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편 122)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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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22: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122:2, 개역)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122:3, 개역)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122:4, 개역) 지파들 곧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122:5, 개역)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122:6, 개역)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122:7, 개역)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122:8, 개역)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122:9,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122:1, 새번역)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122:2, 새번역)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

(122:3, 새번역) 예루살렘아, 너는 모든 것이 치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처럼, 잘도 세워졌구나.

(122:4, 새번역) 모든 지파들, 주님의 지파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라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122:5, 새번역) 거기에 다스리는 보좌가 놓여 있으니, 다윗 가문의 보좌로구나.

(122:6, 새번역)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 "예루살렘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122:7, 새번역) 네 성벽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네 궁궐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하여라.

(122:8, 새번역) 내 친척과 이웃에게도 "평화가 너에게 깃들기를 빈다" 하고 축복하겠다.

(122:9, 새번역) 주 우리 하나님의 집에 복이 깃들기를 빈다.

(19:35, 개역)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7, 개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19:48, 개역)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앞의 글 시편129편에서 제목을 시온을 미워하는 자 라고 했습니다.

즉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그 차이로써 알수 있게 된다 말이죠.

 

오늘 시편 122편을 보니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나옵니다.

 

(122:6, 개역)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곧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는 자 이겠죠.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과연 평안을 구할 줄 알까요?

말로는 평안 평강을 구하나 뒤에는 칼을 숨기고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안 그러는 자가 없다는 거죠.

 

평화란 전쟁의 종식입니다.

그러면 전쟁을 시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요? 평화가 말이죠.

오늘 나오는 예루살렘을 전쟁을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 전쟁을 정작 누구에게로 향할까요?

뒤에 숨긴 칼을 누구에게 들이댈까요?

예수님에게 들이댑니다.

오늘 시편 122편으로 치면 다윗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판단의 보좌, 심판의 보좌 즉 심판의 기준을 다윗의 집에 보좌를 두었는데도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그 심판을 다윗의 집에 둔 보좌를 통해서 격어봐야

왜 그런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물론 아예 깡그리 무시하기 때문에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 뻔하지만 말이죠.

 

그 어떤 인간도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자가 없다 말이죠.

육의 전쟁이야 늘 수시로 벌어지지만

영의 전쟁을 무슨 수로 인간이 벌릴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육이기 때문이거든요.

 

결국 우리는 육입니다 영이 아닙니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럼 이 영의 일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가 이 다윗의 집에 두신 이 심판의 보좌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수 있다 말이죠.

한마디로 미워했다는 겁니다.

그냥 바로 바로 미워한게 아니라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해 놓고서는 뒤로는 칼을 숨겨서 미움을 발하더라 말이죠.

이 현상이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말이죠.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전세계가 들썩 들썩 할 정도로

아기 예수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 죽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 이유로 그 이유 하나로 예루살렘에 살았던 겁니다.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을 사랑한다고 평화를 빌면서 말이죠.

이것이 인간쪽에서 믿겠다고 달려드는 모습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마라 검을 주러 왔노나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나 자식이나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사랑만이 진짜 전쟁을 벌릴수 있고

사랑만이 전쟁을 종식시킬수 있는 평화를 이룬다 말이죠.

 

우리는 사랑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로 이 전쟁같은 사랑을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져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사랑을 할게 아니라

도리어 770번 용서의 사랑을 받아야 할 판국으로

우리는 사랑이 없다 라는 사건을 당하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시온에 예루살렘에 거치는 반석을 두시는 겁니다.

시온에 사는, 예루살렘을 포로로 잡아버린 그 원수를 향한 전쟁을 개시하시는 겁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출시키고 건지시는 겁니다.

난 예루살렘을 사랑했다 라고 하는 자에게 거치는 반석인 실족케 하는 복음을

난 예루살렘을 사랑한 적 없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주님의 영광을 두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할 판국에 놓여지게 됨으로써

졸지에 그 회개의 고백이 졸지에 영적전쟁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래서 이 다윗이 찬양하는 겁니다.

다윗에게 벌어진 그 사건 곧 주의 인자하심의 사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예루살렘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다윗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다윗은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수님에 대한 공격

곧 시온에 대한 공격을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아무도 공격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유대인에게 그런 기적적인 것을 보여주면

서로 임금 삼을려고 하지 누가 예수님을 공격하겠습니까?

 

짐승 구유에 태어남으로써 뒤에 숨겨놓은 칼을 들이대면서 공격하듯이

실로암 소경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비로소 공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곧 천국의 침략 방식입니다.

 

난 소경이 아닌데 왜 소경인 자를 불쌍히 여겨서 오히려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고 뒤짚워 씌우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는 거죠.

지난 주에 스토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마태복음을 예로 들었는데

왜 하필이면 손 마른 자를 그것도 멀리서 고치시는게 아니라

일부러 안식일날 그것도 성전 앞에서 고치시는 겁니다.

전쟁 하자 라는 거죠.


그 넓고 넓은 땅 다 내버려두고 왜 하필이면 애굽에 들어가서 애굽에게 시비를 거는 것일까요?

딴 곳에 살아도 되잖아요. 하나님나라 건설하라 말이죠.

그런데 그건 평화가 아닙니다.

전쟁 종식이 될수 없다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만 영광 받으신다 말이죠.

곧 평화요 전쟁의 종식으로써의 화평입니다

그러니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 말아라 검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인 예수님의 마음이다 말이죠.

죄 문제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모든 육체는 다 소멸시키겠다는 겁니다.


결국 소경은 너가 진짜 소경이다고 하셨듯이

손 마른 자는 너가 손 마른자야 라는 일종의 시비 입니다.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그래서 찬송가도 그때 목 마른 자들이 다 이리오라 를 개사해서

손 마른 자 들이 다 이리오라 라고 찬송가를 부르고 했다 말이죠..

 

시온에 살아도

예루살렘에 살아도

오늘 본문처럼 예루살렘을 사랑해도

시온을 사랑해도

정작 예루살렘과 시온 곧 평화의 도시에 살아도 사랑해도

 

평화를 원치 않았고

예루살렘을 싫어했고

시온을 미워한 본심이 바로 예루살렘 되신 예수님

시온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들추어지게 되더라 말이죠.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즉 이 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평화가 없다는 겁니다.

전쟁의 종식이 없다 말이죠.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빼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부터 건지시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 아들 되신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말이죠.

시온을 미워하고 예루살렘을 싫어했다는 것이 들통나 버렸습니다.

내 쪽에서 사랑하겠다는 것이 이것이 다 거짓말인줄 아시죠 라고 드러나더라 말이죠.

 

그럼 평화는 물 건너 간 것일까요?

 

이렇게 완전히 야단 났다 말이죠. 절단 났다 말이죠.

완전히 잃어버려야 그 뒤에 오시는 것을 보자 말이죠.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울었는데

기쁨의 복음이 되더라 말이죠.

즉 기쁨이 아닌 것인 엉터리 평화가 들통나면서 말이죠.

 

외인이였고 손(손님)이였는데 이제는 그렇게 동떨어진 자가 아닌

하나가 된 것이다 말이죠.

 

인간이 예루살렘을 사랑해 버리면

오히려 막힌 담이 더더욱 세워져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원수처럼 사단의 회처럼

완악함의 수건을 벗지 않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그런 의문의 것을 자랑하고 내세울꺼다 말이죠.

 

막힌 담이 허물이 지기는커녕 더더욱 높이 높이 세우는 꼴이다 말이죠.

 

(2:11, 개역)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2:12, 개역)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9, 개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20, 개역)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21, 개역)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2, 개역)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오히려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보여줌에 있어서

막힌 담을 허무는 평화 사랑을 주님께서 보여줌으로 인해서

주님 쪽에서 넘어오심이라는 화목제물

곧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이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말이죠.

 

오늘 내용 벌써 다 끝났네요 ㅋㅋㅋ

 

자 그런데 오늘 시편 122편을 보니

왠지 아가서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안달이 나서 사랑하겠다고 달려드는 내용처럼 말이죠.

 

우리는 사랑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술람미 여인처럼 저 솔로몬 양반이 왜 저럴깡 ~~~

 

결국 시편 122편을 문자로 보면 내 쪽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할려고 하는 거꾸로 오독으로 보는 거다 말이죠.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하고

예루살렘에게 평화를 빌어야 하는 식으로 말이죠.

 

실제로 유대인은 그런식으로 봤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들도 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고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라

시온을 사랑하라 라고 말이죠.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서는 즉 주의 인자하심에서는

우리는 예루살렘을 미워하고

시온을 미워한 마음을 들통나더라 말이죠.

 

이 갭을 무슨 수로 좁히죠?

 

마침 오늘 어머니께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 아내 사라가 웃었다 라고 하나님이 말했다 말이죠.

그런데 사라는 안 웃었다고 합니다.

 

어허 웃었다니깐

 

어허 안 웃었어요

 

속으로 웃었다고 치지만, 즉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겉으로는 표출이 안되었다는 주장이다 말이죠.

 

그래서 안 웃었다니깐요.

 

어허 웃었어

 

자 여기서 제가 어머니께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어떤 시근 없는 남편이 아내를 웃게 해 주겠다고 개그를 칩니다.

웃끼는 행동을 했다 말이죠.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시근없는 행동을 받아줄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아이고 굶어죽을 판국인데

그런 웃끼는 행동을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말이죠.

 

그러니 안 웃는 겁니다.

기가 차 잖아요.

 

맞죠 어머니 기가 차죠?

그래

 

결국 이 웃음의 의미는 곧 복음의 의미 기쁜소식 또는 주의 인자하심 또는 오늘 평화의 의미는

 

비웃었다 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의미이다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비웃음입니다.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쁜소식이다 말이죠.

치 피 흥 이다 말이죠 싫어했다 말이죠.

아름다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다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비웃은 것 맞다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러든 말든 예수님 쪽에서 남편 쪽에서

웃끼게 하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슬픔이어도 슬픔 대신 희락을

아무리 잿더미 이어도 재 대신 화관을

아무리 근심 이어도 근심 대신 찬송을

 

주님 쪽에서 넘어와서 퍼붓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웃음 이다는 겁니다. 곧 이삭이다 말이죠.

 

이삭이란 비웃음을 유발케 해서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웃음이란 예수님 쪽에서 부여하는 것이지

내 쪽에서 긍정적 마인드 또는 웃음치료 등등으로 갖추어서 나오는게 아니다 말이죠.

 

정작 우리는 미워했고 비웃었다 말이죠.

그 바탕을 깔고서 오는 것이 이삭이라는 웃음이다 말이죠.

웃음아 웃음아 라고 부를 때 마다

나는 실상은 비웃었단다 비웃었단다 라는 것이 이삭을 부를 때 마다 깔려져서 불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회개의 달인이 될 필요도 없이 그냥 회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니다 말이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그럼 죄인인 우리는 이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을 부를 때 마다

저절로 회개가 깔리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그게 무슨 놈의 회개냐 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회개 이다 말이죠.

회개의 달인들로부터 무시 당하는 회개가 자동적으로 된다 말이죠.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늘 곧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게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된다 말이죠.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겁을 먹었죠 한 밤 중에 천사들이 막 나타나서 찬송을 하니 말이죠.

 

(2:8, 개역)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2:9, 개역)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2:10, 개역)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11, 개역)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2, 개역)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13, 개역)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이 때에 평화를 빌지도 않았는데

평화를 강제로 입혀짐을 당함으로써

평화를 찬송하는 천사들의 무리에 졸지에 참여케 됨으로써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보게 되더라 말이죠.

 

이 아기 예수가 표적 이 된다는 겁니다.

 

(2:11, 개역)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어떤 표적? 구주 이다는 겁니다.

구세주 즉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뭐에서? 죄에서 구원할 자

즉 죄와 전쟁을 벌려서 승리를 해 평화를 이룰자이다는 겁니다.

 

(122:5, 개역)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판단의 보좌 즉 심판자 이다는 거죠.

구원자란 동시에 심판자입니다.

죄를 심판하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죠.

이 심판의 보좌가 다윗 집의 보좌에 두셨다 말이죠.

 

그러니 예루살렘은 무조건 이 평화를 이룰 수밖에 없다 말이죠.

무조건 사랑 곧 기쁨이 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런데 가짜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오히려 이 희년을 거부한다는 것이 앞의 글에서 자주 언급했습니다.

 

괜히 거부하는 바람에

기다려봐 내가 진짜 평화인지 아닌지 보여줄게 라고

주님의 전쟁에 이 십자가 전쟁에

주의 인자하심의 전쟁에 다 말려들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실로암 소경을 앞장세우니까

졸지에 예루살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미워했고

시온을 미워했다는 것이 들통나 버렸다 말이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다 찬양하라 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찬양을 싫어했다 말이죠.

 

그러니 어머니께도 설명했듯이

진짜 웃음을 곧 이삭을 상상도 못했던 이 이삭을 준비한 이 기쁨 이 웃음 이 복음을 외치실 때

 

정작 우리는 비웃었고 싫어했고 미워했다는 것이 들통나야

내 쪽에서 만들어낸 예루살렘 사랑 시온을 노래부르고 내 쪽에서 이삭을 생산한게 아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전적으로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퍼붓는 웃음이지

내가 수긍해서 또는 믿숩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다 지키겠습니다 라고 해서 나온게 아니다 말이죠.

 

이 단절성이 바로 성령의 일이다 말이죠.

이 단절성을 모르면 다 육적인 일일 뿐이다 말이죠.

절대로 나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나올꺼다 말이죠.

 

제발 배반 하세요 배산해서라도 내 쪽에서 뭘 해도 다 죄임을 알아라 말이죠.

 

주님 쪽에서 웃음 곧 이삭을 미리 준비하시고 퍼붓는 웃음이기에 우리는 피 치 흥

뭐 나는 불임여성이고 남편은 100살이 넘어서 더 이상 생산이 안되는데?

왜 자꾸 집요하게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라고 하는지

약속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야 라고 속으로 웃었다 말이죠.

 

그것을 주님은 잡아내시는 겁니다.

거봐 거봐 웃었잖아 라고

상상도 못한 이삭을 주시는 겁니다.

 

결국 이삭이라는 원인 없는 결과를 퍼붓기 위해서

이런 시근 없는 웃끼는 행동을 주님께서 하신거다 말이죠.

 

누가 복음 2장을 방금 보니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쁨이 오고 희년이지요.

또 평화가 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내용들과 사도행전 그리고 그 뒤의 역사를 보면

전혀 전혀 평화롭지 않아요.

오히려 더 요동케 되고 시끄럽게 소동이 벌어지고 오히려 더 전쟁이 가중화 되는

혼란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게 평화래요

졸지에 복음 기쁜소식 때문에

졸지에 전쟁이 개시 됨으로써

개시 됨 자체가 이미 완료이다는 겁니다.

 

이미 이삭을 준비해 놓고서 주님이 자꾸 꼬투리를 잡는 겁니다. 너 웃었지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난 안 웃었다 라는 나의 정당성 나의 그런 시근없는 행동에 동참하지 않겠다 라는

나는 불임입니다 나는 이미 단절된 100세 넘은 남편의 아내입니다 라는 그런 인간 쪽에서의 계산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쳐들어 오는

처음부터 이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미 완료된 평화를 주시는

그 웃음이 바로 이삭이다 말이죠.

 

우리가 원해서 달음박질 해서 나오는 것이 이삭이 아니다 믿음이 아니다 말이죠.

믿음은 그야말로 전혀 믿은적이 없는데 믿겨지는 것이 선물로써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기쁜소식의 특징입니다.

나는 싫어했고 전혀 기뻐하지 않아서 비웃었다 말이죠.

 

이것을 짝으로 이것을 구원자로써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이 죄인은 구원자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이삭이라는 웃음을 기쁜소식을 부를 때 마다

자동적으로 회개가 됩니다.

 

그런데 정작 회개의 달인들은 아무리 회개를 해도 회개치 않는 겁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노라

 

천국은 바로 이런 우리의 속내를 깨면서 들어오는 것이다 말이죠.

이 전쟁이 아니면 이 심판이 아니면

우리는 죄인인줄 알길이 없이

 

그저 번제와 제사로

예루살렘을 사랑했노라

시온을 사랑했노라 라고 우길꺼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주의 인애와 자비 앞에서는

상한심령이 아닌 자로 들통나 버리는 겁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모르게 되더라 말이죠.

구원자로 안 보더라 말이죠. 예수님을

심판주로 안 보더라 말이죠.

 

그러니 예루살렘에 괜히 사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한다면

다윗의 집의 보좌를 둔 심판의 보좌를 둔 이유는 전혀 모르더라 말이죠.

 

? 번제와 제사를 드렸기에

괜히 드리고 괜히 예루살렘에 살고 괜히 예루살렘을 사랑했기에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주께서 사랑하사 화목제로 아들을 주셨다 말이죠.

이 아들이 아니면 평화란 없어요.

죄를 번제와 제사로 해결할수 있을까요?

택도 없다 말이죠.

그 의문의 반복을 왜 쓸데 없이 드리냐 말이죠.

남 용서 7번 할게 아니라

 

나는 사랑이 없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을 사랑 한 적 없습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평화를 빈 적이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제가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자입니다 라고 해야하는 판국이

 

오히려 기뻐하심을 입은 자 에게 평화가 덮쳐지더라 말이죠.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태어나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아무리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져서

평화가 지금 현재 2017년 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늘 시끄럽고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전쟁이 제일 많이 반발하고 있다 말이죠.

한반도는 거기에 비할수 없다 말이죠.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다 말이죠.

 

그런데 무슨 평화 입니까?

 

결국 평화를 빈자 예루살렘을 사랑한자가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자

평화를 입은자

예루살렘을 사랑하신 자의 긍휼을 입은자들은 다 받을 것 다 받았다 말이죠.

 

그저 남은 것은 억지로 예루살렘을 사랑한 자는

전쟁의 마침이 없는 가까 평강 속에서

그 땅만 차지하고 억지로 평화 평화를 외치고 있다 말이죠.

 

평화를 입음 당하는게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음 당하는게 아니라

 

자신들이 기뻐할려고 억지로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살고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있다는 티를 팍팍내고 있더라 말이죠.

마치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바리새인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부자청년처럼

껍데기는 그야말로 완벽한 믿는자인데

껍데기를 확 벗겨 버리는 예수님 앞에서는

사단의 회로 들통나는 겁니다.

 

절대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더라 말이죠.

 

오히려 차라리 주여 나는 사랑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자에게

주님이 사랑을 입혀 주신다 말이죠.

그럴 때 그 사람은 억지로 예루살렘에서 살지 않아요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에 살아도

시온산에 살지 않아도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처럼 시온에 살지 않아도

 

시온이 덮쳐지고

예루살렘이 덮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시온 되신 예수님

예루살렘 되신 예수님

참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이

 

이삭처럼 웃음을 주시고자

주의 인자하심 곧 자기 자신인 화목제물을 주시고자

 

미움 받는 모습으로

십자가라는 표적으로 오신거다 말이죠.

 

이 주님을 과연 심판주로 볼수 있을까요?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자가 구원자이듯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죄와 전쟁을 벌려 나의 죄를 이기시는 분이 진짜 평화를 이룰자 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평화로 안 보이는 자는

아무리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살아도 사랑해도

지금 현재 까지 예루살렘은 전혀 평화가 없는 도시로 남아있을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괜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고

그 장소에서 구원이 이루어질것이다고 믿고 있다 말이죠.

 

마귀들이지요.

 

결국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이 마치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신부로써 표현되었는데

그래서 아가서 같다고 했지요.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해서 자꾸 전쟁을 한다 말이죠.

그것이 시기와 질투이다 말이죠.

죄에 대해서

원수에 대해서 질투하고 시기를 해서 전쟁을 벌려서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환자로써 죄인으로써 심판해 주세요 수술해 주세요 할 판국인데

자꾸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땅을 차지하면 평화가 되는 줄로 알고

난 수술이 필요가 없는 자입니다. 저 환자 아닙니다 라고 하니

괜히 예루살렘에 산 거다 말이죠.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괜히 다니는 겁니다.

교회 사람들이 이런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똑같아요.

회개의 달인 번제와 제사의 달인 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정작 교회라는 죄인은 없어요

오히려 가짜인 의인들만 교회를 다 장악하고 있는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죄인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없다 말이죠.

 

괜히 교회를 성화론자들이 다 장악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개혁주의자들이 교회를 다 장악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해본들 평화가 없는 예루살렘처럼

성화된자를 교회에서 본 적이 없어요.

개혁자를 교회에서 본 적이 없어요.

다 뜬 구름 잡는 헛된 망상만 집어넣는 종교마약 집단최면 뿐이더라 말이죠.

 

그런 모호하고 미흡하고 의문의 것을 외칠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또렷하면 된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꼬시냐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는 이제 됐꼬 자꾸 그 이후에 뭘 해야 할 것이냐 라고

자꾸 뭘 해야 한다고 덧붙이더라 말이죠.

 

이 십자가의 용서가 얼마나 풍성한지 모르고

우리 쪽에서 뭔가를 자꾸 해야

방종치 않는다 라고 사기를 치니까

다 그 말이 수긍이 되니 다 넘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수십년 수백년 수천년 지나도

평화가 없어요.

 

자기들도 알아요

그럼 뭐만 남느냐

말도 안되는 의문의 것만 남아요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라는 것만 남아요.

그런 의문을 왜 남기냐 말이죠.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인간쪽에서 할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예루살렘을 사랑했다

시온을 사랑했다

라는 것만 형성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교리이고 신학이다 말이죠.

 

괜히 교리가 괜히 신학이 있는 바람에

또렷한 십자가의 피 흘리심 보다

쓸데없는 의문의 것인

마침도 없는 것으로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게 가로 막고 있다 말이죠.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껍데기는 완벽하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알맹이는 없어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렇게 된 원인 없는 결과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루살렘을 사랑할려고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시는 참예루살렘 성전이신 예수님을 싫어했다 말이죠.

그래서 끝까지 끝까지 원인 있는 결과로

자기가 예루살렘을 사랑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평화는 없어요.

 

평화 곧 예루살렘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예루살렘을 한번 날려 보자 말이죠.

 

예루살렘을 허물어 보자 말이죠.

 

3일만에 다시 세워지면 진짜 예루살렘이고요

3일만에 다시 세워지지 않으면 가짜요 인간의 손으로 유지되는 예루살렘이다 말이죠.

인간이 억지로 예루살렘을 사랑하고자 하는 문자를 지키고자 하는 의문일 뿐이다 말이죠.

 

진짜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죄를 대신해서 화목제물로 오신 분이다 말이죠.

 

그 분이 참예루살렘으로써 나의 가짜 예루살렘 됨의 허물을 다 덮어주시는 겁니다.

 

백날 우리는 예루살렘을 7번 사랑한다고 아무리 실천해도

정작 거짓이디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등돌리고 돌아서 가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한 것이 맞지요? 라고 했는데

그럼 전재산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니까

사랑한 게 아니라 미워한 것이 들통나 버린 겁니다.

 

도리어 우리는 예루살렘을 사랑한 적이 없이, 또는 예루살렘에 산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예루살렘으로부터 770번 용서함을 받음으로써

십자가에서 예루살렘을 사랑을 다 이루심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기뻐하심을 입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 내용아 마태복음 25장의 종말비유 3종세트에서 종말의 현상 곧 성전에 올라갔을 때 부르는 노래 라는 사건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나옵니다.

 

(25:32, 개역)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25:33, 개역)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5:34, 개역)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5:35,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25:36, 개역)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37, 개역)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25:38, 개역)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25:39, 개역)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25:40, 개역)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5:41, 개역)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25:42,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25:43, 개역)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25:44, 개역)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25:45, 개역)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6, 개역)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그 완성이 그 평화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로 다 이루심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평화를 다 이루신

막힌담을 다 허무신 예수님의 피흘리신 인자하심 때문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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