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16: 1- 7)

 

일곱 대접과 아벨과 선지자들의 피흘림 그리고 찬송하리로다 심판하심이 의로우시도다

 


(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11:51, 개역)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16:1, 개역)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16:2, 개역)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16:3, 개역)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16:4, 개역)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16:5, 개역)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16:6, 개역)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16:7, 개역)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3:2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개역)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일곱 대접에 대해서 나오는데

먼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창조를 일곱으로 표현한 겁니다.

완벽한 창조이다는 거죠.

그 창조를 다시 허물어버리는 일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새창조입니다. 새 몸 되신 예수님 입니다. 창조 일곱은 곧 예수님이다 말이죠..

앞에서 새 이스라엘 왕 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시편에서

새롭다 라는 것은 기존의 것이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 세우는 겁니다.

더 나은 제사이다는 거죠.

그러니 새창조 아니면 다 함량 미달 666이다 말이죠. 곧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말이죠.

 

여기서 일곱 인에서 이 인을 뗄자가 없어서 세례요한이 울었다고 했잖아요

이 두루마리 편지가 공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편지를 공개할 자가 없어서

인을 뗄자가 없어서 울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새언약의 완성자가 아니면 천사도 못 떼는 인 이다 말이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유일한 주의 인자하심 이

말씀대로 되어야 함을 알고 있는 세례요한은 답답한 겁니다.

아무도 열자가 없고 열 자격이 될 만한 자들이 없으니 말이죠.

천사들도 안되거든요.

 

아무도 열자가 없고 열자격이 없다고 하니까

포기해 버리고 답답해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신경끄자 라고 해 버리면

문제는 그 빈자리를 반드시 누군가가 다 차지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 그 빈자리에 앉을 자가 바로 심판자 이거든요.

즉 거룩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자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자 거룩한 자이다 말이죠.

그 빈자리를 그 보좌를 그 심판자의 자리를
글쎄 꼭 먼저 앉는 놈이 있어요 글쎄 ~~ 
애굽의 왕 바로왕이 차지하질 않나

이스라엘에서는 사울왕이 앉지를 않나

하나님의 집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바리새인이 차지해 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신경쓴다고 해서 이 두 진영의 싸움 충돌 차별성을 막을수 있는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니 그 빈자리의 텅텅비어있음을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얼룩으로 치면 반드시 그 얼룩을 제거하고 싶어 환장하듯이

그 빈자리에 앉고 싶어서 환장한다 말이죠.

(수 2:8, 개역)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수 2:9, 개역)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수 2:10, 개역)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수 2:11, 개역)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수 2:12, 개역)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수 2:13, 개역) 『12절과 상동』

(수 2:14, 개역)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수 2:15, 개역)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수 2:16, 개역)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수 2:17, 개역)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수 2:18, 개역)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수 2:19, 개역)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수 2:20, 개역)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수 2:21, 개역)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수 2:22, 개역)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따르는 자가 돌아가도록 사흘을 거기 유하매 따르는 자가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만나지 못하니라』

(수 2:23, 개역)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수 2:24, 개역)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행 16:31, 개역)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새번역)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일곱이 등장했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심판자가 나타났다는 것에서
마치 기생라합처럼 간담이 녹는 겁니다.

자기민족과 자기 신을 배신하는 쪽에 서게 된다는 것이

세례요한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우는 모습이 말이죠. 우는 자가 복 되도다

즉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가 복 되도다 라는 겁니다. 긍휼을 쳐다보는 자다 말이죠.

 

그 심판이 부어지는 겁니다. 일곱 대접 말이죠.

 

결국 찬송이라는 것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는 것과

이런 죄인도 용서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심이 옳았다 라고 나팔부는 겁니다.

이 두 모순을 동시에 보여주는 겁니다.

 

즉 전쟁에서 찬송이란 나팔이란 이미 이 찬송만이 승리했다는 겁니다.

그럼 전쟁할 필요가 없이 이미 이 찬송으로 결정나 버렸고

그래서 전쟁 안하는게 아니라

이미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각본대로 찬양의 자작극대로 전쟁이 후차적으로 벌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승리가 먼저고 그 뒤에 전쟁개시 입니다.

 

마치 6일 동안 회개를 하면서 뺑뺑이를 돌고 마지막 일곱째날은 나팔부는 것처럼 말이죠.

나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자입니다 라고

그 증거물이 바로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입니다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라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우는 겁니다.

울면서 돌아요 글쎄

 

그런데 이것이 이미 승리했기에 눈물흘리는 것이다 말이죠.

용서의 기쁨으로써 눈물 흘리는 겁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행함은 회개를 하고 난 뒤에

반성을 하고 난 뒤에 행동을 고치는 것이고

반대로 믿음은 용서를 받았기에 회개를 하는 겁니다.

반성이 아니라 버릇고침이 아니라

이미 사랑 속에 놓여졌기에

뭘 해도 다 죄이기에

뭘 해도 죄로 규정하는 사랑 때문에

행동을 고치는 유무 곧 나의 행동 고침에 관심이 없고

그 용서하신 분의 사랑만을 외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말이죠.

물론 외침도 소용없어요 벙어리이거든요.

외친다는 것을 조건으로 보는 자가 있거든요.

조건 없어요. 조건이 되어버리면 그 조건을 도저히 갖출수 없는

날때부터 소경인 자는 배제되거든요.

그렇게 바리새인이 배제시킨 실로암소경을 도리어 예수님을 그들 중앙에 세우는 겁니다.

어린아이를 중앙에 세우듯이 말이죠.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지키는 자가 아니라 믿음은 그저 사랑하는 자 일 뿐이다 말이죠.

 

그래서 일곱 인은 이 복음의 개시 출발 시작입니다. 비밀을 공개하기 위해

봉인된 아무도 열수 없는 그 일을 시작하는 겁니다. 곧 여리고성 정복처럼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복하는 겁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겁니다. 시작 하는 겁니다. 복음의 시작이요 개시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어떻게 정복하죠?

사랑으로 곧 믿음으로 정복합니다.

행함이 아니라 말이죠.

 

일곱의 뚜껑을 여는 겁니다. 개봉박두

창조의 비밀을 여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아니 안식이 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이 되어 있다니

쉬는 날 평안이 그냥 우리가 놀고 먹고 주일날 일안하는 것인줄 알았는데

정작 성전에서 일하시는 분이 있다는 겁니다. 안식일 에도 말이죠.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화평으로 인해 원수 됨이 하나가 됩니다.

 

그 앞에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라고 뺑뺑이 도는 겁니다.

그리고 일곱 나팔은 공격 뿌뿌뿌 공격하라 라고 나팔부는 겁니다 공격

더 나은 전쟁입니다.

저들의 전쟁은 그냥 전쟁 그냥 제의 제사일 뿐이고

우리의 전쟁은 십자가의 용서를 보여주는 더 나은 전쟁이다 말이죠.

일곱째 날에 말이죠. ? 안식의 완성이거든요,

 

그 주인 그 안식의 주인이 납신다 길을 비켜라 라고 말이죠.

호산나 호산나 나팔 부는 겁니다.

여길 붙어라 머릴 비워라 불을 붙여라 리릴리 라라라 ~~~

그 여호와의 불 앞에서 그 심판 앞에서

그 전쟁 앞에서

함량미달인 것은 모조리 다 죄입니다.
그 함량미달인 666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일곱나팔입니다.

 

뭐 말씀 지키고 남을 7번 용서하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고 혹시 모자란거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지금 당장 지키겠습니다 라고 해도

그렇게 잘난 율법 지킨것도 다 불타 없어지고


심지어 못난 것 십계명 두 돌판 깨뜨려먹었습니다.

모세에게 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라고 지도자 니만하냐 하고 대들던 것 그 증거물도 그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용서 받고

배고프다 고기 달라 정력이 다 떨어졌다 힘 없다 고기 다오 라고 대들다가 만나를 받았는데

이제는 그 만나가 너무 너무 지겨워서 박하사탕 쩍쩍 이빨에 끼이니까

무지 무지 싫어버린바 된 그 만나사건을 담은 항아리 그 증거물도
마귀가 아닌 예수님께 잡혔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는데


그 박스 법궤 박스가 바로 성전으로 다시 예수님의 몸으로써

그 예수님 마저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자체가 용서함으로 처음부터 다가왔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아니면 다 함량미달이다 말이죠.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화목제물이다 말이죠.

처음부터 말이죠.

십자가가 뒤에 온게 아니라 처음부터 온 겁니다.

그런 실상을 글쎄 그림자를 붙잡고 있었으니 원 ~~~~

 

그러니 그림자 다 거덜 내어야지요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 새 이스라엘 왕의 등장에 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벌리는 임금의 일하심에

아들이 상속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혼인잔치는 동시에 심판의 날이 되는 겁니다.

계시록은 그야말로 혼인잔칫날이거든요

긍휼의 날이거든요

누구의 왕이다? 이스라엘만의 왕이요 신랑이다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 곧 새이스라엘 새노래 새신랑을 노래부르는 자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새남편 즉 전남편의 율법과 이혼한 자

새 백성인 고아 과부 나그네의 기쁜날 잔칫날 혼인날이다 말이죠.

추수 날이다 말이죠.

원래 전쟁이란 추수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심판을 퍼붓는 겁니다. 낫으로 베는 겁니다.

오늘 일곱 대접은 심판을 때려붓는 겁니다. 불 지르는 겁니다. 심판입니다 저주죠.

곧 여리고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저주를 통해서 심판을 통해서 허물어짐을 통해서

여리고성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겁니다.

어딜 감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너거들이 차지하고 있느냐 라고 말이죠.

 

그럼 왜 그들이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흘렸기 때문에 그 피가 되갚은바 되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아니 난 우리 조상이 죽인 선지자들이 죽이는 그 현장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라고 한다 말이죠.

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의 사람이라서 너희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인 그 장소에 없었고 태어나지도 않았다 라고 한다 말이죠.

난 예수님을 죽인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 없었어요

그때 2천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라고 한다 말이죠.

 

내가 하지 않았다고 내 조상이 했다고 만약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는 절대로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는데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아담의 자손인 이상 그 범주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 말이죠.

그러니 내가 하지 않은 행위라고 해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느냐 말이죠.

인간은 자꾸 행함을 따집니다.

조건을 따져요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더면 동참안했다 라고 조건 유무를 따진다 말이죠.

자꾸 난 존재이다 존재 맞잖아 라고 말이죠.

곧 원인 있는 결과를 말이죠.

난 죽인 결과가 없다 라고 말이죠. ? 나는 그런 행동을 지금은 하지 않았다 라는 원인이 있으니까

살인자라는 살인 안했다 라는 조건을 내세우는데

주님은 기능을 따지는 겁니다.

죄인이라는 기능

24장로도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했던 자요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래서 주여 제발 십자가에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한다 말이죠.

변화산에서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존재로 보는게 아니라 행함으로 보는게 아니라

판대기로 본다 말이죠.

존재로 보면 개인 개인을 구원해줘야 할 판국이라?

그럼 일곱이 필요가 없어

이스라엘도 필요가 없고 왜? 집단 구원이 아니라 개인 구원이 되어야 하니까

그럼 바리새인을 구원해 주어야 하고

고아 과부 나그네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앉은자 개같은 갈릴리 이방인을 구원해 주면 안돼?

? 그럼 그들은 이스라엘 개인들 하나 하나만 구원이 되니까 말이죠.

그럼 부자청년을 구원해 주고

감히 전재산을 가난한 자 곧 게을러 터진 저 가난한 자에게 주면 안돼?

율법을 어기는 거니까 말이죠. 게으름 방조다 말이죠.

 

저 가난한 게을러 터진 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주면 개인구원 다 깨진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쌓아올린 마일리지 다 사라지니까 말이죠.

차라리 마귀의 세가지 시험 곧 돌을 떡덩이 되게 해서

가난 문제 다 해결해 줘야 할 판국이라!!!

이것이 마귀가 장악한 이스라엘 개인 구원 곧 성화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일곱으로 움직인다 말이죠.

그 일곱의 증상물이 이스라엘 집단이다 말이죠. 개인이 아닌 집단.

다수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수에 상대적인 다수가 아니라, 그렇다고 소수도 아닌

몸이다는 겁니다. 누구의 몸? 내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일곱 교회 말이죠.

 

 

그러니 심판도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없이 내가 구지 선지자를 죽이지 않는 행동을 했더라 손치더라도

이미 사고방식 자체가 선지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그 구조에 들어가 있다라는 겁니다.

전체 판대기로 보고 있지

개인 개인 하나 하나를 따지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먼저 내가 의식하는 시간 속에 벌어지지 않았다고 발을 뺄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래에서는 반드시 선지자를 죽일 수 밖에 없는

국가 대 국가, 진영 대 진영 싸움이다 말이죠. 육과 영의 전쟁.

육에 속하지를 말던가??

십자가가 개입하게 되면 언제든지 죽일 수밖에 없는 같은 사고방식에 있다 라는 것을 안다면

주여 저는 주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자입니다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 선지자를 죽이는데 손에 피를 뭍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빌라도의 사고방식과 같다 말이죠.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더 하다 말이죠.

마귀에게 갇혔다는 겁니다. 마귀에게 속한 마귀 소속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가입으로 죄 아래 갇혔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율법을 완벽하게 못 지킨다는 것이거든요.

99.999 % 지켜도 소용없어요

하나 어기면 다 어긴것이니까

 

저 세리 매국노를 공격하고

저 원수 사마리아인을 공격하고

저 박그네를 공격하고

남의 눈의 티를 뺄려고 달려들지만

정작 나의 눈의 들보를 뺄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둘 다 똑같은데

한국의 전 국민이 다 최순실이인데

난 저 어두운 최순실이가 아니요 난 빛이다 어두움은 빛을 이길수 없다 라고 백날 노래 불러 우겨도

 

저 봐 저봐 내가 남을 이겨야 한다는 저 생각 최순실이와 뭐가 다르냐 말이죠.

김용옥이가 제2의 최순실이가 많다 라고 하는데

자기가 최순실이면서 말이죠.

누굴 보고 최순실이래

자기가 최순실인데

자기가 소경인데

소경 아니다고 하니

뭐 구원해 달라고????

 

아니 소경 아니라메?

본다메?

 

그럼 의인에게 왜 의사가 필요하냐 말이죠.

 

이 말은 인간에게 기준이 없는 겁니다. 새 기준 말이죠.

모조리 다 기존의 기준인 헌 기준 헌술 헌부대의 기준 뿐이다 말이죠.

그게 바로 육체 이다 말이죠.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뭐 묻은 똥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랜다고 말이죠.

 

그러니 새기준 새술 새부대를 볼려면

기존의 기준인 이 육체

이 육체에서 모든 엉터리 기준이 나오거든요.

그 육체를 깨뜨리고

새 몸인 죽었다가 다시 3일만에 살아난 그 새 몸을 기준으로

 

일곱 대접이 부어지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되도 않는 육체가 함량미달인 주제를 모르고

자꾸 이 육체가 자기가 옳다고 우기니까

이 육을 심판해 주는 새로운 새 몸이

안식의 주인이 나타났으니 말이죠.

 

바로 구약에서는 바로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라고 한

시아버지 유다의 육체가 아닌

며느리 다말의 몸을 새로운 기준으로 그 기준과 결혼해서

곧 긍휼함을 얻어서 그 새 몸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그 새몸은 마치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 다말의 육체인 여리고성을 허물어뜨리고자

전쟁 전에 뚜껑을 여는 겁니다. 곧 할례입니다.

뚜껑 열어서 곧 일곱 인을 떼어서

하루에 한 바퀴씩 뺑뺑이 돌면서

회개를 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는 막 사는 자입니다.

저는 탕자입니다 라고 말이죠.

 

막 산다고 하니까 마치 막사는 자가 주체가 되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막살게 하시는 분에 의한 오로지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긍휼 곧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나오는 증상이지 자력으로 막살고 죄 지을수 있는게 아니다 말이죠.

마귀가 미끼로써 물지 않는 죄인, 또는 죄는, 막살기는, 막살기가 아니무이다 ㅋㅋㅋ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이들이 전쟁하는 자 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아니 전쟁의 주체자가 아니라 전쟁의 신인 여호와의 배치물이다는 겁니다.

 

누구의 전쟁을 보여주는!

누구 전쟁?

십자가의 피 전쟁 피용서의 전쟁 말이죠.

그 전쟁에 기뻐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즉 새노래를 부르는 자이다는 겁니다.

할례 곧 거세당한자

힘이 쥐 뿔도 없는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문둥병자 소경을 모아서 전쟁을 하는 겁니다.

참 잘 하겠지요잉??

전쟁을 몸이 성한 자를 가지고 해도 될까말까 한 판국에

의도적으로 제단에 불이 못붙도록 오히려 물을 뿌리는 식으로

손마른자 목마른자 의에 주리고 상한자 어중이 떠중이 다 모으는 겁니다.

신체상 이미 저주 받은 자로 말이죠.

이미 거세 당했으니까 말이죠.

야곱처럼 환도뼈가 뿌라져서 쩔뚝 쩔뚝 거리는 자로 모은 겁니다.

가시떨기나무를 모으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할례를 먼저 하고 힘이라는 요소가 절대로 나올수 없도록 한 후에 전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은 내 쪽에서 이겼다 라는 말을 일체 못하도록 하는 단절입니다.

성령의 일이다 말이죠.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할례를 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무조건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뭐 이런 요상한 전쟁이 어디있냐 말이죠.

세상 어디에도 이런 전쟁 없어요.

지금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또 이것을 일부러 따라 할려는 자가 있는데 하지 마세요

따라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힘이니까 말이죠.

원인 있는 결과다 말이죠.

행함은 이유 없이 무조건 666 곧 함량미달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에 계시록 자체가 모조리 다 천사들만이 활동합니다.

인간의 활동 자체가 없어요. 배제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성령행전처럼 말이죠.

어딜! 개방이 어디 있어요 무조건 단절 뿐인데.

 

이 천사들 곧 선지자들을 죽인다고 없어질까요?

또 살아나와 글쎄

또 죽여

또 살아나

하도 죽이다 죽이다 지쳐서 내 팔이 아파 죽어

어딜 육이 영을 죽여요?

 

육의 최대의 무기는 살인이지만

오로지 자기 사는 것 생존만이 목적이지만

 

영의 최대의 무기는 다시 살고, 남을 살리는 거다 말이죠.

안식의 주인이 글쎄 손 마른 자를 살려요

그래서 미워 죽이는 겁니다. 안식을 어겼다고.

그냥 죽은자 내버려 두라 말이죠.

왜 살리냐 말이죠.

그 정도로 살리는 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접을 붓습니다.

다 죽이십니다.

아들이 소원하는 자만 다시 살리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용서만을 쳐다보는 자만을 말이죠.

그것이 새노래를 부르는 자입니다.

 

유리바다를 건너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

다른 노래 못 부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 심판이 얼마나 참되냐 말이죠

의롭냐 말이죠.

물에 빠뜨리는 선지자 곧 성령으로 인해서

세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케 하는

죽었다가 다시 3일만에 살아나는 그 새 몸이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일곱 대접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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