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비밀과 배에는 쓰고 입에는 꿀같이 단 말씀 (10: 1-11)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

 

 

(10:1, 개역)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10:2, 개역)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10:3, 개역)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10:4, 개역)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10:5, 개역)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10:6, 개역)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10:7, 개역)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10:8, 개역)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10:9, 개역)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10, 개역)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0:11, 개역)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10:1, 새번역)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10:2, 새번역)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10:3, 새번역)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으니,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10:4, 새번역) 그 일곱 천둥이 말을 다 하였을 때에,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인봉하여라. 그것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10:5, 새번역)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10:6, 새번역)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10:7, 새번역)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10:8, 새번역)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10:9, 새번역)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10:10, 새번역)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10:11, 새번역)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9절에서 먹으라 라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 그 상황

출애굽때 곧 진노가 펼쳐지는데 있어서의 상황인 출애굽이 생각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나를 먹으라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말이죠.

 

즉 탈출할 세상, 곧 떠나야할 세상, 이 땅은 악마의 세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떠나기만 하면 됩니까?

 

네 됩니다.

탈출한다는 것은 차이성이거든요. 다른 곳이 있다는 겁니다.

떠나면 곧 입성이 동시성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것이 동시성으로 작용하지가 않습니다.

갭이 생깁니다. 사이의 간극 말이죠.

졸지에 이 간극 곧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서

광야에서 다 통과하지 못하는 겁니다.

심지어 모세도 통과 못합니다.

반석을 두 번 쳤거든요.

 

주의 인자하심이 태클을 걸어서 광야를 못 통과하는 겁니다.

 

탈출하기만 하면 떠나기만 하면 바로 입성은 따 놓은 당상이 되어야 하는데

떠나긴 떠났는데 졸지에 중간에서 고아가 되어버리니까

놀랍게도

탈출을 무색하게 만드는 도리어 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나 돌아갈래 애굽으로 돌아갈래


애굽 사라졌어 사라졌다니깐 10재앙으로 모조리 다 불태워 버렸다니깐

사라지든 말든 나 돌아갈래

즉 이 말은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떠났기는 떠났는데

떠나면 뭐합니까? 갈 곳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다 말이죠.

그런데 그 코 앞의 15일 길 밖에 안되는 길을

의도적으로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으로 뺑뺑이를 돌리니까

졸지에 40년 동안 헤메는 겁니다.

15일 길을?

 

무슨 미로에 갇혀 버린 겁니까?

 

분명히 약속의 땅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말이죠.

그런데 가까이 가기는커녕 점점 멀어져 버리니까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 도리어 과거로 되돌아 갈려고 한다 말이죠.

모세도 탈락하는 판국에 누가 그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 목적지가 있기는 있었을까요?

가깝기는커녕 완전 멀어져 버리니까

한번도 본적도 없이 다 사라져 죽어버리는 겁니다.

 

왜 이 간극이 이 갭이 건널수 없이 멀어진 겁니다.

앞의 글들에서 지옥간 부자가 간과한 것을 아브라함이 상기 시키죠

너와 나 사이에 큰 구멍이 있어서 나도 너에게 너도 나에게 서로 오고갈수 없는

큰 구멍이 있다고 말이죠.

 

앞의 계시록 글에서

구원이란 이 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기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모세도 탈락했습니다.

넌 누구 제자야 너 예수 제자이지?

실로암 소경아 넌 신참 예수의 제자이지

난 모세 제자야

 

모세도 통과한 못했는데 모세 제자 되어서 뭐하게요?

성화론이란 결국 영웅 뒤에 줄서기죠.

예수를 영웅으로 보게 되면 모세제자이다고 우기는 것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심지어 예수님의 12제자들 조차도 나는 모세제자이다 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였다 말이죠.

 

자 그럼 아무도 구원 못 얻는다 라고

그 동안의 구원의 공식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안 통했다 말이죠.

성화론도 물론 마찬가지이구요.

구원 곧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겨지지가 않더라 말이죠.

출애굽 했던 장정(가장) 60만 명 중 단 한사람도 없었다 말이죠.

유대인도 안 되는 판국에

왜 이 불가능한 구원을

불가능한 채로 계속해서 언급이 되는 것일까요?

마치 율법

참 출애굽때는 아직 율법이 가입이 되지 않았다 말이죠.

아무튼 마치 율법처럼 못지키는 율법

불가능한 율법을 계속해서 언급하듯이 말이죠.

어차피 아무도 못 지키는 율법인데 왜 계속해서 언급하시냐 말이죠.

어차피 구원을 아무도 못 받는데 구원을 계속해서 언급하시냐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결국 율법을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라고 구원 시킬려고 구원을 언급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만약 율법을 지키게 되면 비밀이 아니죠.

만약 모세도 구원 출애굽한 장정 60만명이 구원받으면 그거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요.

비밀이란 안 풀린다는 겁니다.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비밀 그대로, 안풀리는 그대로가 구원입니다.

풀리면 구원이 아니지요.

 

그럼 율법을 왜 줬습니까? 문제를 풀어보라 말이죠.

 

앞의 글에서 다윗은 율법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쳤습니다.

율법대로 실행하는 법대로 하는 재판관 이였다 말이죠.

이거 구원 될까요?

될 리가 없지요

비밀이 아니니까

 

다윗은 포로 되었습니다.

그러니 외부에서 이 포로된 다윗을 빼내어야 합니다.

그 빼내는 것을

다윗을 빼내는 자를 바로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다윗은 율법을 외치는게 아니라

이 비밀을 외치게 되는 겁니다.

 

졸지에 참선지자들이 이 다윗이 외친 비밀을 똑같이 외치게 됩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는 풀릴 리가 없지요.

다윗에게 비밀이 되었는데 비밀을 외치는데

저들은 풀 수가 없으니까 비밀 그대로 증거가 되는 겁니다.

 

마치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와서 예수님께 베드로 내놔라 라고 했을때에

마귀는 오히려 이 비밀을 더더욱 증폭시키는 일에 말려드는 겁니다.

누가 봐도 마귀는 비밀을 풀었다고 생각했다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와 예수님의 관계인 이 비밀을 풀기는커녕

도리어 이 비밀에 영광 돌리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말이죠.

 

애굽왕 바로왕과 애굽 군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듯이 말이죠.

 

도대체 어떤 관계인데 비밀입니까?

바로 죄인과 구원자의 관계

환자와 의사의 관계

의인을 부르러 오심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관계인 비밀이다 말이죠.

 

그러니 비밀로써 구원자이고

비밀로써의 의사이다 말이죠.

 

환자에게는 의사가 신기한 비밀이지

풀리는 의사가 아니다 말이죠.

그건 건강한 자이거나

의사의 기능을 다 아는 환자일 것 같으면 더 이상 환자가 아닌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치료하는 자이겠지요.

이 관계성이 필요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 관계성 곧 비밀이 싫어서 다들 나 돌아갈래 라고 애굽으로 되돌아 갈려고 한 겁니다.

얼마나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싫었으면

너무 너무 싫었으면 되돌아 갈려고 했을까요?

 

흠모할 모양이 없어요.
관계 맺기가 싫다는 겁니다.

비밀이 싫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되어서 다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이죠.

 

오늘날 성화론자들을 보면 딱 그래요

비밀을 싫어해서

성화 될려고 한다 말이죠.

 

아무도 이 관계를 원치 않습니다.

뉘게 나타났냐 말이죠.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도 안 믿었다는 것이 뽀록 들통난 겁니다.

그래놓고 성화를 한다는 둥 다 사기치는 겁니다.

비밀이 싫고

관계가 진절머리가 나서

자기가 직접 나서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성화다 말이죠.

얼마나 비밀이 싫었으면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정죄하고 의인이 될려고 할까요?

 

오로지 예수님만을 위해서 죄인 인자는 없다 말이죠.

오로지 의사만을 위한 환자는 없다 말이죠.

 

비밀인데

풀수가 없는데

왜 그 풀수 없는 답답한 관계를 누가 형성할려고 할까요?

 

그러니 아예 자기 쪽에서 다 풀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이 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기는 구원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고개를 다들 돌려 버립니다.

비밀을 싫어해요

납득이 되는 구원을 해 달라는 겁니다.

조건을 갖추는 메시아가 되어 달라는 겁니다.

자기 투사죠.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나팔은 전쟁 실행입니다.

비밀을 실행하는 겁니다.

풀수 있기는커녕 당하는 판국입니다.

 

다윗처럼 포로된 자를 빼내시는 비밀과의 관계성을

마치 국수 삶을때에 채로 걸러내듯이 걸러내는 겁니다.

 

출애굽 할 때 장정 60만명이 광야에서 채로 걸러내니까 단 한 명도 남아나지 않고

다 탈락 당하는 겁니다.

 

딱 한 사람 구원받은 자 유다지파 갈렙 인데

사실상 없다 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바지자락 붙잡다가 얼떨껼에 딸려온 모세의 빈자리를 대신할 뿐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즉 결국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말이죠.

약속의 땅에 들어갔어도 그들은 다 탈락 당하듯이 말이죠.

그럼 도대체 약속의 땅에 들어갔어도 구원은커녕

맨날 전쟁을 하니

쉼은 어디있냐 말이죠.

안식은 언제냐 말이죠.

가나안 땅 7부족 다 쫏아내어야 안식이다 말이죠.

그럼 또 일곱 부족 다 쫏아내면 안식 올까요?

도대체 숙제가 풀리지 않는다 말이죠.

단계 단계를 넘어갈때마다

모조리 다 실패할 뿐입니다.

단계를 넘어가는 것도 주님이 다 봐줘서 넘어가는 것이지

단 한 개의 단계도 성공해서 넘어간게 아니다 말이죠.

출애굽 초반부터 앞의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 애굽 군사가 쫏아올때에

 

비밀이 외쳐집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그런데 그 비밀 자체가

가만히 서 있기는커녕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기는커녕

원망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있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커녕 구원안되고 애굽 군사들에 의해 다 죽임 당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이게 구원입니까? 아니면 원망해서 구원 안 된 겁니까?

구원 되긴 했는데 왜 원망을 할 수 밖에 없을까요?

이게 비밀이다니깐요.

원망 없이 구원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구원인데

그건 마귀가 심은 생각이고

 

원망하고 구원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배신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비밀이예요

풀길이 없어요

그냥 비밀 그대로 간직한 상태로가 구원이지

비밀을 풀면 그건 구원 안되는 겁니다.

조건 갖춘거지 그렇게 되면 성화론이지요.

불교나 유대교처럼 교리 플러스 실천인거지요.

 

구원은 그야 말로 말이 되면 안됩니다.

말도 안되는데 구원인 겁니다.

 

말 되는 구원 받은자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아 저 사람의 행위는 또는 믿음은 구원 받아 마땅해

주님은 저 사람은 무조건 구원해 줘야 해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경 인물 있으면 말해주세요

 

성경에 나온 인물 중에서도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들 말도 안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

비밀이기에

 

참으로 뻔뻔한 복음입니다.

뻔뻔한 피 죠.

그야 말로 비밀스럽기 짝이 없는

부조리의 끝판왕이다는 겁니다.

 

제대로 율법 지켜서 말씀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 있으면 말해보라 말이죠.

 

오히려 구원은 심판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 심판을 퍼붓습니다.

나팔을 불어 소집명령합니다.

천사들 다 모엿

자 공격

살아남을자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본인이 심판에서 아무도 못 살아남도록 전쟁을 퍼부어 버리고서는

주님이 또 그 속에서 몰래 뒤로 빼돌리는 반칙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것이 피입니다. 그것이 비밀이다 말이죠.

심판이 없는 구원이 아니라

심판 퍼붓고있는 그 와중에서 말이죠.

 

그래놓고서는 죽음이 이들에게 묻지 않았다고

죽음도 피하는 자들이라고 높여 버립니다.

죽음이 안 묻는 자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인간 다 죽음을 통과 못합니다. 통과할 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피를 반칙으로 몰래 발라서

죽음이 묻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묻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이 옳아서가 아니라

이 피가 옳다는 겁니다.

이 피가 비밀이지

그 사람이 비밀이 아니다는 겁니다.

피가 맺는 관계성이 비밀인 겁니다.

 

그 비밀에 마귀는 달려드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십자가의 비밀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십자가는 더더욱 또렷해지는 겁니다.

마귀는 시샘에 배 아파 못삽니다.

그 짖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더더욱 영광스럽게 높이는 짖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 역할만 부여받은 기능이기에 말이죠.

피조물이기에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수 없다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은 비밀입니다.

즉 상대적인 존재에게는 때려죽어도 비밀이 아니다는 거죠.

즉 다른 말로 마귀에게는 비밀 곧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저게 무슨 놈의 사랑이고? 그게 무슨 비밀이고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나 한 쪽 강도에게는 비밀로써 왔기에

서로 비밀의 언어가 오고갑니다.

 

옆의 강도는 때려죽어도 모르는 비밀언어입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옆의 강도에게는 이 비밀언어가 사랑은 무슨놈의 개코

지금 죽는데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예수도 죽는데

죽음 속에서 무슨 놈의 사랑이 꽃피냐

놀고들 자빠졌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죽음 속 일수록

심판 속 일수록

광야 속 일수록

비밀은 더더욱 빛을 바랍니다.

믿음은 더더욱 소망은 더더욱 사랑은 더더욱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로써 주어진 것이다 말이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인간 구원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이유도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대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소견이 반영이 된 것이 일체 없다 말이죠.

 

이것을 다윗이 선물로써 알게 되니까

눈에 보이는 왕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국가

눈에 보이는 성전

일체 거들떠 보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윗의 눈에 박혀 버렸기에

다른 것을 보고 싶어도 못 보도록 되어 버린 겁니다.

 

시시하고 모호하고 의문이고 또렷하지 않으니까

흐릿해서 안 보여서 눈길이 가지 않고

 

또렷하고 명료하고 시원시원하게 밝히 보이는 것만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흐릿하고 모호한 것을 들이대냐 말이죠.

 

그렇다면 일곱 천사들이 펼치는 전쟁실행은 이 흐릿한 것을 뜯어내는 공사를 하는 겁니다.

 

공사 하니까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의 대사가 생각나네요

판데기를 뜯어내는 공사치는 겁니다.

걸러내는 겁니다.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의 것들을 공사치는 겁니다.

 

즉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거꾸로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식으로

역사 속에서는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렸다 말이죠.

 

그럼 하나님의 비밀인 세계에서는 천사들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머릿돌 되게 하고자

오히려 건축자들이 세우고 있는 집을 공사치는 겁니다.

철거하는 겁니다.

 

머릿돌 하나만 남기고자 철거공사 하고자

모조리 다 공사친다 말이죠.

 

그 장면이 오늘 장면입니다.

 

다윗이 율법 네배나 갚으라 라는 것을 건설하고자

쓸모 없다고 버린 그 돌이

머릿돌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말이죠.

 

그러니 다윗은 도리어 자신이 버린 돌로부터 구원 받아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긍휼을 얻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모든 인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인 내가 살해해서 죽인 그 십자가의 예수가 바로

나를 도리어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말이죠.

 

이 관계성을 십자가가 맺고자 함인데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다 말이죠.

직접 죽인 당사자이니까 최대의 인생 오점이 생겨버린 거다 말이죠.

 

그럼 유대인만 그렇고 나머지 이방인인 안그런건가요?

다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은 어떻고요?

다윗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들이 전리품으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에 의해서 말이죠.

 

얼마나 이 말씀의 비밀이 씁니까?

그러나 입에는 답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주의 인자하심이 벌리시는 자작극에

다들 걸러 넘어져 실족케 됩니다.

그럼에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영광이 되는 겁니다.

 

다윗은 의인으로써 건강한 자로써가 아니라

죄인으로써 전리품으로써 이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를 시편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백날 봐도 유대인들은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저주이지

찬양할 꺼리가 되지 않는 찬양깜이 되지 않는 정반대의 것이지만

 

다윗은 이 하나님의 비밀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에 의해서 천사들은 움직이는 겁니다.

이 땅을 공사치고

하나님의 비밀을 머릿돌로써 증거하고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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