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봉인 (6: 1- 8)

 


(
6:1, 개역)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6:2, 개역)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6:3, 개역)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6:4, 개역)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6:5, 개역)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6, 개역)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6:7, 개역)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6:8, 개역)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봉인 된 것을 뗄 때, 곧 해제 할 때

못풀던 단절된 것들이 이제는 막 쏟아지게 되는데

그 쏟아지는 비밀풀이 답들이 무상으로 공짜로 막 쏟아진다는 겁니다.

 

앞에서 사도요한이 이 봉인된 책을 아무도 펼 자가 없었다 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늘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도 못 폅니다.

오로지 어린양만 이 책을 봉인된 책을 펴는데 있어서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24장로들은 면류관을 반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서 상급받는다는 것은 곧 이런 의미입니다.

반납하기 위해서 받는거다 말이죠.

면류관의 출처는 저 아니예요 저분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그 모습을 미리 이 땅에서 누리게 되면

저는 십의 이조를 드렸고 믿음 생활 607080년 모태신앙이라는 둥

그 딴 소리를 하지 못한다 말이죠.

왜냐하면 성도는 출처는 저분입니다. 저 아닙니다 라는 소리를 반드시 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저 아니요 이 분입니다. 라고 차이성으로써 뭐뭐 아니요를 반드시 붙여서 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면류관 반납입니다.

 

그런데 십의 이조를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자들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곧 뭘해도 나는 가짜요 엉터리요 다 죄입니다 라는 소리를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사단의 회 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정죄 받는 자들이 오히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긍휼을 바란다는 자체가

졸지에 차이를 드러내더라 말이죠. 단절을 드러내요

 

사단의 회가 절대로 못 따라하는 내용입니다.

사단의 회는 단절이 아니라 연결 소통 개방을 외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차이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단절이 무슨 의미인줄 모른다는 겁니다.

 

왜 사도요한이 웁니까?

봉인된 책을 아무도 펼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기록된 대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앞뒤 모순된 이 간극을 좁힐 길이 없다는 겁니다.

좁힐수 있다면 그 사람은 또는 영적 존재인지 하여튼 이 책에 봉인된 인을 해제 시켜보라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나오는 음녀란 자기 쪽에서 신랑을 찾아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이 모든 것이 음녀의 특징입니다.

자기 쪽에서 마치 거룩을 이룰수 있는냥 거룩에게 접근하고 있다고 과시하고

거룩을 실천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과연 이런 자가 봉인된 책을 펼수 있는 자일까요?

 

그런데 웬걸 이런 자들이 정죄하는 매국노 세리에게는

책이 펼쳐진냥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이 세리에게 덮쳐져서 나타나는 겁니다.

 

아무리 들따 보세요 세리가 도대체 무엇을 했길래? 거룩이 덮쳐지는 겁니다.

 

알고 보니 세리가 아니요 예수님의 일방적인 편파긍휼이 덮쳐져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세리는 그 긍휼을 누리는 겁니다.

 

알고보니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봉인된 책의 인을 떼어서 매국노 세리에게 나타내는 겁니다. 탕자에게 나타내는 겁니다.

 

그럼 여전히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거룩이 덮쳐진적이 없이

거룩을 행했다는 소리 밖에 다른 외침을 그들은 못하도록 되어 있고

 

오히려 봉인된 책의 인이 떼어져서 책에 기록된 내용들이 나타난 자에게는

오히려 심판 속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 속에 놓여지니 십의 이조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이고 뭐고

뭘 해도 심판 바깥에서 벗어날길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이 드러나는데 있어서

뭘 해도 이 심판 속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것이 없음을 직시하게 된다 말이죠.

 

아예 저들은 그것도 안보이지만
(못 보도록 막아버렸기 때문에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못 보고 못듣지만)


세리는 보여주셨기 때문에 직시하게 됩니다.

 

그러니 뭐 어떤 것들을 내어놓아도 통과할수 있는게 없다니깐요.

그래서 무조건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주로 오해하기를 주의 인자하심이다고 하니까

우리가 판단해서 맞네 맞네 주의 인자하심이 맞네 라고

우리가 경험케 되니 주의 인자하심이 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도 하기 전부터

아예 우리 자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의 인자하심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경험(체험)하고 판단(이해 납득 설명)해서가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거다 말이죠.

우리의 경험과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이 그런 식이다 말이죠.

마치 예수님도 우리 유대인의 신학에 검증받아서 테스트 시험에 통과하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성경 지식에 맞는지 함 따져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의 3가지 시험을 미리 받으시는 겁니다.

잠시 떠난 마귀들이 어디서 나타나는고 했더니

바리새인과 율법사 대제사장들 등등에서 나타나더라 말이죠.

여전히 테스트 시험쳐서 자신들이 문제된 그 시험문제를 통과해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다행히 빵점 맞았습니다.

빵점 뿐이겠습니까?

마귀의 대 마왕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까지 되어버린 겁니다.

 

즉 자신들의 모습을 예수님에게 뒤짚워 씌운거다 말이죠.

도둑이 제발 저린 겁니다.

 

결국 우리의 경험과 판단을 거치지 않는 것이 복음이듯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진 적이 있습니까?

거 봐요 보탬이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 대부분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만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 사수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겁니다.

그 한가지 예로써

회개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뭔가를 잘못하거나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누가 나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보고 다쳤거나

또는 나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데 내 자식 내 친지들의 실수로 인해서 연결이 되다 보니 그렇다거나 등등해서

 

뭔가를 잘못했고 누가 피해를 봤고 그래서 아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느껴서 회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앞으로도 또는 과거에 몰랐던 것 아니면 내가 해 놓고서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랬던 것

 

이것 다 미리 보험 넣어서 미리 저축해서 누가 내 때문에 손해 보면 거기에 대한 책임처리비용을 지불하듯이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것이 회개라고 보고 있다 말이죠.

 

하여튼 내가 잘못해서 회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말이죠.

 

그게 아닙니다.

그것을 노리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런 마귀들이 한 둘이가 달려들어서 따져드는게 아니였다 말이죠.

 

회개란 원인을 따져서 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뭘 해도 다 죄이기 때문에 회개이다는 겁니다.

즉 원인이 없어요.

결과를 보고 회개를 하는 겁니다.

원인 때문에 회개하는게 아니라

결과를 보고 말이죠.

 

아무 잘못 한게 없다 칩시다.

마치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고

혹시 부족한게 있다면 당장 말해주세요 그럼 지금이라도 반드시 실천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라고 했을때에

근심하고 등돌리고 돌아서 가버린다 말이죠.

 

잘못한게 없는데 왜 등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섭니까?

 

회개를 왜 못할까요?

 

율법을 괜히 지켰다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괜히 지킨 겁니다.

회개란 처음부터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이 나보다 먼저 있었다 라는 것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나는 주의 인자하심처럼 인애와 자비가 없는 놈입니다 라고

나 아니요를 못 외쳤다는 겁니다.

그럼 저 김대식은 블로그 제목을 나 아니요 라고 붙였기 때문에

저는 그럼 천국 가는 자 입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저 또한 인자 곧 인애와 자비가 없어요.

없기 때문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쳐다 봐야 할 것인데

당연히 없기 때문에 쳐다봐야 하는데

못 쳐다보는 겁니다.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을 한 순간에 다 손놓아야 하는데

못 놓겠다는 겁니다.

자기 동일시가 된 거다 말이죠.

어릴적부터 다 지켜온 율법이 졸지에 자신의 기념비가 되어서

그 탐욕을 못 버리는 겁니다.

 

제가 주여 그 가난한자 아닙니까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인데

율법 지킨 것을 마치 물량의 량으로 따지니까

지옥간 부자처럼 창고를 늘려가면서까지 양으로 꽉꽉 채우다 보니까

 

오늘밤 니 영혼 데리고 가면 그 창고에 까까득 채운 것 누구것이 되겠니 라고 하니

잠을 못자는 겁니다.

잠을 몾자

내 소유가 저들에게서 빼앗아서 채웠는데 그것도 열심히 열심히 채웠는데

저들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는데 내 것을 차지하게 되면

나는 그럼 뭐가 돼?

내 영혼 오늘밤 취하는 것 보다

 

(5:30, 개역)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내 소유물이 저들 매국노 세리의 것이 될 것 같으니까

잠을 못 잔다 말이죠.

 

(5:28, 개역)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마치 간밤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뭐라 뭐라 적으니까

벨사살 왕이 잠을 못 자는 거다 말이죠.

죽임당하거든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5:25, 개역)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5:1, 개역)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5:2, 개역)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5:3, 개역)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5:4, 개역)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 , , ,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5:5, 개역)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5:6, 개역)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5:7, 개역)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 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5:8, 개역)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5:9, 개역)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5:10, 개역)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5:11, 개역)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5:12, 개역)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5:13, 개역) 이에 다니엘이 부름을 입어 왕의 앞에 나오매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5:14, 개역)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5:15, 개역) 지금 여러 박사와 술객을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내게 보이지 못하였느니라

(5:16, 개역)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5:17, 개역)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5:18, 개역)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5:19, 개역)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5:20, 개역)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5:21, 개역)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5:22, 개역)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5:23, 개역)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 ,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5:24, 개역)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5:25, 개역)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5:26, 개역)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5:27, 개역)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5:28, 개역)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5:29, 개역)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5:30, 개역)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5:31, 개역)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즉 부자청년이 어릴적부터 율법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어도

벨사살 왕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여진 글처럼

 

저울에 달아보고 함량 미달이면 다 죽여버리겠다 쪼뽀 쪼뻐 라고 한다 말이죠.

 

부자청년도 함량 미달이 되는 판국에

부랴 부랴 다니엘에게 서열 3위 라는 세 번째 치리자로 삼아본들

즉 회개해 본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신의 잘잘목을 따져서 나오는 것은 회개가 아니무이다.

회개란 뒤에 오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앞에 있었다 말이죠.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해도 함량을 채울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겁니다.

회개가 처음부터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나 보다 먼저 존재했다니깐요.

내가 회개를 할 때 그때 회개가 아니라

나 보다 먼저 있어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다니깐요.

즉 주의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가 곧 잃어버림과 되찾음이 먼저 있었다니깐요.

그러니 우리는 회개를 보고 회개할 생각하지 마시고

눈물 짜고 반성하고 부랴 부랴 다니엘을 세 번째 치리자로 삼을게 아니라

그거 다 소용없어요.

애초부터 나는 인애와 자비를 쳐다볼려고 하지 않는 심판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인 주님의 인자하심을 쳐다봐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썩어뭉들어진 마음과 가슴을 치면서 울었던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서 울었다 라는 겁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죠.

이것이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다는 겁니다.

 

아니 회개의 달인들인 유대인이 왜 예수님을 안 쳐다볼까요?

맞습니다. 회개의 달인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쳐다볼 이유가 없다 말이죠.

건강한 자인데 회개도 이렇게 잘하는데 말라꼬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쳐다 봅니까?

 

그딴 예수는 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라 하니 저쪽에 가서 놀아라 말이죠.

 

자 앞의 계시록 글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오늘 일곱 인을 떼는데 있어서

왜 이 일곱인을 떼시는 그 이유가 뭐냐 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바로 주님이 의사이고 구원자이다는 주의 인자하심 때문이다는 겁니다.

즉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시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협박용도 아니요 종말을 대비하라는 말도 아니요

이 어려운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서 종말을 무사히 통과하라는 말도 아니다 말이죠.

그게 무슨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입니까?

 

이렇게 일곱인을 떼시는 이유는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하기 위해서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을 위해서

일곱 인을 떼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말이죠.

 

이게 무슨 협박 공갈하듯이 겁주어서 계시록 종말 강의를 듣고 헌금바쳐서 심판을 피할수 있는 길을 얻을수 있다고 사기를 치는 것에 속아넘어갈 이유가 없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부자청년에게 근심케 만들어 등돌려 돌아서게끔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즉 어딜 감히 함량 미달인 되도 않는 미완료의 미흡함을 가지고

저울에 달려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딱 봐도 택도 없이 모자라는 판국에

 

이게 기쁜 소식이다 말이죠.

우리 백날 믿어봐도 우리의 믿음 택도 없이 모잘라요

저울에 올리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먼지 같아 ~~!!

비이지도 않아(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러니 함량 미달이다는 것이 기뻐야 해요.

함량초과가 되면 골치 아파요

물론 그런 일은 없지만

 

함량 초과가 되면 누가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 보겠냐 말이죠.

뭘해도 함량 미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쪽에서 주님을 찾아내어서 신랑 삼고자 하는 그런 음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고방식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을 땍지 하고 종편땍지 하듯이 손털게 만들어 탈탈탈 털려서

주님 쪽에서 나를 신부 삼고자 다가와서

자신의 피 흘리심을 발라서 그 피를 자랑하시고파서

피 발린 신부를 과시하고픈 겁니다.

 

내가 신랑 찾아나서는 것은 피 안 발릴려고 발악하는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 사단의 회와 같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바로 그렇다 말이죠.

우리가 그런 성화론자들 다 거쳐봐서 알잖아요.

 

내 쪽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겠다고 달려드는 임금삼고자 할때에

주님은 도망치셨다 말이죠.

 

주님은 인자하심을 쳐다보지 않고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표적을 본게 아니라

기적을 보고 따라온거다 라고 임금 안될래

신랑 안될래 라고 도망치시는 겁니다.

 

미끄러지듯이 리마리오의 마가린 버터 3세의 빠다가 발려서 저들은 어린양을 놓쳐버린다 말이죠.

 

예수님이 임금 되어주지 않고 도망치시는 겁니다.

온천하 만국을 다 보여주면서 다 줄테니 절하라 백날 해 보세요

도망친다 말이죠.

뭐 다니엘에게 세 번째 치리자 서열 3위를 줘본들 안 잡힙니다. 포착 안되요.

 

아무리 음녀와 짐승이 어린양을 잡을려고 해도 놓쳐버리고 쭐꾸덕 미끄러짐을 당한다 말이죠.

그 굴욕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을 더더욱 커지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이예요.

예수님에 대한 살인의지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은거다 말이죠.

 

 

자 그래서 일곱인을 뗀다는 자체가 기쁜소식입니다.

허접하고 미흡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들이

이 심판 속에서 불탈때에

또렷한 것만 남는다 말이죠.

정금만 남고 나머지 불순물들은 다 제거가 되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남은자만 남게 되니까 말이죠.

 

공장에서 일할때에 제품 공정에서 완료품에 생산이 되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백날 해도 완제품이 나오지 않으면 그 공장 문 닫아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복음은 공장 문 안 닫겨요

완료품이 막 쏟아진다 말이죠.

 

그리고 왜 일곱이냐?

 

먼저 표현된 일곱 교회가 바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증상물이듯이

이 일곱교회 곧 일곱 촛대와 함께 거하심이듯이

새로운 관계를 만들 듯이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3, 새번역)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 7:13

(1:13, 공동) 그 일곱 등경 한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13, 현대인) 그 촛대 사이에는 예수님 같은 분이 발에까지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13, 현대어) 그리고 그 촛대 한가운데에 어떤 분이 서 계셨습니다. 나는 그분이 인자라고 불리는 예수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분은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계셨으며

 

 

일곱 인(전쟁 시작), 일곱 나팔(전쟁 상황), 일곱 대접(전쟁 종결) 등등은

반대로 철거하는 작업이다 말이죠.

? 이미 완료 되었기에

이미 평화가 성취 되었기에 검을 주러 왔노라 말이죠.

 

물론 일곱은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창조하신 날인 일곱째의 날에 다 완료하심이고

이 창조가 결국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기에

7 은 예수님을 말한다고 말이죠. 행운의 숫자 럭키 세븐이 아니라

7이 예수님이다가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다는 겁니다. 창조주.

예수님으로부터 왔고 예수님으로부터 돌아가는 것이다 말이죠.

처음과 나중이다는 겁니다.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11:36, 새번역)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11:36, 공동)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1:4, 개역)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8, 개역)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4:8, 개역)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리고 이 7의 확대가 바로 12요 즉 이스라엘 이다 말이죠.

물론 인간 이스라엘은 다 실패했어요

그렇다고 주님은 실패하시느냐 이미 완료했기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예수님 뿐이고요.

6장 다음에 7장에 바로 십사만 사천이 나오는데

1212이지요. 12의 무한 확장인거죠. 이스라엘 12지파 말이죠. 찬양대.

 

결국 역사는 이렇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통해서 박살이 나야하고

상대적으로 그렇게 박살난 역사 속의 찌끼들은 마치 목욕탕 샤워 욕조기 의 물마개 속에 빨려들어가서

묵시에서는 새피조물 새이스라엘 12지파로써 형성이 되는 거다 말이죠.

7은 마치 두 가지 기능 곧 역사는 예수님으로 부터 박살이 나서 욕조 물마개 뚜껑 열어버리면 물이 빨려들어가듯이 훅 빨려 들어가서

저쪽 묵시에서 뱉어짐을 당할때에 이것이 바로 일곱 촛대인 일곱 교회 또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12지파로 형성이 된다 말이죠.

 

그러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겁니다.

다윗이 썩어짐은 안당하는게 아니라 당해요

당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죽지만 그 역사를 박살내어서

묵시에 뱉어버리면 누가? 7이가. 일곱이가. 예수님이 뱉어버리면

썩어짐을 당하지 않는겁니다.

 

(13:27, 개역)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13:28, 개역)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13:29, 개역)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13:30, 개역)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13:31, 개역)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13:32, 개역)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13:33, 개역)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13:34, 개역)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13:35, 개역)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13:36, 개역)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13:37, 개역)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13:38,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13:39, 개역)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바로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다 말이죠. 7의 기능이 말이죠.

에스겔에 나타난 마른뼈가 다시 살이 붙어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듯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곱 인을 떼신다는 자체가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마라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또렷하지 않은 것들은 가라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아닌 것들은 모호하다 말이죠.

의문의 반복은 썩 물러가라

기존의 것들을 날려버리고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이죠.

 

그래서 일곱인을 뗍니다. 전쟁 시작입니다. 이전 것은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즉 이것은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겁니다.

승리를 이미 선언하고 들어가는 전쟁 시작입니다.

 

네 생물의 천사가 나오는데 각각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퍼뜩 퍼뜩 부랴 부랴 바삐 움직입니다. 포착 불가이다 말이죠.

해석 불가입니다.

그리고 여러개의 눈의 기능 처럼

세상 곳곳에 누비면서 이 전쟁을 퍼붓는 겁니다.

이 전쟁을 피할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겁니다.

 

각각의 말의 색깔은 천사의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첫 번째 인을 떼니까

 

(6:1, 새번역) 나는 그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우레 같은 소리로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2, 새번역) 그리고 내가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그는 이기면서 나아가고,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

 

흰 말이 나오고 말에 탄 자가 활을 쏘고 면류관을 썻는데 이기면서 나아가더라 말이죠.

즉 희다는 것은 거룩한 자와 거룩하지 않은 자의 구분입니다.

물론 거룩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부자청년처럼 거룩한 짖을 해서 거룩한게 아니라

거룩과 무관한 자가 거룩하심을 입음으로써 생명의 면류관을 자랑했던 세리처럼

오히려 거룩한 행실을 했던 바리새인은 생명의 면류관을 자랑하지 못한 자들이다 말이죠.

천사가 면류관을 쓴 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자랑하는 자

곧 이기는 자

거룩하심을 입은 자를 구별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천국 갈자와 못갈자를 철저하게 구별하는 천사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천사가 탄 말의 색깔은 붉은 색입니다. 피 색입니다. 전쟁 유발자입니다.

서로 서로 전쟁을 붙이는 겁니다. 칼을 주러 왔노라 말이죠.

 

(6:3, 새번역) 그 어린 양이 둘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4, 새번역) 그 때에 불빛과 같은 다른 말 한 마리가 뛰어나오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권세를 받아서 가졌습니다. 또 큰 칼을 받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결국 어떤 누구도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아비와 자식을 어미와 딸을 며느리와 시어무이를 싸움 붙이고자 왔다는 겁니다.

? 사람의 원수는 집안 식구이니까 말이죠.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 용서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와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런 전쟁을 곧 여호와 라는 이름 전쟁(구약)

십자가의 피 용서 전쟁을 서로 서로 싸움하도록 붙이는 전쟁 유발자 천사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인을 떼는 천사가 탄 말의 색깔은 검은색 곧 가뭄입니다.

앞의 글 솔로몬의 시편에서 언급했듯이

 

(6:5, 새번역) 그 어린 양이 셋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6, 새번역)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서 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 왔는데 "밀 한 되도 하루 품삯이요, 보리 석 되도 하루 품삯이다.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말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 , '데나리온'

 

(127:1, 개역)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27:2, 개역)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사람의 수고가 헛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차이성으로 나타난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면 말이죠.

이 여호와가 전쟁의 신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이다 말이죠.

지혜는 이 전쟁의 신을 통해서 아 사람의 수고가 헛되구나

백날 해도 기업이 세워지지 않는구나

자손도 없고 집도 없고 다 단절이 되는구나

그러니 여호와께서 직접 집을 기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솔로몬이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검은말을 탄 천사의 기능은 사람의 수고가 헛되게 하는 겁니다.

기근과 가뭄은 점점 더 빈부의 격차를 심하게 만들어서

시편처럼 악인은 죽을때도 잘 죽고

의인은 그 악인이 잘 됨에 낙망을 하고 실족을 하는데

성소 올라가게 되니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즉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니까

곧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 이유를 알게 되더라 말이죠.

이것을 시편 127편에서 솔로몬이 성전에 올라가서 노래로 외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검은말을 탄 천사의 기능은 사람의 수고가 다 헛되게 하기 위한

가뭄을 퍼붓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자 이다는 거죠.

 

그 다음 네 번째 천사가 탄 말의 색깔은 청황색입니다.

청황색은 말라 죽은 생명 부재 상태인 흉년입니다. 사망입니다.

쫄딱 망하는 거죠. 가을에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6:7, 새번역) 그 어린 양이 넷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이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또는 '가거라!'

(6:8, 새번역) 그리고 내가 보니, 청황색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의 이름은 '사망'이고, 지옥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과 죽음과 들짐승으로써 사분의 일에 이르는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 , '하데스'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 죽지요.

포도 나무에 열매 없지요.

감람나무 열매 그쳤지요.

논 밭에 식물이 없지요.

우리에 양떼 까정 없지요.

송아지도 없이죠.

완전히 철저한 단절이지요.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이게 말이 되겠냐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 자체가 이런 기능이다는 겁니다.

죽여놓고 다시 3일만에 살리는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곧 믿음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라는 자연세계는 청황색처럼

잎이 말라 죽는 낙엽과 같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흉년인가? 톡 하고 건드렸더니

땅의 사분의 일이 사망할 정도로 죽어나가는 겁니다.

후패케 만들어서 다 날려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묵시에 뱉어버리는 새피조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 하게 되는

이 말도 안되는 일을

주의 인자하심이 벌리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결국 네 천사가 담당한 기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전쟁 곧 땅에 불지르기입니다.

역사는 이 네 천사의 불지르기에 의해서 활활활 불타는 겁니다.

 

(12:49, 개역)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개역)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것은 인간 쪽에서 장담할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거죠.

절망입니다 절망

오로지 주님의 인자하심에 달린 문제로 만들고자

모조리 다 망하게 하는 전쟁의 개시입니다.

 

오로지 피만 바라보게 하고자 광야에 불뱀을 푸는 식입니다.

오직 장대 높이 달린 인자의 높이 들리심 곧 인애와 자비만을 쳐다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불뱀에게 물린 자임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해당 되지

그것 조차 인식이 없는 자에게는 다 헛소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 오는 귀환하게 될 때에 꿈만 같도다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벌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눈으로 볼수 없이 진행 됩니다.

이미 완료된 채로 말이죠. 완료된 증상으로써 구원 얻은 자에게만 보이는 환상 곧 꿈만 같은 일입니다.

 

구원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니 문자로 백날 끼어맞추어서 퍼즐 풀 듯이 해도 역사 속에서 맞는 구석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꿈만 같도다 라는 다 이루심의 십자가의 피 용서 자체를 어리석게 보고

또 유대인은 거리끼는 걸림돌로 보기 때문에

저들에게는 전혀 무관하게 벌어지는 네 천사의 움직입니다.

포착이 안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결과적으로 다 이룬채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말이죠.

누리듯이 이 기쁜 소식을 맛보는 겁니다.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처럼 달게 말이죠.

바로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케 하기 위해서 ~~~~

 

(10:9, 개역)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10, 개역)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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