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외치는 독수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 (계 8: 7-13)

 

 

(8:7, 개역)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8:8, 개역)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8:9, 개역)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8:10, 개역)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8:11, 개역)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8:12, 개역)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8:13, 개역)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사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부제를 달면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외침이 됩니다.

 

구약의 참선지자들이 그랬고 세례요한 그리고 사도들도 그러했고

그 노선에서 일곱 천사가 그렇게 외치는 겁니다.

 

(3:1, 개역) 그 때에 침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3:2, 개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요한의 외침을 앞의 글들에서 자주 언급했지요.

평탄케, 평평하게, 예수님이 꽃길로만 걷도록 하겠다는 것이

사실상 평탄키는커녕 퍼뜩 퍼뜩 죽임을 당함으로써

자신이 방해꾼 밖에 안된다는 식으로

바로 바로 무대에서 뒤로 빠져버리는 누락 되는 식입니다.

 

아니 평탄케 한다메? 구불 구불한 그 길을 그대로 놔둔채로

예수님은 고난의 길 그대로 가셔야 하고

정작 본인은 죽임을 당해 버리고

도대체 평탄케 한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말이죠.

평칸한 거 하나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꽃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40:3, 개역)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0:4, 개역)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결국 앞의 글 시편 125편 굽은길 곧은 길에서도 언급했지만

평탄한 길은 없어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이 틀렸냐?

문자로 보시면 안된다 말이죠.

평탄한 길은 없는 길로써의 평탄한 길입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길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인 기능으로써의 평탄한 길인데

길 자체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이 분이 평탄한 길이예요 라고 소개하고 세례요한은 뒤로 빠지는 겁니다.

 

결국 존재가 아닌

모든 것을 기능으로 보시면 모두다 예수님이라는 한 인물로 모아집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존재한다고 보는 겁니다.
존재로써 본 거다 말이죠. 안식의 존재. 
그러다 보니 지키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안 지키는 개같은 이방인 같은 존재가 될 것이냐?
그것만 따진다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하는 존재가 될까요? 8번 용서하는 존재가 될까요?


그런데 안식의 기능은 지키는게 아니라

안식의 주인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그 주인으로 부터 긍휼을 받냐 못 받냐 라는 주인의 기능인 곧 긍휼히 여기심에 촛점이 있는 겁니다.

바로 오늘 말하고자 하는 간극인 주의 인자하심만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그 한 인물과의 관계성이 없으면

안식일 백날 지켜도 소용없다 말이죠.

아무리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도 사단의 회나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성령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라는 것은

회개의 달인들에게는 씨도 안 먹혀드는 소리입니다.

나팔소리입니다.

그럼 회개하는 존재가 아니라

회개하지 마시고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난 기능으로써의

회개라는 기능은 바로 예수님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본인이 평탄케 할려고 길을 뚫어버리는 불도져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반대로 예수님이 없는 길을 새로 만들어

죽음에서 생명의 길을 뚫으신 평탄한 길 그 자체 되심에 있어서

세례요한은 일찌감치 그 길을 미리 앞당겨 그 평탄한 길을 가는 겁니다.

누가 이룬 그 길을?

죽음에 구멍을 뚫어서 구멍낸 길을 누가 걷는다?

세례요한이 걷는 겁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은 퍼뜩 퍼뜩 누락 되어야 한다 말이죠.

나 아니요 저 분이 뚫은 길입니다 라고 퍼뜩 퍼뜩 누락된다 말이죠.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11, 개역)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4:12, 개역)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오히려 예수님이 평탄한 길로써 이 없는 길 이 죽음의 길을 뚫은 길 그 자체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다는 겁니다.

 

(1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부활교리 따로 믿을 필요가 없이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다는 겁니다.

 

평탄한 길 따로 걷거나 만들필요가 없이

예수님 자체가 길이다 라는 겁니다.

 

이 분이 길이십니다 라고 하면 된다 말이죠.

내가 그 길을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길이 알아서 막 달려오는 겁니다.

길이 알아서 다가와요!!

마치 런닝머신처럼 말이죠.

그냥 그 위에 있으면 저절로 걷게 되는 겁니다.

 

결국 제가 지금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이유는

회개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함입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오늘 본문에 화 화 화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회개의 달인들이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또 지킬려고 달려든다 말이죠.

우리가 달려들어서 지키는 성경은 없어요.

정반대로 말씀이 나에게 달려들어서 덮쳐지는 겁니다.

 

만약 회개 해서 구원될 것 같았으면 벌써 했다고

 

다윗이 말했다 말이죠.

 

회개 눈물 기도 금식으로 아이를 살려낼수 있었을 것 같으면 벌써 했다 말이죠.

정반대로 꺽으신 뼈로 기뻐한다는 것은

그 아이의 죽음 자체가

희생이 나를 도리어 살리는

죽은 나를 살리는 부활이 되는 것이다 말이죠.

남 부활 시킬게 아니라

내가 도리어 부활 당하는 것이다 말이죠.

 

결국 회개가 알아서 덮쳐오니까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노래 부르는 겁니다.

 

내가 독수리를 불러낸적 없습니다.

독수리가 떴다 라는 것은

주검이 있다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봐도 멸망하지 않았는데요?

마치 누가 생각납니까?

이스라엘은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고 외치는 거짓선지자가 생각나지요?

그런데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은 망했다 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인데

왜 망했다고 하느냐? 하나님이 보호하는 유일한 민족인데

하나님의 모독하냐 라고 말이죠.

이것이 거짓선지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라고 외쳐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완료된 것이 있기 때문에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의문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말이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에

무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왜 선지자를 보내서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를 외치는 것일까요?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를 외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이 간극 이 3일이라는 간극 속의 주의 인자하심을 보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채우시고자 하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창고에 자꾸 썩어질 것들을 채우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성전을 세우는데 있어서 쓸모 없다고 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그 버림 받은 돌이 머릿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잃어버림을과 다시 되찾음이라는 간극을

이 간극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간극이라는 틈을 일부러 만드시는 겁니다.

오늘도 일곱 천사가 등장하는데

일곱은 예수님의 기능입니다.

일곱은 다 허물어 버리는 기능과

그것을 다시 세우는 일곱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삼분지 일

또는 화 화 화 라고 세 번을 언급합니다.

묵시의 숫자화입니다.

기능이 뭔고 하니

자꾸 무시하는 것들을 무능한 것들 곧

아무것도 아닌 것에 천사들은 의미를 걸고 목숨을 겁니다.

나의 허물을 포착하고자 달려드는 며느리 다말이 도장 도장끈 지팡이에 집착하듯이

예수님이라는 회개 자체가 베드로로부터 세 번 부인을 받아내는 겁니다.

? 꼬끼오 세번이 준비가 되어 있다 말이죠.

평탄한 길이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 자신이 평탄한 길이요

예수님 자신이 회개로써

너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는

예수님 자신이 기도로써 기다리고 있어서

그 기도의 효과를 누려 보라는 겁니다.

너의 기도와 족히 비교도 되지 않는 겁니다.

 

저번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이 계시록을 얼마나 겁주고 협박 공갈용으로 증거했으면 다들 안 볼려고 합니다.

아예 덮어버린다 말이죠.

덮어버린다고 해서 덮어지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달려들어서 연구한다고 해석되지도 않습니다.

말씀이 알아서 우리에게 달려들어서

준비된 것을 주고파 안달이 나 있다 말이죠.

 

베드로에게 꼬끼오를 준비해 놓고서 그 효과를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 만드시는 겁니다.

그 죄인됨이 골프치는게 아니라

세가지 물증입니다.

일종의 예수님이 부여한 자격증입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주시는 겁니다.

골프 백날 쳐 보세요 꼬끼오 절대로 안 주신다 말이죠.
골프로 죄인 될것 같으면 벌써 했다 말이죠.
죄란 골프로도 안됩니다.
인간이 죄를 짖는게 아니라
죄가 인간을 다루거든요. 

 

우리가 무시했던 그 자격증

죄인이라는 자격증을 말이죠.

 

우리가 회개한 적 없습니다.

회개의 달인도 못 받는 회개라는 자격증을

예수님 자체가 회개가 되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덮어버리시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탈탈탈 털려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을 보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주님으로부터 탈탈탈 털리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천사들이 부지런히 탈탈탈 털어버립니다.

즉 잃어버림 당하도록 합니다.

? 다시 찾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세가지 물증

십계명 두돌판 물론 깨어진 두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법궤에 언약궤에

증거궤에 담을려고

일부러 원망할만한 곳으로 인도했듯이

 

오늘 독수리가 뜨는 주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듯이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라고

마땅히 죄인임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뭘 해도 죄인인데 왜 구지 세가지 물증을 잡을까요?

그것은 다시 찾고자 함이다 말이죠.

왜 구지 십자가라는 3일 길의 내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루 만에 부활하면 안됩니까?

왜 삼분지 일을 멸망시킬까요?

 

모든 기능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시키기 위함입니다.

결국 피를 보라 라는 취지인데

우리는 자꾸 계시록을 연구한 자들의 숫자 계산에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그런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자 말이죠.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볼 생각 않고

그저 자기 구원만을 쳐다보라는 거짓영들에게 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우리는 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어딜 감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론들을 거짓영들로부터 알아낼려고 하느냐 말이죠.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사는 관계성을

오히려 일곱 천사들이 보여주는 것인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방법론을 따지더라 말이죠.

 

회개의 달인들이 되고 싶어 하더라 말이죠.

안식일을 괜히 지키니까 안식의 주인을 무시했뜻이

회개의 달인이 될려고 하니까

회개를 부으시는 주님의 취지를 다 무시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회개 이다 말이죠.

 

그러니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것은

회개도 예수님이요 천국도 예수님이지

회개 따로 천국 따로

우리는 회개도 해야 하고 천국도 가여하는 그런 나의 숙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같이 멸망하는 가운데서 아 주님이 회개이셨구나

아 주님 자체가 천국 이셨구나 라는 것을 보는 것이

복된 눈이다 말이죠.

 

주님의 손에 달려 있지

예수님이 숙제 내어서 그거 못 풀면 너 지옥이야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풀면 다 천국가게?

 

예수님이 사랑하심과 상관없이 천국가는 것은 없어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숙제 풀기와 아무런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심 때문에

일부러 아무도 못 푸는 숙제를 주시는 겁니다.

? 풀라고?

아닙니다 그냥 포기하라고

그런데 포기 못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이 의인 될려고 하지 죄인 될려고 아무도 하지 않는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죄인을 만드는 겁니다.

 

죄인이 되어서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게 아니라 말이죠.

 

우리는 버릇이 자꾸 존재가 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나 기능은 오로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겁니다.

나를 말하는 것은 없어요

내 쪽으로 끌어올수 있는 것은 성경에 아무것도 없어요

소위 제가 교회라는 곳을 다니기 시작 하면서부터

모든 주일학교 교사부터 선생 노릇하는 자들

그리고 목사 전도사 교역자들 장로들 집사들

그 어떤 누구도

이런 말을 하는 자를 만난적이 없어요

 

그러니 뭐 이단으로 쫏겨날 수 밖에요.

 

아무도 없어요

 

성경말씀은 그런 말만 하는데

도대체 성경이 서로 다른 것 같다 말이죠.

 

어떤 유치한 이단들은

삼분지 일을 이슬람교 국가들의 국기의 초록색과

일곱인을 떼는 초록말을 탄 천사와 연관 시켜서

지도에서 그 이슬람 국가의 분포가 3분에 1 이라고 해서

그렇게 해석하더라 말이죠.

 

존재의 해석은 그 어떤 것을 끼워맞추어도 안 맞다 말이죠.

기능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완료가 아니라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가 아니라

이미 다 이루어진 예수안에서 다 이루어진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친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이루어진 것이다 말이죠.

그것을 우리는 누리는 겁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외침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다 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허물어지는 것들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 허물어지는 방법을 찾을게 아니라

허물어 짐 속에서

다 허물어지는 것들 속에서

 

유일하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이 누구냐 라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기대를 걸고 있다면

그 인물에 관심이 없다 말이죠.

 

스스로 그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질자가 없어요.

그래서 고맙게도

일곱천사의 나팔소리로 인해

허물어짐을 당함으로써

비로소 썩지 않는 유일한 한 분을 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아니 죽었는데 안 썩다니?

안 허물어지다니

 

말이 되냐?

허물어 졌잖아

죽었잖나 자나 자나 잔나 ~~~

 

반석으로 든든한 미쁘신 분이 다가오면 그 사람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분으로 다가오시면 그 사람에게만 안 죽은 부활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비 하신 겁니다.

준비한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기능 다시 사심과 반석 되심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탈탈탈 일곱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의해

우리의 여리고성이 그 난공불락의 튼튼한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그 든든한 48년간 지었던 성전이 하루 만에 다 허물어지면서

다시 사흘만에 지어지는 겁니다.

 

이 사흘이라는 간극에

주의 인자하심을 준비하신 겁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 곧 어린양의 피를 발라주실려고

모든 것들을 허물어 버리시는 겁니다.

 

출애굽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피의 기능이 어떤 기능인지를 보여주고자

애굽의 장자 곧 미래의 꿈나무인 맏아들을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 심판 속에서 마땅히 같이 죽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문설주에 흠없는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인해서

천사들이 죽이지 않고 패쓰 하고 통과해 넘어가는 겁니다.

 

말씀 잘 지켜서도 아니요

안식일 잘 지켜서도 아니요.

남을 78번 용서해서도 아니요

회개를 잘해서도 아니요

기도 금식 찬양을 잘 해서도 아닌

 

오로지 어린양의 피의 공로

즉 십자가의 죽으심 대신 죽으심 덕분에

천사들의 나팔 소리 속에서도

그 멸망의 진노 속에서도

정금같이 나오는 겁니다.

 

바로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취할이도 여호와 이신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가 찢으셨다가 다시 도로 꿰매주시는

그 찢는 삼분의 일이 찢는 것이다 말이죠.

? 다시 싸메주시고자 하는 간극

 

3일이라는 이 간극 이 주의 인자하심

곧 십자가 때문에

미리 준비하신 피의 공로로 우리를 살리시는 겁니다.

 

얼마나 저절로 노래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꿈만 같을까요?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우리는 찢겨진적도 없고

눈물로 씨를 뿌린 적 없는데

예수님이 찢겨지셨고

예수님이 질고를 지고 눈물 흘리셨는데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불태워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피의 공로를 알길이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지중지 여기는 애굽을 불태워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어린양의 피의 배려를 알길이 없습니다.

세상을 불태워 버리지 않는 이상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를 알길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알려주시고파서

안달이 나서 퍼뜩 퍼뜩 천사들을 부랴 부랴 배치시키는 겁니다.

 

화 화 화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주의 영광을 봐 버렸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발려져 버렸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와 버렸넹

이 회개하라 라는 나팔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흑암의 백성들 개같은 이방인들 사망의 땅과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자들에게만


빛이 비추어지듯이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죄인에게만

희년이 선포 되는 겁니다. 뿌뿌뿌 ~~~~


곧 이 나팔소리 화 화 화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라는

비로소

비로소

아무도 기다리지도 않았고

이 소리를 아무도 원치도 않았는데

비로소

비로소

천국이 덮쳐지는 겁니다.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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