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 여호와 (시편 121)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21: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121:2, 개역)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3, 개역)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4, 개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5, 개역)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121:6, 개역)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121:7, 개역)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8, 개역)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바로 앞의 글 계시록 일곱인을 통해서

주님은 오로지 자신의 피 외에는 관심이 없는 피만 자랑하시고자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철학자들이 진짜 사랑이 뭔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있어서

흔히 사용하는 예로 든것이 무슨 이야기가 뭔고 하니

전족 이야기입니다.

엣날 중국에서 결혼한 아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신발을 작게 만들어서

도망가다 발이 아파서 오래 못 가도록 한다 말이죠.
물론 이것은 잘못된 가설이라고 하지만

철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예로 자주 언급이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진짜 사랑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철학자는

사랑하는 자를 불구로 아예 만들어서 죽을때까지 책임지면서 수발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다고 누가 봐도 삐딱한 내용인데

앞뒤 말을 들어보면 다 최면걸리듯이 수긍하게 되는 겁니다.

 

즉 그런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사랑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을 말하는데 핵심이 있다는 거죠.

그것을 볼려면 중간에 도망치면 안되니까

과연 그런지 아닌지 다 보는게 아니라
중간에 다 안보고 도망쳐 버리면

끝까지 책임지는지 안지는지 알길이 없으니까 말이죠.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철학자 곧 지혜를 사랑하는 자 치고

단 한 개라도 책임지는 놈 없다 말이죠.

다 말장난 하다가 자기 보다 약한 놈에게는 말빨로 밀어붙이고

자기 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낑낑 꼬리를 내리는 식이기 때문에

처세술의 달인들인 철학자의 속임수에는 말빨로 곧 사람을 좋게하는 말로 인해

넘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이렇게 사기치는 것을 다 알면서도 사람들이 그런 철학자의 말을 수긍하고
그런 철학자들은 좋아하는 이유는

진짜 사랑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말이죠.

 

철학자들 말이 처세술이고 사기치는 것인줄 뻔히 알지만

언젠가는 나를 책임 끝까지 책임져 줄수 있는 자가 있다는 희망 때문에

그 거짓말을 하는자의 말을 자꾸 듣다 보면

희망이 생기니까 말이죠.

 

레닌의 말처럼 거짓말도 자주 하면 진짜가 된다고 했듯이 말이죠.

즉 대중은 듣고픈 것만 듣고싶어하고 보고싶은 것만 보기를 원하고

믿고픈 것만 믿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노리고 파고드는 것이 철학자 신학자 곧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인 거죠.

 

자 그럼 그런 거짓선지자를 쫘아악 깔아놓고서

그 배경으로 참선지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해 라고 

도리어 거짓선지자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지만

참선지자는 그야 말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선지자는 상대방 사람의 상태를 봐 가면서 거짓말로 유혹을 하지만

참선지자는 아예 부정의 부정 곧 상대방의 상태를 보지도 않고 아예 뻥을 치는데

세상에 이런 뻥도 없어!! 거짓선지자의 뻥은 그 뻔데기 앞에서는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완전 뻥 완전 뻥구라일 정도로 심하디 심하다 말이죠.

 

왜냐하면 거짓선지자의 배경을 깔고서 그 위에서 증거하는 참선지자의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임을 당할 수 밖에요

 

뭐 너가 우리를 구원해 주겠다고 어디서 뻥을 쳐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짖는자여

누가 너의 뺨을 때렸는지나 맞춰봐 맞춰봐

어느 손가락으로 너를 찔렀게? 맞춰봐 맞춰봐

이런 뻥구라야 뭐 3일만에 짖는다고???

 

참 우리도 거짓되게 살지만 너처럼 그런 구라는 안 쳐 ~~~~~

적당히 거짓말을 해야지

에라이 죽어라 ~~~~

 

자 이런 식으로 역사는 반복합니다.

역사가 아무리 반복이 되어도

이 현상을 멈출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우리 조상들은 그런 잘못을 했지만 우리는 다시는 그런 짖을 하지 말자 라고 다짐했고 백성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말이죠.

 

아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의 마음을 몰라주고 속을 박박 끓어대는 겁니다.

역시나 반복이 됩니다.

의문의 것이기 때문에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까정 죽여 버립니다.

결국 부정의 부정이란
마귀로 부터 마귀 취급 당하는 것이 진짜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와 한 세트를 이루어서 그 차이로써 참복음이 증거 되는 겁니다.
이단으로 부터 이단 취급 당하지 않는 복음은 가짜이다는 거죠.
거짓으로 부터 거짓 취급당하는 것이 진짜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지혜를 쫏는 이방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이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신 영광 곧 은혜요 자비입니다.
이 십자가 보다 또렷한 사랑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흐릿하고 모호한 것으로 사기를 칠려고 하냐 말이죠.

 


성전에 올라가서 부르는 노래 두 번째 노래로써

오늘 시편 121편을 보게 되면

말씀 세계에서는 저렇게 주님의 참 사랑이 완료된 채로 우리를 도우시지만

정작 역사에서는 그 반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절대로 하기 싫어도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런 짖을 하도록 되어 있다니깐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는게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이 땅에 발을 못 붙이도록 하는 조치이다는 겁니다.

여기는 내 구역 내 영역이니까 예수 너는 꺼져 라고 해서

도로 돌려보내버린 것이

 

진짜 숨어있는 내막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탈출 곧 구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방식을 철회하시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십자가가 밝히 보이도록 또렷하게 해 버리고

나머지는 흐릿하고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이 된다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을 거야

내가 만약에 그렇게 하면 내 손에 장 지져 버리겠어 라고 장담할게 아니라

역사는 이럴 수밖에 없기에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 거부하는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이 거리껴 하는 걸림돌인 십자가로

 

바로 이런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의 방식으로

이 땅을 날려버리겠다는 취지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진짜 역사의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는 묵시의 활동

언약의 활동

십자가의 피 활동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책임져 주는 진짜 사랑이 왔다 라는 것은

역사에서는 정작 가짜로 취급해 버려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어두운 눈이라는 겁니다.

흠모할 모양이 없다고 귀히 여기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역사 속에서는 아무리 교회 다니고 성전에서 같이 예배와 말씀을 본다고 지킨다고 우겨도

흠모할 모양이 있는 것만 귀히 여기는 세상 속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흠모할 모양이 없어서

귀히 여기지 않아서 버렸다 말이죠.

 

그 버린 돌이 모퉁이 되는 기이한 일이

바로 성전에 올라갔을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했는지를 말이죠.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라고 했을때에

우리는 전혀 흠모할 모양이 없어서 귀히 여기지 않았다 말이죠.

보디가드이면 풍채가 좋아야 하는데

나 보다 더 약해

더 약하니까 날 지키기는커녕 도로 보호해야할 판국이라

그래서 싫어버린다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버렸다 말이죠.

아니 그런데 그 버린 돌이 모퉁이 돌

든든한 집의 대들보 주춧돌이 되어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흔들리지 않는 반석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불안 불안한 것처럼없다 말이죠.

그 불안이 아예 없는 기초가 튼튼한 반석

어떤 위험이나 창이나 협박

풍파 바람 번개 심지어 지진에도

종말의 제 3차대전의 핵전쟁에도 끄떡 없는

심판 속에서도 아무 탈 없는 노아방주와 같다는 겁니다.

 

무엇이? 내가 버린 예수님

내가 세 번 부인한 예수님이 말이죠.

 

즉 이것은 내 쪽에서 사랑하겠다가 먹혀들지 않는 사랑이고

반대로 주님이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진짜 사랑의 방식인 요나의 표적

곧 십자자 라는 표적의 방식으로만

다가오겠다는 겁니다.

바로 그 내용이 바로 오늘 시편 121편인데

여기서 내 쪽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주님을 책임지겠습니다 가 없는게 아니라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틀렸다 오해 오독한 것임을 탈탈 탈 털렸을때에

도리어 예수님쪽에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어봐 주시는 그 인자하심이 덮쳐왔을때에

비로소 이 시편 121편이

성전에 올라갈때에 부르는 노래임을

예수 안에서 마음껏 부르는 노래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난 절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을 거야 라고

네 네 네 네네장담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장담 마음껏 하세요

막사세요

막하시다가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고 욕도 먹을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렇게 지적당함으로써

역사라는 꺼플을 벗기시면서

숨어있는 마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마귀에게 잡혀 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자 이기는커녕

마귀에게 고자질해서 마귀에게 잡히도록 하신다 말이죠.

 

우와 예수님으로부터 배신 당하는 그 느낌

한번 느껴보세요 얼마나 쫄깃 쫄깃한지 ~~~~

 

즉 이 말은 마귀를 이길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보라니 말이 됩니까?

그 불뱀이 너야 너

너가 마귀이다 라는 겁니다.

마귀를 이기고 싶어하는 너가 마귀이다는 겁니다.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셈이다 말이죠.

제로 게임이다 말이죠.

그러니 그런 모호하고 미흡한 의문의 반복에 사로잡힐게 아니라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 다 이루었다를 보자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다는 겁니다.

 

다 이루심이 십자가가 아니면 다 이루어짐을 다른데서 찾을수가 없어요.

그런데 다른데서 찾을려고 하다 보니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불쾌하다 말이죠.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시인하게 되는 꼴이니

그럼 그 동안 귀히 여긴 것들을 다 손아귀에서 손 놓아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다 포기해야 한다 말이죠.

그 귀하다고 귀하게 했던 가치있다고 여긴것들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 말이죠.

결국 다른 것들은 다 동일시 할수 있어도

이 십자가 만큼은 도저히 도저히 동일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어떻게 불뱀을 쳐다 보냐 말이죠.

나는 마귀입니다 라고 시인하냐 말이죠.

나 자신도 용납이 안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용납을 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똑같은 십자가의 사건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다들 못 박아라 못 박아라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럴때에 스데반 집사처럼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증폭이 되더라 말이죠

 

아니 왜? 더 증폭이 됩니까?

멈춰지지 않습니까?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하고 유일하게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는 똑같은 짖을 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입장이지만

묵시 에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 주의 인자하심의 혜택을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난 뒤에

주여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라고 기도하는게 아니라

 

(121: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121:2, 개역)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먼저 있었던 것은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음 도움을 어디서 오느냐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때문에 나는 불뱀에게 물릴 수밖에 없고

그 이름 때문에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하신거다 말이죠.

 

결국 여호와라는 이름인데

여호와란 이름이 아니지요.

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 참 한 군데 있지요

임마누엘

이것도 일종의 기능처럼 주어진 것인데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라는 뜻이지요.

 

여호와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인데 전쟁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전쟁의 신이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그 별명의 이름이 바로 예수 라는 이름이지요.

딴 이름을 준 적이 없지요.

 

그 전쟁 때문에

숨어있는 존재를 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인데

시편에서는 원수로 표현되었지요.

그러니 이 전쟁의 신 여호와 라는 이름이 아니면

우리는 이 원수의 존재를 파악 못하고

이 원수만을 상대로하는 이 시편을 알길이 없어서

달달 외우기만 하다가

예수님을 죽이는

그것도 그냥 죽이는게 아니라

바알세불 걸린 마귀로 취급해서

내가 마귀인데 예수님을 마귀를 뒤짚어 씌우는 이 모습이

이 역설적인 모습이 도대체 왜 이런가 라는 실상을 알길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다행히도 이 이름 곧 전쟁의 신인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보이지 않는 원수의 내막을 통해서

비로소 부르짖게 된다는 겁니다.

원수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부르짖을수 있냐 말이죠.

그 원수 문제 해결할 방법이 내 쪽에는 없으니

이 원수 문제 해결해 달라고

출애굽을 외치듯이

구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말이죠.

 

그러니 부르짖음은 주님만의 아이디어 이듯이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신 이유도 부르짖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이것이 진짜 사랑이다는 겁니다.

부르짖도록 만드는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에게 속아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런데 주님께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심으로

너 베드로야 내가 너의 허물 책임질께 라고 나올때에

원수 마귀가 돌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의 진수 곧 십자가 사랑의 진수입니다.

 

처음부터 원수마귀만을 상대로하신 주님의 자작극이였다 말이죠.

 

네네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십자가

 

처음부터 십자가로 출발했던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주님의 자작극에 말려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속았어 속았어 예수님께 속았어 라고 하던가요?

 

오히려 예수님과 짝짝꿍이 되어서 네네 그럼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도로 묻고 있어요.

 

둘이 척하면 척이다 말이죠.

오히려 마귀가 뻘쭘하게 되었어요

 

왜이래 재훈 재훈 여기 이상해 이상해 재훈 재훈 베드로 핵노잼 이라고

원수마귀가 도리어 당황하게 되더라 말이죠.

 

이렇게 뻔뻔스러운 베드로일줄 몰랐다 말이죠.

예수님 죽여 놓고도 저렇게 뻔뻔하다니

다윗 보세요 우리야 장군 고의적으로 죽였고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살인 말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치밀히 계획해서 죽였다 말이죠.

이름 없는 아이가 죽지요.

 

그런데 그 꺽으신 뼈로 기뻐하다뇨?

세상에 이런 뻔뻔스러운 놈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일급 살인자가 따로 없잖아요.

베드로는 예수님까정 세 번 부인했으니

천하의 이런 죄인도 없어요

그런데 이런 뻔뻔스러움은 어디서 오느냐 말이죠.

 

고것은 여사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의 고거는 여사에게 물어보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천지지으신 여호와께로 온다는 겁니다.

전쟁에서 온다는 겁니다.

나의 전쟁이 아니라

김의 전쟁

곧 예수님의 전쟁인 십자가로써

주의 인자하심의 전쟁으로써 왔다 라는 겁니다.

이름 전쟁

곧 모든 인간의 이름과의 전쟁에서

그 승리로 인한 전리품이 이스라엘이듯이

이스라엘은 싸움한 적도 없는데 이 전리품을 누리는 겁니다.
곧 본인들이 전리품이듯이 말이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

주님의 전쟁승리로 다 이루심으로 온다는 겁니다.
어떻게 전쟁 승리했는데?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었도다 선언 말씀선포 로 이기셨다 말이죠.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이겼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도움은 내가 반성하고 회개해서 오는게 아니라

내가 도움을 구하기도 전에 회개 곧 주의 상하고 통회하는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이 먼저 있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마귀가 밀까부듯이 나의 어마 어머한 허물을 약점 잡아서 송사를 해도

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주님의 회개(눈물=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스토커 사랑? 불륜의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겁니다.

나 보다 먼저 있었던 이 스캔들 십자가의 피이기에 마땅히 자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러니 일곱인을 신나게 떼어서 퍼붓는 불지르는 천사의 활동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수가 없는 거죠.

 

우리는 이렇게 나의 도움이 주 여호와께로 옴을 보고 기뻐하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으며

감람나무 그치도 논 밭에 식물이 없어도 아싸 ~~~~~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라고 말이죠.

왜? 주의 인자하심의 등장이거든요. 주의 머리가 들리심이거든요. 곧 십자가 등장입니다.
다 이루심의 등장이다 말이죠.
의사의 등장 때문에 나는 졸지에 환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구원자의 등장 때문에 나는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어떻게 지키신다고요?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격동케 해서

부르짖도록 만듬으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마귀에게 마귀 취급당하는 십자가라는 저주로 스캔들로 스토커로써


내 쪽에서 주님 사랑하겠다는 나서는 방식을 다 꺠부수고

주님 쪽에서 사랑하시겠다고 안달이 난 술람미 여인을 찾는 솔로몬의 아가 곧 노래 중의 노래의 방식으로

진짜 사랑인 스토커의 방식으로 끝까지 책임지시겠다고 덤벼드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피,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는 방식 뿐인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해서 화목제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의 죽음의 방식으로만 사랑하겠다는 겁니다.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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