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려운 [행함이 있는 믿음]을 자꾸 해내지 말입니다 (시편 140)

 


(
140: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140:2, 개역) 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140:3, 개역)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셀라)

(140:4, 개역)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140:5, 개역)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셀라)

(140:6, 개역)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140:7, 개역)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140:8, 개역)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가 자고할까 하나이다(셀라)

(140:9, 개역) 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저희 입술의 해가 저희를 덮게 하소서

(140:10, 개역)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140:11, 개역)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강포한 자에게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케 하리이다

(140:12, 개역)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140:13, 개역)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차이를 앞의 글 계시록 11장 두 증인의 죽음 에서 언급했습니다.

 

결국 가짜 교회와 진짜 교회의 차이점이 또렷하지 않으면 모호한 의문의 제사일 뿐이다 말이죠.

 

행함이 없는 믿음인 가짜교회의 특징은 자꾸 진짜의 자리에 덮썩 앉는 겁니다.

그 반대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진짜 교회의 특징은 뭘해도 자신은 가짜일 뿐이다고

빈자리를 남겨놓는다는 겁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이 개입해 달라고 요청한다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가짜교회는 그 빈자리를 넙쭉 앉는 겁니다.

 

그렇게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빈 자리 그 삼일이라는 간극 그 사건의 자리에

예수님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데

어라 마귀가 그 빈자리를 앉는 겁니다.

 

오늘 시편 140편의 취지도 그런 의미입니다.

마치 구원이 이미와 아직의 미완료처럼

아직도 구원해 달라고 다윗은 우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해서 일까요?

 

그래서 자꾸 구원해 달래요

 

요즘 목사들이 자꾸 십자가 고만 제발 그만 말해라

이제는 십자가는 지나갔고 부활을 외쳐야 한다 라고

죄 죄 죄 그만캐라 그만 울어라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 무식한 목사는 이 삼일의 간극을 모르는 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모르고

그저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하자 라고 주장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더라 말이죠. 가짜 교회의 삯꾼 강도의 소굴이지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에 다윗은 외치고 있는 겁니다.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자 앗싸 눈물 나왔다 주의 병에 담아야지 라는 식으로

그렇게 오늘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완료가 되었기에

다른 것은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

이 십자가만 반복해 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죄인의 자리에서 외치고 있다 말이죠.

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런데 소위 마귀에게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죄인의 자리에 앉은 다윗의 저 외침을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왜 일부러 죄인의 자리에 앉냐 말이죠.

 

자신들은 지금 다 의인의 자리에 앉아서

그저 외치는 것이

그저 관심사가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매국노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도록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지

 

저렇게 왕이 징징 짜면서 구원해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것에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다윗은 무시 무시한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즉 모세가 애굽을 향해 10가지 재앙을 퍼붓듯이

엘리야가 바알 아세라 850명의 선지자 편에 선 강도의 소굴을 이스라엘을 향해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하듯이

 

소위 심판을 퍼붓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다윗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부정성이 앞에 놓여지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결국 잃어버림 이라는 부정성에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의 나타나심이기에
이 잃어버림에 마귀가 좋아라 하고 달려드는 겁니다.
너 버림 받았지 라고 말이죠. 그런데 되 찾으심 앞에서 다시 낫게하심 앞에서
마귀가 범인으로 잡히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이 간극에 말려들어야 하는 거죠.

 

마치 오늘날 어떤 목사가

자신이 담임 하고 있는 그 교회를 향해서

10가지 재앙을 퍼붓고

비오지 않기를 십일조 못 드리도록 삼년반 동안 월급 한 푼 못 받도록 교인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식이다 말이죠.

 

다윗이 말이죠. 이스라엘 왕으로써 말이죠.

 

아 그럼 교인들이 갖다주는 월급의 십일조로 먹고 사는 목사가

결국 자기 얼굴에 침뱉는 식이 된다 말이죠.

교인들이야 뭐 당연히 죽어나가지만

결국 자기도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써 왕인 자기도 죽는거다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죽음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우리 모두 죽음 속으로 들어갑시다 라는 식입니다.

 

그 속에서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라는

 

누가 이 간극에서 태어나는 자인지 라는 것을 보자 라는 거죠.

 

그것을 어려운 말로 광야교회라고 사도행전에 나오더라 말이죠.

사망의 권세가 묻지 않는

음부의 권세가 묻지 않는

주의 살과 피로 사는 성도인지 아닌지를

잃어버림을 당함으로 인해서 되찾고자 주님의 뛰어드심

이 저주에 주님의 뛰어드심이 있는지 보자 라는 겁니다.

 

참 무모하지요.

그런데 다윗 본인이 주 여호와로 부터 그렇게 격었거든요.
찢으셨으나 다시 되찾았다 말이죠.

이것이 요나가 격은 것 아닙니까? 요나의 표적!!.

 

그래서 다윗 자기는 그 완료를 봐 버렸거든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덮쳐졌거든요.

그러니 왕이라는 직분이 왜 있겠냐 말이죠.

전에는 율법을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치는 그것이

이스라엘 왕 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울왕도 그것 때문에 미쳐버렸지요.
이스라엘 왕 다움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증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덮쳐지니가 그게 아니더라 말이죠.

 

왜 왕이 되었는가? 왕 직분이 뭔가?

바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것은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그 날 강도가 니다 이 놈아

이것은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이다 말이죠.

주님이 원치 않는 싫어하는 거다 말이죠.

 

그럼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인 인애와 자비는 뭔가?

왕의 직분이 왜 주어졌는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그 의문의 이스라엘을 위하지 말고

 

3일만에 다시 지어진 미래완료의 이스라엘이 이미 완료되었다고
왜 다 이루어졌는데? 십자가의 긍휼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 인자하심을 바라보라 라는 겁니다.

그것을 쳐다 보라고 왕의 직분이 주어짐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퍼붓듯이

십자가의 저주를 퍼붓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허물어 지면 안됩니다 라고

사수 할려는 자들이 생긴다 말이죠.

 

그들이 바로 두 증인을 죽이는 자들이다 말이죠.

물론 이 두 증인 또한 죄인이다 말이죠.

그러니 완료를 미래완료를 쳐다 보라고 외치는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고자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고자

이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간극 말이죠.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지

십자가를 잘 증거해서 교회 잘 되자

이스라엘 잘 되자가 아니다 말이죠.

이미 교회가 완성 완료 되었는데 뭘 잘 되자 말하냐 말이죠.

우리 숙제는 없는데

 

그러니 십자가라는 완료를 퍼붓는 겁니다.

지금 다윗이 그래서 십자가를 나타내소서 라고

또 출애굽 전쟁을 외치고

또 출이스라엘을 외치고

또 구원 전쟁을 외치고

또 마리아처럼 한나처럼 기도하는 겁니다.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왕이 외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포로되었고 갇힌바를 모르거든요.

 

오늘날에 목사가 이런 소리를 외치면 교인들이

정 그러면 목사 니 혼자 탈출해라 라고 외친다 말이죠.

 

그런데 왜 목사라는 직분을 외 주셨겠냐 말이죠?

눈에 보이는 교회 그거 가짜다 진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도록

목사로 세웠다 말이죠.

 

삯꾼은 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하면 진짜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말이죠.

그러나 주님이 목자되심은 주 되심은 이미 다 완료되었기에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탈출하자 라고 외치더라 말이죠.

 

그러니 소통이 안되는 단절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은 방언이다 말이죠.

오늘 본문을 보면 희년을 외치는 모습처럼 저에게는 보입니다.

그 희년은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자 에게만 해당되어요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마치 출애굽 전쟁은 부르짖는 자에게만 의미 있듯이 말이죠.

그래서 부르짖도록 만들고자 애굽왕을 강퍅케 하신거다 말이죠.

주님의 자작극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혹여나 혹여나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 라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듯이 떨리는 마음으로 희년을 유대인 회당에서 먼저 외쳤습니다.

참으로 다행으로 그들이 이 희년을 발로 차 버립니다. 거부해요

복음을 그들 성전을 46년동안 짖는 자들은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발로 차인 이 희년을 거부함에 억울하다고 하는게 아니라

 

~~~ 다행이다 (이적 다행이다 ~~~~)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저들이 받아들였다면 큰일 날뻔 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씀이 이 주의 책에 기록된 말씀대로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하시면서

이제 신나게 이방인에게 희년을 주어야지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러니 행함이 있는 믿음은 두가지 조건이 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쪽은 거부하도록 해야 하고

이쪽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겁니다.

한 쪽만 이루어지면 안된다 말이죠.

 

죽이기만 하면 안되고

다시 살려야 합니다.

 

찢으셨다가 다시 꿰매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계시록처럼 성도는 구멍이 뻥뻥뻥 뚫힘을 당하는 판국입니다.

왜 꿰매는 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그것이 한때 두때 반때 라는 십자가의 간극입니다.

이 잃어버림 당하고 다시 되찾은 바 되는 이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개역)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6:3,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것을 앞의 글 저 아시지요? 라고 안다 야다 라는 의미이다 말이죠.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주께로 돌아가자 라는 겁니다.

십자가로 돌아가자

처음사랑 아무 조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돌아가자

 

이 말이 얼마나 통하지 않는 단절된 언어이면

그것도 교회 사람들이 가장 거부하는 언어이면

다들 이렇게 반응 합니다.

 

저 안식일 지킨다니깐요

저 교회 다닙니다.

저 이스라엘입니다.

 

아니 이스라엘에 있는데 어떻게 이스라엘로 돌아가자 라고 하느냐

아니 부활 교회 믿는데 왜 자꾸 내가 부활인 것을 믿느냐 라고 말씀하시냐 말이죠.

부활 믿는다니깐요.

 

라고 대화가 안되는 겁니다.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더라

죽은 믿음을 주장하더라 라는 겁니다.

 

다윗은 바로 그 죽은 믿음 속에서 외치고 있는 겁니다.

산 믿음

저 분을 보자 라고

 

오히려 괜히 안식일 지키는 바람에 안식의 주인을 죽이더라 말이죠

오히려 성전을 46년동안 사람의 손으로 괜히 지으니까

삼일만에 짖는 참성전 되신 예수님을 죽이더라 말이죠.

실상은 버리고 그림자를 취하더라 말이죠.

 

우리는 뭘 해도 그림자 안개 일 뿐이다 말이죠 헛되다 라는 겁니다.

실상을 나타내 주소서 라고 해야 할 판국이다 말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출애굽 하자 라고 주께로 돌아가자 라고 외칠때에

 

그래서 탈출해서 이스라엘애서 살고 있잖아요 라고 반응한다 말이죠.

오히려 다윗 왕 너 혼자 미완료이고

우리는 완료인데 왜 자꾸 이스라엘로 돌아가자 라고 외치느냐

지금 여기가 이스라엘인데 라고 반응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시공간을 뛰어넘어버립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그 장소 그 때인 사건을 쳐다보지 않으면

이스라엘에 살아도 이스라엘이 아니요

교회에 다녀도 교회가 아니다는 겁니다.

머리 없는 몸인 좀비요 강도의 소굴이요

앙꼬 없는 찐빵인 껍데기일 뿐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다윗을 보자 말이죠.

그렇게 외친 다윗 지는

다윗 자기는 이 이스라엘을 벗어나던가요

탈출하던가요?

결국 자기도 그 땅에서 죽잖아요.

이스라엘 한 발치도 못 벗어나는데

뭘 자꾸 출이스라엘을 외치냐 말이죠.

자기도 못 탈출했는데

 

바로 그겁니다.

다윗은 갇혔다는 겁니다. 포로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희년을 외치듯이 출애굽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파악 못하는 겁니다.

아귀가 안 맞다 말이죠.

 

결국 예수님이 오지 않는한 다윗의 외침은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오시니까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더라 말이죠.

결국 다윗은 예수님의 행함을 행동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유대인 속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들이

다윗이 미리 샘플 맛배기로 조금씩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완료로써 외쳐진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미완료가 아니라 말이죠.

 

시간도 공간도 날라가 버리는 사건입니다.

 

곧 십자가만 나타내더라 말이죠.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다윗이 외친 겁니다.

한마디로 유대인에게 돌삐 맞아 죽을 소리를 예수님이 했듯이

이스라엘에게 돌삐 맞아 죽기 좋을 소리를 한 거다 말이죠.

 

오늘날 행함이 있는 믿음을 정 외치고 싶다면

교회에서 돌삐 맞아 죽기 좋을 소리를 하는 식입니다.

그것도 목사라면 더더욱 말이죠.

 

그런데 그런 목사 없으니 아예 기대하지 말자 말이죠.

그저 눈에 보이는 교회에 미쳐버리자 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겁니다.

 

결국 지도 모르니까 엉터리 소리를 한다 말이죠.

 

오늘 다윗이 처한 입장을 생각해 보자 말이죠

도대체 애굽도 눈에 안보이고

원수도 없는데

마치 원수를 향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로 탈출 하냐 말이죠.

갇힌바도 없고 포로된 바로 없는 독립 자주 국방의 나라에서

그것도 강국이 되어서

주변 나라도 쳐들어 오지 않는데

왜 저런 소리를 하냐 말이죠.

 

물론 솔로몬 이후로 현실화 되지요.

 

그러니 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의문의 모호함이다는 겁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평안과 안식이니

그런 모호한 것 붙잡지 말고

이미 다 이루신바 된

넉넉한 승리인 십자가를 보자 라는 겁니다.

 

그것도 평안할 때 저런 소리를 하면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미친놈으로 보이겠지요.

 

예수님은 로마독재로부터 해방을 외치는 것도 아니요

그런데 자꾸 천국을 외치니

미친놈이라고 그것도 자기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하더라 말이죠.

회개하라 울어라 라고 외쳐본들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 유대인이다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저 외침은 결국 무시 받기 위해서

아니 아예 제발 무시해라 라고

무시 받을꺼 뻔히 알면서 외친다 말이죠.

 

갇힌바도 아니요

포로된바도 아니요

억눌린바도 아닌데

 

부르짖을 필요성이 없으니

 

공허한 메아리처럼

헛된 외침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런데 그 외침이

이방인에게는 졸지에 의미가 있게 되더라 말이죠.

희년이 그랬거든요.

 

내 이름을 부르짖이 않던 백성에게 부르짖게 된 바가 되는

누가 믿었으리요 주의 팔에 뉘게 나타났느뇨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10:13, 새번역)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2:32

(10:14, 새번역)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0:15, 새번역)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 52:7

(10:16, 새번역)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또는 '기쁜 소식' 53:1(칠십인역)

(10:17, 새번역)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말씀'

(10:18, 새번역)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퍼졌다" 하였습니다. / 19:4(칠십인역)

(10:19, 새번역)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 32:21

(10:20,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 65:1(칠십인역)

(10:21,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 65:2(칠십인역)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그러니 다윗의 외침은 이 부르짖음은 그야말로 우주적인 외침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구원전쟁이니까 말이죠.

 

모호한 인간의 손에 펼쳐지지 않는 이 구원전쟁을

오로지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이 구원전쟁을

주님의 손에서 지금도 부지런히 펼쳐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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