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제일 좋은 새 옷 이요, 금가락지 이요, 새 신발이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리자

 

주의 인자하심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바 된 삼일이라는 십자가의 간극

 


(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개역)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33: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133:2, 개역)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133:3, 개역)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

(133:1, 새번역)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133:2, 새번역)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133:3, 새번역)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오늘 시편 133편을 베드로 전서 2장을 통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인간의 시선에서 아름다움이란

누구든지 다 따라할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화장 기술이나 또는 패션감각을 배우면 금방 누구든지 할수 있는 미 입니다.

곧 동일성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움 보다 더 나은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더 나은 아름다움은 막상 아름답기는커녕 다들 고개를 돌리는 입장입니다.

곧 불편한 아름다움인데

바로 거리끼는 십자가입니다.

 

번제와 제사 보다 더 나은 것이 십자가다 라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것이다 겁니다.

뭐뭐 보다 더 나은 뭐뭐 라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 외치고 있는 것을 추하게 만들어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거리껴 고개돌려버리는 그 추한 십자가를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움보다 더 나은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진짜 아름다움 이다는 겁니다.

 

마치 며느리 다말이 창녀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시아바지의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드디어 획득한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그가 나 보다 옳았다 라는 겁니다.

상대적인 나 보다 말이죠.

 

그 잘난 나는 추하게 되고

그렇게 추하다고 여겨졌던 그 며느리 다말이

추한 나를 살리는 구세주 이다는 겁니다.

 

가장 추한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가장 아름다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아름다움 더 나은 아름다움으로 말이죠.

다들 아름답지 않다고 고개를 돌려버린 자들이 아름다움 맞네요 라고

모든 자들이 이 아름다움에 무릎 꿇게 된다는 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앞에 말이죠.

 

그 십자가가 어떻게 무슨 수로 아름다울수가 있을까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라고 성경에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제일 최고의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아마 종교꾼들은 이런 생각 한번도 못해 봤을 겁니다.

가장 거짓말 아니냐 라고 말이죠.

오히려 세뇌 시키기 바빴죠 뭐

 

왜냐하면 그들은 오히려 죽음의 하수 노릇만 하더라 말이죠.

종노릇 말입니다.

죽음으로 공갈 협박하는 우상숭배자들이거든요.

죽음을 시기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보험회사 차린 겁니다.

 

그러니 죽음이 제일 강합니다.

그 죽음 보다

그 부정 보다 더 한 부정이 사랑이다 라고 한다면

니쁜 죽음 보다 더 나쁜 사랑이어야 한다 말이죠.

 

마귀로부터 나쁜사람 이라는 소리 못들으면 그거 사랑 아니다 말이죠.

박그네 에게 나쁜사람 이라는 소리 들었던 사람이 다시 그 자리에 앉게 되고

정작 진짜 나쁜사람은 수갑 채워지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죽음을 잡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무이다.

 

그런데 사랑이 죽음 보다 강한데

왜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사랑이 많을까요?

그것이 가장 대표적인게 바로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외칩니다.

안 외치는 종교가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 다 가짜이다 말이죠.

그것을 또 감추기 위해서 부활교리 안 만드는 종교가 없어요.

하여튼 인간을 도와주고 싶어 환장한 것이 종교입니다.

그게 사기꾼이지요. 그런식으로 삥을 뜯어내는 겁니다. 샤머니즘 말이죠.

 

모든 종교는 인간을 구원해주고 싶어 환장한 돈에 미친 것들입니다.

그게 유대교 바리새인이였다고

예수님께서 아예 대 놓고 까발려 버렸다 말이죠.

 

아무튼 어떻게 사랑이 죽음 보다 강하냐 말이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죽음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죄를 미워한다 라는 식입니다.

 

종교 중에서 가장 최고의 종교인 불교는

마귀 조차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자 라는 식인데

 

그래서 티벳불교 였던가요? 몇 년 전에 10년 좀 못 되었을 때 였지 싶은데

중국군인이 자신들을 죽여도 그 죽이는 중국군인을 부처로 보자 라는 식이라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부처의 뜻이다 라고 중국군인도 사랑하자 라는 식으로

땡중들이 막 죽어나거더라 말이죠.

 

어떤 중은 자신의 몸에 불때워서 중국군 보는 앞에서

나는 너 중국군을 사랑한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학교때 배운 뭐였죠? 아 맞다 등신불

분신해서 해탈 하는

 

제가 보기엔 그건 사랑이 아니라

정반대의 폭력과 같았다 말이죠

조폭 ~~~

 

히틀러 보다 더 나쁜 폭력이 비폭력을 주장하는 간디처럼 말이죠.

쓸데 없는 환각 곧 이데올로기 라는 폭력을 심어버렸으니 말이죠.

 

왜냐하면 국가도 결국 종교 이거든요.

중국 이라는 국가 종교는

불교 종교에 비하면 쨉도 안된다 라는 식이다 는 겁니다.

너 나 못 이겨 라는 식입니다.

전세계에 퍼져있는 불교인데 말이죠.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더 잘 많이 열매 맺고 더욱더 퍼지지롱 이라고 말이죠.

 

들뢰즈의 자살이 그런식이였듯이 말이죠.

히틀러 보다 더 나쁜 간디 라고 말한 지젝도 마찬가지인데

둘다 똑같다 말이죠.

독립운동의 게릴라 전을 펼치는 유대교나 로마 독재나 도진개진 둘다 마귀들이다 말이죠.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시기 질투 미움으로써의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죽음 자체와 싸울수가 없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종교가 말이죠.

기껏 히틀러와 싸우니까 독재와 싸우니까 나 봐라 옳잖아 라는 식이다 말이죠.

 

그러니 모든 종교에서 모두가 말하는 사랑 조차도 추상적인데

그 사랑 보다 더 더 더 추상적인 것이

더더욱 말도 안되는 것이

 

그런 가짜 사랑 보다 더 추상적인 것이

죽음을 시기하는 사랑

죽음을 질투하는 사랑

죄를 미워하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원수에게 내어줄까요?

그럼 원수를 좋게 한 것이지

죽음을 미워한게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기능 자체가 원수 이기는데 도사이다는 겁니다.

이미 이긴 채로 등장한 겁니다. 이 땅에 왔다 말이죠.

이 죽음에 뛰어들었다 말이죠.

 

이것이 구약에서 조금 힌트로 나온 예가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애굽 족장에 아브라함이 내어주는 모습입니다.

힘이 없으니 빼앗기는 거죠.

그래서 아내를 애굽 족장에게 주고서 자신은 포주처럼 돈 받고 아브라함 지는 살아남았다 말이죠.

아니 그런데 이 아내를 내어주었는데 돈 받고 팔아버렸는데

이 아내 사라가

애굽 부족들이 멋도 모르고 마치 전쟁의 전리품으로 여겼는데

정작 본인들이 이 미끼를 덮썩 물게 됨으로써

도리어 본인들이 사라의 전리품으로 전락해 버리는 겁니다.

졸지에 눈 깜짝할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던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전쟁처럼 말이죠.

그런데 항복 하고 백기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아브라함 형님 잘못했습니다. 행님을 몰라 봤습니다 라고

항복 ~~~ 재산이고 뭐고 다 줘버리고 도망치듯이 멀어져 버리는 겁니다.

어서 딴데 가세요 라고 말이죠.

 

그리고서는 혜택을 아브라함 지 혼자 다 받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신 때린 베드로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부터 그 십자가의 공로를 다 누리듯이 말이죠.

 

정작 애굽부족은 삥 뜰을려고 하다가 도리어 삥 뜯기는 깡패처럼 말이죠.

 

이것이 마치 복선처럼 나중에 모세가 10가지 재앙을 퍼붓는 사건으로

다시 재현 됩니다.

 

애굽은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또 당하는 거죠.

 

이게 구약의 그림자입니다. 실상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실상이 왔으면 그림자를 버리고 실상을 믿어야지

그림자를 붙들고 있으면 뭐가 되냐 말이죠.

 

아무튼 구약에서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애굽을 이기는

이 가장 미약한 이스라엘은 도대체 뭘까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졸지에 튀어나온 이스라엘은 뭔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비밀이다 말이죠.

 

아무도 구약의 그 어떤 민족도 이 이스라엘이라는 비밀을 푸는 자가 없습니다.

신과 겨루어 싸워 이기는 자들이다 말이죠.

 

그렇게 이 세상에서 강한 애굽을 이기듯이

신약에서는

이제 실상 그림자가 아니라 실상인

죽음과 사망의 권세와 맞짱뜨는 겁니다.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실상은 애굽과의 전쟁이 아니라

죽음과의 전쟁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망의 권세자들과의 전쟁입니다.

 

아니 세상에 죽음을 시기하는 사랑 본적이 있나요?

그런 종교? 그런 사랑?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게 다 거짓이다 말이죠.

 

죽음을 질투할 거야 라고 죽음과 맞짱 뜨는 종교가 없어요.

오히려 죽음 곧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죽음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것이 종교다 말이죠.

그러니 종교란 우상 숭배이다 말이죠.

이 우상숭배에 교회도 똑같은 짖을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철학자들은 종교는 마약이라고 합니다.

종노릇하는 노예가 된다고 마약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 마약과 국가라는 마약에 맞짱뜬 바울을
오늘날 현대 철학자들이 무지 좋아라 해요

흉내내고 싶다는 거죠.

물론 의문으로 끝나는게 철학자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니까 말이죠.

 

유대교 보세요 바리새파는 아예 로마에 굽신 하잖아요

또 다른 파들은 그 반대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총 칼로 한다 말이죠

총 칼로 이길 것 같으면 그게 로마와 뭐와 다르겠냐 말이죠

간판만 다를 뿐이잖아요.

 

결국 죽음으로 겁주어서 장사하는 것이 종교다 말이죠.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갈수 있다고 구라를 치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점쟁이와 다를바 없잖아요

교회도 똑같더라 말이죠.

점쟁이들만 다 모인 곳이 오늘날 교회이다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자꾸 출애굽하자 출이스라엘 하자 라고 지겹도록 말하는 겁니다.

다들 듣기 싫어하는 소리만 다윗은 외쳤던 거죠.

 

막살면 안된다는 모든 종교가 외치는 말만 할 뿐이지

죽음과 싸우지는 않잖아요

출애굽을 요청하지 않잖아요 구원전쟁을 부르짖지 않잖아요.

바르게 살아서

지 혼자 깨끗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지

자기 혼자 천국 가면 그만이지

남을 위해 구원을 외칠수가 없다 말이죠.

부정함에 뛰어들수가 없더라 말이죠.

사랑이 없기는 마찬가지 곧 울리는 꽹과리 소리만 요란하다 말이죠.

 

그럼 너는 사랑 있냐?

당연히 없습니다.

 

그럼 너도 구라네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 치킨

 

왜 제가 사랑이어야 합니까?

저는 십자가를 진 적도 없는데!

저는 그저 사랑으로부터 혜택을 입었을 뿐인데

 

저는 예수님을 싫어했다 말이죠.

그 예수님을 누가 좋아 하겠냐 말이죠

풍채도 없구요

아름다움도 없구요

고운 모양도 없어요.

질고 곧 질병과 고통을 앓고 있는 그 분을 누가 좋아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기에

저도 그 속에 속한 자일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아름다움이 없는데 새까맣게 타 버린 얼굴

아니 그 태양빛에 얼굴이 다 타버린 그 양반이

즉 디기 못 생겼다는 겁니다.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로 내 눈 배린다고 다들 고개 돌려 버려요

그런데 그 양반이

죽음과 맞짱 뜨더라 말이죠.

얼마나 시기심이 많은지 죽음을 시기해요

죽음을 질투하더라 말이죠.

 

그가 외치는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시샘이 많은지

꼬치 꼬치 달려들어 쏘아댑니다.

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쇠파리. 등에 라고 했지만

등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시비 거는

실족케 하는 자입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가만히 잘 가고 있는 자를 달려와서 다리 걸어 자빠뜨리는 자 이다 라고 할 정도이다 말이죠.

 

죽음에

사망의 권세에

죄에

마귀에게

태클 거는 자 보셨나요?

다리 걸어 자빠뜨리는 자 보셨나요?

아예 죽기살기로 달려들어 시비를 건다 말이죠

속을 빡빡 끍어 댑니다.

 

그러니 그 당시 최고의 종교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말려드는 이유가

주님쪽에서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다리걸어 실족케 하더라 말이죠.

가는 곳곳마다 태클을 거니까

 

바리새인이 안죽이고 싶어도 안죽이고 싶어도

도저히 참고 참아도 안될 정도로 극한의 상황까지

예수님께서 몰아붙이니까

결국 못 참고 죽이는 식이다 말이죠.

 

자 그럼 죽이는데 성공했으면

죽음이 승리했습니까?

사랑이 승리했습니까?

 

죽음이 승리했잖아요

 

문제는 그 뒤 입니다.

자꾸 죽였는데

마치 다시 살아났는냥 자꾸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니 죽음이 죽이다 죽이다

결국 자기 팔이 아파서 죽게 되더라 말이죠.

미끼를 괜히 덮썩 물었던 겁니다.

그렇게 말도 안되게 죽음이 죽더라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신들이 있는 곳에서 어떤 신이 나타나

신은 죽었다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외치니까

어떻게 신이 죽냐 라고 바보 병신 아냐? 라고 배꼽빠질 정도로 웃다가 다 죽었고

정작 그렇게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친 신만 살아 남았다 라는

웃지 못할 역설적인 이야기처럼

 

십자가가 마치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를 자신만만하게 죽였다 라고 자부했는데

어라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또 죽입니다.

또 살아납니다.

또 죽입니다.

 

거기에 나선 사람이 바로 청년 사울 곧 사도바울 아니냐 말이죠.

예수쟁이들 다 죽여버리겠다 라고 나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가장 학문적으로 최고의 엘리트였다 말이죠 가말리엘 문하생

 

그러니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말이죠.

아니 그런데 왜 지가 왜 예수를 증거하냐 말이죠.

스데반 집사를 죽인 사도바울인데

스데반 집사가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 다시 살아난 스데반 집사가 바로 사도바울이다 말이죠.

얼마나 역설적이냐 말이죠.

아벨을 죽였는데

아무리 아벨을 죽여도

아벨은 다시 살아나더라 말이죠.

그게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라는 그 자체로써의 전염병, 예수 바이러스가 퍼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던 자가

도리어 본인이 아예 가장 최선봉에 서서 예수님이 주 이시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더 잘 퍼트려요

 

 

그러니 이것은 신의 전쟁이지 인간 전쟁 없다 말이죠.

 

결국 절대는 절대를 사수하는 절대가 아니라

진짜 절대는 절대를 없애버리는 절대로써의 비절대 이다는 겁니다.

 

필연을 없애버리는 필연으로써의 비필연인 우연 이다 말이죠.

예정을 없애버리는 예정으로써의 비예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저주인 십자가 이다 말이죠.

유기의 증거가 십자가 아니냐 말이죠. 버림받은 증거물

그 유기받은 자가 선택의 주

구원의 주 였다는 겁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즉 아무도 몰랐다라는 겁니다. 비밀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동일성 동질성 합일 일치성이 아닌

차이성으로써의 기능이다 말이죠

기능 즉 원판이다 말이죠.

 

그러니 정작 예정된 선민 유대인들이 다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결국 사단의 회로 들통이 나더라 말이죠.

 

동일성 말고 차이성을 내 놔 봐라 말이죠.

막살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차이성을 내놔봐라 말이죠.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습니다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저 세리와 같이 막살지 않았습니다.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말이죠.

죽은 믿음이다 말이죠

오늘날까지 목사들이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거꾸로 가르치는 겁니다.

 

차이가 없어요

더 나음이 없어요

간극이 없어요 간극이

주의 인자하심이 없어요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없어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없다 말이죠.

 

그럼 차이성이 뭐냐

행함이 있는 믿음이 뭐냐

부정성에 뛰어드는 겁니다.

위반입니다.

 

사랑이란 금지를 위반하는 겁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고 하셨잖아요

이거 위반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다 말이죠

 

반칙이다 라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와야 정상인데

의인을 안 부른다는 것은 불법이다 말이죠.

법을 어기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은 불법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간따나 불법인데 의인을 안 부르니까 말이죠

그런데 불법에 불법 이중 불법으로써 이제는 아예 대놓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이거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이해 불가죠

해석 불가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뿐입니다. 성경말씀은 말이죠.

 

그런데 무지 무지 쉬워요

지혜롭게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냄을 감사할 정도로 너무 너무 쉽다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이 자꾸 우기는게 있더라 말이죠.

뭔고 하니

의인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어요.

아브라함이 10명만 있으면 안 멸망 시킬겁니까? 오냐

그런데 점점 작아져서 본인도 해당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럼 의인이 없는게 심각한게 아니라

구원자 라는 기능이 무의미해져 버리는 것이 중요하게 심각한거다 말이죠.

심판자 자체가 있다는 자체가 의인이 없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그 기능을 나타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존재 보다 앞선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존재는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능만 있으면 되요

 

그러니 의사라는 기능은 의인 건강한 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존재 필요없어요.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본인이 의인 또는 건강한 자이다고 보는 자는

의사로써 예수님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십자가이니

이 십자가가 얼마나 거리끼는 걸림돌이겠습니까?

 

우리도 이거 직접 체험하잖아요

성화론자들이 얼마나 십자가를 거부하는지 말이죠.

 

그래서 다른 것도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사기를 치는 겁니다.

 

저런식으로 동일성 일치성에 빠져있는 시아버지를 구할려고

창녀로 변신해서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담보물로 잡고자

그 세가지 물증을 잡는 획득하는 행동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부정함에 뛰어드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다들 정결함을 행하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거꾸로 이야기 하니

사기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재미있는 것은 사기꾼의 말이 먹혀들어요

말이 먹혀드니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절입니다.

뚝뚝 끊어져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절 된 그 상태로써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 사기꾼들이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민족을 배신하고 자기민족의 신을 배신때리고

거짓말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곧 자기나라를 칠려고 오는 적군 정탐꾼을 숨기고자

거짓말을 해서 가족을 구원하는 기생라합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세리 매국노 친일파처럼 긍휼을 바라는 모습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정작 바리새인은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그거 내세우는 판국에 말이죠.

바리새인의 외침이 먹혀드는 것이 그들 신앙의 환경이지

세리가 외치는 긍휼은 먹혀들지가 않아요

오늘날도 교회 환경에서 오고가는 대화도 똑같습니다.

십의 이조 이레게 두 번 금식 성화 되었다는 것이 먹혀드는 거지

단절 된 언어처럼 불쌍히 여겨주소서 는 교회에서 먹혀들지 않는 언어 이다 말이죠.

 

사도행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했는데

이 표현만 나오면 기생라합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는다 말이죠.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16:31, 개역)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16:34, 개역)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11:13, 개역)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1:14, 개역)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2:9, 개역)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2:10, 개역)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2:11, 개역)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2:12, 개역)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2:13, 개역) 12절과 상동

(2:14, 개역)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2:15, 개역)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2:16, 개역)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2:17, 개역)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2:18, 개역)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2:19, 개역)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20, 개역)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2:21, 개역)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2, 개역)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따르는 자가 돌아가도록 사흘을 거기 유하매 따르는 자가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만나지 못하니라

(2:23, 개역)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2:24, 개역)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교회에서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자꾸 보탤려고 합니다. 여기에

십일조 교회봉사 말씀실천 등등등

 

즉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누구를 배신때린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어떤

교회 다니는 모태신앙이라고 하는 자가

그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을꺼 같으면

다 천국 가겠네 라고 비꼬더라 말이죠.

교회 안다니는 자가 아니라

다니는 놈이 그래요

 

결국 자기는 동일성이다고 우기는 거죠.

 

그렇게 쉽게 구원 될 것 같으면

내가 미쳤다고 그 동안 교회 다녔겠냐 라고 말이죠.

 

그러니 저 세리 저 창녀 저 기생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세리 매국노 친일파 일본 앞잡이도 창녀도 기생도 다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을꺼 같으면

왜 자기가 미쳤다고 교회 다니냐 라는 식이다 말이죠.

 

교회 다녀 준게 행함처럼 십의 이조 드리고 바치고 지키는 것으로 봤다 말이죠.

 

바로 그 동일성 일치성을 배신 때리는 것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거든요.

행함이 있는 믿음이거든요.

민족 배신하는 행함

모태신앙이라는 그 가족신앙을 배신하는 행함

자기 신을 배신하는 행함

교회를 배신하는 행함

어차피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투사이니까

하나님을 배신 때리는 행함

자기를 배신하는 행함인 차이성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만 잔뜩 모아서
즉 나는 절대 세 번 부인 안했다

나는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

나는 저 세리처럼 막 멋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 말씀을 지켰다 라고

바르게 살았다고 우긴다 말이죠.

배설물 똥덩어리들만 가득 모아서

그것으로 자랑 기념비로 삼아버리니까

 

무슨 소리 하는 줄 모르는 겁니다.

 

 

배신한게 없어요

누구를 부른다는 것은

반대로 누구는 이제 다시는 안 부른다는 겁니다.

안쳐다본다는 겁니다.

안듣는다는 겁니다.

기생라합이 애굽을 하루만에 무너뜨린 여호와의 이름에

간담이 녹아 덜덜덜 떨었다고 할 정도로 딴 사람 말 안듣는다는 겁니다.

 

결국 그 누구를 배신해야 하는데

배신한게 없으니까

 

배신 한다는 게 뭔지

누구를 배신한다는 말인지

그 누구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평생 동일성 평생 일치성만 추구하다 보니

차이나는 그 누구를 못 보니까

그 누구와 차이나는 그 누구를 못 부르는 겁니다.

앞의 누구는 누구이고

뒤의 누구는 누구인지 모른다 말이죠.

 

앞의 누구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에 죽지도 않은 자들이고

뒤의 누구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에 죽은 자를 말한다 말이죠.

 

결국 그들은 죽음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으로 장사를 하는 보험회사처럼 상조회사처럼

하나님 장사를 한 거다 말이죠.

그들과 함께 어울린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말이죠.

강도의 소굴 말입니다.

오늘날은 더더욱 심한 거죠.

비교도 안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끌어모으는 겁니다.

성화론자들 봐요 가관입니다 가관.

막살면 안된다고 외치더라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막살지 않았는데 주의 이름을 못 불러요 너무 너무 이상하고 신기해요

그럼 뭘 부르냐

부르지 말아야 할 막살지 않은 자기 이름을 막 불러요

참 신기해요.

그들은 주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못 부르더라 말이죠.

 

그렇게 지옥 가시겠습니까?

막살지 않아서 지옥 갈래요? 바르게 살면 뭐합니까! 지옥인데!

그럴빠에 차라리 거짓말 하는 기생라합이 옳았다 말이죠.

그는 나 보다 옳도다

세상에나 자기 이름만을 부르고 주의 이름을 못 불렀던 시아버지 유다를

엉터리 하나님 존재만 믿었던 그 유다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만든 여인이 바로 며느리 다말 창녀로 변신해서

세 가지 물증인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획득한 이 부정한 증표가 도대체 뭐길래?

이 부정한 물건에 목숨 걸었냐 말이죠.

이것이 아이와 그 아이의 아비를 살리는 유일한 부정한 도구 곧 십자가 이다 말이죠.

죽음에 뛰어드는 겁니다.

얼마나 막 살았으면 죽음에 뛰어듭니까?

시아버지 유다를 살릴려고 말이죠.

유대인을 살릴려고 개같은 이방인 막사는 이방인이 말이죠.

교회 다니는 사람 예수 믿게 할려고

교회 다닌적 없는 세상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을 물에서

지옥에서 교회에서 건져내더라 말이죠.

 

이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부정함 속에 뛰어드는 겁니다.

죽음 속에 뛰어듭니다

 

오늘 시편 133편의 핵심은 위에서 내려온다는 겁니다.

 

대부분 종교에서 하늘 영광이 다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럼 성경의 차이점은 뭐냐

거룩이 위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밑에서 거룩을 지켜서 위로 올라가는 거룩 그런 거룩은 없다는 겁니다.

성화론은 엉터리 이다는 거죠.

 

의인은 없다 말이죠

그래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누가?

위에서 내려온 거룩이 말이죠.

 

그리고 위에서 내려올때에 팔이 어긋맞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거룩과의 차이점입니다.

 

누가 봐도 거룩한 삶을 살던 부자청년과 맏아들이 영생 구원 얻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개같은 이방여인 우물가의 여인 남편 6명이나 있던 그 이방여자가 구원 받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구원 얻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아버지 재산을 다 말아먹은 허랑방탕한 삶은 살았던 탕자가 구원 곧 영생을 얻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들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부정함에 뛰어든 예수님이 옳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늘 베드로 전서 29절처럼

이게 얼마나 무시 무시한 표현이냐 하면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는 겁니다.

 

아니 그럴만한 구석이 1도 있나요? 1%라도 있기는 할까요?

전혀 없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뒤와 앞에 있습니다.

저는 청년부때에 목사나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등등이 말씀을 가르쳐줄때에

저부분만 딱 떼어놓고 알려주다 보니

거의 다들 외우듯이 그 부분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순 엉터리로 배웠다 말이죠.

 

저것은 상대적인 의미이다는 겁니다.

10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 이였는데 이제는 어두움이 아니고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였는데 이제는 백성이고

너희가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는 긍휼을 얻었는데

 

결국 원인이 없이 되었다는 겁니다.

 

(벧전 2:10, 개역)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원인이 없이 그냥 결과로 주어졌다 말이죠.

그러니 그때 배운 것이 앞 뒤 다 빼먹고 저 9절만 알려주더라 말이죠.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말이죠.

그런데 그 앞 뒤가 더 중요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말도 안되는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누구는 버렸다는 겁니다.

 

이게 아름답다 라는 겁니다.

 

아마 이렇게 배웠다면 다들 반발했을 겁니다.

 

이 불편한 아름다움

이 원인 없는 결과가 얼마나 무시 무시하냐 하면

 

결국 전에 백성이였던 자를 버리고 백성 아니게 만들었다는 것이고

전에 긍휼을 얻던 자를 긍휼을 못얻도록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즉 배신했다는 거죠.

누가? 주님이 말이죠.

그리고 그 남은 자리가 우리에게 넘어온 겁니다.

 

그래서 벧전 29절 위의 구절의 내용들이 십자가 라는 걸림돌을 설명하는 겁니다.

 

즉 그냥 탕자를 긍휼을 베푸는게 아니라

맏아들 앞에서 보란 듯이 긍휼을 베푸는 겁니다.

금가락지 새옷 새신발 살진송아지로 잔치를 말이죠.

 

자 이것은 도저히 이 긍휼을 도저히 용납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겠다는 취지입니다.

 

이게 아름다운 덕이다 말이죠.

이게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이다 말이죠. 영생입니다.

 

어머니가 이때 거리끼는 것이다 라는 말이네

 

굿 딩동뎅 맞습니다 맞고요 어머니

바로 그겁니다.

 

마귀가 왜 베드로를 잡아서 예수님에게 데리고 옵니까?

스가랴에서도 그랬거든요.

그것은 마귀가 예수님에게 인정받고픈 겁니다.

주여 주여 주님을 배신 때린 아주 나쁜놈 베드로

세 번씩이나 배신 때린 그 나쁜, 은혜도 모르는 놈을 제가 잡아왔습니다 라고 하냐 말이죠.

 

누가 봐도 그 베드로가 나쁜거 맞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사는 바로 이렇게 행동하는 마귀를 겨냥한 겁니다.

주님은 인간 구원 관심 없다 말이죠.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그 나쁜 베드로에게 금가락지 새옷 새신발 살진송아지를 입혀 버립니다.

베드로야 너 나 사랑하지? 라고 눈치 주면서 입을 삐죽 옆으로 내미는 겁니다.

곧 옆에 있는 마귀 듣는 앞에서 말하라 하고 윙크 하면서 싸인을 보내는 겁니다.

아 네 네 네 그렇게 하라 말이죠. ok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이게 아름다움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팔을 어긋맞게 하는 거룩이다 말이죠.

 

이것이 베드로 전서 29절의 의미입니다.

결국 누구 이야기 입니까?

베드로 자신의 이야기이다 말이죠.

당사자 베드로가 자기가 직접 격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말이죠.

 

마귀에게 사로잡혀 왔던 그 베드로가 말이죠.

 

탕자 용서를 도저히 용납 못하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맏아들

아니 왜요?

맏아들 본인이 아버지 말씀을 다 지켰기 때문에

탕자 행동 하나 하나 곧 막사는 모습 하나 하나가

응어리 지면서 복수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거든요.

 

그러니 제발 막사세요

말씀 지키기 마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말씀 지키면 응어리 져요

 

그게 마귀입니다.

그 마귀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최고의 극대의 관계의 신랑 신부의 사랑관계로 보여주니까

메두사가 돌아버리는 겁니다.

 

이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말이죠.

곧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했을때에

정작 이스라엘이 그 택한 족속인데 이제는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 택하신 족속에 이방인을 앉힌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겁니다.

 

말씀 자체를 예수님이 어기는 셈이다 말이죠.

맞습니다 그 말씀 자체를 어기는 것이 사랑이다 말이죠.

그것이 동시에 말씀의 완성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결국 인간이 말씀을 지킨 것은 매듭을 오히려 더 꼬이게 했던 겁니다.

사랑도 없으면서 지키니까 말이죠.

안그러면 다말처럼 창녀로 변신해서 시아버지를 돌이키던가?

기생라합처럼 거짓말해서 가족을 구원코자 민족을 배신하던가?

 

예수님 보세요 배신하잖아요

 

마귀가 왜 말씀대로 하지 않냐고 따지는 겁니다.

이게 말씀대로 하는 거거든요

이것을 설명을 못하니까

당연히 설명이 안 되니까

방종을 유도하면 안된다고 다들 쉬쉬한다 말이죠.

 

그만큼 주님의 사랑에 자신이 없는 겁니다.

 

마귀를 들추어내는 사랑이 없는거다 말이죠.

 

이 가장 추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아름다움일줄이야 ~~~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엉터리 아름다움 불로 태우면 다 타버리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가장 추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진짜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아니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똑똑한 유대인들 다 버리고

그 선민을 택하신 족속으로 하지 않고

개같은 이방인인 우리를 택하신 족속으로 삼고

탕자를 가락지 좋은 옷 신발 살진송아지를 먹일까요?

왜 탕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고

그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을까요?

 

이것은 유대인 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피 능력이 더 나은거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보는 앞에서

막살지 않는 자들 보는 앞에서

막사는 세리 죄인 강도를 구원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별명을 붙이는 겁니다.

즉 놀려먹겠다는 겁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는 별명을 말이죠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메시아 조건에 전혀 안 맞다고 아예 까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알고 예수님이 미리 떠벌리는 겁니다.

얼마나 이 행함이 옳냐 라고

저들은 틀렸다고 하는데 지금 옳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저들은 꼬투리 잡은 것인데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피 자랑을 염두하시면서 오히려 더 자랑꺼리로 삼을 정도이다는 겁니다.

 

저들이 이상하다 이거 범인들과 한 패거리라는 증거물인데

꼬투리 잡힌 예수님이 꼬투리 잡은 마귀 보다 더 당당하고 뻔뻔스러운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증거물이 곧 도장 도장끈 지팡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가 베드로를 살리는 구원의 증표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게 구원받는 증표라니요

오바 아닙니까?

이 과잉된 제스쳐가 바로 진리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는 진리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진리가 너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말이죠.

이 주의 인자하심이 말이죠.

 

이 십자가의 3일의 간극이 말이죠.

 

그것도 맏아들 보는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참으로 뻔뻔하게 말이죠.

오직 너희는 금가락지요, 택하신 족속이요,

제일 좋은 옷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새 신발이요, 거룩한 나라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벌린 잔치이니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았으니까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에 졸지에 맏아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겁니다.

 

(벧전 2:3, 개역)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4, 개역)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개역)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실족하게 하는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돌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둔다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

그 돌이 머릿돌이 되게 하는

주의 인자하심에 그만 낙심하여 실족해 넘어지더라 말이죠.

이것은 시온에 두는 겁니다.

 

시온의 머릿돌이거든요.

 

시온에 사는 사람들이 다 넘어 자빠지는 겁니다.

물갈이가 되더라 말이죠.

시온에 살지 않던 자들이 시온에 살도록 만드는 돌

시온에 살던 자들은 시온에 못 살도록 만드는 돌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 라는 돌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위에서 내려오는 거룩

아름다운 구원

영생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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