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구원은 헛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옳았습니다. (시편 144)

14-145 불에 새까맣게 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시편 145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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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5, 개역)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7:47, 개역)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27:48,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27:50, 개역)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27:51,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27:52, 개역)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27:53, 개역)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27:54, 개역)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144:1, 개역) [다윗의 시]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144:2, 개역)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144:3, 개역)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144:4, 개역)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144:5, 개역)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하소서

(144:6, 개역)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144:7, 개역)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 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 건지소서

(144:8, 개역)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44:9,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144:10, 개역)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144:11, 개역)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144:12, 개역)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144:13, 개역)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144:14, 개역)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144:15, 개역)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44:1, 새번역) 나의 반석이신 주님을 내가 찬송하련다. 주님은 내 손을 훈련시켜 전쟁에 익숙하게 하셨고, 내 손가락을 단련시켜 전투에도 익숙하게 하셨다.

(144:2, 새번역)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산성,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뭇 백성을 나의 발 아래에 굴복하게 하신다. / 18:2와 삼하 22:2를 따름. , '변함없는 사랑' 히브리어 사본들과 시리아어역과 아퀼라역과 제롬역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내 백성을'

(144:3, 새번역)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생각하여 주십니까?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하여 주십니까?

(144:4, 새번역) 사람은 한낱 숨결과 같고, 그의 일생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144:5, 새번역) 주님, 하늘을 낮게 드리우시고, 내려오시며, 산들을 만지시어 산마다 연기를 뿜어 내게 하십시오.

(144:6, 새번역) 번개를 번쩍여서 원수들을 흩으시고, 화살을 쏘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려 주십시오.

(144:7, 새번역) 높은 곳에서 주님의 손을 내미셔서 거센 물결에서 나를 끌어내시고, 외적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44:8, 새번역) 그들의 입은 헛된 것을 말하며, 그들이 맹세하는 오른손은 거짓으로 속이는 손입니다.

(144:9, 새번역)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새 노래를 불러 드리며, 열 줄 거문고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144:10, 새번역) 왕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신 주님, 주님의 종 다윗을 무서운 칼에서 건져 주신 주님,

(144:11, 새번역) 외적의 손에서 나를 끌어내셔서 건져 주십시오. 그들의 입은 헛된 것을 말하며, 그들이 맹세하는 오른손은 거짓으로 속이는 손입니다.

(144:12, 새번역) 우리의 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나무처럼 튼튼하게 잘 자라고, 우리의 딸들은 궁전 모퉁이를 장식한 우아한 돌기둥처럼 잘 다듬어지고,

(144:13, 새번역) 우리의 곳간에는 온갖 곡식이 가득하고, 우리가 기르는 양 떼는 넓은 들판에서 수천 배, 수만 배나 늘어나며,

(144:14, 새번역) 우리가 먹이는 소들은 살이 찌고, 낙태하는 일도 없고, 잃어버리는 일도 없으며,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이다. / 칠십인역과 아퀼라역과 심마쿠스역과 불가타를 따름. ,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고', 곧 새끼를 배서 몸이 무거운 것을 말하거나, 살이 쪄서 몸이 무거운 것을 말함 또는 '뚫리는 일도 없고' 또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도 없고'

(144:15, 새번역) 이와 같은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다. 주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다.

 

 

 

새로운 왕으로써 다윗왕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십니다.

즉 기존의 왕 곧 사울왕을 적폐청산하듯이 폐기처분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움입니다. 곧 다윗에게서는 구원이겠지요.

그러나 이 구원이 이 다윗의 구원이 당사자 다윗은 헛되다 라고 합니다.

아무리 이 새로움을 다윗 자신의 신체에 융합시킬려고 해도 안된다 말이죠.

오히려 육신은 날로 날로 이 새로움 때문에 패하게 되고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 지는데

마치 약속이라는 바이러스가 나를 숙주로 삼아서 날로 날로 나를 잠식해 감염시키는 겁니다.

그저 육신은 날로 날로 패할 따름이지요.

 

새롭게 비정규직에서 다시 정규직으로 정식왕으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우리야 장군을 죽이는 모습에서

새로움은커녕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일곱이 덮친 겁니다. 일곱을 봤다 말이죠. 십자가의 죽음을 본 겁니다.

창조를 허물어 버리는 일곱 말이죠. 곧 일곱은 예수님이요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

이것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다 라고 말이죠.

 

결국 새로움은 인간에게 붙이는게 아니라

이전 것은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새로움은 인간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에 붙이는게 아니라

헌 술 헌 부대에 붙이는게 아니라
사람의 구원에 붙이는게 아니라
헛것에 허무에 붙이는게 아니라

곧 구원은 인간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물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신 그 분에게 붙이는데

그 분은 구원이 아니라 도리어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붙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새것은 새것에게 붙인다 말이죠. 새술은 새부대에,

이전 것이 아니라 새것이 된 그 새것에게 새로움을 붙이는 겁니다. 구원을 붙인다 말이죠.

이 십자가의 죽음의 연속성에다가 구원을 붙이는 것이다 말이죠.

이게 새로움입니다.

이 새로움 앞에서 모든 기존의 것들은 폐기처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세리가 폐기처분 당해야하는 마땅함을 알고

일곱을 보고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구원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들이대는 겁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저 매국노 세리와 같은 삶인 토색치 않았다는 둥 이라고 말이죠.
그런 것들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본 겁니다. 사람의 구원이 의미있다고 말이죠.

ㄱ러나 세리는 일곱을 보고 곧 주의 인자하심을 보고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저런 것들이 의미 없다 가치 없다 사람의 구원은 헛것이다 라고
주의 인자하심을 보고 외치는 겁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성령 곧 새 영 새 마음 종말의 영의 마음은

항상 이 둘을 충돌 대조 시켜서 죄인을 찾고 있는 겁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자를 찾더라 말이죠.

 

누가 더 나쁜놈입니까?

맏아들입니까? 탕자 입니까?

탕자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피를 바르니까

곧 금가락지를 끼우니까

졸지에 이 예수님의 피를 누가 공격하는 고 하니

맏아들이 공격하는 겁니다.

탕자 저 딴게 뭐가 샘나서 공격하겠습니까?

오로지 마귀의 공격 대상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긍휼에 대한 공격입니다.

 

그래서 욥도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외치는 엘리야도

요나도

다윗도

모래에 애굽인을 죽여 안보이게 모래로 덮은 모세도

그리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도

이 마귀 이 원수로부터 공격받도록 하는 겁니다.

알고 보니 이 마귀가 이 원수가 자신들을 공격하는게 아니였다는 겁니다.

무엇을 공격하는고 하니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고백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피 발림을 십자가의 피용서에 대한 공격임을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원수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는 거죠.

 

자 그렇다면 누구의 원수다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유대인을 다 장악한게 마귀이다 말이죠.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한 내용으로 유대인을 다 장악했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왜 직접 하늘에서 하늘 영광 버리고 내려왔냐 라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이 헛됨을 마귀도 압니다.

그래서 율법 특히 시편도 율법이다 말이죠.

이 시편 만큼은 유대인들은 어릴적부터 다 외우도록 해서 다 지키는 삶이 되도록 교육한다 말이죠.

 

그래서 나온 자가 부자청년 아닙니까?

시편 다 지켰습니다.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다 지키겠습니다.

 

과연 시편 다 지켰을까요?

 

원수에게 장악 당한 자가 무슨 수로 말이죠.

 

다윗이 그래서 우리를 물에 등떠밀어 확 빠뜨리는 겁니다.

원수를 보라고 말이죠.

내가 말씀 곧 시편 율법 지키는데 방해꾼이 되는 저 사마리아와 같은 존재가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보라고 등떠밀어 빠뜨린다 말이죠.

 

저울로 재서 함량부족인 666을 내세우는 곧 종교를 내세우는 자들이 원수가 되는데 있어서

 

바로 탕자에게 전재산을 다 바치는 예수님 자기목숨 곧 피 발라주심에 대한 반발심을

누가 하느냐 라는 겁니다.

 

탕자는 그 원수를 밝히는데 있어서 죄인이라는 미끼로 작용한 겁니다.

그럼 다윗 또한 이 예수님의 원수를 보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들었듯이

일부러 동산 중앙에 벌거벗은 여인을 보여주었다 말이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동시다발적으로 뻐버펑 터지니까

예수님을 세 번 부인 안 할 수가 없듯이

우리야 장군을 안 죽일수가 없는 겁니다.

 

죄인 만드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 용서의 자작극입니다.

 

니 왜 살인했노를 묻고자 함이 아니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용서했다를 말하시고자 말이죠.

 

자 이럴때에 원수들이 발악을 하면서 달려드는 겁니다.

 

누구였죠? 아들 압살롬에게 쫏겨나는 다윗을 보고서

꼴좋다 너가 사울왕을 죽이더니 니가 그대로 당하는 구나 꼬시다 라고 말이죠.

 

시므이 이네요 시므이

 

그러나 그 시므이라는 자는 인과응보라는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 라고

의문의 제사를 반복하듯이 육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를 거치지 않고서 보게 되니까

선악으로 보는거다 말이죠.

즉 언제 어떤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이 그때 그때 마다 달라지게 되니

지금은 다윗이 악으로 보이겠지만

나중에는 또 선으로 보이게 되면

그땐 어떡하냐 말이죠. 한 입에서 두 말 곧 찬송과 저주가 나오게 된다 말이죠.

 

성경이 어려운 이유는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 뿐이다 말이죠.

그래서 말 되는게 하나도 없어요

그럼 결과 곧 끝을 거쳐서 거꾸로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탕자가 구원받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맏아들이 진노가 되는 것은

원인에 따른 해석으로는 안 맞다 말이죠.

 

끝에서 거꾸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이 속해 있는 그 한계성을 넘어서서 해석해야 한다 말이죠.

 

결국 성령으로 해석 하는 길 외에는 답이 없어요.

성령 성령 하니까 마귀가 장악한 맏아들이 말하는 성령이 아니다 말이죠.

맏아들의 성령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게 만드는 거죠.

성전의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부자청년처럼 시편을 어릴적 부더 다 지키는

오늘날로 치면 성화론자들의 성령론과 똑같다 말이죠.

 

그런데 탕자에게서의 성령은 끝에서 종말에서 거꾸로 쳐들어 오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은 깨어진다 말이죠.

맏아들은 부자청년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이 어릴적부터

라는 시간을 개입을 시켜야 말이 되요

 

그런데 탕자에게는 시간이 빠져 버립니다.

공간도 빠져요

아버지 곁이라는 공간을 떠났다 말이죠.

 

반대로 맏아들은 아버지 곁을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공간을 사수했다 말이죠.

 

그런데 공간을 없애 버려요

그것이 아버지가 멀리서 집나간 자식 언제 돌아오냐 라고 기다리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졸지에 맏아들은 탕자와 경쟁, 충돌하는게 아니라

아버지랑 충돌, 경쟁하게 되더라 말이죠.

 

율법은 시소다 말이죠.

한 쪽을 지키면 다른 한쪽은 어기게 된다 말이죠.

그럼 그 지킨 것을 시이소를 통해 올라간 쪽이,

내려간 쪽을 향해 매꾸어서 평준화 시킬수 있냐 하는 점입니다.

 

즉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냐 하는 점이다 말이죠.

 

전 재산은 곧 나의 영역인 공간과 그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어릴적부터 지켜온 행함을

저쪽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으른 가난한 자에게 토색하는 자에게,

아무 조건없이 남에게 줄 수 있냐 하는 점입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시이소의 한 쪽이 높이 높이 올라감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한쪽은 저 사망의 음침한 곳으로까지 점점점 내려가는 것이

율법이 개입한 이유다 말이죠.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 말이죠.

무슨 놈의 선이 나오겠습니까? 666만 나오지

 

그러니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완악해 지는 겁니다.

저 바리새인 보세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잖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볼 필요 없어요

너무 흔해요

오늘날 교회의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완악함의 끝판왕이다 말이죠.

 

?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완악해 진다 말이죠.

 

이게 원수입니다 원수

 

계시록에서는 이들을 사단의 모임 사단의 회 라고 일곱교회와 반드시 대조를 시키시는 겁니다.

 

그럼 이들을 원수로 규정하신 예수님을 보자 말이죠.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다면 적어도 구름타고 오셔야지

왜 짐승구유에 태어나시냐 말이죠.

이게 구원입니다. 여기에 인간 구원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냐만 의미를 두는 겁닏가.

 

끝에서 거꾸로 해석해야 하는데

시간순으로 해석하게 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케 된다 말이죠.

 

어디 이 뿐입니까?

나사렛 예수입니다. 저 난지도 예수다 말이죠. 저 각설이 예수다 말이죠.

나사렛에서 무슨놈의 선한 것이 나겠냐 말이죠.

아둘람 굴에서 무슨 이스라엘의 새 왕이 나냐 말이죠.

 

말도 안된다 말이죠.

 

어디 이 뿐입니까?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이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천지 원수인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을 예수님 자기 백성으로 삼아버린다 말이죠.

그것도 아예 유대인 코 앞에서 보란 듯이 말이죠.

 

아니 왜?

 

사람의 구원은 헛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막살지 마세요 라는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즉 정규직 사울왕을 폐기처분하기 위해서 말이죠.

 

기존의 선지자를 폐기처분하기 위해서

정식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농삿꾼을 불러서 참선지자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 기존의 선지자를 거짓선지자로 규정하기 위해서 말이죠.

 

명불허전에서 허봉탁을 의원으로 신분세탁해서 불법으로 세웠다는 것은

정식으로 신학교 아니 한의대를 나와 자격증을 딴 자들을 다 폐기처분하겠다는

미래에서 쳐들어 오는 잉여(더 나은 의술)가 된다 말이죠.

 

오죽하면 예수님이 얼마나 막 살면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냐 라는 별명을

절대로 막살지 않는 바리새인으로부터 듣는다 말이죠.

 

아니 왜?

종결 끝에서 왔거든요

미래완료에서 왔어요

그 분에게는 시간 역사 공간이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이 시간인 역사와 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에

결과가 없어요 끝이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의문의 모호한 것만 반복한다 말이죠.

그러니 완악한 수건을 더더욱 못 벗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없어요

회개를 할 수가 없어요.

 

이 회개의 달인들은 절대로 회개를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막살면 안된다고 여기니까 그 정도로 예수님께 별명을 붙일 정도로 그 정도로

정확한 사실을 자기들이 의미를 두는 시간에 갇힌 시선으로

예수님을 시간을 들여서 파악하니까 그 별명을 붙이더라 말이죠.

 

그 막살기가 구원인데

아무리 봐도 절대로 절대로 네버 네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구원 아니야 라고 한다 말이죠.

 

그게 구원인데

 

시공간이 폐기천분 당한 것이 막살기인데 곧 구원인데

시공간을 절대로 빼면 안되기에

막살지 않아서 그 모습으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이게 사람의 구원이 헛됨을 모르는 처사다 말이죠.

이것이 시므이의 해석입니다. 다윗을 보는 시선

곧 유대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

그래서 해석을 포기하는게 아니라

예수를 해석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겁니다.

오 먹보에 술꾼에 세리 친일파와 죄인을 친구 라는 겁니다.

 

이거로 퍼트리면 이 해석을 퍼트려 이데올로기화 하면

게임 끝이다 말이죠. 누가? 바리새인들이

 

아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예수님을 더 좋게 하는 거다 말이죠.

예수님이 죽으시러 왔거든요

이 예수님의 죽음이 구원이예요

 

그래서 인간의 구원 곧 기존의 것이 이 새로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다 깨어지니까

그들은 누워서 침뱉기 할 뿐이다 말이죠.

 

그러면 더더욱 시기와 시샘 미움으로 달려드는 겁니다.

 

무엇으로? 자신들의 신앙으로 전쟁할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이 인간의 신앙이 글쎄 666 짐승의 수를 받은 종교요 국가다 말이죠.

 

자 이렇게 숨어있는 마귀가 드러나는 겁니다.

무엇을 의지하는 원수입니까?

정치 곧 국가죠, 종교죠

그 힘을 결집시켜서 아마겟돈에 모아서

마치 산헤드린 회의에 모여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꼬 회의 하듯이

로마와 손 잡고 정치술로써 서로가 자기 손에 피 안 뭍힐려고 떠 넘기면서 말이죠.

서로 손을 씻어요 글쎄

 

이미 마음 속으로 죽였는데

손에는 피 뭍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되니까 이게 종교이거든요.

그런 종교에 국가는 말려들지 않겠다고 서로 떠민다 말이죠.

 

? 종교는 막살면 안되니까

이 막살면 안됩니다 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치적인줄 아십니까?

내 손에 피 안 묻히겠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살인을 벌린다 말이죠.

 

그냥 차라리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세요 제발

 

예수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안 믿어요

 

왜 믿음이 없을까요?

 

마귀라서 그런 겁니다.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하시거든요

 

예수님은 인간 상대 안합니다. 인간 구원 관심 없어요.

베드로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들은 마귀이니까 예수님은 이 마귀만을 상대로 하니까

묻는다 말이죠. 따진다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이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내세우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 없는 자들의 특징이다 말이죠.

 

이것이 끝에서 종말에서 역사를 거꾸로 깨뜨리면서 시간을 폐기처분하면서 처들어 오는 해석이다 말이죠.

결과로만 살아요

원인 없어요

 

저들은 반대로 원인만 있고 결과가 없어요

당연하지요

예수님이 반칙을 벌리는데

어떻게 결과가 있겠냐 말이죠.

 

그들은 예수님을 상대로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미워한다 라고 하셨다 말이죠.

아니 왜?

세상을 악하다 라고 하셨거든요.

 

원인 없이 결과로 공격하시니까

저들은 결과는 없고 원인으로만 수비를 한다 말이죠.

 

자 그렇다면 왜 사람의 구원이 헛됨이 아시겠죠

인간은 구원을 마치 조건을 갖추어서 구원받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릴적부터 지켰다고 자부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꾸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아 그래

그럼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어라 라고

율법의 끝 곧 사랑에서 결과에서 출발하니까

 

졸지에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폐기처분 당해요

 

감사합니다가 나오겠습니까?

원인 없는 결과가 없는데

 

그저 원인 있는 결과를 주장하니까

끝이 없어요

종말이 없어요

성령이 없어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할 판국 아닙니까?

그런데 정직한 영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미래완료가 덮쳐진 자에게만 나와요

회개는 미래완료라는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진 자에게만 나온다 말이죠.

 

회개의 달인들에게는 절대로 나올수 없죠.

어리석고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니까 말이죠.

걸림돌 곧 십자가가 글쎄 원인이 없어요

그냥 결과이다 말이죠.

 

이 거리끼는 돌을 실족케 하는 돌을 글쎄 시온에 두겠대요 글쎄

불쑥 불쑥 나타나서 깨뜨리고 그리고서는 사라지고

또 위에서 불쑥 불쑥 치고 빠지고

옆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서 46년 동안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빠지고

뭐 세웠다 라고 자부했던 것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깨뜨리더라 말이죠.

뭐 세웠다 하면 다 뿌쌋뿌더라 말이죠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8:16, 새번역)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얼마나 견고한지 시험하여 본 돌이다. 이 귀한 돌을 모퉁이에 놓아서, 기초를 튼튼히 세울 것이니, 이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8:14, 개역)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8:14, 새번역)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9:33, 새번역)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8:14; 28:16(칠십인역) 또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벧전 2:6, 새번역)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28:16(칠십인역)

 

 

? 헛되니까 우상이니까 나의 구원이 졸지에 나의 우상으로 자리잡으니까 말이죠.

 

이 걸림돌이 글쎄 구원이예요

허물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똥덩어리를 배설물을 처리해 주시니 말이죠.

 

어제 시편 150편에서 예수님이 성소라고 했지요

 

(8:14, 새번역)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나로 인하여 실족지 않는 자는 복되도다 말이죠

예수님은 넘어뜨리시고 자빠뜨리시고 어딜 감히 구원받을려고 해 라고 구원을 폐기처분 시키는

시온에 놓여진 걸림돌이다 말이죠.

 

(11:6, 킹흠정)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6:31, 킹흠정)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의 양들이 널리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14:27,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7:23, 킹흠정)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킹제임스 성경으로 검색 되네! 다시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11:6, 새번역)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또는 '의심을 품지 않는'

 

(26:31, 개역)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6:31,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다. / , '나에게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13:7

 

(13:7,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13:7, 새번역) "칼아, 깨어 일어나서, 내 목자를 쳐라. 나와 사이가 가까운 그 사람을 쳐라.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나 또한 그 어린 것들을 칠 것이다.

 

(14:27,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14:27, 새번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모두 걸려서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 , '나를 버릴 것이다' 13:7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23, 새번역)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 '의심을 품지 않는'

 

 

정직한 영도 없지 새마음 새영도 없지

다 넘어지고 다 뿌서져야 한다 말이죠.

그리고 새로 짖는 겁니다. 아예 없기에

그래서 피 흘리시고 살과 피를 먹이신다 말이죠.

즉 새호흡으로 생기를 새로 집어넣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전 것은 지나간 거죠. 보라 새것이 되었다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3일만에 되찾는

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새로움 때문에

사람의 구원은 허구로 드러나는 겁니다.
성화론이 그래서 엉터리인거죠. 인도종교이거든요. 교리 플러스 실천 이게 불교죠.

그런 사람의 구원은 헛된 우상이다는 겁니다. 의문의 반복인 제사죠.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

곧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을 구원하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구원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 아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시편144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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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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