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규정하는 주의 인자하심(약속) 완성 (시편 144)

 


(
144:1, 개역) [다윗의 시]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144:2, 개역)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144:3, 개역)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144:4, 개역)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144:5, 개역)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144:6, 개역)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144:7, 개역)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144:8, 개역)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44:9,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44:10, 개역)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144:11, 개역)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44:12, 개역)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144:13, 개역)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144:14, 개역)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144:15, 개역)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44:1, 새번역) 나의 반석이신 주님을 내가 찬송하련다. 주님은 내 손을 훈련시켜 전쟁에 익숙하게 하셨고, 내 손가락을 단련시켜 전투에도 익숙하게 하셨다.

(144:2, 새번역)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산성,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뭇 백성을 나의 발 아래에 굴복하게 하신다. / 18:2와 삼하 22:2를 따름. , '변함없는 사랑' 히브리어 사본들과 시리아어역과 아퀼라역과 제롬역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내 백성을'

(144:3, 새번역)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생각하여 주십니까?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하여 주십니까?

(144:4, 새번역) 사람은 한낱 숨결과 같고, 그의 일생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144:5, 새번역) 주님, 하늘을 낮게 드리우시고, 내려오시며, 산들을 만지시어 산마다 연기를 뿜어 내게 하십시오.

(144:6, 새번역) 번개를 번쩍여서 원수들을 흩으시고, 화살을 쏘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려 주십시오.

(144:7, 새번역) 높은 곳에서 주님의 손을 내미셔서 거센 물결에서 나를 끌어내시고, 외적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44:8, 새번역) 그들의 입은 헛된 것을 말하며, 그들이 맹세하는 오른손은 거짓으로 속이는 손입니다.

(144:9, 새번역)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새 노래를 불러 드리며, 열 줄 거문고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144:10, 새번역) 왕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주님, 주님의 종 다윗을 무서운 칼에서 건져 주신 주님,

(144:11, 새번역) 외적의 손에서 나를 끌어내셔서 건져 주십시오. 그들의 입은 헛된 것을 말하며, 그들이 맹세하는 오른손은 거짓으로 속이는 손입니다.

(144:12, 새번역) 우리의 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나무처럼 튼튼하게 잘 자라고, 우리의 딸들은 궁전 모퉁이를 장식한 우아한 돌기둥처럼 잘 다듬어지고,

(144:13, 새번역) 우리의 곳간에는 온갖 곡식이 가득하고, 우리가 기르는 양 떼는 넓은 들판에서 수천 배, 수만 배나 늘어나며,

(144:14, 새번역) 우리가 먹이는 소들은 살이 찌고, 낙태하는 일도 없고, 잃어버리는 일도 없으며,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이다. / 칠십인역과 아퀼라역과 심마쿠스역과 불가타를 따름. ,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고', 곧 새끼를 배서 몸이 무거운 것을 말하거나, 살이 쪄서 몸이 무거운 것을 말함 또는 '뚫리는 일도 없고' 또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도 없고'

(144:15, 새번역) 이와 같은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다. 주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다.

 

 

인간의 구원이 헛되다 라는 것은

마치 사람의 수인 666이라는 것이 미흡하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구원이 미흡하고 모호하고 의문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겁니다. 헛짖이다는 겁니다.

 

그럼 완료는 뭔데? 그것이 바로 일곱 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입니다.

곧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시편에서 주의 인자하심이란

밤에는 주의 성실하심으로 원수 속에 집어넣고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새벽을 맞으며 찬송의 옷을 입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는게 아니라

바로 다윗 만이 이 주의 인자하심을 외치는 찬송의 옷을 입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며는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이라는 심판을 제대로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44:10, 개역)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이게 완료입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하게 기록된 완료성

미흡함이 없는

의문이 없는

모호하지 않은 또렷함

이것이 미쁘심 이다 말이죠.

 

결국 다윗은 그 해하는 칼에 놓여지는 겁니다.

곧 심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에 놓여지듯이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내세우는 구원의 조건

즉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율법사처럼 큰 계명 두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등등을 지키는 것이 인간이 내세우는 구원의 조건인데

 

그런데 이것이 미흡한 666 바로 사람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뭘까요?

 

베드로가 남을 몇 번까지 용서해야만 합니까? 7? 8번 이라고 했을때에

770번 곧 490번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하라 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일에서 벗어나는 불가능한 소리를 하셨다 말이죠.

아니 주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를 이야기 하셔야지

왜 자꾸 인간이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한 소리를 하게 되면

그것은 666이 되는 사람의 일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은 못하나 하나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미흡하기에 오로지 심판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바리새인은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을 외치는 입장에서

정작 세리는 머리도 못 들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심판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전의 기능이 뭡니까?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말이죠.

기도란 저는 무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는 곳이다 말이죠.

즉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우는 자가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다윗이 시편 다 끝나가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웁니다.

우는 연기를 한다고 했지요.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처음사랑 때처럼 말이죠.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그리고 같이 울자 라고 확 등떠밀어 물에 빠뜨려 울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출애굽을 입만 띠면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완료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ㅋㅋㅋ

말이 되나요?

 

오히려 정반대죠

성전에서 바리새인처럼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완료처럼 보입니다.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해 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들 교회에서 이런 기도를 하기를 원하거든요.

 

? 완료처럼 보이거든요. 복 받은 자처럼 보인다 말이죠.

 

결국 세리처럼 기도하는 자는 사실 없어요.

불가능해요

나 실패했습니다. 나는 패배했습니다.

나는 마땅히 망해도 쌉니다.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에게서 성전에서 쫏아낼려고 한다 말이죠

 

자 그러고 보니 계시록 초반의 일곱교회와 사단의 회의 충돌과 똑같지 않습니까?

즉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곧 십자가 사건을 무한반복하시겠다는 겁니다.

 

세리 매국노 세리는

칠칠맞게 교회에서 맨날 울고

교회에서 저주 받고

교회에서 심판받고

교회에서 미움받으면

저 교회 끄트머리에 앉게되지

교회 중앙에 서지를 못하잖아요

성전의 중앙자리는 다 바리새인 곧 짐승의 수를 받은 666 사람의 수가 다 차지하게 됩니다.

 

그저 교회에서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한다면

분위기 다 흐려 놓는다고 나가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욥 보세요

재산 있을때에는 주변인들이 뭐 하나라도 얻게 될까봐 어슬렁 거리다가

욥이 저주를 받아 다 날라가게 되니까

에라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라고 외친다 말이죠.

 

이게 바로 완료 이다는 겁니다.

전혀 완료 스럽지 않은 것은 완료라고 하고

 

완벽하게 다들 부러워 하는 저 바리새인의 기도내용처럼

다들 따라하고 싶은

저 완료 완벽하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가장 의문의 가장 미흡한 가장 모호한

바로 사람의 수 666과 같은 사람의 일이다는 겁니다.

 

뭐 몇 번 용서? 7? 남을 8번 용서하겠다고?

그런 모호한 것을 원해?

더 나은 제사를 원해?

완료를 원해?

완료요

그럼 남 용서 할 생각 말고

너나 예수님으로부터 770번 무한대로 용서받아야 할 판국인

심판 속에 매일 매일 놓여진

십자가의 저주 속에 놓여진 것이 바로 완료야

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야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다윗을 칼로 해하는 이스라엘 국가요 세상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을 칼로 해하는 이스라엘 나라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세상이다는 겁니다.

그런 죽은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쪽 강도가 외쳤다는 것은

죽은 자가에게 무슨 살려달라고 외치냐 말이죠?

그게 정상입니까?

가능한 소리이냐 말이죠.

단절의 소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이게 실상인데

저런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아예 안 보이고

배부른 소리로

남을 7번 용서할까요 8번 용서할까요 라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 마귀와 전쟁인데

오로지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그저 그저 사적인 구원의 조건 갖추기 라는

짐승놀이

종교놀이

구원 놀이에

늘 미쳐있다는 겁니다.

곧 자기를 위한 우상놀이다 말이죠.

이게 짐승이예요 666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짐승을 목격한 겁니다.

그리고 다윗이 눈치를 챘다는 이유로

다윗에게 해를 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자 이 다윗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재편 재편성 하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재편성하는 겁니다.

다윗이 곧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울잖아요 ~~~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를 정말 떠나 가나요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 처음사랑 때문에

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곧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다윗은 무능한 입장 속에 놓여져서 심판 받는 겁니다.

고난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십자가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다윗 자체가 하나님의 집으로써 기도하는 집으로써

불쌍히 여겨 달라고

저 원수로부터 건져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다윗 혼자만 말이죠.

 

욥만 저 원수로부터 건져달라고 우는 겁니다.

 

엘로힘 하나님 믿고 있는 자들은 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구원의 조건인 회개를 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회개하라고 욥을 다구치는 겁니다.

친구 랍시고

 

그런데 욥은 욥의 세친구를 위해서 성결제사를 드립니다.

즉 이 말은 스데반 집사의 외침처럼

주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뜻이다 말이죠.

 

회개를 하나의 구원 조건으로써 행하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마치 방언 터지게 할려면 주기도문 100번 외워라 라고 하는 식입니다.

더 웃끼는 것은 수준 높은 성화론자들은 저런 수준낮은 짖은 안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짖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성화 하겠다는 자체가 그런 발상이더라 말이죠.

 

그래서 무능하게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는 다윗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저런 다윗의 수준낮은 짖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무능하게 살려주세요 하고 할빠에

뭐라도 하겠다는 겁니다. 뭐라도 해야 문제를 해결할 것 아니야

왜 자꾸 하나님 못살게 자꾸 뭐 달라고 하면 안된다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가 아닌 딱딱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어른이 된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놀랍게도 그런 사기술이 먹혀 들어요 글쎄

 

사도바울 같으면 어딜 감히 꾀냐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냐 라고

자신이 그 짖의 달인이였다고 아주 호통을 칠 꺼다 말이죠.

 

그러니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능한 젖먹이를 통해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여호와 거룩한 전쟁 말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전쟁 말입니다.

 

당당하게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았음을 내세우고 싶으십니까?

교회에서

성전에서 무엇을 내놓고 싶냐 말이죠.

 

누가 봐도 무능한 모습은 실패한 패배한 모습을 다들 싫어합니다.

그런 모습 내어놓았다가는

부자청년처럼 주변인들이 다 떠날까봐 등돌리고 갈까봐

자신이 등을 돌려 버리는 겁니다.

 

결국 다들 바리새인의 기도를 성전에서 하고 싶어 한다 말이죠.

그것이 훨씬 더 완료된 모습이다 말이죠.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짐승의 수를 세우고 싶어 한다 말이죠.

이런 환경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아니 누가 남을 78번 용서하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하지

오히려 남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 하냐 말이죠.

 

그런데 시편 달달 외웠다는 저 유대인들이

심지어 베드로 조차도

시편 전체가 울 잖아요

그런데 정작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다들 남을 7번 용서 할까요 8번 용서할까요

또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또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하소서 당장 지키겠습니다

또 율법사처럼 큰 계명 두 계명 지켰다는 둥

또 안식일을 지키는데 왜 당신 제자들은 안식일 안 지키느냐는 둥

 

우는 자가 없고 다들 내세우기 바쁩니다.

성전에서 마저도

예수님 앞에서도 마저도

 

모든 시편 어릴적부터 달달 외운 인간들이 모조리 다 우는게 아니라

우는 자가 복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로

우는게 아니라 다들 뭔가 행했다고 자꾸 행한 것을 예수님에게까지 들이내미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을 보고 770번 용서해주세요 라고 울어야 할 판국인데

아무도 살려주세요 라고 우는 자가 없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먹지 않습니까 라고

정작 유대인을 찾고 유대인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교회 한번 다닌적 없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은 처음 듣는 이름이고

 

심지어 딸이 귀신들렸으니

다들 저주 받았다고 손가락질 하는 판국에

 

긍휼히 여겨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울면서 주세요 주세요 라고 달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이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이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시지 않으면

이 죽음 속에서 건져 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인간 관계를 엉망으로 해서 살아왔으면

아무도 건져줄 자가 없는 겁니다.

귀신들린 딸이 있다고

다들 피해 가는 겁니다.

 

강도만났다고 피를 흘린다고 레위인도 제사장도 부정함을 만지면

율법을 어기게 되니까

이슬람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하니 이스라엘 기독교 아빠가

딸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살인입니다.

종교란 짐승입니다.

뭐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양탈리마을에서 그런 사기를 쳤지요

양의 탈을 쓴 늑대다 말이죠.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미흡합니다. 저울에 달아 보면 택도 없이 미달합니다.

그냥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 곧 770번 용서 곧 무한대의 용서를 받으세요

 

괜히 7이 아닙니다.

7이란 심판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심판의 주입니다.

심판의 주 앞에서는 심판 뿐입니다.

 

완료인 7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 미달상태입니다.

모두다 6이라는 미흡한 수를 반복할 뿐입니다.

저울을 재니까 부족해요

부족하면 무조건 심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주어야 저울에 딱 맞다 말이죠.

그런데 전재산을 누가 가난한 자에게 줍니까?

 

제가 이런말 하니까

진짜로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줄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는데

절대 그러지 마세요

물론 그런 인간 없습니다만 종교성이 강한 청소년들은 정말로 시도를 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리고 평생을 잊지 못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줄 생각 말고

가난한 자 버릇 듭니다

결국 가난한 자 끝까지 돌보는게 아니라

그런 자도 없지만

가난한 자에게 베풀었던 자기자신을 평생 잊지 못하고 돌보기에 미쳐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가난한 자는 없어요

그 상대적인 분은 예수님이지

7번 용서하겠다고 전재산을 나누어 주겠다는 인간 곧 나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유일하게 부요하신 분이

도리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으로써

 

진짜 가난하신 분이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딱 한 분 가난한 자

딱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유일하게 마음이 가난한 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도리어 770번 용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그런거 낼 생각 하지 마시고요

한국에만 있는 십일조 말라꼬 지킵니까

오히려 한국선교사들이 미국 등등에 가서 십일조 문화를 수출할려고 한다죠

짐승놀이 종교놀이를 한국에서도 모잘라서

게임을 해외판으로 벌리는 해외원정도박을 벌리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뭘 해도 강도의 소굴입니다.

주여 심판받아 마땅하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할 판국입니다.

이것이 주여 남을 용서하는게 아니라 제가 주님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

그 사람 자체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전 3:9, 개역)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서는 십의 이조 드렸다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전은 놀라운 탄식 소리만 외쳐질 뿐입니다.

이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주의 인자하심만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다윗이 살려주세요 건져주세요 제발 구원해 주세요 라고

사람을 구원해 달라가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구원을 외친다는 것은 의문의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의문을 구원해서 뭐하게요

모호함을 구원해서 뭐하게요

우상을 구원해서 뭐하게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수도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수도 없는

그런 우상을 모호함을 흐릿함을 그런 안개를

그런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인생을 구원해서 뭐하게요

 

다윗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약속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 때문에 우리 손에 죽은 예수님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왜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라고 하셨을까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식을 위해 말이죠

 

주님은 심판을 받는게 아니라

도리어 심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이룰려고 가시는 겁니다.

 

아니 누가 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지

울어주는 아낙네들이 공감능력이 뛰어난 여성이기 때문에 울어주고 있지

아낙네들이 저주 받고 있지 않거든요

지금 예수님이 저주인 십자가에 달리고 있지

아낙네들이 십자가에 안 달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위해 7번 울지 말고

너나 예수님의 우심 그 피 흘리심이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770 받아라 라는 겁니다.

 

도대체 보이는 눈에 보이는 대로 보시질 않는 겁니다.

총명 곧 지혜로 십자가가 밝히 보임으로 볼때에

짐승에게 당하고 있는 것은 너이지

내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 다윗은 왜 우는 겁니까?

왜 약속을 구원해 달라고 우는 겁니까

연기라고 했습니다.

이미 약속은 성취 되었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 약속이 성취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봐버렸고

그 십자가의 피 언약이 덮쳐졌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도 안 웁니다.

그러나 다윗은 웁니다.

 

정작 울때는 안 울고

피리 불어 웃어야 할때는 애곡하는 거꾸로 된 상황을 다윗은 연출하고 있는 겁니다.

 

신하가 묻습니다.

왕이시여

조금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왜 지금은 웃습니다.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노래부르고 막 춤추십니까?

지금 그렇게 막즐기는 분위기 아니잖습니까?

막살면 됩니까?

지금 이 분위기에서?

애가 죽었는데?????? 아이가?

그런데 꺽으신 뼈로 즐거워 하는 겁니다.

 

오히려 잔치를 벌려요 글쎄 ~~~

 

다윗은 진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안 보이는 것을 무슨 수로 봅니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다니면서 미치고 환장했을 겁니다.

어서 이 로마제국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독립운동 펼치실줄 알았는데

속 터지게 잔치를 매일 매일 벌려요 글쎄

 

너무 너무 막살아요 글쎄

 

도저히 참을수 없어서 차라리 일본군 손에 죽을빠에 내 손에 죽으라고 노예로 팔아버린다 말이죠.

 

그 잔치 은 30냥에 나도 한번 즐겨보자 라고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은 애곡할때이다 라고 갑자기 잔치상을 다 접어요

 

이것은 가룟유다 옳치 너 잘 걸렸다

어서 너가 맡은 일을 해야 때가 다 되었어 어서 하렴 이라고

 

피리를 불 때 운다고 티박을 주더니

이제는 피리를 불려고 하니

애곡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 말이죠.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 히스테리 희숙대리 입니까?

 

이것은 바로 사람의 일 곧 짐승을 겨냥한 상대적인 모습

곧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짐승에게 잠식 당한 상태라서 진짜 현실을 못 보는 소경이거든요

 

예수님은 짐승이 보인다 말이죠.

그 짐승만을 상대로 하신 모습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다윗 또한 누구를 상대적으로써 느껴서 울부짖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때려죽어도 안 보이는 원수를 보고서 우는 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돋보기까지 사용해서 다윗을 관찰해도

다윗을 해하고자 해꼬지 하는 칼이 안보인다 말이죠.

 

저는 이 시편 140 막바지 부분을 보고서 놀란점이

마무리가 되지 않고

새롭게 시편 1편으로 다시 돌아간 듯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는 표현에 놀랬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시는 모습을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이 아닙니다.

그런 개인이면 따라하면 된다 말이죠.

 

이게 따라하고 흉내낼수 있는 입장입니까?

쉽게 말해서 씌인겁니다.

예수님이 씌인겁니다

꽁깍지 씌이듯이 예수님만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덮쳐져서 지금 다윗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편 대로 오심이 맞죠

그런데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런 다윗 앞에

그런 예수님 앞에서

그저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남을 7번 용서할까요 라고 하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말을 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짐승 곧 시편에서는 원수죠

이 원수에게서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그럼 원수에게서 건져주세요 라고 해야 할 판국인

우는 자가 되어야 할 판국인데

주여 저 소경입니다 고쳐주세요 진짜 현실을 못 보고 있습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인데

원수가 안 보이니까 다들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둥

구원 그 이후의 삶은 쪽팔리지 않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둥

한 마디로

다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종교놀이에 게임중독 된

짐승의 표 666이라는 짐승의 수

사람의 수 그 의문의 반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상대적인 십자가라는 심판 곧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곧 대접이라는 심판

십자가라는 저주가 밝히 보이지 않으니까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우리를 대신 해서 지금 외치고 있습니다.

주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고자 말이죠.

 

이거 아니면 주의 인자하심은 없으니까 말이죠.

다른 것이 기록되지 않았거든요.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목놓아 입이 찢어지라고 광야에서 아무도 안듣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으라고 외칩니다.

 

이 약속을 어서 다 이루어 주소서 라고 말이죠

마치 사도요한이 계시록에서 아무도 인을 땔 자가 없어서

이 말씀대로 어서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을 땔자가 없어서 우는 것처럼

성령의 놀라운 탄식처럼

어서 어서 예수님 빨리 인을 때소서 라고 울 듯이 말이죠.
어서 어서 심판을 부으소서 라고 ~~~~

어서 어서 770번 용서를 베푸소서 라고

저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달라고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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