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광야 땅굴속 아둘람 굴)의 예수님과 광야 교회인 다윗의 만남 (시편 142)

 

 

(142:1, 개역)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142:2, 개역)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142:3, 개역)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142:4, 개역) 내 우편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142:5,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142:6, 개역)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142:7, 개역)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편 141편처럼 이제 시편 거의 마지막 부분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끝나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으로 처음사랑으로 되돌아 가듯이

살려주세요 제발 건져주세요 라는 외침이 오히려 더 격렬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자리입니다.

여기서 태어난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을 육에서 나지 않고

아빠 없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마치 이삭처럼 말이죠.

 

이것이 자유자입니다.

 

그런데 자유자 라면 자유자 다워야 하는데

전혀 자유자 같지 않습니다.

계시록에서 이미 승리한 채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자처럼 안 보이고 광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간극을 만들어 냅니다.

빈 공간 곧 처음자리인 처음사랑인 주의 인자하심 이라는 텅빈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사건의 자리 말이죠.

이게 부활인데

모든 종교의 부활은 마치 바리새인의 부활관처럼

천국가는 조건처럼 부활교리 믿어주겠다는 식인데

그건 부활이 아니라 존재에 깔맞춤한 우상이죠.

부활이란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 사건의 무한반복 증폭 확대 재생산인 겁니다.

? 다른 잉여는 없거든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인간의 정치와 십자가의 정치의 대립이라는 제목도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정치란 잉여이거든요. 최고의 잉여

간택의 문제인데

이 간택에 어떤 누구도 의의를 제기 할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간택이

바로 십자가의 정치입니다. 잉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는 오로지 자기 존재 중심이기에 인간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상과 같습니다.

약속을 못 지킨다는 거죠.

인간의 손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주님은 거부하셨거든요.

사랑은커녕 의문의 제사만 반복하니

상한심령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자유자가 전혀 자유자처럼 안 보이는 이유는

십자가의 정치 곧 십자가의 잉여 때문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순종이 제사 보다 더 낫다 더 잉여적이다 라는

십자가의 정치가

마귀가 벌리는 정치 보다 더 잉여적인

남을 살리는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자유자가 자유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죄인으로 오심은

자신의 자유를 혼자만 누리지 않고 너와 함께 나누겠다는 약속이다는 겁니다.

이 자유에 거부하는 마귀에 대한 원수 갚기 이다는 겁니다.

? 혼자만 누려도 상관없는 이미 승리하심을

왜 나누실까요?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이것이 불쌍히 여겨주심 곧 긍휼 즉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주의 인자하심

인애와 자비 이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원수가 마귀원수가 선악의 법칙으로 바꾸는 바람에 모든 인간은 조건을 따지면서 살도록 되어버린 겁니다.

 

 

다윗이 이미 승리했고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또 처음처럼 시편 초반부처럼

살려주세요 원수로부터 구원해 주세요 라고

마치 이미와 아직의 긴장상태로 보일까요

연기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자유를 자기 혼자 누리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주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도 그랬거든요. 다윗 자신도

그래서 처음사랑의 출발점을 다시 상기시키는 겁니다.

 

정확하게 그 굴이 어떤 굴인지 모른다고 학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아둘람굴 이라고 치면

사울왕이 이스라엘을 다 장악하고 난 뒤에

다윗을 죽이고자 해외 원정까지 가면서 쫏아갑니다.

마치 붉은 큰 용과 해산의 여자의 사건

곧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처럼 말이죠.

그래서 다윗이 어디로 피신하는고 하니

너무 너무 험악한 골짜기 굴 속에까지 피신해야 할 정도로

죽기살기로 사울왕이 찾고자 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들에 핀 백합화 광야 바위 언덕에 피는

아름다운 백합화

즉 주변 환경이 척박하다 못해 죽음 속인데도 불구하고

떨어질 듯 말 듯 톡 하고 건드리면 바로 죽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의 백합화라서 더더욱 아름다운데

 

내일 아궁이에 던질 이 풀도 귀히 입히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라는 겁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하는 즉위식을 치른 곳

 

여자가 붉은 용을 피해 광야로 피신해서 양육했듯이

자유자가 전혀 자유롭지 못한 모습처럼

순종하는 모습으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집니다.

그 죽음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로부터 쫏겨난

정작 이스라엘은 이들을 백성으로 삼도록 되어 있는데

뭔가 이상하게 이스라엘에 애굽으로 돌변하더니

진짜 이스라엘을 다 쫏아내어서

이스라엘 바깥 이방인의 터에서

쫏겨난 자들이 모여서 그들 속에서 왕으로 세워지는 겁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게 되고

그렇다고 이방인도 아닌

물론 이방인이면서 그들 나라에서 쫏겨난 자들도 있구요

중간에 낑낀 경계인처럼놓여졌는데 졸지에 이스라엘 왕을 만나는 겁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물론 다윗은 죽을 맛이지만 말이죠.

 

(삼상 22:1, 개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개역)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들이 바로 처음자리를 보여주는 첫사랑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은 그 처음사랑을 보여주는 겁니다.

대상물로써 말이죠.

 

마태복음 4장이 그래서

흑암의 백성들

사망이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들

개같은 이방인들

이들에게 복음이 증거된다고 하는 겁니다.

드디어 드디어 복음이 응했다는 겁니다.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치 누가복음에서 단 한 사람

많은 이방인 과부 중에 단 한 사람 수리아 여인에게만

많은 문둥병자 중에 단 한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만 희년이 증거되듯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그러니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처럼

전혀 안 어울리는 언발란스한 만남으로써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자의 이 관계성

십자가라는 긍휼의 관계성 피의 관계성을

 

지금 다윗은 너도 광야 속에서 예수님 만나라고

그 처음자리인 첫사랑의 자리에서 예수님 만나라고

우리를 확 등 떠밀에 물에 빠뜨리듯이 광야에 빠뜨리는 겁니다

죽음에 빠뜨리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다윗처럼 처음자리에서 만나지만

사울왕은 미친 듯이 율법을 지켜서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주었다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 주변의 사람들 가족과 함께 85명을 다 죽여버립니다.

그 근거가 바로 사울왕 자기는 율법 지켰다는 겁니다.

율법 지키면 이래 됩니다.

껍데기만 지키고 인과 신과 의를 버렸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살인의지를 표하도록 되어 있다니깐요.

 

그러니 율법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가입된거다 말이죠.

사망의 몸에서 갇혀있음을 직시하게 되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율법 외의 한 의를 쳐다보라는 의미인데

지켜버리니까

율법 외의 한 의를 안쳐다보고

긍휼을 바라지 않게 되니

율법 지킨 것이 오히려 회칠한 무덤 같아서 완악한 사단의 회 이다는 겁니다.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래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으로 썩어빠진 죄성을 가리우고 있었다는 겁니다.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는 겁니다.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앙꼬는 버리고 껍데기만 아름답게 하니까 오히려 살해를 하는 겁니다.

의문의 제사의 반복의 특징입니다.

또렷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죠.

 

처음자리 처음사랑을 스스로 발로 차 버리니까

다윗은 이 처음사랑을 상기 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태어났다고

죽음 속에서 태어났다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그 간극에서 태어난 자인

이스라엘이라고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태어난 겁니다.

아빠 없이 태어난 겁니다.

그 의미가 할례입니다.

그런데 손 할례의 달인들이 됨으로써

오히려 마음판의 할례를 핍박하는 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할례의 의미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처음사랑

곧 아둘람 굴 속에서 태어난 이유로 인해

벌어진 십자가사건을 상기 시키는 겁니다.

처음자리 라고

 

마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이 처음이요

나중은 붉은 큰 용과 여자가 해산함으로 낳은 아기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 나중으로써

이 처음과 나중이라는 간극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으로써

우리를 다윗은 십자가 사건에 확 등 떠밀어 버리는 겁니다.

이 처음 사랑

아무 조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으로 용서하신 그 십자가의 3일이라는 간극에서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탕자가 그 간극에서 태어난 자였듯이

처음자리에서 태어났다고

처음사랑을 기억하라고

십자가 속에 등 떠밀어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참선지자가

사도들이 말이죠.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는가를 말이죠.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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