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 보란 듯이 입히시는 찬송의 옷(희년) (시편 137)

 

마귀 보란 듯이 뒤집어 씌우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금가락지요

14-137 마귀 보란 듯이 입히시는 찬송의 옷(희년) (시편 137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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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137:1, 개역)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2, 개역)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137:3, 개역)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137:4, 개역)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137:5, 개역)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137:6, 개역)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137:7, 개역)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137:8, 개역)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137:9, 개역)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137:1, 새번역)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137:2, 새번역)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137:3, 새번역)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137:4, 새번역)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137:5, 새번역)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137:6, 새번역)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137:7, 새번역) 주님,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그 날에, 에돔 사람이 하던 말, "헐어 버려라, 헐어 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 버려라" 하던 그 말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137:8, 새번역)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 , '딸아'

(137:9, 새번역)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구원이란 원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상태에서 주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원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가를 주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그런 내용을 목격한 자를 증인이라고 합니다.

 

증인 목격자 증거자 말이죠.

 

예수님께서 희년을 외치시는데

그 희년의 대상이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 자에 이 희년이 주어진다고 외치십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럼 포로된 자에게 가서

갇힌 자아게 가서

억눌린 자에게 가서 외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증인으로써 목격자로써 증거자로써 복음을 외치신다면

그 복음의 대상을 향하여 외칠려고 하실 겁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사람들을 향하여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희년의 대상이 되는 자가 아니라

그 반대인 희년의 대상자가 될 수 없는 자

곧 포로 된자가 아닌 포로로 잡은 자들

갇힌 자가 아닌 갇히도록 한 자들

억눌린자가 아닌 억누른 자들

이 원수들을 향하여서 희년을 선포 하시는 겁니다.

 

그럼 당연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희년을 거부하는 반응 말이죠.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렇게 희년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알리바이를 형성한 후에

그 다음에 희년의 대상자들에게

저들이 발로 차 버린 이 희년을 이 기쁜소식을 전하는 겁니다.

 

왜 이런 과정을 거치시는 걸까요?

 

 

오늘날로 치면 교회에게 희년을 외치니까

교회 사람들이 이 희년을 거부하는 것을 확증하고

알리바이로 그 증거를 잡고

그 뒤에 희년의 대상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결국 복음을 누가 거부한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마귀 보란 듯이 금가락지를 끼어주는 겁니다.
꼭 마귀 듣는 앞에서 호산나 찬양을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가 설정이 되어야 하고

원수가 설정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 에이 그런 예수님은 아니다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 안믿는다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말이죠.

물론 교회는 아에 거부하고요

 

자 그렇다면

왜 주님은 뻔히 거부당할줄 알면서 왜 회당에서 외치실까요?

그냥 바로 저들 원수를 거치지 않고

바로 희년을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들에게 주시면 안되는 겁니까?

 

마치 복음을 증거하기 전에 반드시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에 받으시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은 결국 인간의 싸움이 아닌

육의 싸움이 아닌

여호와의 전쟁인 마귀와의 싸움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보여주기 위해 중간에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이 전쟁을 목격하는 셈입니다.

남의 전쟁인데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의 전쟁

십자가의 전쟁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나를 위한 구원은 없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37편은

바벨론에 포로 당해서

그들 바벨론이 야 시온의 사람들아 너희 시온의 노래 좀 불러봐

우리가 재미 좀 느껴보자 라는 식으로

모욕하는 장면입니다.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이 이방에서 부를수 있겠느냐

그럴꺼면 차라리 입이 달라 붙어서

혀가 입 천정에 붙어버려라

예루살렘을 기억치 못한다면 손이 말라비틀어져버려라 라고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면서 자신을 저주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원수들을 갚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어머니께 이 굴욕의 상태를 오히려 정반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되기 전에는 그럼 예루살렘에서 노래 불렀을까요?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요?

정작 그럴때는 안 부릅니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진짜사나이를 촬영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에 마시는 우유를 꿀맛 같이 여겼을까요?

애들이나 먹는 것이라고 아예 먹지도 않았을거 아닙니까?

 

매 순간 하나 하나가 모조리 다 감사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배부를때는 여호와의 노래를 안 불렀다 말이죠.

그런데 이제 바벨론 포로 당하니까

그것도 모욕을 당하면서 굴욕 속에서 이 노래

이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시온에서는 정작 줘도 안 부르는 노래를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은 약속 스스로가 지킨다 라고 말이죠.

원수 갚아 달라는 부르짖음을 절대 부르지 않던 자들이

이제야 원수 속에 놓여지게 되니까 원수 갚아 달라고 부르짖게 된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출애굽의 노래입니다.

 

저 원수 갚아달라는 요청은

결국 약속 스스로가 약속에게 요청하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게 아닙니다.

인간은 다시 배부르면 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수가 활개를 치든지 말든지

나랑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노래는 노래 스스로 노래 안 부르고는 못배기도록 배치시키는 겁니다.

도저히 노래 못 부르는 장소에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노래 부르는게 아닙니다. 인간이 찬양 부르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노래 부르는 사람이고 ccm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이고

노래가! 찬양이, 인간을 악기로 삼아서 피리로 삼아서

노래 부르는 노래가

바로 십자가의 노래입니다.

노래란 찬양이란 사건입니다. 묵시입니다. 역사나 행함이 배제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찬양이다는 겁니다.

 

이 찬송의 옷을 입혀서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서는 인간이 부르는 노래란 없습니다.

노래가 우리를 배치시키는 겁니다.

 

노래하기가 아니라

노래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김노래 이노래 박노래 최노래
박찬양 최찬양 김찬미 이찬송 으로 말이죠.

 

그것이 남들은 모두다 자기랑 사이 안좋은 사람을 다 피해서

노래 부르지만

왜냐하면 노래라는 즐거움을 원수 앞에서는 안부르겠다는 겁니다.

이 기쁨을 나눌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친한자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싶어합니다.
아니 누가 잔치날에 또는 노래방에 원수랑 같이 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복음은 우리를 마귀 코 앞에서 부르도록 한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희년을 누구 앞에서 제일 먼저 선포하는 겁니까?

원수 앞에서 말이죠.

이것 때문에 우리를 찬양자로 삼았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외치도록.

 

마치 듣기 싫은 소리를 그들의 귀에 대고

대놓고 외치는 겁니다.

그들에게 반드시 소음으로 들리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거리끼는 소리 불편한 소리로 말이죠.

호산나 호산나 ~~~~.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영광의 소리

아름다운 노래이다는 겁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똑같은 복음을 한 쪽에서는 기겁을 하면서 싫어하도록 되어 있고

다른 한 쪽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야말로 기쁘기 한량없도록 하시는

이 현상이 기이하지 않습니까?

 

인간 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가 있길래 이런 현상을 벌리시는, 사건을 터트리시는 것일까요?

 

바로 약속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한 쪽은 긍휼을 보여주는 그릇으로 약속을 담았고

다른 한 쪽은 진노를 보여주는 그릇으로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의 피가

곧 십자가의 노래가 이 둘을 가르는 겁니다.

 

그러니 의도적으로 마귀 코 앞에서 찬송의 옷을 입히시는 겁니다.

계시록에 거룩한 흰 옷을 일곱 교회에게 입히실때에

반드시 사단의 회와 구별 시키면서 대조시키면서 말이죠.

한쪽은 완악함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 쪽은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에게 찬송의 옷을 입히니까

정작 실로암 소경은 눈이 있어도 못 보는 그 예수님을, 눈이 안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보게 됩니다.

결국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찬송의 옷이 입혀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저 실로암 소경이 소경된 것이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라고 따지는 자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가 소경이 되었다는 그 영광이

눈이 있어도 보이질 않는 겁니다.

정작 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혀 못 보는 겁니다.
의사로 보일리가 없잖아요 자기가 일단은 환자가 아닌데
죄인이 아닌데
자기 죄냐 부모죄냐 라고 따지는 그 대상물이 아닌데.

 

그러니 정작 부모 죄인지 자기 죄인지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은

바리새인에게 해야 됨을 예수님이 팔을 어긋맞게 하신 물음이어야 하는데

그게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약속은 정작 정반대로

긍휼의 그릇은 실로암 소경이였고

진노의 그릇은 바리새인이였는데

 

그것을 정반대로 거꾸로 봐놓고서는

적반하장으로 도리어 큰 소리 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을 못 보는 소경으로 진노의 그릇으로 태어난 자가

도리어 고쳐달라고 저는 소경입니다 저를 고쳐주세요 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죄인입니다. 환자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의인이라고 하니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

진짜 소경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벌리는 전쟁을 보라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시온에서 살면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으면

의인인데

본다고 우기는데

어찌 예수님의 전쟁을 보겠습니까?

 

시온은 시온 스스로가 이루고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스스로가 이룹니다.

왜냐하면 모두다 약속의 개념이기에

곧 십자가 라는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의미들인데

 

시온을 소유해 버리니까

예루살렘을 소유해 버리니까

의인이라고 우길 뿐이지

죄인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전쟁을 보여줄 수가 없더라 말이죠

 

그래서 애굽 속에 집어넣습니다.

?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영광 받고자 말이죠.

그래서 바벨론 포로 당해 가는 겁니다.

찬송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 놓여졌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찬송은 바로 이 주님의 십자가의 전쟁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함으로 전쟁을 붙이시고

우리는 캄캄한 밤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부르짖도록

찬송의 옷을 입히시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그 전쟁을 통해서 원수 보란 듯이 주님을 찬송케

찬송의 옷을

금가락지를

오직 택하진 족속으로 입히시는 겁니다.

 

이것이 찬송이 찬송 스스로의 약속을 성취하는 방식입니다.

이 찬양의 사건 속에 우리는 찬양자로 태어났기에

무조건 십자가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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