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교회로 탈출하는 구원 전쟁 출애굽 전쟁 (12:14-17)

 


(
12:14, 개역)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2:15, 개역)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2:16, 개역)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2:17, 개역)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12:14, 새번역) 그러나 그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광야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날아가서, 거기에서 뱀을 피해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부양을 받았습니다.

(12:15, 새번역) 그 뱀은 그 여자의 등 뒤에다가 입에서 물을 강물과 같이 토해 내서, 강물로 그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2:16, 새번역) 그러나 땅이 그 여자를 도와주니, 땅이 입을 벌려서, 용이 입에서 토해 낸 강물을 삼켰습니다.

(12:17, 새번역) 그래서 그 용은 그 여자에게 노해서, 그 여자의 남아 있는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싸우려고 떠나갔습니다.

 

 

 

마지막 구절 17절에 용이 여자의 아기를 죽이고자 하는 일에 실패를 하니까

그 분노와 화풀이를 그 여자의 남아있는 후손에게 분풀이 할려고 바다 모래위에 섰다고 합니다.

 

(12:17, 공동) 그러자 용은 그 여자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위해서 증언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가 18 바닷가에 섰습니다.

(12:17, 쉬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용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굳게 간직하고 있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공격하려고 나섰습니다.

(12:17, 킹흠정) 용이 여자에게 진노하여 그녀의 씨 중에 남은 자들 곧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진 자들과 전쟁을 하려고 나아가니라.

(12:17, 현대인) 그러자 용은 몹시 화가 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이 증거하신 것을 충실히 따르는 그 여자의 남은 후손들과 싸우려고 나가서

(12:17, 현대어) 화가 치민 용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께 속한 자임을 분명히 고백하는 여인의 남은 자손들을 공격하려고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12:17, 가톨릭) 그러자 용은 여인 때문에 분개하여,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과 싸우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결국 이게 원본이고 출애굽 당시의 사건은 그림자로써

이스라엘을 삼키고자 했던 애굽은 홍해로 몰아가서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창 칼에 죽이거나

아무튼 죽이고자 했다 말이죠.

 

아니 왜? 장자가 다 죽었거든요.

이것이 인간은 원인에 따른 행동만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이란 남의 자식 죽든지 말든지 관심 없어요

문제는 자기 자식이 죽으면 그때서 비로서 본심이 나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애굽왕 바로 왕의 장자를 죽이게 되니까 본격적으로

여호와에 대한 적개심을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열가지 재앙으로 박살이 나도

끝까지 싸우고자 덤벼들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 물에 빠뜨려 죽일려고 했는데

드디어 복수를 해서 속 시원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 바닷물을 졸지에 땅이 삼키듯이 다 빨아들여서

바리깡으로 머리 깍일때처럼 머리 중앙에 길을 내듯이 바닷물에서 길이 나타나는 겁니다.

? 광야로 도망치라고

 

그 광야에서 여자가 아이를 용을 피해서 양육하는데

이들을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겁니다.

세례 받은자 곧 남자 없이 아빠 없이 태어난 자로써 광야로

용을 피해 광야로 피신해서 양육 받은 자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광야 교회라고 하고요

 

이번주 예배 중에 어머니께 이 주의 인자하심이 뭔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문둥병 피부병 환자인 나아만 장군에게

똥물에 7번 담구어라 라고 엘리사가

많은 문둥병자 다 냅뚜고 오로지 이방인 중에 단 한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

선지자 엘리사가 보내심을 받습니다.

딴 사람에게는 보내심을 받지 않는다 말이죠.

즉 여자의 후손이 아니다는 겁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기준은 아들입니다.

 

이 아들 때문에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말이죠.

 

그래서 나아만 장군에게 똥물에 7번 담구어라 라고 하니까

과연 우리 같으면 몸을 담구겠습니까?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는 불가능한 소리이거든요.

못 담근다 말이죠.

그래서 안 되는 줄 알고 그 동안 했던 모든 치료를 실패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해보도록 해 놓고서 다 실패케 만든 후

그래도 건지러워서 죽고 싶을 정도로 만들어 난 뒤에 말이죠.

마치 애굽의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도록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단순히 낫고싶은 마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똥물에 몸을 담구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사적인 개인 소망 달성이 아니다 말이죠.

 

그럼 뭔데?

붕뜨는 소리 말도 안되는 소리

곧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보여주기 위해서 벌어지는 사건이지

개인 피부병 나사(사투리, 낫게 해) 줄려고 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똥물에 몸을 담구었습니다.

이웃도 외면하는 그 잘난 몸을 말이죠.

그 귀하디 귀한 몸을 똥물에 담굴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려 버렸으니 말이죠.

원망 안 튀어 나왔겠습니까?

6번까지 담구어도 제 생각에는 영어로 C C C C 계속 외쳤을 겁니다.

앞에는 애굽군사들이 죽을 둥 살 둥 다짜고짜 창 칼로 덤벼들고

뒤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서 벼랑 끝으로 내 몰린 상황인데

원망 안할 인간이 어디있겠냐 말이죠.

 

아 그런데 여기에다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라고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다시는 저 문둥병이라는 죽음의 병을 저 애굽군사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의 숙제로? 아니지요. 오로지 예수님의 숙제입니다.
주님은 피부 건강한자 부르러 오신게 아닙니다. 문둥병자를 부르러 오신 겁니다.
왜? 그 똥물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예수님의 자신의 피 영광을 위한 사건이다 말이죠.

 

성경은 어디에도 말 되는 소리를 하는 적 없습니다.

일부러 라도 말 안되는 소리만 골라서 합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만 창세전에 유일하게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거든요.

 

이 선악의 법칙의 애굽 세계에서 먹혀들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망 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6번째 몸을 똥물에 담구게 되니까 원망 밖에 안나왔는데

무지 참았다는 겁니다.

7번째 몸을 담구니까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무조건 낫더라 말이죠.

방금 3초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문둥병이 낫게 되니까

그 낫게 된 내 몸을 보는게 아니라

그 속에서 그 똥물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사형 집행장 십자가에서 바로 옆에 예수님이 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맞습니다 뻔뻔스러운 것 맞습니다.

그런데 우짭니까 어쩔수 없어요 기쁜데 뭘

이 똥물에 예수님이 계실줄

이 강도의 사형집행장에 예수님이 오실줄

이 죽음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예수님이 오실줄

 

그러니 이 광야교회라는 공간은

오로지 주의 인자하심만 바라보는

목이 곧은 백성임을 지적받는 낮추시는 할례 세례 불로 태움 당하는 곳이다는 겁니다.

 

그 불 속이 정작 불속에서 누구와 함께 춤추는 공간이 되고

불 바깥은 오히려 모조리 다 죽어있는 세상임을 보여주더라 말이죠.

 

그러니 이 아들과 함께 하느냐 아들이 함께 해 주지 않느냐로 갈려지는 겁니다.

그럼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느냐가 관건인데

도리어 이 광야교회에서 예수님은커녕

성전 숭배에 빠지듯이 우상숭배하더라 말이죠.

마치 십계라는 영화에서 보듯 송아지 우상을 만들더라 말이죠.
뭔가를 해야 한다 싶어서 자꾸 빈공간의 없음에 꽉꽉 채우는 겁니다.

믿음도 채우고 종교도 채우고 신앙도 행함도 꽉꽉
그 빈터의 없음 자체를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광야교회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것이 없어야 하는 없음의 공간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광야교회니까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범인에게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내세우게 되니

 

예수님을 쳐다보는

주의 인자하심을 쳐다보는 공간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여전히 선악의 법칙의 세계가 교회 속에서 활개를 치니

가증한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도망치라 말이죠.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이 출 이스라엘을 외치는 겁니다
.

이스라엘에 가증한 애굽이 섰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도망치는 겁니다.

 

요나서에서처럼 큰 물고기 뱃속으로 도망치는 겁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 줄이야

그 바벨론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 줄이야

 

특정 장소 특정 공간을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없음의 빈공간의 자리로 피신 시켰더니만

도리어 그 공간을 우상화 하는 붉은 큰 용의 짖을 하더라 말이죠. 애굽화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특정 공간을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 없음의 빈공간으로

인간들이 이 광야교회가 볼품이 없다고 온갖 것으로 꽉꽉 채워 버리는 겁니다.

목사 말 잘듣기를 교회에 채우지를 않나

십일조 드리기를 광야교회에 채우질 않나

교회 충성 봉사를 광야교회에 채우질 않나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그런 교회에서

그런 애굽에서 또 도망을 쳐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여자가 낳은 아들을 이기지 못하는 붉은 용의 분풀이로써 벌어지는 사태이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교회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이런 애굽에서 나그네로써 살 수 밖에 없는

발 붙일 곳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아들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겁니다.

머리 둘 곳 없게 땅에 발 못 붙이도록

텃새를 부리면서 자기들의 공간에서 나가라 라고 말이죠.

 

그러니 뱀의 후손에게 고맙죠

우리를 빨리 빨리 죽여서 이 텃새가 심한 곳에서 떠나도록 하니까 말이죠.

 

자 이것이 아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는 겁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을 미워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저들의 속을 박박 끍어댄다는 거죠.

심지어 권세까지 줍니다.

그것이 저들의 역할이다 라는 겁니다.

어서 너가 맡은 일을 하라고 가룟유다에게 어서 너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그는 돈을 받습니다.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립니다.

그 돈을 가룟유다는 못 씁니다.

자존심 곧 자아가 허락지 않거든요

심지어 스스로 깨닫거든요

그 스스로 깨달음이 모든 종교인데 결국 그 깨달음이 자살입니다.

자아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이 자아를 스스로 없애 버리는 겁니다.

불교가 이 자아를 없애는 훈련을 해요 글쎄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는데
이스라엘 독립운동을 하는데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데

예수님이 안 도와주는 겁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에 동참 안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파는 겁니다.

 

마치 장자가 다 죽으니까

애굽이 본색을 드러내듯이

이것이 인간은 원인에 따른 행동만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전혀 쓸모 없다고

건축자들이 성전을 짖는데 있어서 쓸모없다고 버리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정작 그들이 짖는 성전이 예수님 그 자체인데

껍데기에 미쳐 있다 보니 실상을 버리는 겁니다.

또 막상 실상인 성전을 봤더라도 예수님을 참성전으로 보더라도

자신들이 생각한 성전이 아니라서

원인이 없는 성전은 안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자신들의 손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건 성전이 아니라 조직이요 국가

그 국가가 바로 짐승 아닙니까

 

마귀의 세가지 시험 곧 메시아 면접시험에서 그런 국가 체제를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겁니다.

국가란
첫째 경제력이 강해야 하고 

둘째 신이 보호하는 기적의 국가이어야 모든 전쟁에서 승리해서 제사를 끊임없이 드릴수 있다 말이죠

셋째 온 천하 만국을 통일하는 강한 왕이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신국 신이 택한 제사장 나라?


그렇게 장악한 국가 곧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이다 말이죠
.

유대인은 마귀에게 장악 당해서 그저 저런 메시아만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그런 메시아 나라 운동의 조건에

하나님 나라 운동 조건에 하나도 맞는게 없어서

 

그렇게 은 20냥을 받고 요셉을 땅에 파묻어 죽여서 팔아넘어기듯이

30냥에 팔아 넘기는 겁니다.

그래 그래 그게 바로 너의 역할이야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 싶어서

노예로 팔아 넘기는 역할이다는 겁니다.

 

그 역할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은 30냥을 받고 팔았다는 것은 존재 가치로 봤고

가치 조건으로 돈을 받은 겁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건립회복 운동의 어마 어마한 가치를 매겼는데

이제는 딸랑 은30냥으로 볼 뿐이다는 겁니다.

노예 몸 값

인간의 믿음이 거짓인 이유는 결국 기대를 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 노예를 팔 때 받는 매매값 요셉도 은 20냥 결국 노예로 팔리거든요.

 

쓸모 없다는 없음의 값이다는 겁니다.

역시나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 떠나라 라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곧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이

그 상대적으로 드러날꺼 아닙니까?

저들은 존재로 봤거든요.

 

그러나 기능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존재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겁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랴 사람에게 도움 되는 것이 일체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결국 기능은 곧 사건 이다 말이죠.

기껏 존재의 최대의 무기는 죽이는 것 뿐입니다.

말 안들으면 죽여버리겠다는 살기 넘치는 살인의지이다 말이죠.

그러나 사건은 그 죽음에서 다시 3일 만에 다시 사는 겁니다.

그러니 헛짖을 하는 거죠. 저들은

 

그러니 쫏아내어도 안 죽고

싫어하고 미워해도 안 먹혀들고 하니

얼마나 불편하고 싫겠어요

 

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의 전쟁이라는 약속 자체가 싫다 말이죠.

왜 이런 일들을 벌리느냐 말이죠.

약속 자체를 거부하니까

주의 인자하심이 나타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니까

사건이 안 벌어지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돌부리에 다리 걸려 넘어지니까

이 돌을 걸림돌을 뽑을려고 하다가

다 말려드는 겁니다.

이 걸림돌 십자가를 뽑아서 바깥으로 던지면 던질수록 더더욱 안쪽으로 파고 들어와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고 안방 내 놔라 라고 하더라 말이죠.

 

자꾸 그렇게 긁어대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 약속 자체를 믿는 다는 것은 다 사기요 거짓입니다.

아브라함 때만 해도 함땅과 가나안 저주에 대한 노아 언약 다 잊어버렸으니

처음 듣는 소리이다 말이죠.

 

뭐 십자가? 야야야 2000년 전의 일이다 고만 좀 해라 라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 목사들이다 말이죠.

 

또 십자가 십자가만 주구창창 외치는 자들에게서는 늘 수시로 교회를 탈출하는

출애굽 사건이 안 벌어져요

사건이 없어요.

기껏 사건 이라고 해 봤자

돈 문제

성추행 문제

건물 때문에 돈 싸움 직분 싸움

다들 장로하는데 장로 안 세워주니까 삐져서 벌어지는 싸움

그 똥푸는 일이 뭐 좋다고 서로 할려고 ㅋㅋㅋ

여자 목사 안 세워준다고 반발하고

무슨! 교회가 인간들을 기쁘게하는 산당 같더라 말이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서로 찌지고 뽁고 싸워도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제시하면

언제 그랬냐 듯이 다 합심하여 일심동체로 덤벼드는

살기가 넘치는 곳이 교회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도 즉 구조 자체가 그래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서 고칠려고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 사단의 회가 맡은 일이거든요.

살기가 넘치는 곳으로써 말이죠.

 

이것이 계시록 초반에 반드시 일곱 교회라는 주의 오른팔에 붙잡힌바 된 교회가 있다면

그 상대적인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사단의 회가 상대적으로 놓여지는 겁니다.

 

물론 누가 이기고 누가 대세가 되느냐

사단의 회가 이 여자가 낳은 아들의 후손을 쫏아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광야란 어떤 특정 장소가 아닌

그 자체로써 없음으로 놓여지는 겁니다.

그냥 없어요 존재 가치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죽음으로 몰리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없음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오로지 3일 만에 다시 산 아들의 긍휼만 있을 뿐이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어요.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긍휼이 여겨주시느냐에 달린 문제이지

 

인간이 어떻게 개입하거나 나서거나 손댈수 있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냥 함께 죽을 뿐이다 말이죠.

다시 함께 사는 것은 예수님 마음대로인 주님의 자신의 피 바르심이지

나에게 달린 문제나 숙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참 이렇게 보면 참으로 무모하죠.

뭘 믿고 예수님을 믿겠냐 말이죠.

예수님 마음대로 인데

예수님 마음에 안 들면 그만이다 말이죠.

 

얼마나 냉소적이십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런 믿음을 우리가 무슨 수로 내어놓겠습니까?

 

저 고백이 그 여인에게서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피 바르니까

피가 저렇게 고백하도록 그 증상

피 발린 증상을 토해내는 겁니다.

주체는 여인이 아니라 피 였던 겁니다.

 

그러니 저런 고백을 할수 있을까

못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 자체가 안 먹히는 겁니다.

주체는 피에 달려버렸으니까 말이죠.

그냥 즐기는 것 밖에 없는 겁니다.

너에게 피 발린 그 피의 증상

십자가의 피 용서의 증상을 누리고 즐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그러니 가룟유다는 기능적으로 활용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자꾸 나의 존재를 이용해 달라 사용해 달라 라고 우기지만 말이죠.

주님은 자신의 피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라는 기능으로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라는 기능으로 볼 뿐이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의 피 용서 라는 주의 인자하심이 덮쳐지지 않는 이상

내 쪽에서 뭘 해서 다가가는 모든 것들은 똥내 나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바칠 생각 말고

주님이 주시는 것이나 누리세요.

 

오늘 계시록 12장을 통해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오늘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았습니다.

창세전의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으로 나타남을 보여주신 것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실상 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보는 것들은 다 허상이고

그림자 이고

진짜 현실

진짜 실상은 바로

이 창세기 3장의 내용의 기록된 말씀대로 되어 간다는 겁니다.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6, 개역)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그럼으로 우리가 아이를 낳고 잉태라는 고통을 느끼며

남자는 돈벌고 사회에서 욕먹어가면서 병들어 가면서 다쳐가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또는 해체 되는 것 조차도

모조리 다 이 십자가의 피의 영광이라는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우리는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미 무시험 합격으로 태어났거든요.

 

천국에 가면 남자 여자라는 것도 없어요.

잠시 이 땅에 살면서 기능으로 주어진 겁니다.

 

이것이 진짜 현실인 십자가의 피 전쟁 때문이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태이기에 즐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 속에 놓여졌기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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