습니다.

 

(128:2, 개역)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방금 인간의 수고가 헛되다고 했는데 128편에서는 수고한 대로 먹으니 복되고 형통한다고 합니다.

 

단 앞의 전제가 서로 틀렸지요

127편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이라는 단서가 달려있고요

128편에서는 여호와의 법을 경외하는 자 그 도를 행하는 자 라는 단서가 달려 있다 말이죠.

 

(127:1, 개역)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28: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런데 여기 단서가 달린 그 내용이 어떻게 인간 쪽에서 손을 댈수가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원수문제에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안되고요. 불가능하죠.

 

이 원수 문제를 해결이 될 때에 평화 평강이라는 것이 완료가 된다 말이죠.

 

(128:5,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128:6, 개역)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자 그러면 역사적인 순서 시공간의 순서대로 가능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처음부터 평강 평화로 출발해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자식이라는 열매 이다는 거죠.

그러니 이 자식은 다윗의 자손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 경제력에 안정적인 가정에서도 둘째를 가질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미래가 불확실성에 놓여졌기에 자식은 기업이 아니라

말아먹을수 있는 짐이 되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시대의 상황에 따라 자식 개념이 다 달라진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에게 적용할수 있는 자식 자손 개념이 아니다는 겁니다.

 

열매로 알리라 라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알게 되는데

인간을 통해서 신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면 대부분 마귀였습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인 거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말이죠.

우상입니다.

가짜 하나님!

 

그럼 진짜 하나님을 알려면 제대로 된 열매는 바로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즉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면

 

(128:5,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128:6, 개역)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시온에서의 복

예루살렘의 복

이스라엘의 평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3060100배가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말이죠.

 

자 그럼 이 자식의 자식의 복이 이루진 그 예를 그 사례를 한번 보자 말이죠.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미리 평강이다 라고 선언하고 즉 먼저 있고 그 평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전혀 열국의 아버지가 아니고 전혀 열국의 어머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원인 없는 결과를 선언하고 들어가는 평강이 되니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으면 안되는 초조함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식능력이 떨어지기 전에 억지로라도 자식을 낳습니다.

그 자식이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낳은 자식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기업을 구색으로 갖추게 된다 말이죠.

 

열국의 아버지는 못 되어도 적어도 자식 하나 만큼은 낳으면

이 자식이 자식을 낳음으로써 최소한의 기회가 적어도 보장이 되는 것이다 말이죠.

 

아 그거요? 한 세트? 맞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억지로 한 세트를 갖춘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죄인과 의인이 한 세트를 이루기 위해서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낼수가 없습니다.

골프 백날 쳐보세요 죄인되나? 이것은 의사 곧 구원자가 만들어내는 숙제인데 말이죠.

자기가 자기 숙제로 해 버리니 주님이 임금이 되어 주지 않고자 도망을 치신다 말이죠.

하여튼 종교마약을 먹은 놈들은 억지로라도 죄인이 될려고 환장해 있습니다.

의인이 등장해 줘야 한 세트를 이루는 죄인이 되는데

골프 치는 죄인 되기 때문에 졸지에 의인이 되어버리니 말이죠.

넌 십의 이조 못 드리지? 이레에 두 번 금식 못하지?

난 골프 쳐서 죄인이 될수 있어 라는 식입니다.

 

죄인이란 예수님만 쳐다볼때에 나오는 긍휼을 원하는 모습인데

남과 비교해서 나오는 죄인 개념은 결국 자기 잘 낫다는 의인 개념인 거죠.

 

어딜 감히 인간의 손으로 세울려고 하냐 말이죠.

뻔한 사기를 자기 혼자 몰라요 마약에 취했으니 말이죠.

우상숭배에 빠져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악령이 들려서 지금도 마약을 퍼트리고 있더라 말이죠.

 

아무튼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든 100세 전에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아브라함이 약속을 오독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힘이 있을때에 이 약속을 성취해야 한다고 본 겁니다.

 

문제는 손바닥도 서로 맞아야 소리가 난다고

한 쪽 곧 열국의 어무이는 이미 불임 상태이다 말이죠.

아예 불가능하다 말이죠. 아예 ~~~~

태가 닫혀서 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몸이 아니무이다.

이 단절을 헤아릴수 없습네다.

 

그러니 이미 50%는 땡 탈락입니다. 죽음 곧 생명이 아닌 죽은 태이다는 겁니다.

나머지 50%인 아브라함으로 이 약속을 인간 쪽에서 성취해야할 판국입니다.

주님은 성화론자들처럼 자꾸 강박증으로 성화되어라고 보채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넌 열국의 아버지야 라고 말만 했을 뿐입니다.

이 열국의 아버지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자꾸 원인을 만들어낼려고 하니까 오히려 결과가 없는 거죠.

 

그러니 아브라함 스스로가 자기 꼬라지를 보게 되니

점점 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점점 확률이 떨어지게 되니 초조하게 된다 말이죠.

가능성이 더 낮아지기 전에 숙제를 해야 한다고 본거죠.

열국의 어머니는 가망 없고

반은 이미 날라가 버렸고 반이 남았는데

이 반 50%도 점점 시공간 속에서는 점점 사라져버리고 입지가 점점 좁아지더라 말이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능성이 떨어지게 되니 말입니다.

 

사람의 수고가 헛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약속 곧 열국의 아버지라는 축복을 기업을 어떻게 얻게 되냐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세우심과 사람의 수고가 한 세트를 구성해야 한다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점점더 의인이 되어야 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는 기업 때문에 사람의 수고가 헛됨이라는 죄인으로 배치되어야 하는 겁니다.

구원자 때문에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숙제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할려고 죄인이 스스로 될 수가 없어요 독자적으로 하는 것은 존재죠. 우상입니다.

어떻게 환자가 스스로 되냐 말이죠. 의사 라는 처음 출발 때문에

우리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죄인 또는 환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그 처음 열매 곧 믿음의 열매가 바로 아브라함 곧 믿음의 조상이다 말이죠.

이 허리에서 나오는 단절로써의 단절의 열매입니다.

어떻게 단절인데 열매가 나냐 말이죠.

그렇다면 육으로 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즉 믿음의 열매들의 아버지가 되는 원리이다 말이죠.

? 본인이 아브라함 본인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멜기세덱의 허리에서 낳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누구의 때를 바라보게 되었냐 하면

이삭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때를 보게 된다 말이죠.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된다 말이죠.

 

(8:56, 개역)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8:57,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8: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8:59, 개역)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8:56, 새번역)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

(8:57, 새번역)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브라함이 당신을 보았단 말이오?'

(8:58,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8:59, 새번역)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몸을 피해서 성전 바깥으로 나가셨다.

 

 

시온이 졸지에 원수들에게 밟혀서 쫄딱 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고요

이스라엘은 공중분해 되었다 말이죠.

완전히 죽은태가 된 겁니다.

어떻게 열매가 날까요?

 

그러나 그런 시온일 것 같으면 애초부터 시온에서 출발한게 아닙니다.

시온 스스로가 내어주고 시온 스스로가 되찾는 겁니다.

그러니 시온이 아무리 원수들에게 밟힌다고 해도 밟히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거짓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를 해도 입에서 축복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시온 자체가 이미 완료된 겁니다.

그 완료 때문에 그 의사됨 때문에

졸지에 짝꿍이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포로당해 가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올때에 꿈만 같도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의 개입 외에는

즉 하나님이 직접 세우심이 아니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라고 말이죠.

사람의 수고가 헛됨이요, 사람의 수고는 아니요 주님의 세우심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본인이 믿음의 조상 다운 짖을 해서 믿음의 조상이 아님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럼 누가 꼼수로 개입한 부조리를 반칙을 벌렸다 라는 겁니다.

그 반칙의 혜택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물론 성화론자들은 믿음의 조상이 된 원인을 자꾸 따지던데

제대로 설명하는 놈을 못 봤어요

 

오히려 그 부조리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자식을 바쳐라 말이죠.

또 인신제사가 나오네요 ㅋㅋㅋㅋ

입다가 이름 없는 딸을 바쳤듯이 말이죠.

 

제가 왜 인신 제사를 언급하냐 하면

성화론자 곧 수준높은 성화론자들 속에서 자기들끼리 질문하고 그 답한 것을 봤는데

그런데 답변을 한 꼬라지를 보니

복음 보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교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태도 때문에

복음을 들을수가 없더라 말이죠.

? 실제로 따라한 자들이 있으니 성화론자들은 행동가들 아닙니까? 실천가들

그러니 비합리적인 행동이 나오게 될까봐 염려가 된다 말이죠.

 

따라하라는 말이 아닌데

본인들이 늘 성경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우기다 보니

그것까지 따라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조심 조심 오해할까봐 납득을 시켜 줄려고 한다 말이죠.

그래서 답변들이 모호해요 성경에 있기는 있는데 불편해서 그 부분을 빼고 싶어!!

어떤 전도사가 자기 자식을 실제로 인신제사로 바쳤다는 뉴스가 10-20년 전에 있었다 말이죠. 그러다 보니 조심스러워!!!

그래서 뭐 하나 명쾌한 답변은 없는채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 버리는 식이다 말이죠.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말이죠.

 

그냥 성경은 지킬 것이 단 한 개도 없다 라고 하면 될 것을

그렇게 되면 또 교리 다 무너질까봐 걱정이 된다 말이죠.

방종케 하는 원인이 될까봐 두려워!!!

 

아무튼 믿음이란 인간 쪽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인데

주님이 개입해서 주님이 세우시는 기업이다는 겁니다.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주님 본인이 뒤로 꼬불쳐 놓고서 다 이룬 것을 선포 선언한 겁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되게 되어 있지

여기에 아브라함이 보탬이 된게 없다는 겁니다.

보탬이 되면 큰일 나요

그래서 오히려 짝꿍이 되기 위해서

그 반대로 죄인이 됩니다.

뭘 해도 죄인이 되는 짝꿍 땜에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불신의 조상이다 말이죠.

우상 조각하는 자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원인 없는 결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이삭 때문이다는 겁니다.

열매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열매도 바치라고 합니다.

바쳤습니다.

자 그렇게 되니 이제는 열매의 열매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됩니다.

이삭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이를 낳아야 합니다.

김믿음 최믿음 박미듬 강미둠 이믿음 말고요

예수님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봤습니다.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합니다.

기업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겨냥해서 등장한 것이니

이 기업 만이 원수 문제를 해결한다 말이죠.

이삭은 하나의 예고편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선취로 보여준거다 말이죠.

 

그러니 원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무이다.

내 죄를 대신해서 화목제가 되는 독생자가 아니면 자식이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시편 127편에 솔로몬이 자식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갑자기 마리아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저도 놀랬습니다.

어떻게 그것과 연관이 되었는지 말이죠

 

그럼 시편 128편에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시온 예루살렘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납니다.

자 과연 성화론자들 말처럼 타락한 생활을 하지 않고

말씀을 제대로 지키는 삶을 사는 그런 태도로

과연 이 시편 128편의 시대 상황에 들어가서

시온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복되게 할 수 있을까요?

구지 성화론자들을 따질게 아니라

바리새인이 이 일에 목숨까지 걸고서 행동했습니다.

시온 되 살리겠다고

예루살렘 회복 시키겠다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독립운동을 펼쳤잖아요

그들이 성경 말씀 단순히 문자로만 해석해서 말씀 지킨게 아니다 말이죠.

모든 것을 걸었다 말이죠.

모든 것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독립운동을 목숨걸고 하겠냐 말이죠.

 

이슬람 자살 테러 아무나 못합니다.

자격을 안 준다 말이죠.

신학생이어야 하고

이들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고 죽는다 말이죠.

그것도 마귀들과 싸워서 마귀소굴에 폭탄을 터트려서 말이죠.

완벽한 성화론이지요.

 

그렇게 모든 것을 걸어도 왜 안되냐 말이죠.

주님이 안 세웠거든요.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것은 다 헛짓이다 말이죠.

얼마나 모호하냐 말이죠.

의로운 일들을 자기 쪽에서만 하는게 아니라

원수 쪽에서도 한다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원수와의 경계선이 모호해 지더라 말이죠.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매국노 세리와 자신들을 경계 선을 긋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이것은 말이 그렇지 목숨까지 걸었다 라는 겁니다.

모든 삶을 걸어서 나오는 십의 이조요 이레에 두 번 금식이지

비난 받을려고 그런 행동 했었겠냐 말이죠.

의로운 행동이라서 다들 따라 하고파서 난리지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할 뿐이지

다들 부러워서 너도 나도 다 따라하고픈 행동들이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외치는 행동들이 비난 받는 행동들이겠냐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직접 세우지 않는 이상은 헛짓이다는 겁니다.

그럼 주님이 직접 세우는 방식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주의 인애와 자비인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다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포로 당해 쫄딱 망해야 합니다.

멀쩡할 때 낳은 자식이 아니라

불임이었을때에 낳는 자식 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처럼 달게 된다 말이죠.

 

이것이 믿음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개입이다 말이죠.

 

불임의 태에서

죽은 태에서 나오는 자식이어야만 진짜 자식이지

순풍 순풍 잘 놓는 자식에게서 나오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너와 너의 자식을 위해서 울어라 라는 겁니다.

 

?

십자자는 수태치 못한 자가 많은 자식으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말 자체가 이미 안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믿음의 개입이

여호와께서 직접 세우심의 개입이 아니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반드시 죄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불임여성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희년은 누구에게만?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암의 백성들

개같은 이방인에게만 희년이 해당되듯이

이 복음은 고아 과부 나그네인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자에게만 구원의 소식이 된다 말이죠.

그래서 먼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이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니까

즉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에게 회당에서 외치니까

고맙게도 고맙게도 발로 차 버리는 겁니다.

발로 차 발로 차

그러니 이방인에게로 넘어오는 거죠.

이렇게 사단의 회와 일곱교회가 한 세트를 이룬다 말이죠.

항상 첫째 아들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니 두 번째는 뉘우치고 돌아온다 말이죠.

이것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경험이라는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반드시 격게 되는 일로써

둘째 부인이 진짜 부인이다는 겁니다.

죽은 태가 진짜 복된 태다 말이죠.

 

이것을 인간 쪽으로 끌어 당길수가 없고요

주님 쪽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릴 뿐이다 말이죠.

 

너의 쓴잔을 내가 마시었고

나는 너에게 단잔을 주었노라 말이죠.

 

우리 쪽은 배에 쓴적 없어요.

주님이 홀로 십자가에 달렸다 말이죠.

 

그러니 항상 성화론자들의 강박증이 아니라

이 말씀은 나에게 해당되는게 아니라

성령이 알아서 하실 문제로

언제든지 우연히 나에게 덮쳐질수가 있으나

내 쪽에서 억지로 만들어 낼수가 없는

오히려 늘 죄 밖에 생각하지 않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 숙제는 없고 주님의 숙제 뿐이니

아무리 반항 해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수태치 못함을 억지로 만들어 낼수가 없다 말이죠.

자신의 의사 됨 자신의 구원자 됨 때문에 발생하는 우연한 짝꿍이지

인간 쪽에서 끌여당겨서 맞출려고 할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까 기껏 한다는 소리가 골프 치면 죄인이 된다는 아주 무식한 소리를 하는 거다 말이죠.

이것을 확장 시키면 성화론자들의 주장들이고

바리새인들의 주장들이다 말이죠.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거다 말이죠.

 

사일런스 라는 영화를 봤는데

아무리 실화라고 해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다 일어나는 현상이다 말이죠.

자국 종교는 타국 종교를 배척하는데 있어서

결국 종교라는 것은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왜냐? 결국 인간의 손으로 지은 가장 최고의 종교는 국가이거든요,

그 국가를 넘어서는 종교를 가질수가 없는거다 말이죠.

말로는 국가를 당연히 초월하는 종교이다고 하지만

대부분 호국종교이다는 겁니다.

? 그 국가의 이미지가 결국 신의 나라의 페르소나 Persona 이다는 겁니다.

성격이다 말이죠. 가면, 위 가면 위

마치 천국의 모형으로써의 교회로 보듯이 말이죠. 모형론 typology

결국 선교란 국가를 정복하고 신을 정복하는 것이다 말이죠.

구약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것들 곧 신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말이죠.

영화 마지막 끝 장면에 침묵은커녕 풀벌레소리 바람소리 새우는 소리 등등의 자연의 소리가 가득차있던데 자연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감히 국가를 넘어설려고 하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아닌 철저하게 갇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을 자유케 할려다가 본인이 갇혀있음을 몰랐음을 들통당한거다 말이죠.

수시로 배신해서 수시로 고해성사를 해달라고 하는 가장 미운놈이 결국 자기의 모습이였던 거다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할려다가 본인이 정작 770번 용서 받아야할 자임을 모르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남에게 고해성사 해줄 생각 말고 본인이 고해성사 받아야 할 판국인줄 모르는 거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자식이 없는 겁니다.

기업이 없어요.

열매가 없어요.

모두다 죽은 자입니다.

죽은자를 골프치듯 죄인 되듯이 죽은자가 되는게 아니예요

원래 죽은자 였었는데 그게 졸지에 의인되듯 진정으로 산자라고 우기는 식입니다.

소경이 아니다고 하니 소경이듯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원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판국에 무슨 놈의 구원이 되냐 말이죠.

원수문제를 거치지도 않고 구원이 되는 경우가 없어요.

 

그러니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웃사랑을 실천했다는 둥

말씀을 지켰다는 둥

전형적으로 원수 문제를 거치지 않고 구원이 되었다고 우기는 표현을 스스로 함으로써 들통나는 것이다 말이죠.

다 거짓이다 말이죠.

이거 다 거짓말인줄 아시죠.

 

진짜 자식은 진짜 열매는 원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식이다 말이죠.

그래서 웁니다 세리는 말이죠. 십의 이조 드렸다고 안 외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울어요

24장로처럼 면류관을 반납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 구원이 아니라 이 심판에서 벗어날길이 없는 갇힌자이라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웁니다.

이것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길에서

여인네들이 울면서 따라올때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심판을 곧 여호와의 불을 미리 앞당겨서 그 불 속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죽는게 아니라

너희들이 곧 불 바깥에, 심판 바깥에 있다고, 안죽었다고 하는 자들이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나를 위해 우느냐 라는 겁니다.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라는 겁니다.

심판은 내가 아니라 너희가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한 세트로써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자는 오히려

오히려 수태치 못한 자가 복 되도다 라는 겁니다.

곧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수태치 못하고 죽는 판국인데

오히려 많은 자식들로 인하여 기쁨을 얻는 겁니다.

 

정작 아이를 많이 생산한 자들의 자식이 다 죽게 되니

얼마나 헛되냐 말이죠.

 

이것이 성전에 올라갈 때 벌어지는 완료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벌어진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미 완료됨으로써 벌어지는 것이니 말이죠.

시공간을 초월해 버리는 부조리이니까 말이죠.

법을 안 지켜요 시공간의 법칙을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는 말은

시공간을 초월해 버리잖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아브라함이 못 봤다면

믿음의 조상도 아니요 이삭이라는 불임여성에서 나온 자식도 없는거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결과에서 도출되는 나타나야만 했던 역순들의 사건들이니까 말이죠.

 

(51:2, 개역)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8:56, 개역)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러니 여기서 때 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건이요 인물이지요.

때가 시간이 되면 모순이 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그녀의 불임 조차도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즉은 자로 방불함이 된 것이 말이죠.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우리의 죄인 됨은 의사를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위한 인물 개념이지

지키고 행하는 개념이 아니다는 겁니다.

 

진짜 자식은 누구입니까?

기업은 누구냐 말이죠.

열매는 누구냐 말이죠.

그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말하기 위한 자식이어야 합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자식만이 기업이요.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자식

전쟁을 종식 시키는 평강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용사의 화살통의 가득함과 같다 라고 했잖아요

원수와 맞딱뜨렸을때에 원수를 쓰러뜨릴수 있는 화살 말이죠.

화살통이 텅텅 비어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 말이죠.

헛되다 말이죠. 이것이 솔로몬이 성전에 올라갔을때에 외치는 지혜인 거다 말이죠.

 

(127:1, 개역)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27:2, 개역)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3, 개역)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127:4, 개역)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127:5, 개역)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127:1, 새번역)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127:2, 새번역)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 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

(127:3, 새번역)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다.

(127:4, 새번역)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으니,

(127:5, 새번역)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심판 속에서만 보이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인애와 자비는 이렇게 심판 속에서 긍휼을 바라는

나의 화살은 나의 자식은 원수 문제도 해결 못하는
화살도 아니다는 겁니다
.

그래서 진짜 화살을 바라는 겁니다.

뭘 해도 갇혀 있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속에서

자식 곧 기업이라는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참 열매요 그 열매의 나무만이

곧 예수님의 하나님 만이

곧 이름이지요. 친짜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닌 유대교의 하나님이든 바리새인의 하나님이든 성화론자들의 하나님이든

다 가짜로써 인간의 손에서 세워지는 헛된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들은 심판 속에서 다시 세워지지 않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면 다 녹아 없어지는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냥 존재만 우기다가 사라지는 안개죠.

 

또렷한 기능이 뭡니까? 기업이죠. 그 기업이 누구냐

그 자식이 누구냐 말이죠.

 

죽음 속에서 연달아 태어난

자식의 자식이 누구입니까?

죽은 태에서 주렁 주렁 열매가 3060100배의 열매가 나오는 기업?

 

그 열매는 이미 처음부터 출발했습니다.

처음부터 합당한 열매로써 말이죠.

곧 주의 인자하심으로 출발한 겁니다.

마침도 주의 인자하심으로 마치기에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한 겁니다. 처음과 나중.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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