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딸 음녀의 비밀 (17:15-18)


 

(17:5, 개역)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17:4, 개역)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17:5, 개역)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17:6, 개역)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17:15, 개역)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7:16, 개역)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17, 개역)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7:18, 개역)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17:15, 새번역)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본 물 곧 그 창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다.

(17:16, 새번역) 그리고 네가 본 그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창녀를 미워해서 비참하게 만들고, 벌거벗은 꼴로 만들 것이다. 그들은 그 창녀의 살을 삼키고, 그 여자를 불에 태울 것이다.

(17:17, 새번역)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당신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

(17:18, 새번역) 네가 본 그 여자는, 세상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큰 도시를 가리킨다."

 

 

 

창세기에 뱀이 나옵니다.

 

계시록에서는 옛 뱀이라는 표현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12:9, 개역)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20:2, 개역)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이 뱀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는데

그 저주의 내용이 흙을 먹고, 배를 땅에 기어다니는 겁니다.

즉 땅으로부터 멀어질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로 올라갈수가 없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거죠.

 

가인이 이마에 표를 받고

이 땅으로부터 멀어질수 없는 것을

땅에 배를 딱 붙이고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 꿈치를 상하게 하고

즉 땅에 발 못 붙이게 하겠다는 거죠.

다 죽여버리겠다는 거죠.

그 피로 세워진 것이 음녀의 나라 라고 했습니다.

음녀가 입은 붉은 옷이 바로 피흘린 성도의 죽음을 과시하는 겁니다.

 

라멕이 그래서 가인은 벌이 7배이지만 자기를 건드리면 77배 라고 하는 겁니다.

 

반작용입니다. 하늘에 발 못 붙이게 하겠다는 주님의 조치에 대한 반박이요 보복조치입니다.

 

또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즉 대가리 우두머리를 치면

그것은 허구이다는 거죠. 허상 허깨비 말이죠.

 

모든 전쟁에서는 그 우두머리 한 놈만 패면(주유소 습격사건) 이미 게임 오바입니다.

 

그러니 이미 창세기에서 이미 게임 끝난 겁니다.

 

그 우두머리가 없는 흩어진 잔챙이들이 날 뛰는 것 조차도 인간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약속을 쳐다보는 겁니다.

그 약속에서 무엇이 나오냐를 말이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곧 세상의 비밀은 바로 이 약속으로 인해 돌아가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이 모두가 아마겟돈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지요.

? 약속 대로, 기록된 말씀대로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마귀는 마귀 답도록 행동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약속에서 벗어나는 마귀의 행동은 없다 말이죠.

하기 싫어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도록 말이죠.

 

그 약속의 뚜껑을 여는 것이 바로 일곱 봉인 떼기입니다.

개시 개봉 박두입니다.

약속이 열리면 얼마나 설레이냐 말이죠.

마치 영화관에서 드디어 영화가 시작할 때

그 짜릿한 기분 말이죠.

 

사도요한은 빨리 영화가 개봉해야 하는데

아무도 영사기를 돌릴줄 아는 자가 없어서 울었다 말이죠.

영화가 개봉하도록 되어 있는데 정작 아무나 마음대로 영화를 개봉할 수는 없으니 말이죠.

자 그런데 드디어 개봉박두

어릴적에 영화관에 가면 개봉할 때 다들 박수를 치고 했거든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첫장면이 나오자 마자 말이죠.

그 만큼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겁니다.

 

일곱 봉인을 떼기 하니까

일곱 심판들이 나옵니다.

이 일곱 심판이 바로

아 일곱 나팔이지요. 이 일곱 나팔 뿌뿌뿌 라고 전쟁을 선언하고

그 전쟁의 대상을 규정하는 겁니다.

너 나와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일곱 심판을 퍼붓는 거죠.

 

너 애굽 나와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라고 뿌뿌뿌 나팔 부는 거죠.

너 바벨론 나와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라고 말이죠.

그리고 너 음녀 패역한 이스라엘, 부패한 예루살렘 너 나와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라고

 

그렇게 규정하고서 일곱 대접 붓기 곧 심판을 붓기 하십니다.

 

이 일곱으로 새창조 하시는 겁니다.

기존의 창조를 허물고 말이죠.

그럼 기존의 창조는 완벽하지 않았다? 라는 거죠.

 

완벽했지요.

그런데 왜 허무냐?

 

허물지 아니하며는 기존의 것을 사수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아니 왜 허무냐고? 허물어야 더 나은 새창조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처음창조는 새 창조를 위한 보충물이였다는 거죠.

그리고 기존의 창조는 마귀를 잡기 위한 하나의 전쟁터 마당이였다 말이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놓은 이유가 그런 겁니다.

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바람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려서 이 땅을 사수하는 일에 집념하는

음녀의 노릇을 하게 되는 겁니다.

 

퍼뜩 퍼뜩 떠날 생각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땅을 천국으로 건설하느냐

이 땅에서 영향력을 차지하느냐 라고

 

땅에 머리 둘 곳 없으신 예수님과 대조를 이루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즉 저들의 모든 활동들은 반작용 곧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 뿐이다는 거죠.

 

그 반작용을 한 풀이, 원한, 복수심이기에

모든 행동들이 복수심으로 꽉꽉 차 있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가 그래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복수심을 꽉 찬 것들이다는 거죠.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반면에 아벨의 제사 곧 더 나은 제사는 퍼뜩 퍼뜩 이 땅을 뜨는

본인 자체가 제물이 되는 다 타버리는 잿더미가 되는 겁니다.

 

그 잿더미에게 화관을 씌우는 겁니다. 신부의 꽃단장 말이죠.

 

그러니 금가락지를 씌우고 끼우니까 더더욱 약올라 죽으니까

반작용으로 성도를 죽여서 그 피로 옷을 해입는 겁니다.

 

어떤 영화였죠? 지금은 고전이 된 영화인데

어릴적 명화극장 토요극장에서

로마 황제였던가? 예수님의 수의를 걸치면 병든자도 낫는다고 해서

그 수의를 걸치니까 병이 낫지 않는다고 더더욱 화 내는 장면이였는데

아마 자신의 정신병을 자기 스스로 그 수의를 걸치면 된다고 봤던가 봐요

어릴적이라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봤는데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결국 이들이 왜 종교 또는 믿음에 목을 메느냐?

사울왕이 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에 목을 메느냐?

그들이 진짜 율법을 생각해서? 거룩을 생각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정말 거룩한 안식을 생각해서?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진짜 말씀을 생각해서?

아니다는 겁니다.

반작용입니다.

그래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 겁니다.

그들은 결국 복수심에 따른 반작용이였던 겁니다.

한 풀이, 원한이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제사장 딸이였던 음녀의 특징입니다.

레위기에 이 음녀가 나오는데

 

(21:9, 개역) 아무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스스로 더럽히면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

(21:9, 새번역) 제사장의 딸이 창녀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히면, 제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여자는 불태워 죽여야 한다.

(21:9, 공동) 사제 된 사람의 딸이 창녀가 되어 몸을 더럽히면 그것은 제 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 여자를 불에 태워 죽여라.

(21:9, 쉬운)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어 스스로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딸은 불에 태워 죽여라.

(21:9, 킹흠정)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창녀 짓을 행하여 자기를 욕되게 하면 자기 아버지를 욕되게 하나니 그녀를 불로 태울지니라.

(21:9, 현대인) 만일 제사장의 딸이 매춘 행위를 하여 자기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으면 그녀를 반드시 불로 태워 죽여라.

(21:9, 현대어) 제사장의 딸이 음란한 짓을 하며 제멋대로 놀아나거든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 그가 음란한 짓을 함으로써 제사장인 자기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레위기는 거룩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 거룩에 몸 담은 자들이 바로 제사장이다 말이죠. 레위지파 말이죠.

그래서 이 거룩의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 가정이겠지요.

그렇게 거룩의 원리를 잘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거부성을 반발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음녀 제사장 딸이라고 하는 겁니다.

 

단순히 야동에 빠지는 것이 음행이 아니다고 했듯이

창녀짖을 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탕자가 오히려 창녀짖을 한 반면에

그 창녀짖을 하는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반발하는 것이 맏아들이였다 말이죠.

이 맏아들은 평생을 아버지 말씀만 지켰다 말이죠.

그런데 이 탕자 곧 원수죠 그 원수를 사랑하는 이 십자가의 사랑에

비로소 본격적인 반발성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음녀죠.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목사들을 보면 음녀들이라고 봅니다.

거룩에 대해서 잘 알고 그 원리를 잘 알고 있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 십자가가 단지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는 겁니다.

물론 배고프면 어쩔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라는 것을 이해는 할수 있어도

배고프지도 않는데 그냥 십자가의 용서가 이유없이 싫어요

그것을 성화론자들을 보면 특히 더 잘 볼수가 있습니다.

이건 뭐 유대교 예요 유대교

유대교가 세상으로 나오면 불교이거든요.

교리 플러스 실천

완벽한 음녀들

 

신학교들이 참으로 고맙게도 음녀들을 양성하고 있더라 말이죠.

 

단순히 인애와 자비는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번제와 제사를 반복하는 기술자들을 양성하더라 말이죠.

 

다행히 IMF가 터져서 졸업생들이 신학생들을 너무 많이 배출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을 많이 봤거든요.

결국 자기는 돈 안되었고 누구는 돈 되는 교회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다 너무 많은 신학생들을 배출한 신학교 탓이라고

졸업한 어떤 사람의 궁시렁 대는 모습을 봤는데

 

그러다 몇 년 뒤에 세상 대학교 졸업한 학생들도 같은 처지가 되니까

그 튀어나온 입술이 쑥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넌 음녀야 라는 지적을 받아야 할 판국입니다.

일부러 안식일날만 골라서 성전 멀 리가 아닌

성전 코 앞에서 손 마른자를 예수님이 고치십니다.

 

이것이 안식의 주인이 하는 일이거든요.

이 거룩성에 반발을 하는 자들이

남이 아닌 안식일을 목숨걸고 지키는 자들이였다 말이죠.

 

사마리아 원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반발성을

남이 아닌 말씀을 지키는 이스라엘이 목숨까지 걸고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것이 음녀이다 말이죠.

십자가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말이죠.

유대인에게 왜 거리끼느냐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알고있는데 왜 자기들의 방식을 안 따라주고

자신들이 가장 꺼려하는 방식으로 극단적으로 거룩을 표출하느냐 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거리낀다 말이죠.

 

말씀 곧 거룩을 실천하고 행하게 되면

그 원리와 지침들을 교리화 해야 하고

그래야 보편성을 확립한다 말이죠. 합리화가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거룩은 바로 인간들이 확립해 구축한 거룩의 원리를

비켜서

그것도 일부러 비켜 비켜 비켜서 단 하나도 맞는거 하나 없이

일치하는 것 단 한 개도 없이

그냥 거룩을 완성해 버리니까

졸지에 이 거룩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유 없이 미워지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가 정성 없이 드렸다고들 청소년 교육 교재에서 본적이 있는데

아닙니다. 정성을 드렸다 말이죠.

오히려 정성을 드렸기 때문에

자신이 드린 제사가 거부시 당하는 것을 못 참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드린 제사가 더 미운 겁니다.

십자가가 더 미워요.

 

이유 없이 말이죠.

 

탕자가 그런 점에서 십자가를 나타내는데 기막힌 겁니다.

 

맏아들의 속성을 드러내는데 말이죠.

 

 

또 음녀 하나를 소개해 드릴께요

음녀의 비밀은 딴게 아니라

더 나은 거룩에 대반 반발성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의 원리는 결국 십자가 사랑입니다.

약자 보호법, 이웃 환대법, 또 뭐 있죠? 시형제 결혼법 등등

이 모든 것이 사실상 죽은 자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거룩은 육의 깨끗한 행실을 말하는게 아니라

거룩은 죽은 자를 살리는 영의 거룩성을 말하는 겁니다.

그 영의 마음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다 말이죠.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너희 모두가 약자이다 라는 겁니다. 즉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 일부러 300 데라니온 떼 먹고 도망친 자를 옆에 지나가도록 하니까

졸지에 용서가 뭐가 됩니까? 일만 달란트 용서 받은게 뭐가 되냐 말이죠.

 

그러니 약자가 아니였다는 것이고

그 빚을 탕감해 주신 임금의 용서를 거부한 모습이였다는 것에서 음녀이다는 겁니다.

 

빚진자 곧 외부에서 살려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리

즉 거룩이 살려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였는데

이 살려줌을 받고도

10명의 문둥병자 중에 유대인 9명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기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저는 여전히 외부에서 살려주어야만 하는

거룩의 자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한다 말이죠.

 

자기자리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문둥병자요 빚진자입니다.

자기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

살려주시는 분에 의해서 살아짐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호흡 자기 숨 자기 생명이라는게 없어요.

 

앞에 시편에서 호흡이 있는 자 마다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라고 했잖아요

기존의 호흡 있는 자를 다 죽여버립니다.

새 호흡으로만 살도록 하신다 말이죠.

내가 거룩하고 잘나서 새 호흡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기존의 호흡을 하던 자들도 다 죽은 판국에

그딴 호흡이 뭐 중요합니까?

 

새호흡이 아니면 다 죽은거다 말이져

즉 살려주심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거룩의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신겁니다.

살려주시는 영 성령을 주시고자

약속한 성령을 주고자

정직한 영이 없기 때문에

새호흡이 없기 때문에

새노래를 부를수 없기 때문에

대신 매맞음으로써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마련한 자리로

부어주신다 말이죠.

 

이것이 레위기의 거룩의 의미에 다 나옵니다.

그것을 제사장 딸이 잘 알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부합니다.

마치 탕자의 형, 맏아들처럼

 

그리고 끝까지 십자가의 용서를 거부합니다.

 

자기자리를 따로 꼬불쳐 놓았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거룩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자기 따나 실천해서 모아둔 거룩을 따로 챙겨서 거룩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진짜 거룩 앞에서 배설물을 자랑스럽게 들이대더라 말이죠.

 

그것을 배설물 취급했다고 그래서 이유 없이 십자가에 대한 반발성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다 그런식이였다 말이죠.

 

자기 자리가 없는데 그 없는 자리를 마련할려다가

십자가에 턱 걸려 버리니까

이 십자가가 졸지에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이 십자가가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거룩지키기를

똥 취급하는 것에 못 건뎌서

졸지에 걸림돌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음녀이거든요.

 

진짜 음행은 탕자가 아니라

맏아들이 탕자에게 퍼붓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거부입니다.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 원수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한 반발입니다.

 

누가 봐도 탕자인줄 알았는데
누가 봐도 며느리 다말인줄 알았는데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겁니다.
신학교 출신이라고 하는 시아버지 유다가 음녀였던 겁니다.

 

마침 며칠전에 어머니께서 돼지고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돼지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서 누구 누구는 안 먹는다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레위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을 안 먹는 유대인

정결한 짐승을 먹는 유대인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도행전에 베드로에게 꿈에 묵으라 내가 깨끗하게 했다

안 묵을랍니다.

어허 묵으라 라고 세 번씩이나 썰전을 벌리더라 말이죠.

(행 10:9, 개역)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행 10:10, 개역)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개역)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개역)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개역)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개역)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개역)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음식을 유통시킨다 말이죠.

코셔 라고

이슬람의 힐랄 과 같이 세계에 유통됩니다.

 

콜라도 코셔 라고 적힌 것이 있을 정도로 말이죠.

왠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그리 깨끗하다고

오히려 더러운 배설물을 온 몸에 바르는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정작 레위기에 나오는 부정한 짐승 정결한 짐승은

곧 거룩의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들이 가장 더럽다고 저주스럽다고 거부하는 십자가가 거룩인데

이 거룩을 거부하는 겁니다.

음녀처럼 말이죠.

 

돼지는 굽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되새김질을 못해요

 

결국 짐승 중에는 굽과 되새김질이 바로 출애굽 출세상 이 땅을 어서 떠나자 라는 겁니다.

출애굽 할 때 급히 먹어라 벤또 도시락이 있다는 겁니다. 되새김질이지요.
허리에 띠 띠고 신발 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라 말이죠.

이것이 거룩이다는 겁니다. 이 땅과의 단절.

(출 12:11, 개역)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또 바다짐승에게는 비닐이 있어야 한다 말이죠. 즉 떠돌이 여행자이다는 겁니다.

참 들짐승의 굽에 해당됩니다.

굽이 벌어져 있어야 오래 달릴수 있다 말이죠. 달리기

자꾸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죠.

땅과의 분리입니다. 신발 신어라 말이죠.

이것이 비늘이 있는 거다 말이죠.

 

비늘이 없으면 땅에 안착하듯이 땅에 흡착하는 겁니다.

 

결국 거룩이란 유교에서의 도덕 윤리가 아니라

이 땅을 뜨는 겁니다.

거룩은 곧 분리, 차단, 구별, 단절, 이다 말이죠.
성령론을 개방성 다양성이라고 우기는데
정반대입니다. 차단이요 단절입니다.
저런 개방성과 다양성과의 단절이요 구별이다 말이죠.
저런 땅의 사고방식과의 차이요 절단입니다. 

그것도 이슬람의 순교처럼 뜨는게 아니라 천국 가기 위해서 자살테러를 벌리는게 아니라

그 반대 방향에서, 하늘에서 꼿아서, 작살을 쏘아 꼿힘을 당해서 하늘로 끌려가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하늘로 가는게 아니라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말하는 거룩이란 다 가짜입니다.

성화론도 가짜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지킴도 다 사기입니다.

힐랄인지 코셔인지 백날 가려서 편식해도 오히려 더러움 완고함만 가득차게 되는

완악한 수건을 더더욱 못 벗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활동의 반대로

음녀는 땅에서 왕들을 모으는 겁니다.

마치 사도행전의 천사들의 활동처럼 따라해요 글쎄

창작성도 없어요 즉 따라한다는 것은

곧 복수심이다고 했지요

원한 한풀이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아닌 행함은 모조리 다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믿음이 나올수 없고요

모조리 다 행함만 나오는 겁니다. 복수심만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은 원치 않는다고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복수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호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 중심으로 천사들이 활동하듯이

음녀를 중심으로 땅의 임금들이 모여서

이 거룩에 대한 반발성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만이 거룩하다 라는 것에 반발해서

인간들에게 소통될수 있는 다른 것도 거룩하다 라고

유사천국을 유통시켰듯이 종교를 통해서

유사거룩을 매매 소통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 자리를 마련하는 안심을 안도감을 가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거룩은 그 꼴을 못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이룰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말이죠.

 

계시록에 나온 것도 다 이루었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그 사이 그 빈공간에 무엇을 까까득 채우는가?

빈그릇에 비어있는 십자가를 꽉꽉채우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만나면 내가 쌓아온 거룩이라고 모은 유사거룩들이 탈탈탈 털려서

빈깡통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비어있지 않죠? 빈깡통으로 꽉꽉채워지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뭐 하나 내세울것이 없는 자랑할꺼리 없는 진짜 거룩입니다.

이 진짜 거룩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나를 빈깡통으로 만든 이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라고

십자가로 꽉꽉 채우는 것이 거룩이다 말이죠.

 

그러니 초림과 재림 사이에 주의 인자하심 곧

일곱 봉인 떼기, 일곱 나팔 불기, 일곱 대접 퍼붓기가 꽉꽉채워지는 겁니다.

이 일곱이 나를 창조하는 겁니다.

 

역사순서로 시간 순서로 공간 즉 몸 순서로 첫째아들 둘째아들의 몸

공간 순서로 창조되던 방식이

 

거꾸로 일곱에 의해서 창조 당하니까

거꾸로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제사장 나라입니다.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개같은 이방인이 졸지에 제사장이 되더라 말이죠.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이죠.

 

거룩이라면 이래야 되지 않습니까?

진짜 거룩이기에 더러운 이방인에게 전재산을 다 내어주거든요.

그런데 어설프게 거룩 지켜놓고도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면서 지켰다고 우기면 안된다 말이죠.

 

진짜 사랑이기에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겁니다.

목숨 내어줄 수 없다면 그냥 저는 사랑 못합니다 라고 하세요

도리어 받아야 할 정도로 불쌍한 자입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이다 말이죠.

 

자 딴 사람들은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교회사람들은 다 알아먹어요

그런데 거부합니다.

제사장 딸처럼 말이죠.

눈에 보이는 구원장치들이 있겠다 뭐가 아쉬워서 십자가를 믿냐 말이죠.

 

아예 거룩이 없다면

실로암 소경처럼

개같은 이방여인처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거룩이 없습니다.

거룩을 인애와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할 텐데

 

어설프게 거룩을 지켰다고 우기니까

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겁니다.

제사장 딸 음녀처럼 예수님이 친히 만드신 십자가라는 거룩을

이유 없이 미워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처럼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속이냐 말이죠.

어설픈 거룩으로 사기치지 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기쁘게 심판 받읍시다.

주의 인애와 자비는 인간의 믿음이나 말씀실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문으로 속일려고 할 뿐입니다.

 

원수인 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인 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십자가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 성경지식, 목사, 이 모든 것들과 족히 비교도 안됩니다.

그런 의문의 것들과는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