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의 노래(요나의 기도)와 구원은 여호와께로 (시편 130)

선지자의 노래 :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난 구원자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
130: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130:2, 개역)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3,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130:4, 개역)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130:5, 개역)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130:6, 개역)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30:7, 개역)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130:8, 개역)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2:1, 개역)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2, 개역)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3, 개역)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2:5, 개역)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2:6, 개역)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7, 개역)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개역)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개역)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2:10, 개역)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오늘 시편
130편을 보니까

요나의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글 시편 123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미 완료된 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곧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누심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선지자 이여도

말로만 구원은 여호와께로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기능적으로 발휘되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이기 때문에

선지자인 요나 자체를 바다 깊은 곳에 빠뜨리는 겁니다.

즉 주의 눈물을 모아서 주의 병에 담기 위해서입니다.

(합 3:1, 개역)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합 3:2,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3, 개역)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합 3:4, 개역)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합 3:5, 개역)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합 3:6, 개역)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합 3:7, 개역)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합 3:8,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합 3:9, 개역)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합 3:10, 개역)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합 3:11, 개역)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합 3:12, 개역)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돌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합 3:13,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합 3:14, 개역) 『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합 3:15, 개역)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비록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고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떼가 없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즉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즐겁다 라는 이미 완료된 것 때문에

일부러 의도적으로 앞의 무화과 나무

포도 열매 모조리 없애 버리는

잃어버림을 받게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선지자라는 존재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선지자의 기능으로써

완료되었기에

선지자 당사자 요나가 이 없음을 몸소 체험케 되는 겁니다.

그 죽음 속에서 과연 여호와의 이름을 기뻐하나 안하나가 후차적인 숙제풀기 통과시험이 아니라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죽음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 없음 속에 들어가고

잃어버림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 3일 만에 되찾은바 되었기 때문이다 말이죠.

 

물론 사단희 회인 유대인에게는 바로 이 십자가의 지혜가 걸림돌이지만

구원 이미 얻은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영광이다 말이죠.

 

그래서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으면

앗싸 기쁘기 짝이 없다 말이죠.

 

눈물을 주의 병에 담게 되니 앗싸 성공 하면서 기뻐한다 말이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무슨 매조키즘 환자도 아니고 말이죠.

 

어떤 재미있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매직 티팟 (2012) 였던가?

어떤 젊은 부부가 집안 경제가 파탄이 나게 되었는데

어느날 골동품 가게에서 요술램프 비슷한 주전자를 훔치게 되었는데

이 주전자에서 이상하게
아픔과 고통을 느끼는 순간 마다 돈이 뿌려지면서

돈이 생기더라 말이죠.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씀씀이가 커지다 보니

더더욱 고통의 강도가 세져야만 큰 돈을 주전자로부터 얻을수 있고

조그마한 고통에서는 푼돈 밖에 안나오게 되니까

점점점 신체의 고통을 더하기 위해서

팔 다리 다 뿌삿뿌더라 말이죠.

나중에 알게된 팁이 구지 주인공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주전자 근처에서 벌어지면 돈이 막 나오게 되니

고통이 많은 산부인과나 등등을 찾아다니더라 말이죠.

 

그러다 보니 입이 저절로 실수로 발설하다 보니

이 주전자를 찾기 위한 목숨건 강탈전이 벌어지더라 말이죠.

그 영화의 교훈은 마치 마이다스 손과 같은 신화 동화 이야기와 동일하더군요

 

아무튼 인간은 선악을 못 넘어서기 때문에

이 영화, 이 신화, 이 동화는 자기 분수에 맞게 살자 이지만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이미 완료된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이 먼저 있고

거꾸로 눈물 흘리도록 바다 깊은 곳 속에 놓여지며

거꾸로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게 되는 곳에 놓여지며

거꾸로 마음이 가난한 자로 태어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런데 우리는 오독을 합니다.

아니 오해 할 수밖에 없도록 보이게 하는 겁니다.
선악의 법칙으로 보기 때문에 권선징악이라는 욕망에서 못 벗어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것이 강퍅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구원 곧 긍휼의 그릇은

바로 십자가가 완료로써 덮쳐지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박은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로 삼으셨다는 겁니다.


화목제가 먼저 있었기 떄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화목제물이 먼저 있었다 말이죠.
 

우리는 오해해서 우리가 했다고 본 거다 말이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참람죄로 뒤짚어 씌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주의 십자가의 지혜에 말려든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이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아니 기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복음이다 말이죠.


내가 죄인으로 밝혀지는 복음

십자가가 나를 뭘 해도 죄인으로 만드는 것에 못 벗어난다는 복된 기쁜소식

 

내가 가해자로 밝혀진 것

오직 예수님만이 피해자로 드러난 사건

 

우리는 바로 이 십자가의 지혜 이 주의 인자하심 에 못 벗어난다는

여호와의 이름에 의해

이미 구원에 놓여졌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겁니다.

찬양이란 내 쪽에서 할 수 없어서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찬양이 아니라

노래가 아니라

노래 자체를 할 수 없는

벙어리로 밝혀지면서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말이 되나요?

노래 할수 없는 것이 기뻐 찬양하는 벙어리 찬양자이다는 겁니다.

 

이 단절이 기쁜 겁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나무 열매 없으며 말이죠.

 

오늘 시편 130편에

바벨론 포로 귀환하면서 꿈만 같아서 노래 부릅니다.

 

포로 되기 전에는 벙어리가 아니였고

무화과 나무 잎이 무성했고

포도 나무에 열매가 많았다 말이죠.

그때 노래 부른 것은 노래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입이 있으니 당연히 노래 할 줄 알았다고 여겼다 말이죠.

 

그런데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벙어리가 되고

몸뚱아리 박살이 나서

쩔뚝발이 야곱처럼 앉은뱅이가 되고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되고

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포로 귀환 때에

꿈만 같아서

저절로 노래하게 되더라 말이죠.

아니 벙어리가 되었는데

어찌 노래하게 되었을까요?

글쎄요

이 간극을 좁힐길이 없어요

설명이 안됩니다.

그냥 저절로 되었다 말이죠.

 

잃어버림으로 인한 다시 되찾음이

애초부터 있었던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였다는 겁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는 찬양자로 이미 태어났다는 이유로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바다 깊은 곳에 던져져야만 하고

미움 받고 멸시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주의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의 인자하심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파수꾼 곧 선지자는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바다 깊은 곳에 던져져야만 합니다.

말로만 구원은 여호와께로가 아니라

내 입이 존재하고 그 입이 존재한 뒤에

그 입에서 구원은 여호와께로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구원은 여호와께로다가 먼저 있고

그 뒤에 입이 만들어지고

그 입이 당연히 말하는게 아니라

벙어리로써 마땅히 당위로

벙어리 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여호와께로다 라고 외치는 것이

찬양사건이다는 겁니다.

 

여호와로 기뻐 즐거워 하리라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야 하고

포도 나무에 열매 없어야 하고

우리에 양떼가 없음으로써

 

비로소 찬양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찬양하는 자와 찬양자로 태어난 자와의 차이점

 

곧 완악하고 강퍅한 그릇과 긍휼의 그릇의 차이입니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와의 차이점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는 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미리 격습니다.

바벨론 포로됨을 미리 격는 것이

바로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위해

깊은 바다 속에 던져지는 겁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것이 우는 자가 복되도다 라는

 

주의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차이나게 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진노케 하는 자를 강퍅케 하기 위한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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