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다 와 귀히 입히심 (시편 127편)

 

(사 61:10, 개역)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127:1, 개역)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27:2, 개역)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3, 개역)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127:4, 개역)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127:5, 개역)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127:1, 새번역)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127:2, 새번역)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 / 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

(127:3, 새번역)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다.

(127:4, 새번역)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으니,

(127:5, 새번역)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12:16, 개역)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2:17, 개역)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2:18, 개역)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12:30, 개역)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2:32, 개역)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2:33, 개역)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12:34, 개역)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헛되다 라고 했을때에 단독적으로 헛되다 라는 것이 성립이 될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반대되는 것이 세워질때에 그 반대를 통해서 헛되다가 규정 됩니다.

 

마찬가지로 귀하고 복된 것은 천하고 저주스러운 것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거침으로써 아 귀한 것 맞네 복된 것 맞네 라고 한다 말이죠.

 

시편은 원수가 누구인지를 아직까지도 시편연구가인 성경박사들이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시편 자체로써는 안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와야 이것이 다 비로소 규정이 됩니다.

 

오늘 원수도 나오는데

다윗의 원수도 아니요.

하나님의 원수도 아닌

예수님의 원수이어야 비로소 해석이 되니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 이상 보류될 수밖에 없는

인을 뗄수가 없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원수를 설명할때에

말씀을 나누다가 어머니께서 아기돼지 삼형제와 늑대라는 동화를 잘 모르셔서

중간에 유튜브를 통해서 동화까지 보여드리기도 했습니다.

 

즉 진짜 귀한것이고 진짜 복된 것이고

진짜 헛되지 않은 것이다면

바로 원수

곧 늑대가 후 하고 불었을때에 날라가지 않는 것을 통해서

귀하고 헛되지 않은 진짜 복된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늑대가 등장 해 줘야만 한다 말이죠.

종말때에 든든하게 남아있는 반석만이 진짜 복된 것이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아무리 덤벼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 진짜 복이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종말에 와르르 무너진다 말이죠.

 

솔로몬의 은사는 지혜인데

자신이 누려 보니까 헛되다 라고 합니다.

그럼 이 말을 당연히 무시하게 됩니다.

너는 누려봤으니까 그런 배 부른 소리를 하지

배고픈 우리에게는 황금옷이 얼마나 귀한 줄 아느냐? 라고 따지고

솔로몬의 말을 무시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무시하라고 외치는 헛되다 헛되다 헛되다 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존경한다고 하는데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자들이 유대인인데 바로 시편 127편을 달달 외울 정도로 존경한다 말이죠.

귀히 여긴다 말이죠.

그런데 실상은 귀히 여긴적이 없다 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럼 들통나서 드러나면 감사한데

끝까지 들통나도 나는 귀히 여길 것이다 라고 우기니까

존재를 주장하지

말씀의 기능을 무시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자신은 말씀을 귀하 여기면서 지키고 행하고 실천하고 하는데

단한번도 지킨적도 없고 늘 말씀을 무시했고 말씀을 거부했던 이방인을 코 앞에서

구원하고 정작 그렇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나의 코 앞에서

살진소 금가락지 새신발을 입혀버리면 화가 날까요 좋아서 기뻐할까요?

 

이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이 마음이라는 빈공간에 무엇을 채웠던 것일까요?

 

공중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기르신다고 합니다.

하물며 너희가 이 새보다 귀히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말이죠.

 

귀하다 라고 하십니다. 보물이다 말이죠.

 

들에핀 백합화를 보라 실도 내지도 짜지도 않았는데

솔로몬이 입은 영광스러운 옷 과 족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이 꽃 보다 못하다 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귀히 여기는 것은

우리가 무시해 버리는 선지자와 같은 이 공중나는 새 그리고 들에핀 백합화와 비교해 보면

썩어버리는 것들인데

그것들을 귀히 여기고 있으니

 

너는 왜 귀하지 않은 썩어냄새나는 것을 보물이라고 그것들을 추구하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는 귀한 자인데 왜 썩어버리는 것을 칭칭 몸에 가득 채우냐 라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살펴봤지요.

일곱 교회는 그야말로 들에 핀 백합화 같고 공중 나는 새와 같은데

그 반대인 사단의 회 인 유대인의 모임은 쓸데 없는 썩어지는 것들로 몸에 칭칭 감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망하십니다.

 

(3:17, 개역)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여기서 유대인은 그냥 하나의 민족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대표성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유대인의 행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2:9, 개역)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3:9, 개역)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우리가 유대인을 대표성으로 삼은 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 일방적으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하셨듯이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를 알아야 하니까 말이죠.

그런 완벽한 인간들에게 무시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차이성이

바로 존재가 아닌 기능이니까 말이죠.

 

그들 유대인의 손에서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이어야만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머릿돌 이니까

괜히 그들을 세운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시편 127편을 본 이상

우리는 이 유대인의 모습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고

사도바울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그 과정을 거침으로써 귀한 것과 헛된 것의 차이를 알수가 있는 겁니다.

 

그럼 유대인들이 도대체 이 창고에 무엇을 채웠을까요?

물론 그들은 때려죽어도 썩을 것을 채웠다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넣었다고 봤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귀한 것을 넣었다고 우기는 유대인들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귀한 것이

담겨졌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입으로 자백할 수밖에 없는 귀한 것이라서

반박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정도로 차이나는 귀한 것인데 바로 십자가입니다.

창고에 유일하 귀한 것이 십자가 곧 주의 인자하심인데

유대인들은 왜 이 귀한 것을 창고에 넣을 수가 없었을까요?

그리고 반박을 왜 하지 못할 까요?

 

물론 가짜 유대인 혈육적인 유대인 말이죠.

진짜 유대인은 혈통으로 나지 않은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은 하나님께로 난 자

오직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

그 유대인이 바로 개같은 이방인이였고
오히려 유대인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말이죠.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진짜 유대인은 예수님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모시는 자입니다.

 

즉 이 말은 창고에 썩어질 것들을 가득 채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탈탈 털려서 썩지 않을 것을 입히움을 당한 자 가 진짜 유대인이다 말이죠.

그 예가 다윗이고 베드로이고 사도바울이다. 말이죠.

심지어 24장로도 사도들도 다 그러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짜 유대인인 곧 사단의 회는

이 간극의 빈공간에 엉뚱한 것을 끝까지 채워서

누가 외부에서 탈탈탈 털어버리는 자가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썩은 것들이라고 알려주는 자도 없고

귀한 것으로 입혀주는 자도 없는 겁니다.

내어버려둠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헛되다 라고 능동적으로 외치는 겁니다.

물론 그 능동성도 헛되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죠.

 

그리고 수동적으로 귀히 입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이 귀한 것은 우리가 무시했고 천하게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시했던 이 꼬끼오가 나를 살려내는 귀한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간극 곧 빈공간에 이 귀한 꼬기오를 채워넣는 겁니다.

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는데 누가 정결한 것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니 이 수동적인 불의한 재물 곧 십자가에 복종하는 겁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솔로몬이 성전에 올라가서 이렇게 외칩니다.

즉 완료를 외친 겁니다. 예수 안에서 말이죠.

무엇을 외칠까요?

능동적으로 모든 것이 다 헛되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완료된 결과가 덮쳐버렸기 때문에 외치는 겁니다.

완료가 덮쳐지지 않으면 헛되다 라는 것을 외칠수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헛되냐?

사람의 수고가 헛되다 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세우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되다 라는 겁니다.

결국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오늘 대통령이 세워졌는데

그것도 헛되다 라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 헛되지 않냐? 라고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 납득이 가는 겁니다.

무엇이 헛되지 않은가? 여호와께서 세우는 것이 헛되지 않은 겁니다.

그럼 여호와께서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수고가 왜 헛된가?

 

(127:1, 개역)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파수꾼의 기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성실하게 지키고 사수하는 자입니다.

전쟁의 상황에서는 군인인거죠.

 

이것이 밑에 구절에서 이어집니다.

 

(127:2, 개역)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127:3, 개역)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사람이 일찍 일어나서 일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됨에 있어서

상대적인 여호와의 파수꾼 기능은 바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데

이 잠을 통해서 자식이 상급으로 기업으로 주어지는데

그 자식의 기능이 바로 파수꾼의 기능인

 

(127:4, 개역)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127:5, 개역)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127:5, 현대인) 그런 화살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가 법정에서 자기 원수를 만나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127:5, 현대어)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한 이는 얼마나 복되랴. 재판받는 자리에서 원수를 만난다 해도 그는 결코 부끄러움 당하지 아니하리라.

 

전통 곧 화살통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해서

원수와의 싸움에서 미쁜 든든한 화살과 같다는 겁니다.

 

종말때에의 반석이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

모래위에 지은 불안 불안한 집이 아니다 말이죠.

 

바람이 후 불어도 끄덕 없는 기능

그래서 돼지 삼형제와 늑대 이야기를 들려준 겁니다.

늑대가 바람을 후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기업

 

이것이 두 형제가 무시했던 막내 돼지가 지은 벽돌로 만든 반석으로 만든 집이다 말이죠.

 

이 집을 주시겠다는 것이 여호와가 세우시는 집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참성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짖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의 손으로 세우는 집은 모래 위에 짖는 집이라서

종말때에 후 하고 불면 다 날라가는 겁니다.

 

인간이 왜 이 창고에 썩어지는 것을 귀하다 라고 채우느냐?

종말때에는 아무도 세워지지 않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헛되다 라고 외쳐야 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헛되지 않는 것은 뭔데?

 

그 헛된 것이 허물어진 그 터 위에서 세워지는 겁니다.

바로 성전을 허물고 다시 3일 만에 세워지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 예수님이 세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의문의 반복에서

썩어 냄새나는 짖을 멈출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워지면 드디어 수고를 멈출수가 있습니다.

 

나의 구원은 헛되고 썩어지는 냄새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 되면 드디어 게임 오바입니다.

 

이 귀한 예수님의 구원을 아무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이 귀하거든요.

나의 구원은 백날 구원되어본들 썩은 것인데도 말이죠.

헛된 것인데도 말이죠.

 

사람의 구원이 헛되거든요.

 

그 공든탑을 허물어야

예수님의 구원되심이 귀하디 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을 본 자가 바로 솔로몬이다 말이죠.

 

파수꾼의 노래 곧 솔로몬의 노래는

종말때에

적들이

원수가 쳐들어 왔을때에

유일한 반석은 무엇이냐 라고 외치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 떼가 없어도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리라

 

즉 종말때에 유일하게 죽지 않는 것은

딱 하나

주의 인자하심만 남는 겁니다.

 

곧 정금 같이 나온다 말이죠.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나온다 말이죠.

 

(23:10, 개역)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23:11, 개역)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23:12, 개역)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23:13, 개역)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23:14, 개역)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23:15,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23:16, 개역)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23:17, 개역)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1:20, 개역)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1:21, 개역)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1:22, 개역)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결국 욥도 오늘 시편 127편 기자인 솔로몬도

어디에 해당 되는 자 입니까?

 

귀히 입히심을 입은 자 입니까?

아니면 귀한 것을 창고에 가득 채운 자입니까?

 

솔로몬은 솔로몬의 영광의 옷을 입으면서 헛되다 라고 외치면서

본인 조차도 귀히 입히시는 들에 핀 백합화를 찬양하는 겁니다.

 

모순이고 역설적이지요?

 

솔로몬의 영광의 옷을 입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는 생활을 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이지요.

 

정반대로 사치 속에서 살면서 이거 다 헛되다 라고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전도서 잠언 등등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처한 환경 보다

저 공중 나는 새가 부러웠으면

헛되다 라를 것을 외치기 위해서

헛됨 속에 있어야 했냐 말이죠.

이게 겸손 아닙니까?

 

존재가 아닌 기능인데

우리는 솔로몬의 기능은 하나도 안 부럽고 원치도 않고

솔로몬의 존재만을 부러워 했다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과연 솔로몬이 부러워 했던

지금도 수시로 공중에 나는 새를 봐도 하나도 안 부러워 하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될까봐

무시 당할까봐

더더욱 솔로몬의 썩어질 영광을 추구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원수를 만났을때에

곧 종말때에

아무런 쓸모 짝도 없는 벌거벗은 모습이 되는

반석은커녕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아무런 보호막이 될 수가 없는 것들이다 말이죠.

 

박그네를 보세요

그동안 그렇게 수많은 황금으로 치장을 해도

종말 때에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겁니다.

 

누가 입혀 주는 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변호사가 달라 붙어도 오히려 등쳐먹고 갈 뿐이다 말이죠.

 

귀히 입혀 주시는 자 없으면

다 헛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종말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계시록을 통해서 일곱 이라는 허물어버리는 것을 퍼부었을때에

아무도 일곱이라는 다시 세워주심이 없기 때문에

수치를 당하는 겁니다.

 

일곱이 없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세워주시는 예수님이 없는 겁니다.

솔로몬은 이 예수님을 보고 외치는 겁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당당히 외치는 겁니다.

종말때에 수치를 안 당할 이름이 누구냐 라고 말이죠.

 

이 이름으로 모으기 위해 일곱을 퍼붓는 겁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퍼붓는 겁니다.

다 헛되다 라고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럼 다시 세워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곱 교회입니다.

종말 속에서 유일하게 다시 세워지는

미쁘신 반석 되시는 주의 이름에 의해 귀히 입히움을 당하는 자

거룩한 흰옷으로 꽃단장을 입혀주시는 신부 옷을 입은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신랑 되신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솔로몬은 그래서 신부로써

거룩한 흰 옷 입히움을 입은 신부로써

신랑의 수고로 당당히 외치는 겁니다.

 

헛되고 헛되니 다 헛되도다 라고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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