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에게 권세를 받은 짐승 (13: 1-10)

 


(
13:1, 개역)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13:2, 개역)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3:3, 개역)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4, 개역)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3:5, 개역)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6, 개역)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13:7, 개역)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개역)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9, 개역)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개역)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오늘 뉴스에서 사우디 아랍 여성이 미니스커트 입은 영상을 내보내다 결국 체포가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제가 며칠전에 이 뉴스를 접하고서 어머니께 저 여자 반드시 잡힐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더라 말이죠. 물론 누구든지 다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불과 몇 년전에 무슬림 여성이 남자친구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그 여성의 아버지가 딸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도 있었고

뭐 이런 명예살인은 하도 많아서 하나 하나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다반사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방금 전에

이스라엘 기독교인이 딸이 무슬림 청년과 사귄다고 역시나 죽여버렸다는 인터넷 뉴스를 보고서

어머니께 보세요 어머니 방금 말한대로이지요? 라고 했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냐 하면

욥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욥이 저주를 받으니까 욥의 세친구들이 회개를 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런데 욥에게는 그런 해석은 나도 안다

다윗이 그런 해석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라고

이제는 먹고 마시고 막 노래부르고 막 춤을 출때에

신하가 왕이시여 좀전까지만 해도 금식 기도 눈물 회개하시더니

혹시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것 아닌가요?

 

아니다 정신 멀쩡하다

저런 회개 눈물 기도 금식으로 혹시 살려볼려고 했는데

그런 해석으로는 통하지 않음을 기뻐한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어려운 신학용어 엘로힘과 여호와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욥의 세친구의 해석은 시간 순으로 가는 존재 개념은 엘로힘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런 해석으로는 이 저주가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고 하는 것이

욥의 해석입니다. 곧 엘로힘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기능의 하나님 이름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해석이 욥에게 덮쳐진 겁니다.

곧 마귀와 하나님의 내기에 중간에 낑긴 상태이다는 겁니다.

 

욥이 미니스커트를 입게 되니까

욥의 세친구들이 욥을 죽일 듯이 달려들어 어서 회개하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욥은 그런 해석 나도 할 줄 안다 그러나 그런 해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밤새도록 건지러워서 빡빡 끍어대고 있는데 온 몸을 가리는 히잡같은 것을 쓴다고 이 피부병이 해결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삐를 던질때에

하필이면 예수님이 옆을 지나가게 되니까 시험을 테스트를 하는 겁니다.

과연 어떤 해석을 할지 말이죠.

 

만약 예수님의 해석이 율법을 그것도 거룩한 율법을 어겼다고

돌삐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자들과 똑같이 돌삐로 쳐 죽여버린다면

마리아 예수님 어머니를 돌삐로 쳐 죽일려고 했던 자들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그러니 모든 인간은 엘로힘이라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말이죠.

결국 신은 없는데 신을 자기 존재감으로 투영을 해서 믿고 있으니 엘로힘이다는 겁니다.

가짜 하나님이다 말이죠, 존재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니 기독교는 종교가 될 수 없어요.

복음이지

종교는 일단 사기를 치거든요.

이스라엘 기독교인이 딸을 죽이는 이유도 그렇고

무슬림 아빠가 이슬람 아빠가 딸을 죽이는 명예살인도

불교도 모든 종교도 결국 신이란 것은 엘로힘

곧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 정반대인 해석이

바로 욥에게 덮쳐진

하나님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이름은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이름은 존재 없음이다는 겁니다. 비존재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어요.

 

존재는 힘이 된다 말이죠.

이름은 아무런 힘이 없다 말이죠.

 

이 하나님의 이름의 기능만 있을 뿐이다는 겁니다.

신체 없는 기능

존재 없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세친구는 엘로힘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모든 일들을

그런데 욥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 그 낯선 이름이 덮쳐져서

누구를 미리 보여주게 됩니다.

바로 여호와의 이름인 예수님입니다.

 

자 그렇게 되니 이 이름이라는 기능 때문에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졸지에 예수님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게 됩니다.

엘로힘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덮쳐지게 되니까

 

흠모할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얼굴도 없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참으로 볼 품 없는 모양으로 욥 마저도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저주 받았으니 당연하죠

자 그렇게 되니

주변에서 다들 하나님 원망하고 죽어버려라 라고

마누라까지 저주하고 나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짐승의 모습의 반대된 모습입니다.

 

(13:1, 개역)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13:2, 개역)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3:3, 개역)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4, 개역)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힘이라는 구석은 전혀 없는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에 비하면

짐승은 모든 구석 구석이 모조리 힘 힘 힘 뿐이다는 겁니다.

 

욥 자체가 존재로 남아있을때에는

그 욥에게 주어진 재산 복받음 등등으로 주변인들이 다 배치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저주를 받으니까 복받음이고 뭐고 재산이고 뭐고 다 날라가 버리니까

주변인들이 다 사라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랬거든요.

제자들까지 다 도망치는 겁니다.

 

? 이것이 존재가 아닌 기능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거든요.

기능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말이죠.

 

존재로 있을때에는 다들 가능성과 어떻게 해서든 같이 소통하고파서

접속 연결을 시도하고

동일성 합일화 일체화 한다 말이죠.

그래서 따라할려고 하고

성화될려고 하고

자꾸 인간 자기 숙제로 뭔가를 자꾸 할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존재입니다.
나 라는 자아는 이제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겁니다. 유비쿼터. 무소부재. 접속이다 말이죠.
네트는 광대하다 말이죠.

 

그러니 욥을 존재로 본 주변인들이

마누라도 자식들도 모조리 이 재산 중심으로 욥을 봤다는 겁니다.
마귀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봐줘서 라는 것이다는 말의 해석과 동일합니다.
재산 거들내면 하나님을 원망할꺼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돈이고 뭐고 재산이고 뭐고 다 탈탈탈 털리니까

주변인들이 다들 저주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 곧 기능이 덮쳐지니가 다들 등돌리더라 말이죠.

 

괜히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서는게 아닙니다.

전재산을 전부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게 되면

착한 일 했기 때문에 뿌듯할 거야 라는 그런 단순한 생각이 드는게 아니라

과연 주변인들이 내 주위에 과연 남아 있을까?

이게 본심이다 말이죠.

다 등돌리고 돌아서는데??

 

그렇게 왕따 당할빠에

부자청년 본인이 예수님의 그 말씀을 왕따 시켜버리는 겁니다.

이게 존재의 한계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기능이 덮쳐져 버리면

이 존재와의 충돌 곧 엘로힘과의 충돌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무슬림도 이슬람도 아까 이스라엘 기독교인도

모조리 다 엘로힘입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엘로힘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짜죠.

즉 인간 쪽에서 가능한 믿음으로 신에게 다가가겠다는 식입니다.

 

욥의 세 친구처럼 해석하는 겁니다.

가인도 사울 왕도 그리고 야곱의 형 에서도

 

이들이 모두 하나님을 안 믿은게 아니다는 거죠.

다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게 가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이 된 자기자신을 투영하는 겁니다.

곧 자기를 믿는 거다 말이죠.

마귀가 이런 광명한 천사와 같은 하나님을 설정시켜서 거기에 모든 인간들이 숭배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욥에게 덮쳐진 여호와의 이름은 바로 저런 엘로힘과 싸우는 하나님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결국 마귀와 싸우시는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마귀와 하나님의 내기 장기 싸움이 욥에게 덮쳐진 겁니다.

전쟁의 하나님이다는 거죠, 전쟁이라는 기능이기에

인간의 모든 믿음을 단절 시켜 버리는 겁니다.

오로지 마귀와 싸워서 그 승리의 전리품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은 행함이고

시간 순서대로 가는 것이고

그러니 시간을 빼버리면 인간의 행함은 무용지물이 되는 똥덩어리 배설물이고

 

믿음이라는 사건은 미래에서 쳐들어와서 현재를 구성하니까

그냥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누리는

항상 선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선물로써 말이죠.

 

그러니 인간 쪽에서 신에게 향하는 방식은 없는 겁니다. 그런 엘로힘 방식은 없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이름 방식 곧 전쟁이라는 기능을 수행해서

그 전쟁의 승리로써 주어지는 선물 개념이 믿음인 겁니다.

주님 쪽에서 부어주시는 믿음 뿐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어머니께서 그게 성령이제? 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12:18, 공동) "보아라, 내가 택한 나의 종 내 사랑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 그에게 내 성령을 부어주리니 그는 이방인들에게 정의를 선포하리라. / 이사 42:1-4.

(2:17, 공동)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요엘 3:1-5.

(2:18, 공동)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2:29, 현대인) 그 때에 내가 또 나의 남녀 종들에게 성령을 부어 줄 것이며

(2:33, 가톨릭)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자꾸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겠다 성령을 부어주겠다 라고 하시는 이유가

주님 쪽에서 주시는 방식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이라는 기능을 펼치실때에

이름으로 즉 아무것도 없는 그 이름으로 승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는 이름으로는 승리를 못하고 뭔가 자꾸 힘을 추구함으로써 승리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기 창 칼 권세 이다는 겁니다.

 

이름은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것으로 승리이기에

그래서 오히려 힘빼는 존재감 자체를 삭제하는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할례를 전쟁 바로 직전에 하는 겁니다.

없음으로 전쟁하는 거죠.

 

그런데 존재는 있음으로 전쟁을 하고 전쟁 자체를 하지 않을려고 하는 겁니다.

이미 자기들끼리의 서열 전쟁이 다 정리가 되었는데

왜 외부에서 뜨인돌의 시비를 당해야 하냐 말이죠.

 

출애굽 전쟁이 바로 이름 전쟁이거든요.

이미 노예로써 전쟁을 종식시켰다 말이죠.

노예가 무슨 놈의 전쟁을 수행하느냐 말이죠.

노예들의 신은 이미 노예가 된 상태로써 이미 진 건데

존재 로써 이미 서열이 정해졌는데 무슨 놈의 전쟁

 

그런데 자꾸 모세는 이름을 말하는 겁니다.

뭐 누구 ~~~~

황비홍처럼 누구 ~~~~

누구 ~~~

 

그런 존재감 없는 신의 이름은 처음이다

들어본적 없는데?

여호와가 누군데?

난 모르겠는데????

 

이름으로 전쟁하는 자는 처음이다 말이죠.

그런 신은 처음이다 말이죠.

다들 존재감으로 전쟁하는데

그래서 이미 존재감으로써 서열을 정했고

노예의 신은 제일 밑바닥으로 정해졌는데 무슨 놈의 전쟁

전쟁의 기회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말이죠.

 

시비를 거는 쪽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이다 말이죠.

그래서 먼저 10가지 재앙으로 10명의 신을 건드리는 겁니다.

최종 장자의 죽음은 곧 인간이 곧 최종적인 신이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신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저들은 방어전만 펼치다가 드디어 참다 참다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함으로써

여호와의 구원을 펼치는 겁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라고 ~~

 

! 성경은 그야말로 말 되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는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을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땡빵으로 행하는 겁니다. 지키는 겁니다. 시간을 개입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기능은 지금 현재도 저 사건이 현재도 벌어짐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덮쳐지고 있기에 지금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니 바로왕을 강퍅케 함으로써 여호와의 이름
곧 내가 누구인지 기다려봐 곧 알려줄게(우비 소녀 ~~)

라고 기능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름이 펼치는 전쟁입니다.

 

이름 곧 아무것도 없는 데

존재하지도 않는데

결국 노아 때에 함 과 가나안이 모든 나라 중에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길

완악한 자들이 되길 일부러 기다린 겁니다.

그리고 약속 곧 언약을 실행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돌이 굴러들어와서 박힌 돌을 빼내듯이

완전 박살을 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오늘 짐승이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의도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도록 말이죠.

그래서 무너뜨릴때에

제대로 효과를 보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기생 라합이 여호와의 이름에 간담이 녹았다 라고 표현하듯이 말이죠.

믿음을 선물 주시고자 말이죠.

 

그러니 오늘 본문에

얼마나 짐승의 능력이 대단한지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심지어 죽임 당한 어린양의 표현에서

다 죽여버리더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땅의 사람들은 그 짐승에게 경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13:7, 개역)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개역)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4, 개역)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짐승의 승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정작 출애굽 하듯이 주님은 자기 백성을 빼내시면서

승리자가 아닌 패배한 죽임 당한 어린양을 강조하는 겁니다.

 

뭐 승리? 승리 뭐 어쨌다고!

세상은 모조리 다 승리자에게 관심 있지

패배자에게는 관심 없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구원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저들 승리자는

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짐승에게 패배 당하고 죽임 당하는 방식이 바로

빼내시는 구원 방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별 차이 차별 구분이라는 거룩이 임하는 겁니다.

곧 죽임 당한 어린양에게 연합 되는 겁니다.

 

결국 저렇게 짐승의 승리의 모습이 우리 자아가 바라는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죽임 당한 어린양

곧 풍채도 업고 흠모할 모양이 없는 모습

패배한 모습은 우리 자아가 싫어한다 말이죠.

오죽 하면 욥의 세친구들이 친구 생각한답시고 회개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그것이 바로 욥의 세친구들과 같은 짐승세계에서 빼내셔서

일찍 죽임 당한 예수님의 세계에 집어넣는 방식인

그림자 출애굽의 실상인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

 

(13:10, 개역)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칼로 흥하고 승리한자 칼로 망한다고

무슬림이든 이슬람이든 이스라엘 기독교인이든

결국 칼을 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들의 승리로 딸이 죽어나가고

서로 서로 죽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우기지만

? 자존심 때문에

자아의 신앙이 실패하면 안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딸을 총으로 쏴 죽여야

그래야

자기가 동네사람들로부터 돌삐 맞아 죽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 세상의 법칙이기에

짐승 세계의 방식이기에

 

그 짐승 나라에서 죽임당하고

패배 당함으로써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제대로 된 실상을 보라고

눈 있는 자는 보라는 겁니다.

마귀의 정체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겁니다.

저들이 겁나는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음을 더 두려워 하라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이미 받았기에

오히려 그 저주 받은 티를

저들 짐승의 세계에서는

승리자로만 남을려고 발악을 하는 겁니다.

 

애굽 보세요 다시는 저 애굽 사람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이 약속이 언약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사라진 애굽을 이스라엘이 복원시켜서 본인들이 애굽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기독교 아버지처럼 딸을 죽이면서 까지 말이죠.

인간에게서는

죽임 당한 어린양의 세계를 갈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짐승에게 경배를 해야만 그 주변 환경에서 살아남는다 말이죠.

패배자가 되면 안되는 방식이 짐승의 세계인데

 

이것이 이미 벌써 패배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겁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안 들리는 것을 들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오히려 패배하고 죽임당한 그 어린양의 세계가

바로 생명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그 정과 욕심을 못박히는 것이 약속만을 바라보는 성도인 겁니다.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왜 마귀에게 저런 역할을 맡기셨는가?

주의 인자하심 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에

그 주의 인자하심만 바라보라고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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