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 (12: 7-13)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공동)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12:5, 개역)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2:6, 개역)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7, 개역)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12:8, 개역)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12:9, 개역)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2:10, 개역)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2:11, 개역)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12, 개역)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2:13, 개역)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2:4, 새번역)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12:5, 새번역)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고, / 2:9 또는 '보살필'

(12:6, 새번역)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에는 천이백육십 일 동안 사람들이 그 여자를 먹여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이 있었습니다.

(12:7, 새번역) 그 때에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가엘과 미가엘의 천사들은 용과 맞서서 싸웠습니다. 용과 용의 부하들이 이에 맞서서 싸웠지만,

(12:8, 새번역) 당해 내지 못하였으므로, 하늘에서는 더 이상 그들이 발 붙일 자리가 없었습니다.

(12:9, 새번역) 그래서 그 큰 용, 곧 그 옛 뱀은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입니다. 그 용의 부하들도 그와 함께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12:10, 새번역) 그 때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이렇게 울려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의 동료들을 헐뜯는 자,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헐뜯는 자가 내쫓겼다. / 또는 '메시아' , '형제들'

(12:11, 새번역) 우리의 동료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말씀을 힘입어서 그 악마를 이겨 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12:12,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아,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자들아, 즐거워하여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 악마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몹시 성이 나서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12:13, 새번역) 그 용은 자기가 땅으로 내쫓겼음을 알고, 남자 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쫓아갔습니다. / 또는 '박해하였다'

(12:14, 새번역)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광야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날아가서, 거기에서 뱀을 피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부양을 받았습니다.

 

 

 

이번 회 알뜰신잡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단군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언급이 됩니다.

 

신화 곧 설화란 확인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즉 원인이 없이 결과만 통보받는 식이 신화 곧 설화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그 원인이 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이 없으면 인간은 답답해 하거든요.
그 빈공간을 견딜수 없어 합니다. 그래서 채워버립니다. 꽉꽉.
그것도 일관성 있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말이죠.

곧 일관성이 있어야 믿음이 가게 됩니다.

그래야 후손 자자손손에게 물려주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약 원인이 없으면 일관성이 없어서 존재랑 안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후대에 아니면 원래 그런지 몰라도 그 원인을 따지니까

왜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는지 그 이유

그 원인이 밝혀지는 겁니다.

그 마늘이 달래요

그 곰이 바로 척박한 환경을 이겨낸 곰족 곧 환족과 결혼하고

호족은 쫏겨나는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신화화해서 만들었다는 겁니다.

 

결국 따지고 따져 보면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겁니다.

그게 신화화 신격화 된 것이지

신화는 아니다는 거죠.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을 반영한 투사한 것이다는 겁니다.
우상이란 자기의 투사이거든요.

 

확인할 길이 없어야 하는데 확인하니까 조사하니까 다 나오더라 말이죠.

그 원인들이 그 이유들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야말로 신화 그 자체입니다.

신화라 표현하지 않고 환상 묵시 그 자체이다 말이죠.

그러니 저런 단군신화는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무시하지 않지만

멀리가면 멀리갈수록 무시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무시하지 말라고 일관성 있게
지금 현재의 존재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자 역사가들이 사명감을 갖고 교육시킵니다.

 

그러나 묵시인 성경은 처음부터 무시해서 끝까지 무시하는 겁니다.
이 단절성을 개방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단절 된 그 자체로 계속 단절을 증폭 시킵니다.

앞의 글에서 야곱의 형 에서가 장자권을 소홀이 여겼다 라고

마치 원인에 따른 결과라는 식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상 뒤짚어 씌운 겁니다.

그러니 장자권에 집착을 해도 결과는 똑같고

장자권을 소홀히 해도 결과는 똑같다 말이죠.

 

그러니 형 에서에게는 이 장자권이 전혀 신화가 될수 없는 겁니다.

즉 약속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에 믿음을 걸 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야곱은 아무리 따져도 따져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와중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걸수 없는데 또 걸어요 본인도 몰라요

이중이유없음 이중반복 이중중복이 되는 겁니다.

이중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무한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꼭지점이 졸지에 두 개 생기니까

간극이 고무줄처럼 양쪽 꼭지점에서 늘렸다 줄였다 마음대로 이랬다 저랬다

일관성이 없이 줄였다 늘렸다 하는 겁니다.

 

앞의 시편 141편에서 다윗은 또 출애굽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그림자이고 실상은 계시록 12장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봐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내용을

출애굽 사건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붉은 용 그리고 아빠없이 태어나는 여자의 해산으로 태어나는 아기

그냥 보여주면 모른다 말이죠.

최대한으로 낮고 낮게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여준다 말이죠

그러나 실상은 아닙니다.

바로 어린아이에게 딱딱한 음식을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겁니다. 즉 이게 원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결과가 덮쳐버렸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 실상이 바로 계시록인데

오늘 본문이 바로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을 나타냅니다

 

앞에서 왜 자꾸 애굽이냐 그래서 출애굽을 왜 그렇게 다윗은 강조하느냐

그 이유는 바로 약속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원수 갚는 것이 허용이 안되는 겁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원수도 없구요

오로지 예수님만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애굽을 이 뱀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애굽이 지금 다윗에게는 지금 시편에서는 없잖아요

그럼 원수는 누구냐 말이죠.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약속을 거부하거든요

곧 십자가의 피를 거부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발생한 것이

유대인들의 손에 죽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아무리 봐도 애굽 이집트가 하나님의 원수까지 될 정도로

그 심각성이 그 죄에 대한 심각성이 와닿지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을까요?

그것은 바로 애굽을 치기 위함인 겁니다.

 

아니 왜
쎄고 쎈 나라 허다하게 많고

많고 많은 땅 다 내버려 두고 그 애굽땅에서 출애굽을 벌리냐 말이죠.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는 이유가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굽신 굽신 월급 주면 그냥 유야무야 흐지부지가 되어버립니다.

즉 또렷하지 않는 의문의 것이거든요.

인간은 뭘 해도 의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우상은 인간의 손에서 나옵니다.

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 꾀로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드는 것입니다.

의문의 반복이니까 말이죠.

 

아브라함은 우상 조각가입니다.

그런데 약속에 덮쳐 버립니다.

졸지에 그냥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이 덮쳐버리니까

이 애굽을 치기 위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결국 다 잊어버리고 유야무야된 흐지부지된 약속

곧 노아 때에 함과 가나안에 대한 저주에 대한 약속을

주님은 잊지않고 약속을 실행하십니다.

인간은 뭐 다 까먹어버린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의 일인데 말이죠.

 

그 뿐이겠습니까?

그 훨씬 더 이전인 노아 언약 보다 더 앞선

창세기 12장 때의 약속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에 대한 약속을

지금 실행하십니다.

항시 실행하십니다.

 

먹고 살기 바쁜 오늘날 현대 사회에

이 언약은 그야말로 귀신 시나락 까먹는 이야기 일 뿐

전혀 현실성이 없는 다들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는

무시할 꺼리이다 말이죠.

 

그러든 말든 약속은 약속 스스로가 운동력이 있어서 실시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함 땅에 대한 원수갚기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다윗이 이 약속을 외치는 겁니다.

 

그럴때에 마치 예수님의 친척들이 두손두발 다 거두고 말리고 또 말리고 하듯이

다윗이 이 외침을 오히려 오늘날 교회처럼 이스라엘이 싫어하는 겁니다.

 

싫어하든 말든 등 떠밀어 물에 확 빠뜨립니다.

 

주의 인자하심만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으니 말이죠.

 

그러니 이 애굽에 대한 집착은

예수님의 원수로써 예수님이 직접 해결하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다 까먹는 인간에게는 해당 사항이 안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럼 인간은 제 삼자로써 따로 독자적인 노선에 서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이 졸지에 이 두 진영의 싸움에 양쪽 진영으로 갈려서 배치 되었다는 겁니다.

3의 영역이 없어요.

중립국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휘말려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나의 문제로 전에는 안 되었는데

이제는 나의 문제가 되어버린 자들이

바로 전에는 백성 아닌자가 백성이 되었고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긍휼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상대적인 자를 염두하고서 이다는 겁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원수의 목전에서 꼭 하필이면 원수의 목전에서

피 잔치를 살진소를 잡는 겁니다.

맏아들이 보는 앞에서 탕자에게 줄 살진소를 말이죠.

 

그래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진짜 실상이 드러날꺼 아니냐 말이죠.

 

아 그랬더니 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긍휼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 애굽짖을 하더라 말이죠.

분명 전에는 백성이였는데 이제는 백성 아니게 되고

전에는 긍휼을 얻었는데 이제는 긍휼을 얻지 못하는

처음사랑 곧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이 일관성이 없는 이 간극을

싫어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껍떼기만 지키는 겁니다. 설렁 설렁 대충 말이죠.

안식일 지키는데 목숨 거는 척만 하는 겁니다.

순진한 자는 진짜로 목숨 걸고요

 

지금도 이슬람에서는 순진한 신학생에거 순교하면 천국간다고 가르치듯이

거기에 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안 먹혀들면 이제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그 영광 순교의 영광을 확대시키거든요.

 

자 이렇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인간은 모릅니다.

다 까먹었고

다시 기억해 낸다고 해도

지금이랑 안 맞다 말이죠.

그 일관성 없는 이야기를 오늘날 왜 해 대냐 말이죠.

출애굽을 다시 외치는 다윗도 미움받는 판국에

그 천지창조 때의 인류의 시작때의 이야기를 왜 지금 오늘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말이죠.

 

 

자 그렇다면 너를 특별히 세웠다 라는 것이 의미 없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은 받고 싶은 욕망은 가득하고 ㅋㅋㅋ

 

그러면 또 수요공급의 원칙에 있어서

종교 장사꾼이 설치기 마련이고

구원을 팔겠죠.

 

구원 궁금해요? 궁금하면 9

땅거지처럼 앵벌이들이 파리떼처럼 득실거리게 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왜? 원수가 이런 짖을 했다는 거죠.

원수 문제 해결하는데 달인이다는 겁니다.

 

복수의 달인 예수님이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복수할 권리가 없다 말이죠

오히려 모든 인간이 이 원수의 자리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원수가 이런 짖을 해서

그래서 갇혔기에

그 갇힌데서 포로된데서 자유케 하는 분으로써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그럼 졸지에 나는 원수도 없으면서

아니 원수의 자리에 원수 때문에 놓여져서

이 주님 혼자 벌리시는

여자의 후손 혼 자 벌리시는 이 전쟁을 보게 됩니다.

곧 약속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이 약속의 피를 무시해서

십자가라는 약속에 툭 다리 걸려 넘어져서 실족케 되어

전에는 백성이였는데 이제는 백성이 아닌 자가 되고

우리 개같은 이방인은 전에는 백성 아니였는데 이제는 백성이 된 그 이유를

원인 없는 결과로써 누리게 됨으로써 지금 그 결과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겁니다.

아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구나 라고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보나 마나 뻔한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승리입니다.

이미 승리한 채로 태어나셨다고 지난주에 언급했지요

그럼 시시해져서 안 볼꺼 아닙니까

미리 결과를 다 알아버렸으니까?

 

그런데 원인 없는 결과란 원인이 없기에 결과만 있기에

시시하기는커녕 계속 해서 설레이게 되는 겁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이유가 없기에 사랑은 늘 설레이고 새롭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결과를 다 알아버린게 아니다 말이죠.

나라는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니까 그런 겁니다.

나 라는 존재 이전인 기능에 의미를 부여하면

다 아니까 시시하기는커녕

캐도 캐도 끝도 없이 막 쏟아지는 마술모자와 같습니다.

토끼도 나오고 다람쥐도 나오고 비둘기도 나오고,
자 그렇기 때문에 즐기기 바쁩니다.

박수치고 우와 우와 감탄하기 바쁘고

찬양하기 바쁩니다.

저절로 말이죠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것이 나오고

참사람과 기쁨의 그 나라를 누리게 되더라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왜 전에 백성이 아니였던 그때에

왜 이 복음을 이 언약의 피를 무시했을까 라는 그 이유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저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말이죠.

내가 그랬거든요

이게 모두 원수 마귀 때문이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을 다 가두었기에 말이죠

그러니 스데반 집사가 돌삐 맞아 죽을때에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천사의 얼굴로 주님께 가는 겁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속했기에

사람의 일처럼 복수 해 달라고

원수 갚아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는 겁니다.

영의 싸움인데

그 실상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여자의 후손인 아기 예수님의 승리 때문에 우리는 이미 승리한 채로 이 전쟁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귀는 패배함으로써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함으로써

성도 또한 이미 승리한 채로 고난을 받게 되는 겁니다.

 

마치 앞의 글처럼 여자가 해산을 해서 광야 속에 숨듯이 말이죠.

그 광야라는 죽음 속에

고난 속에 주님이 안식처로 보호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40년 광야에서 원망하기 바빳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고 나발이고

내 배고프다 날 죽일려고 여기로 끌고 왔제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언약의 피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거든요.

그런데 실상이 이 고난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겁니다.

 

약하게 되는 것

실패하는 것

죽게 되는 것

죽음 속에 놓여지는 것

이것이 때려죽어도 싫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러니 마귀에게 사로잡힌바 된 포로된 이유이다는 거죠.

 

그 마귀만을 상대로한 전쟁이다는 겁니다.

세상을 은혜로 만들었는데

약하든 강하든 상관없이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어 놨는데

마귀가 선악의 법칙으로 세상을 망쳐놓아서리

인간은 절대로 약해지면 무시받는다고 약해지면 안된다고

실패하면 안된다고

불임여성이 되면 인간 취급도 못받는다고

 

이렇게 세상이 졸지에 갑과을의 관계만이 존재하게 되어버린거다 말이죠.

 

이게 창조한 세상 맞냐 말이죠

이게 세계냐

이것도 나라냐 말이죠.

 

애굽이 그래서 본보기로 작살이 났는데

이스라엘

그것도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이 또 그짖을 하는 겁니다.

 

무지개의 언약을 무시하고

긍휼을 무시했던

 

노아의 아들 함을 치시기 위해서

주님은 아브라함을 준비했듯이

아기 예수님을 준비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영적 군사는

아빠 있어서 태어나면 안되는 겁니다.

이삭이 아빠 없이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육에서 난 자가 아닌 겁니다.

그런 자식을 낳는 여자가 바로

자유자 라는 겁니다.

 

남들은 이 여인을 죽은태를 가진 여자로써 취급했기에

저주 받았다 가문에서 쫏아내어야 한다 라는 식으로 봅니다.

곧 죽은자죠

가문을 이을수 없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빠 없이 태어나는 자로써 족속을 이루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홍해 속에서 나왔거든요
죽음 속에서 나왔거든요.

 

그런 자들만이 교회가 됩니다.

 

그런 자들만이 특별히 택한 자로써 이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보고

언약의 피를 찬양하는 찬양자로 태어난 자이다 말이죠.

 

그러니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못 보는 것이

얼마나 지당하신 말씀이냐 말이죠.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곧 하나님 나라 곧 약속의 나라, 언약의 피 나라를 당연히 못 보죠

거듭나지 아니하면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성령의 일로 안보고

기능으로 안 보고

 

자꾸 존재로 보니까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냐 라고

물질 현상의 실천행동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 선생짖 하냐 라고 하신다 말이죠.

 

영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 맞니?

혹시 그동안 육을 가르친 건 아니구?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즉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존재에게서는

기능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육의 아빠 없이 태어난 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 이스라엘이 바로 너야 너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 육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가장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먹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은 다 알아 먹는데 말이죠.

이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이 단절성을 확대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성령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면

무시할 수밖에 없는 소리들 뿐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라는 둥

붉은 용이 애굽이라는 둥

전혀 현실감이 없는 동떨어진 문제이다 말이죠.


지금 심각한 취업난에

돈 한 푼 벌기가 어려운 판국에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할 여유가 어디있냐 말이죠.

저런 것은 다 배부른 자들만이 하는 소리가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무시하고

저런 황당한 신화같은 그것도 옛날 아주 아주 옛날의 캐캐묵은 소리를 하는 것은

종교꾼 그저 돈 뜯어먹는 종교꾼들만이 하는 소리이지

그들도 돈 안되어 보라 말이죠.

당장 다 때려치우고 돈 되는 짖만 할거다 말이죠.

 

그러니 육에서 못 벗어나는 우리에게서는

저런 영의 기능은 정말 말도 안되는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말도 안되는

생존과는 무관한 전혀 딴 세상의 소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격은 자가 죽은태의 믿음의 조상 마누라 사래 아닙니까?

그런데 딴 민족은 몰라도 이스라엘 만큼은 통할줄 알았는데

역시나 안 통합니다.

쌍둥이도 안되는 판국에

형제지간은 가인과 아벨도 안 되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 간격을 벌리는데 있어서

천국 사람과 지옥사람으로 태어난 겁니다.

한 쪽은 천국이가 땡기는 사람이기에

죽은 자 같으나 산 자로써

이 아벨의 피를 갚는 겁니다.

예수님의 원수 갚기입니다.

 

다른 한 쪽은 지옥이가 땡기는 사람이기에

아무리 제사와 번제를 바쳐도

인애와 자비를 담을수가 없더라 말이죠.

약속의 언약의 피를 무시한채로

껍떼기만 잔뜩 바치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자가 지옥이 땡기는 사람으로써 태어났기에

그런 제사 밖에 못 드리는 거다는 겁니다.

 

이런 그림자들이 바로

실상으로써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참소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비웃는다는 의미죠.


(계 12:10, 개역)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2:10, 새번역) 그 때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이렇게 울려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의 동료들을 헐뜯는 자,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헐뜯는 자가 내쫓겼다. / 또는 '메시아' , '형제들'

 


시편에서 얼마나 다윗이 이 비웃음에 대해서 언급하는지

저들 원수는 깔깔깔 치 피 흥 거리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아서

이 원수들에게 건져 달라고 얼마나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그것의 실상이 오늘 본문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고난 속에 놓여짐으로써

 

(12:13, 개역)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가인과 아벨의 그 살인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다시 재현 하시는 겁니다.

더더욱 증폭합니다. 무한반복으로써의 십자가 사건만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확 등 떠밀어서 물에 빠뜨림으로써

진짜 실상을 보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다가 다시 건짐을 받게 될때

주여 뉘 십니까

 

도대체 누구시길래

이 죽음 마저도 굴복하는 겁니까 라고

 

예수님이 낯설기 짝이 없는 겁니다.

 

마귀를 상대할 줄이야

죽음을 상대할 줄이야

사망의 권세를 상대할 줄이야

 

그 동안 그렇게 가깝게 지냈던 분이

그럴 줄이야

그저 시시한 나의 일상에서만 소소하게 만나고 그 기쁨으로만 족했는데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는 주님을 보여주시니까 놀라는 겁니다.

 

그 놀라운 주님을 보라고

전쟁 속에 확 등 떠밀어서

이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보라는 겁니다.

약속의 전쟁을 말이죠.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고난 속에 놓여짐으로써

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보게 됩니다.

약속 대로 되어가는 진짜 현실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 언약의 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뭘 해도 언약의 피가 옳았다고 감사찬양 드릴 수밖에 없음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