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천사의 나팔와 죄인 만들기 (전리품 만들기) (9:13-21)

 

 

(9:13, 개역)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9:14, 개역)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9:15, 개역)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9:16, 개역)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개역)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개역)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개역)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20, 개역)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개역)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9:13, 새번역)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금제단의 네 뿔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뿔들'

(9:14, 새번역) 그것은 나팔을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프라테스에 매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놓아 주어라"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9:15, 새번역) 그래서 그 네 천사가 풀려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그 해, 그 달, 그 날, 그 때에 맞추어 예비된 이들입니다.

(9:16, 새번역) 내가 들은 바로는 그 천사들이 거느린 기마대의 수는 이억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9:17, 새번역) 나는 이러한 환상 가운데서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화홍색과 청색과 유황색 가슴막이를 둘렀고, 말들은 머리가 사자의 머리와 같으며,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9:18, 새번역) 그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 재앙으로 사람의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9:19, 새번역) 그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는데, 꼬리는 뱀과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달려 있어서, 그 머리로 사람을 해쳤습니다.

(9:20, 새번역) 이런 재앙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한 일들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에게나, 또는 보거나 듣거나 걸어 다니지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9:21, 새번역) 그들은 또한 살인과 점치는 일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이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기는 겁니다.

앞의 글 시편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즉 시온을 미워하는 자에서 말이죠.

 

다윗은 의인이 아니라 전리품이였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다윗은 철저하게 갇혔다는 겁니다.

 

결국 갇힌 곳에서 포로된 곳에서 빼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율법이 가입된 이유도 넌 포로된 자야 라는 겁니다.

그럼 그 포로됨에서 유일한 탈출은 주의 인자하심 이다는 거죠.

그런데 이 주의 인자를 미워하는 것이 바로

번제와 제사 곧 마귀의 사고방식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서의 구원을 자신의 손으로 달성하고자

여기에 보탬이 되는 존재가 바로 구원자로 신으로 모시겠으며

그런 신에게만 번제와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 인간들의 신념, 오기이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바로 갇혀있는 증거죠.

그러니 유대인의 회당 곧 성전들은 그야말로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언급했는데

유대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자꾸 마귀에게 갇혀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서 똑같이

마귀처럼 예수님에게 자꾸 구원자의 조건을 내세운다는 점입니다.

 

구원자의 조건을 따진다는 자체가 바로 마귀에게 갇혀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내세우는 구원자의 조건에 맞는 구원자가 왔다 칩시다.

과연 인간들이 그 구원자를 영접할까요? 아니면 얼마지나지 않아 또 식상해버려서

언제든지 버릴까요?

어차피 버립니다.

인간이 취사선택한 것의 한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귀가 눈에 안보이는 겁니다.

마귀 조차 인간에 내세우는 구원자의 조건에 맞는 구원자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거죠.)

 

마치 우리 조상이 선지자를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은 바로 너희 조상이 그런 말을 하면서 선지자를 죽였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은 자꾸 자력으로 뭔가를 할수 있다고

그리고 잘못된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려고 하는 의향이 있다고

그래서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수 있다고 여긴다 말이죠.

 

그런데 그 자체가 이미 갇혀있기 때문에 나오는 사고방식이요 언어요 다짐이다는 겁니다.

그런 언어로 자신에게 다짐을 한다고 해서 될 문제일 것 같으면

주님께서 오늘 여섯 번째 천사의 나팔을 언급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저런 다짐과 무관하게 펼쳐지는 것인데

 

오늘 여섯 번째 천사의 나팔을 통해서 아 나팔이라는 것은

곧 전쟁의 본격적인 상황인데

이 전쟁 자체가 인간이 어떻게 손 댈수 없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럼 무관하게 따로 너희들은 전쟁해라 나는 따로 다른 곳에 전쟁 없는 조용한 곳에 살란다 라는 것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이 전쟁 속에 다 집어 넣어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아니 누가 예수님 곧 자신의 스승을 세 번 부인하고 싶어 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만들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기 때문에

이 전쟁 곧 마귀와의 전쟁인 예수님의 전쟁에

졸지에 베드로가 중간에 낑기게 된다 말이죠.

그리고서 누구 라는 인물과의 관계성 때문에

누가 이기느냐 라는 전쟁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었었었었 ~~~~ 었 어야만 한다 말이죠.

 

마귀가 구원자의 조건을 따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수제자 꼬라지가 저러고 있으니 마귀가 가만 있겠습니까?

그러니 구원자에게 베드로를 잡아오는 거죠.

당신을 배신한 이 베드로 제가 잡아왔습니다 라고

 

자 제가 제시한 구원자의 조건

즉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베드로 곧 당신을 세 번 부인한 이 베드로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 여기서 마귀를 푸시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황충이를 푼다고 했지요?

애굽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십자가가 곤란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곧 주의 인자하심이 곤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마귀의 활동 때문에

이 십자가가 아랑곳 하지 않고 더더욱 맹위를 떨치는 겁니다.

 

베드로가 뻔뻔한게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이 곧 십자가가 더 뻔뻔하니 그 왕아버지 뻔뻔에 그 왕아들 뻔뻔

그 아비에 그 자식이 된다 말이죠.

 

즉 십자가가 틀렸지요? 라고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는 마귀에게

예수님은 마귀가 따지는 구원자의 조건에 일체 부합되는 것이 없이

오히려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말쫑 베드로를 너끈히 용서해 버리시는 겁니다.

아니 이미 용서했기에

이런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사건이 벌어진 거다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귀는 끝까지 무엇을 따진다?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인간들이 우상을 섬기는 모습들인데

바로 인간의 오기입니다.

 

(9:20, 개역)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개역)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끝까지 나는 번제와 제사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포기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이 세계에서 못 벗어나는 갇혀있는 티를 팍팍 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자꾸

구원자의 조건

나의 구원자는 이런 구원자이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오는 이유입니다.

마귀의 역할은 이 세계는 바로 번제와 제사의 법칙만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탕자의 형 맏아들의 사고방식에서도 나타나고

뭐 당연히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는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나타나고

부자청년 에게서도 나타나고

야곱의 형 에서에게서도 나타나고

애굽왕와 애굽백성은 당연하고요

시온에서 살고 있는 사울왕에게서도 나타나고

특히 예수님 당시의 온 유대 자체가 그러합니다.

그러니 마귀가 유대인을 다 장악한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론이 그 대표적인 예죠.

그러니 교회가 절간이요

불교처럼 교리 플러스 실천인 겁니다.

교리가 있고 즉 구원의 조건인 거죠.

교리가 있고

거기에다가 플러스 실천을 하는 것이 불교이거든요.

유대교와 같다 말이죠.

최고의 종교는 불교입니다.

모든 종교는 불교 따라하기 뿐입니다.

과거는 유대교 였듯이 말이죠.

 

그러니 유대인을 마귀가 다 장악했기에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에 빠져있는 겁니다.

교회가 절간이다니깐요.

 

이 절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는 겁니다.

 

그럼 그런 시온을 싫어하는 자들

곧 시온에 살면서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 속에서

빼내시는 진짜 구원은 뭡니까?

 

전쟁입니다.

 

마리아의 기도

한나의 기도는 전쟁 요청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전쟁 요청을 하는 자가 없거든요.

그래서 부르짖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죄인이기에 빼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이 의인의 세계에서 말이죠.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 자들에게서 빼내달라고 말이죠.

 

마리아를 죽일려고 돌삐든 율법을 지킬려는 남정네들 세계에서 옮겨달라고 말이죠.

 

한나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인애와 자비는 관심 없고

껍데기인 번제와 제사에만 관심있기에

이 이스라엘로부터 빼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기도에서도 나타나듯이

 

부르짖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의 방식이 구약에서는 그야말로 총과 칼이 직접 움직이는 방식으로써

군대가 동원이 되는 방식인 출애굽을 보시면 되지만

 

신약에서는 그런 군대가 등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잠깐 언급하면서 앞글에서도 말했듯이

천사들의 활동에 사도들이 장기알처럼 배치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전쟁도 없고 군사도 없고 군대도 없고 말과 병거들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오늘 계시록에서는 천사들의 나팔 불기로써 나타남에 있어서

사도요한은 환상을 보게 되는 방식입니다.

 

이 전쟁에서 천사들의 활동은 마치 출애굽 전쟁의 모습처럼

인간에게 심판을 퍼붓습니다.

 

어디까지나 환상입니다.

역사 에서는 안 나타납니다.

보이지 않게 후다닥 퍼뜩 퍼뜩 벌어집니다.

사도행전의 그 천사들의 활동을 보세요

역사가가 아무리 포착할려고 해도 기록할수 조차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 계시록에서는 아예 환상으로만 언급 되고 있으니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방식으로만 이미 벌어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애굽에 심판을 퍼붓는 방식처럼

그 심판에 이스라엘 곧 유대인이라고 해서 제외 되거나

다윗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에서 배제된 상태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전히 번제와 제사를 원함으로써

즉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겁니다.

구원 받기 싫다는 겁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아이디어 일 뿐입니다.

부르짖도록 하시고자 애굽왕을 강퍅케 하심도

주님의 아이디어이지

인간들은 그 최고의 국가 애굽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말이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이스라엘 왕인데

왜 벗어나고자 하겠냐 말이죠.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칠수 있는

완벽한 법과 그것을 실천할 다윗 본인이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전쟁을 언급하거나

뭐가 아쉬워서 출 떠나고자 하겠냐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땅이라고 해서

이 세계가 아닌게 아님을

곧 애굽임을

 

전쟁을 통해서

죄인 만들어서

전리품으로 만들어서 빼내셔서

저 이미 완료된 십자가의 세계에

인애와 자비의 세계에 옮기고자

 

이 땅 이 이스라엘 조차도 번제와 제사에 중독되어 있는 애굽임을

다윗에게만 보여주는 겁니다.

혼자서 이스라엘을 향해

구원 전쟁인 출애굽을 언급하고 있으니

왕이여 미쳤군요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목사님 미쳤군요.

십자가 고만 좀 카이소

떠나자 고만 좀 카이소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 합니다.

박그네가 물러가니

살만한 세상이 되어서

소비가 3배나 늘어날 정도이니

이게 나라냐

이런 엉망인 나라도

왕이 바뀌면 달라질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이 가득한데

구지 십자가가 뭐가 필요하냐 말이죠.

예수님 혼자 심각한 겁니다.

 

교회도 있지요

성전도 있지요.

율법도 있지요

모든 구원장치가 있다 말이죠.

메시야만 오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이들 모든 구원장치들이

졸지에 조건이 되다 보니

메사아 조건에

예수님이 단 한 개도 해당이 되지 않더라 말이죠.

 

그런다고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이 취소 되냐 말이죠.

밀어붙입니다.

이런 모든 구원장치 다 밀어붙여요

애굽의 우상 장치들을 다 작살 내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예수님의 피를 미워하고 싫어했으면

시온을 미워했으면

주의 인자하심을 미워하고

번제와 제사를 사랑했으면

 

구원 받기 싫기 때문에

양심적인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는 식인 겁니다.

 

그러니 제발 나의 번제와 제사를 받아라 이 구원자야 라는 식입니다.

이것이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며

시온을 차지함으로써

그 완악함을 펼치는데 있어서

 

주님께서 십자가 전쟁을 통해서 빼내시지 않으면

다윗도 저 갇혀 있는 율법 4배나 갚으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길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번제와 제사가 싫어하는 주의 인자하심을 다윗에게 발라 버립니다.

다윗에게 바르니까

다윗은 그렇게 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왕 답게 하고자 해서

율법의 4 배나 갚으라 했던 그것이

즉 번제와 제사

오히려 진짜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를 죽이는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킨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 인간은 마귀에게 갇혀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은 다윗에게 너가 상대할수 없는 마귀를 푸심으로 인해서

다윗은 이스라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나라에 살면서도 불구하고

난 안되는 구나 도저히 여기서는 안되는 구나

딴 세상이 와야 한다고 졸지에 모든 희망을 접게 되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달라고 구원을 긍휼을 외치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구원자의 조건 따지거나

왕의 조건에 부합되자고 했던

그것이 다 뽀록 나 버리고

정작 나 개인의 존재나 내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전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직접적인 충돌의 문제가

다윗 개인의 문제에서 벗어나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문제로

판대기 자체가 판이 커져서 우주적인

지옥과 천국의 대립상황으로써

그 큰 갭의 간극 문제로써 발생함에 있어서

난 저 세상에 옮기움을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왕이고 뭐고

유대인이고 뭐고(구원받는 약속의 민족)

선민이고 뭐고

 

이거 다 의문의 반복일 뿐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말이죠.

 

?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버렸기 때문에

 

아 이 세상은 번제와 제사 뿐이구나

이 의문에서 벗어나는 자는 없구나

나도 마찬가지이구나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부르짖을때에

 

마치 출애굽 장면과 같죠.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니까

점점점 핍박의 강도가 세 지니까

안 부르짖고는 못 베기니까

부르짖는 겁니다.

 

아니 다윗에게 출애굽때처럼 강퍅한 바로왕이 괴롭히던가요?

사울왕은 이미 죽었다 말이죠.

그런데 왜 다윗은 부르짖을까요?

왜 자꾸 구원 전쟁을 요청할까요?

출애굽을 자꾸 외치는 겁니까?

 

다윗 본인이 갇혔다는 것을 안 겁니다.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에서 본인은 못 벗어난다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번제와 제사의 달인은 되었지만

정작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겁니다.

 

정직 하니까 바른마음가짐의 윤리를 말하는게 아니라

성령이 없다는 겁니다.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즉 저쪽 세계의 옮겨짐을 당해야 할 저 천국의 사고방식은 없고

이 땅의 사고방식 곧 번제와 제사를 드리고

그로인한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고

그에 걸맞는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 의문의 세계에서 못벗어난다는 겁니다.

 

저쪽 세계의 사고방식이 없다는 것을 정직한 영이 없다고

십자가의 예수의 마음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없기 때문에 전쟁을 요청하는 부르짖게 된다 말이죠.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겁니다.

 

출애굽 애굽을 떠날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시온도 있겠다

구원의 조건을 다 갖추었겠다

뭐가 부족해서 이 땅을 떠나고 싶겠냐 말이죠.

떠날 마음이 없으니 부르짖을게 아예 없는 겁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 땅이 이상하고 수상하다는 겁니다.

심지어 기도하는 본인도 수상하다고

다윗은 정직한 영이 없다고

기도하는 영이 없다고

내 기도 조차도 수상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혔으니

누가 날 좀 건져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해야 하는데

 

살려달라는 부르짖음이 없다 말이죠.

그 정도로 세상은 나 다윗에게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악의적이지 않고

호의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짖도록 바로왕을 강퍅케 만들어서

이 땅이 살만한 곳이 못 됨을 부각시킴으로써

악의적인 존재를 풀어서

그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는 겁니다.

 

이 땅이 문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는 곳에

느닷없이 황충이를 풀어서

10가지 재앙을 퍼붓고

그래서 떠나야만 한다는 출애굽을 통해서

천사들이 등장해서

문설주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리지 않은 곳은

가차 없이 장자를 죽여버리는

곧 뱀의 머리를 치는 거죠.

그래서

 

떠나야 한다는

탈출해야 한다는

이 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기움을 당해야 한다고 이 전쟁을 벌리신다 말이죠.

 

그럼 출애굽때는 이해가 되겠는데 왜 이미 과거의 역사가 되었기에

지금 이 순간 다윗에게서의 출애굽은 도대체 어떻게 벌어지냐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때의 출애굽은 십자가라는 사건으로 나타났는데

조그맣게 아주 아주 담백하게 표현되었을뿐

뭐 하나 천지 개벽하는 홍해갈라지는 사건이나

애굽 군사들이 쫏아오는 스펙타클한 블랙버스터 영화같은 장면들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수로 부르짖겠냐 말이죠.

그런데 무슨 수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겠느냐 말이죠.

 

인간의 믿음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부르짖도록 하심에 달린 것이다 말이죠.

 

다윗은 개인이 본인 개인이 졸지에 바로왕이 되어서 벌어진 사건이 되어

우리야 장군 밧세바 동침 이름없는 아기의 죽음이라는 쓰리 희생번트가 있었지만

 

또 베드로에게는 세 번 부인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십자가는 그야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든 인간이 고개를 돌려 버리는 모습으로써

가장 거부했던 것이 가장 가장자리로 자리잡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서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는 자가

졸지에 십자가를 가장 싫어했던 나 라는 인간

하나님의 저주를 가장 싫어했던 인간이

그래서 추호도 떠나고픈 마음이 없던 자가

졸지에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서

이 땅에서 부르짖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왜 나를 선택해 주시지 않습니까?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까? 라는

그 부르짖음 속에서

이 땅에서 저 세계로 옮기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겁니다.

내 손에 의해서 죽임 당한 저 십자가가

졸지에 나를 구원해 주는 십자가일줄

저 세계에 추호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를 저리로 옮기는 것이 구원이다 말이죠.

 

그런 부르짖음인 기도입니다.

분명 바로왕을 강퍅케 하기 전에는 절대로 부르짖고자 한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말이죠.

강퍅케 함으로써 잃어버림 당하게 됨으로써

빈털터리 나그네가 되니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고는 못 배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인자하심이 뭐라고 했습니까?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부르짖게 만드는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전쟁을 발발케 하시는 붙이시는 겁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써만 피 발림으로써만 이 밤을 통과하지

그 어떤 누구도 이 어두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오늘 계시록 9장 여섯 번째 천사의 나팔부는 내용들이

얼마나 무시 무시한 장면들입니까?

그 어떤 누구도 이 어두움 속에서 빠져나올수 없도록

어두움에 갇히도록 하시는 겁니다.

아침에 새벽을 맞이하는 자는

부자청년처럼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인한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 곧 자기 목숨을 나누어주시는 에수님의 피 흘리심 뿐이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가난한자는 소유물이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는

번제와 제사의 세계에서 졸지에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듯이

졸지에 예수님의 눈물 때문에

예수님이 기도 덕분에

번제와 제사의 세계에서 옮기움을 당함으로써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미움 받는 자들입니다.

스데반 집사 본인도 시온을 미워했던 자였지만

성령이 임해서 이제는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지언정

이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시온은 이미 벌써 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들을 자기가 알지 못한다고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세계로 옮겨지는데 얼마나 신났는데

얼굴이 천사와 같다 말이죠.

 

그러니 역사 곧 번제와 제사의 세계에서는

이 환상 곧 묵시의 세계 즉 예수님의 세계인 주의 인자하심이신 시온의 세계를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껍데기 시온 땅에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말이죠

떠날 마음이 없다 말이죠.

시온이 애굽인지 모르니 말이죠.

교회가 강도의 소굴인지 모르니 말이죠.

 

환상 속에서 다 이루어져버린 것이니

번제와 제사의 세계에서는 백날 끌어와 당겨와도

여전히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이 땅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추호도 나오지 않는 것이 기도입니다.

추호도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안들립니다.

자신의 기도로만 다 땡빵합니다.

그 의문의 기도로 대체해서 빈공간을 채우는 겁니다.

 

그래서 정작 우리는 이 기도를 이 땅에서 절대로 꿀리지 않는 삶을 살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 밖에 없다 말이죠

 

어쩔수 없습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갇혀 있습니다.

포로된 입장입니다.

그러니 내 기도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내 기도로는 안 되고

부르짖도록 하심으로써만 되는 겁니다.

떠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도록 만드심입니다.

주님께서 빼내시는 기도가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 세상에서 저 세계로 옮기기 위한 기도를 하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할수 없는 기도를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 하시는 기도만이 옮겨지지

우리의 기도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픈 기도를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왜 벗어나야 하는 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를 푸시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시는 겁니다.

전쟁으로써 빼내시기 위한 구원전쟁 십자가전쟁 피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오로지 피로써만 넘어가고 옮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전리품 개념이 교회요 시온이지

인간이 시온 답게 행해서가 되는 신부된 교회는 없습니다.

계시록 일곱교회의 특징은

24장로처럼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는 그 무리에 함께 했던 자입니다.

역시나 갇혔던 자입니다.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의 피로 그쪽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로 옮기시는

거룩을 입히신 겁니다.

결국 신부된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을 입혀짐을 당한 것이지

부자청년처럼 자신이 직접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켜서 된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전리품이지 자력으로 나올수 있는 거룩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가짜 거룩을 넘어서는 거룩이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으로

신부를 꽃단장 시키는 흰옷을 입히심입니다.

 

부자청년이 백날 해도 흰옷을 입을수 없고 만들 수 없다 말이죠.

그런 가짜 흰옷을 빵꾸멍 내기 위해서 황충이를 푸는 겁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공짜요 은혜요 값없이 베푸신 예수님 자신의 목숨 값이어야 하지

인간의 번제와 제사가 아니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값없이 베푸신 목숨값 곧 화목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화목제 때문에

마귀를 푸시는 겁니다.

마귀가 방해를 놓으면 놓을수록 오히려 십자가는 더욱더 또렷해 지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편승이 되어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마귀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철저한 피조물입니다.

부정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빼앗는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전리품이 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구조인 겁니다.

죄인만들기를 통해서 빼내시는 겁니다.

거룩으로 입히시고자 흰옷으로 꽃단장 시키시고자 말이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눈물 흘린적 없다 말이죠.

예수님이 눈물 흘리심으로 나음은 우리가 입은 겁니다.

예수님이 째찍에 맞으심으로 말이죠.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때에 꿈만 같도다 라고 기뻐한 겁니다.

기뻐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기쁨 자체가 덮쳐버리니 말이죠.

 

우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는 겁니다.

 

근심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찬송의 옷을 입히시듯이 말이죠.

 

그러니 이 나팔 소리가 얼마나 기쁜소리 입니까?

주님의 전쟁이 벌리심을 목격하게 되니 말입니다.

옮시고자 하시는

어떤 누구에게도 벌어지지 않는 전쟁을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느냐

 

그야 말로 합당하기 짝이 없는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전쟁만이 또렷하게 보이는

사도요한에게서의 이 환상은

그야 말로 이미 완료된

출애굽 전쟁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감격으로 누리게 되니 말입니다.

이 구원의 전쟁 말입니다.

 

다윗이 그래서 뻔뻔하게

1초 전만 하더라도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금식하고

기도를 했지만

 

자신에게서 이 아이를 살릴수 없음을 알았다 말이죠.

만약 아이를 살리는 회개 기도 금식 눈물이였다면

다윗은 절대로 인애와 자비의 세계로 옮겨짐을 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번제와 제사로 이 땅에서 여전히 희망을 품고서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왕의 자리로 포기할 필요도 없고요.

이스라엘도 포기할 마음도 없고요

성전도 포기할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살릴수 있었다면 벌써 살렸을 것이다 말이죠.

아이를 살리는게 목적이 아니라

아이가 죽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죽은거다 말이죠.

왜 다윗 본인의 눈물 회개 기도 금식이 통해야 합니까

정작 이름 없는 아이의 눈물 회개 기도 금식 곧 죽음이지요.

이 죽음이 대신 죽음이 죽은 다윗을 살리는 겁니다.

거꾸로 였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는 아이를 살릴수 없다 말이죠.

인애와 자비는 아이가 죽은 다윗을 살리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 못 시킵니다.

구원 시키고자 하면 할수록

예수님을 도리어 죽이는 꼴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러 오신 겁니다.

? 너가 금식 회개 기도 눈물 흘린다는 자체가

이미 번제와 제사의 의문의 세계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구원의 조건을 갖추고자 함이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죽은 나를 살리는 겁니다.

얼마나 뻔뻔하면 죽은 모세가 변화산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 말 한마디만 하고 사라지는 겁니다.

 

주여 죽어 주세요.

 

안 그러면 저는 이 세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본인이 갇혔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럼 모세의 제자라고 우기는 유대인들은 다 갇힌 겁니다.

 

? 마귀처럼 구원자의 조건을 따지니깐요

번제와 제사를 따지니깐요.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니깐요

 

이런 판국이 떠날 마음이 있겠냐 말이죠.

 

십의 이조를 드리는 세계가 악마의 세계인줄 모르는 겁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이 악마의 세계이다 말이죠.

저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귀의 세계이다 말이죠.

 

그 마귀의 세계에서 떠나야 함을 누가 요청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나팔소리가 얼마나 고맙냐 말이죠.

떠나자 떠나자

순식간에 천국처럼 보였던 그 애굽이 지옥으로 변하니

안떠나고는 못 배기도록 부르짖게 만드시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죄인 만드심은 나그네로 만드심과 같이

떠나야 함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미 완료된 약속의 세계인 시온이 다 완료되었기에 말이죠

 

이 예수님의 인자하심만을 쳐다보라고 말이죠.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이 전쟁(나팔), 이 십자가 사건을,

오늘도 매일 매일 터트리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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