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로 되어 있는 시 노래 (시편 131)

 


(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131: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2, 개역)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3, 개역)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131:1, 새번역)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131:2, 새번역)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131:3, 새번역)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성경은 비밀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 경전이 있는데 그것들은 인간이 열심히 연구하여 해석하면 풀이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밀로 되어 있다는 말은

그런 연구의 노력과 해석들을 단절시키는 겁니다.

 

비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심에 있어서

항상 모두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도통 무슨소리인지 모르게 패쓰워드 걸어버리면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길이 없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자 청년이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즉 이 말은 지키고 실천했다는 말은 그 부자청년이 그 율법을 해석 할 줄 알았다는 겁니다.

거기에다가 오늘 본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자고치 않게 혹시 부족하다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 실천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체로 습관화 시켰으니 최적화된 상태이니 말씀만 하소서 당장 지키겠다고 하는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킨 부자청년에게

즉 다 지키고, 다 알아서 행하고, 다 해석할 줄 아는 그 율법실천에

졸지에 패쓰워드를 걸어버립니다.

 

그것도 아주 쉽게 말이죠.

분명 쉬운데

더더욱 율법을 지켜온 자가 아니면 어렵겠지만

분명 다 알고 다 실천하고 다 해석했기에

전혀 어렵지 않는 쉬운 문제인데

졸지에 탁 하고 걸려 넘어져

실족케 되어버리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을 건드렸던 것일까요?

 

예를 더 쉽게 들면

학교 종이 땡땡땡 이라는 노래를 다 안다 칩시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지 몰라서 말이죠.

우리 때는 다 안다 말이죠.

그 노래의 내용과 해석 다 알고 노래 부르는데 실천할 줄도 알고

음도 알고 리듬도 다 안다 말이죠.


그 노래로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했고 백점 만점 받는 누구나 다 알고 백점 맞는 노래다 말이죠.
 

그렇게 잘 알던 이 노래를

예수님이 자신 곧 예수님 앞에서 불러보라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럼 까짓꺼 이렇게 쉬운 노래를 못 부를 리가 있겠냐 말이죠.

모든 국민이 어떤 누구 앞에서 불러도 다 합격 백점 만점인데

아주 어려운 고음이 있는 아이유의 좋은날 3단 고음도 없는 곡인데

다 쉽게 쉽게 부를수 있는 고음도 없는 곡이니


또 늘 자주 불렀으니 쉽다 말이죠.

그래서 불렀는데


딴 사람 앞에서는 무조건 100점 이던 노래가

이상하게 예수님 앞에서는 이상하게 노래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갑자기 이 노래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조차도 모르게 새하얗게 되면서

첫음이 뭐더라 아무리 입에서 음을 찾고자 소리를 내어도 도통 모르겠다 말이죠.

 

부분 기억상실증인가? 그럼 잠시 쉬었다가 마음을 충분히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불러 본다 말이죠.

남들 앞에서는 역시나 잘 나오더라 말이죠.

그렇게 확인까지 다 하고서 잘 나오는 노래부르기를 다 거친 후에

다시 예수님 앞에서 부를려고 하는데

또 갑자기 새하얗게 되면 첫음 조차도 땔수 없을 정도로

곡을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땡 탈락 입니다.

 

그런식으로 부자청년에게 예수님이 그럼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고 했다 말이죠

 

갑자기 새 하얗게 되면서 다 까먹어 버리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율법을 실천했었지? 라고

그렇게 몸에 배였던 그 실천력이 한 발치도 내 딛지를 못하더라 말이죠.

 

그럼 다시 쉬었다가 딴 사람한테 해 보는 겁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도 충분히 나누어 줄 정도로 실천력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다시 예수님 앞에 서서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할려고 하는 순간

또 갑자기 새하얗게 되면서 도통 첫발걸음 조차 내 딛일 수 조차도 없는 겁니다.

 

보자 가난한 자가 누구이지 조차도 해석이 안되더라 말이죠.

전 재산도 해석이 안됩니다.

소유물인지 그럼 처 자식까지?

도대체 기준이 무엇인지

 

좀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준들이 자신만만하게 정해져 있었는데

졸지에 예수님 앞에서는 기준들이 모호해져서

가난한 자도 누구인지 모르겠고

전재산도 어디까지 전재산인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새하얗게 되는 겁니다.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 자체를 몽땅 잊어버리는 식으로 말이죠.

 

이게 비유 곧 비밀입니다.

 

단절성을 느끼는 겁니다 단절성

 

주의 인자하심이란 지근 지근 밟혀서 탈탈탈 털리는 것이다 라고 했지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그 간극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일곱 교회 일곱 촛대 일곱 천사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인 등등

일곱이라는 의미가 바로 헐어버렸다가 다시 세우는 의미이다고

이동시키는

이 쪽 세계를 헐어버리고 저 쪽 세계로 이동시켜 빼내는 작업을

숫자 일곱으로 표현했다 말이죠 창조의 날 수 처럼 말입니다.

 

 

그럼 인간은 이 일곱에 곧 비밀이지요

이 비밀에 의해 움직임을 당해야 할 판국인데

본인이 이 일곱을 다루겠다고 비밀을 다루겠다고 하니까

풀릴 리가 있겠습니까? 졸지에 모호해 지고 의문의 반복으로써 흐릿해지는 겁니다.

이 흐릿함을 고수하겠다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미완료를 고집하는 거죠.

 

그럼 일곱이라는 비밀이 다시 세우시는 또렷함이 밝히 보여진다면

이 일곱에 의해서 곧 비밀에 의해서 본인이 옮기움을 당하는

이 쪽 세계에서 저 쪽 세계로 옮겨주시는 그 분의 그 비밀의 일하심의 혜택

또는 섬김 또는 배려를 받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비밀을 풀 자격에 애초부터 나에게 없고

비밀은 영원히 비밀 그대로 남겨진채로

비밀스럽게 즉 단절로써 우리에게 일방적인 편파적인 이동을 시키는 겁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것이 이 비밀을 공개하자 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귀다 말이죠.

개방하자 라는 겁니다.

 

아니 십자가의 피가 모든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 아니냐 말이죠.

그럼 공개해야지 왜 비밀로 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성령은 단절이 아니라 개방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소통과 교통과 네트워크 형성이다고 말이죠.

 

그런데 웃끼는 것은 그럼 말라꼬 비유로 말씀하시냐 말이죠.

우리가 다 주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부자청년의 주장과 동일하다 말이죠.

어릴적부터 말씀 지켰다 말이죠.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하소서 얼마나 겸손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처럼

교만하지 않다 말이죠.

그러니 유대 관원 곧 선생 노릇을 할 정도로

모든 매사에 모범이 되니까 저렇다 말이죠.

 

왜 예수님은 이 부자청년과 소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왜 단절 시켜 버립니까

즉 부자청년에게 예수님 자신을 비밀로써

비밀 그 자체로써 예수님 자신을 부자청년에게 나타내지 않고 감추어버리시느냐 말이죠.

 

마치 이것은 이렇게 때쓰는 모습과 같습니다.

나 예수는 부자청년 너의 구원자가 되기 싫어

나는 너의 하나님이 안될래

 

그 이유가 뭔데요?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켜왔다메?

 

그래서 주님 쪽에서 마치 임금 되어 주지 않겠다고 도망치시는 모습처럼 나오신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우리가 행하고 갖추고 지키는 인간의 숙제입니까?

아니면 임금 되어 주기 않고자 도망치시는 예수님의 숙제 입니까?

 

몇 달 전에 즉 겨울 때에 어머니께서 한 네 다섯 번 자주 물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간다 라는 말씀을 보시고는

 

어떻게 하면 바리새인 보다 나은데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의미 곧 비밀이요 단절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 곧 비밀이요 단절이 오히려 기뻐야 한다 말이죠.

 

내 숙제가 없다는 것이니 말이죠.

 

그런데 누가 이 본문을 보고 자기 숙제로 인간 숙제로 여기지 않겠냐 말이죠.

오죽하면 부자청년이 유대인의 모범 인간의 대표로써 예수님 앞에 놓여지게 되었겠냐 말이죠.

결국 마귀이거든요.

 

더더욱 말도 안되는 불가능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말이죠.

이건 무슨 수로 지키시겠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른?

이것은 모든 종교가 사기 칠때 다 가르치는 겁니다.

즉 비밀이 아니다 말이죠.

 

가능할 것 같으면 비밀이 아니라 개방되고 풀리고 해석이 되고 실천도 되고

막힌 담이 없이 다 가능하다 말이죠.

굳이 소통이 되는데 왜 등돌리고 근심하며 돌아가냐 말이죠.

 

안되니까

택도 없으니까

등 돌리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혹시나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봐 예수님은 두려워 한다 말이죠.

 

즉 안 알려 주겠다는 겁니다.

문제 내 놓고서

맞추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라고

혹시나 부자청년이 이 문제 이 비밀을 풀까봐 전전긍긍하셨다 말이죠.

등 돌리고 돌아서 근심하며 갔을때에

 

예수님은 야호 라고 신나하셨다는 겁니다.

 

비밀인데 왜 풀려고 달려드냐 말이죠.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면

아니다 아니 ㅋㅋㅋㅋ

큰일 날뻔 했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어린아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자꾸 부정적으로 못 간다 못가 라꼬 부정적으로만 이야기 하시냐 말이죠.

그게 비밀 그것이 비유이다 말이죠.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긍정적이면 안된다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다 긍정적이다 말이죠.

우와 어쩌면 성경과 반대인지

 

성화론도 결국은 긍정성을 말하는 겁니다.

비밀이 아니예요

 

다들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천국 갈 사람이다고 다들 인정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안 된다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그럼 그들이 안되면 그 어떤 누구도 안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사기입니다.

 

주님은 안된다고 하는데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된다고 하니

개방이니 소통이니 뭐든지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말씀과 달라요.

 

너 김대식은 매사를 삐딱하게 보니까

성경도 삐딱하게 보는데

눈에 안약을 사거 발라라 라고 하던데

 

제가 삐딱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삐딱해요

예수님이 천국에 못 간다 라고 하시면 제발 믿으세요

못 갑니다.

 

바리새인 보다 나은 사람 있으면 이야기 해 보세요 누구인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 있으면 이야기 해 보세요 누구인지?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속에서도 없어요.

 

없다니깐요.

 

단절입니다.

철저한 단절

 

있으면 누가 그런 자인지 제발 알려주세요

 

막 살지 않은 사람 있으면 제발 알려달라니깐요.

네 네 크게 양보해서 단 하루만이라도 막 살지 않은 사람 있으면 알려주세요

평생이 아니라 단 하루 말입니다.

 

마귀가 자신있게 내세운 부자청년도 안되는 판국에? 우리일까 보냐 말이죠.

 

단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장 지질께요?

 

뭐 멀리도 갈 필요 없이

현재 성화 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얼마나 붕뜨는 구름 잡는 의문의 흐릿하고 모호한 소리입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그런 사기를 치냐 말이죠.

 

단 하루라도 막 살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오 보라 말이죠.

이것도 안 되는 판국에

성화 ~~~ ~~~~

소가 웃습니다 소가

 

그들에게는 비밀이 없어요 비밀이

즉 사랑이 없다 말이죠.

 

십자가의 피가 발리지 않아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 이다 말이죠.

 

죄인과 의사 사이의 간극에(사실상 상극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없다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 없다 말이죠.

일곱이 없는 겁니다.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는 그 일곱 말이죠.

비밀이 없다는 겁니다. 비밀이 있어야 하는데 비밀이 없으니까 그들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를 하는 겁니다.

 

소음이다는 겁니다.

 

뭐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요? 그거 소음입니다 소음

~~~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요? 그거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꽹과리

듣기 싫은 소리, 원치 않는 소리이다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 곧 비밀입니다.

비밀, 비유입니다.

 

결국 마귀는 이 비밀을 깰려고 한다 말이죠.

해킹 할려고 해요

 

기적을 보고 임금 삼고자 했는데

그래서 패쓰워드를 쳤는데

 

띠 띠 띠

막힘 막힘 막힘

단절 단절 단절

삐 삐 삐

패쓰워드가 안 먹혀드는 겁니다.

비밀번호가 풀리지 않아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불러서 배부른 김에 임금 삼고자 따라오니까 도망치신 거다 말이죠.

홧김에 배부른 김에 임금 삼고자 한다는 말은

곧 그 사람에게만 하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특히 유대인의 대표성으로써 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믿을까요? 홧김에 배부른 김에 믿는 겁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번제와 제사를 추구하는 살인의지인 겁니다.

내 같이 이래 잘 믿는 자 무시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는 오기이다 말이죠.

이 오기로 똘똘 뭉쳐진 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다 말이죠.

 

다행히 일곱 교회는 개방 되어 있지 않고

비밀로써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세워지지 않는 도저히 지을수 없는 교회로써 말이죠.

 

교회가 다루는게 아니라

일곱이 교회를 다루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바리새인 보다 나은 경우는 없습니다.

단절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단절입니다.

 

이 불가능성을 내가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가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게 아니라

주님이 자기 목숨은 나에게 주시는 겁니다.

 

내가 나누어 주게 되면

부자청년이 나누어 주게 되면 부담스러워서 잠 못잡니다.

근심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예수님

비밀이신 예수님이 나누어주시는 것은

전혀 근심도 하시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시는 겁니다.

 

성경에는 인간에게 숙제 내지 않습니다.

인간 숙제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숙제를 할려고 안달이 나 버렸어요

마귀들린 겁니다.

마귀들이 그 숙제 할려고 달려든다 말이죠.

심지어 그 숙제를 예수님에게까지 숙제조건으로 따질정도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만을 볼게 아니라

베드로와 우리 자신을 같은 인간으로써 동질감을 느껴서 생각할게 아니라

정작 우리의 동질성은 그 베드로를 잡았다고 예수님에게 자신있게 내미는

그 마귀가 왜 그렇게 예수님에게 인정 받을려고 애를 쓰는지?를 봐야 한다 말이죠.

 

우리의 심뽀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아닙니다.

정작 그 세 번 배신 때린 베드로를 잡아서 예수님께 고소하는 그 모습이

진짜 우리의 속성이다 말이죠.

 

베드로는 오히려 땡잡은 거다 말이죠.

자신의 숙제가 탈탈탈 털리고 주님의 숙제가 덮쳐졌으니 말이죠.

즉 비밀이 있다는 겁니다 비밀

 

그런데 무식한 마귀는 비밀도 없어요.

비밀을 깰려고 병신같이 베드로를 잡아버렸넹

 

 

이 사람 아직도 있어요? 라고 법을 집행하다가

그 법이 자기를 향하는 줄도 모르고 법을 재판관처럼 신처럼 행사해버린 겁니다.

결국 누가 잡혔나요?

 

얼마나 이 표현이 은혜가 되는지

이 사람 아직도 있어요??????

 

법을 이용하다가 도리어 법에게 말려든거다 말이죠.

하물며 율법이 이런 식인데

십자가는 오죽 더 더 더 하겠냐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는 땡잡은 겁니다.

대박 로또 당첨 되었다 말이죠.

오죽하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면서 왜 저러실까앙

여유가 넘쳐요 비밀이 넘쳐요 넘쳐

 

주님의 숙제는 마귀만을 상대로 합니다.

그러니 내 숙제가 없다는 말은 주님의 숙제가 이 마귀의 손에서 건져냄 뿐이다는 겁니다.

만약 내 숙제가 있다면

절대로 막 살면 안된다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 라고 숙제가 졸지에 생기면

그 사람은 마귀의 종으로써

졸지에 비밀이 없어요 비밀이 개방적이다 말이죠.

단절이 없어요 단절이 모든 것이 소통되는 식이다 말이죠.

간극이 없어요 간극 즉 주의 인자하심이 없고

인애와 자비가 없고

오로지 번제와 제사 뿐이다 말이죠.

자기 숙제한 것 자랑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게 성화론이다 말이죠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라고 했을때에

어린아이가 해석이 안됩니다.

고로 천국은 해석 자체가 더더욱 아예 안된다 말이죠.

비밀 그 자체이다 말이죠.

 

이 단절성에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무슨 놈의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둥

 

모조리 자기 숙제 했다는 것을 나열할 뿐이다 말이죠.

 

과연 숙제한 것 맞을까요?

과연 막 살지 않았을까요?

 

전 재산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말이죠.

 

못합니다. 못해요.

 

제가 어떤 성화론 그것도 수준 낮은 저 박영 땡 목사의 성화론이 아니라

수준 높은 성화론을 주장한다고 그들 말 마따나 주장하는 자들의 대화 속에서

아주 충격적인 표현을 들었습니다.

 

만약 목사가 사고든 어떻게 여차저차 해서 죽게 되면

남은 가족을 교회가 책임져 달라는 겁니다.

 

아니 보험회사가 있는데 왜 교회가 책임지죠?

 

저는 그 때 충격 먹었는데 더 기가막힌 것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 대화에 정말 정말 충격 먹었습니다.

 

목사는 교회 교인들 등에 빨때를 꼿아 빨아먹는 좀비? 좀비가 아니라 뭐였더라?

유럽 귀신? 늑대 인간 같은 존재

갑자기 단어가 안 떠오르는데

피 빨아먹는 자 뭐였죠.

드라큘라

 

아 흡혈귀

 

이제 생각나네요 뱀파이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ㅋㅋ

 

뱀파이어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말이죠.

 

무슨 수로 이 뱀파이어 보다 나을수 있겠냐 말이죠.

성경 박사들인데

 

(131:1, 새번역)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131:2, 새번역)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131:3, 새번역)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오늘 본문의 표현들이 딱 누가 생각나는고 하니

베드로입니다.

얼마나 뻔뻔스럽게 여유가 넘쳐흐르는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아요 라고 말이죠.

 

또 누가 생각하느냐 하면

구원받은 한 쪽 강도가 생각 납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싸가지 없는 강도 말이죠.

 

오늘 본문이 딱 원인 없는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인 없어요.

원인 있으면 큰일 나요.

 

원인 없이 결과가 덮쳐버리니까

베드로든 구원받은 강도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고백을

오늘 시편 131편처럼 외칩니다.

 

똑똑

누구세요?

수지예요

넌 두드릴 필요 없단다.

 

즉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해석이 필요 없는 비밀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그들만의 비밀 언어이다 말이죠.

그 어떤 삼자가 개입할수 없는 해석이 안되는 언어이다 말이죠.

그런데 건방지게 자꾸 마귀가 해석할려고 개입한다 말이죠.

왜 그 둘 사이에 끼어 드냐 말이죠.

 

시편 곧 시란 비밀언어 이다 말이죠.

해석 할 수가 없어요.

그냥 해석 되지도 않은채로

결과만 누릴 뿐이다 말이죠.

 

문 열어준 적도 없는데

이미 들어와서 누리고 있는 겁니다.

천국에 못 간다 라고 패쓰워드 걸어서 단절 시켜 막아버렸는데

문 연적도 없이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말이죠.

 

언제 들어왔냐 말이죠.

저도 몰라요

원인 없이 결과만 누리는 겁니다.

비밀이거든요.

비유다 말이죠.

시 언어입니다 시 이다 말이죠.

노래다 말이죠 노래

 

천국을 막 누려요 막

 

언제 들어왔냐 말이죠.

 

몰라요

해석 안 됩니다.

설명이 안됩니다.

 

바리새인 뱀파이어 보다 나은 적 있었나요?

없어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나요?

없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이죠.

네 네 네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아요.

 

도대체 마귀가 포착한 세 번 부인은 어디로 날라가버린 겁니까?

예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을 마귀는 좋아라고 잡았다 말이죠.

세 번 배신을 잡았다 말이죠.

 

잡았으면 마귀의 주장 대로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없어요.

 

생명책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라고 없어요.

오히려 생명책에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만 기록이 되어 있다 말이죠.

 

주의 인애와 자비만 곧 비밀만 기록이 되어 있지

 

마귀처럼 저렇게 열심히 세 번 배신한 베드로를 잡았다 라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열심히 잡았는데

번제와 제사가 기록이 안되어 있어요.

 

당연하지요 비밀이 아닌데 왜 기록이 되겠습니까?

 

아무도 펼자가 없습니다.

 

생명책에 기록 되지도 않을 것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 말이죠.

 

그러니 제발 막 사세요


어린아이는 상대적인 어른의 눈에 막사는 자유자로만 밖에 안 보이거든요
.

벌거벗은 줄 모른다 말이죠.


결국 마귀 보란듯이 마귀 듣는 앞에서 막 살아라 라는 겁니다.
모든 종교에서 외치는 그런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신을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마귀를 동원 못 시킨다 말이죠. 왜? 비밀언어가 아니기에
어린아이는 상대적은 어른의 눈에 발가벗겨진 모습이다는 겁니다.
소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서 어른의 모습과 차이내는 겁니다.

누가 과연 어린아이를 섬기겠습니까?


(마 18: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5, 개역)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 개역)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마 18:7, 개역)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정작 어른은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화를 마땅히 당해도 싼 모습 뿐이데 말이죠.


상대적인 어른의 눈에는 어린아이는 발가벗은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거룩한 흰 옷으로 입혔다 말이죠.

헐벗은 자를 누가 입을 것을 주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종말에만 완성 되는 어린아이 이거든요.


(마 25:34, 개역)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5,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개역)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개역)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개역)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개역)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개역)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1, 개역)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개역)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개역)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 25:45, 개역)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개역)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비밀의 옷을 입혀서 벌거벗은 수치를 안 보신다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이 피 옷, 이 비밀의 옷이 안 보이니까

무시해 버리니까 끝까지 발가벗은 수치를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허물치 않는데

마귀는 끝가지 물고 늘어진다 말이죠.

그런다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있을까요?

칼로 톱으로 아무리 쓰려 보라 말이죠. 짤려지나?

그 따위 번제와 제사는 생명책에 기록이 안되는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 상대적인 마귀 곧 허물을 물고 늘어지는 법을 쥔 어른의 상대적인 모습에

예수님은 어린아이와의 비밀 언어로 허물치 않는 대화를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냐? 너 내 한테 반했나

베드로는 발가벗은 것 모르고 신나게
네 반했습니더, 네 예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피 옷을 입혀짐을 당한 티가 나는

어린아이 대화

비밀의 대화를 하는 겁니다.

 

오로지 주의 인자하심만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 되어 있을 뿐이니

그 주의 인애와 자비를 마음껏 막 누리는 어린아이 같이 말이죠.

 

이 비밀의 노래를 부르는 자는 어린아이 뿐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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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 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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