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피로 다 이룬 예수님 나라 통치 (시편 146) 

14-146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룬 예수님 나라 (시편 146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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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61:1, 개역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개역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개역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1:4, 개역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 61:5, 개역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사 61:6, 개역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사 61:7, 개역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사 61:8, 개역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사 61:9, 개역그 자손을 열방 중에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사 61:10, 개역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 61:11, 개역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시 146:1, 개역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 146:2, 개역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3, 개역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 146:4, 개역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 146:5, 개역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6, 개역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시 146:7, 개역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시 146:8, 개역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시 146:9, 개역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 146:10, 개역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시 146:1, 새번역『㉠할렐루야내 영혼아주님을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시 146:2, 새번역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시 146:3, 새번역너희는 힘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시 146:4, 새번역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시 146:5, 새번역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복이 있다.

(시 146:6, 새번역주님은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시 146:7, 새번역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시 146:8, 새번역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시 146:9, 새번역나그네를 지켜 주시고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시 146:10, 새번역시온아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할렐루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http://crosslamb.tistory.com/1909


 

 

사도바울은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고 합니다.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런 시선은 율법을 지켜온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던 사도바울 본인이

율법을 지켜서 말씀을 성취한게 아니라 정반대로 말씀을 어겼다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말이죠.

남이 아닌 율법을 지키는데 도사인 사도바울 본인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겁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의 이런 바뀌어진 시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오늘 본문 시편 146편의 다윗의 시선 또한 그러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을때에

선물처럼 예상하지 못한 기쁨이 왔다는 겁니다.

즉 본인은 오히려 죄를 더하게 된

사망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찬송의 옷이 입혀졌다고 여호와를 노래하고

주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찬양하고

바로 이 용서, 이 인애와 자비로 통치 되는 것 예수님의 나라를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통치라는 이 의미가

 

로마서 5장에서는 왕 노릇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는게 아니라 전체로 보고 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개인이 율법을 지켰다고 손 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뭘 해도 다 죄 이다는 겁니다.

판대기 자체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으니까요

통치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럼 이 왕 한 놈만 해결하면 되는 겁니다.

이 왕 통치 문제를 해결했다는 선언을

남이 아닌 이스라엘 왕 다윗이 보게 됩니다.

왕 대 왕 의 싸움

사망의 왕 대 순종의 왕, 은혜의 왕, 의의 왕 싸움에서

졸지에 은혜의 왕이 승리했다는 겁니다.

 

그럼 이 은혜의 왕을 쳐다보느냐

아니면 이 은혜의 왕이 하신 일을 거부하느냐로

음녀가 결정이 되는 겁니다.

 

음녀가 제사장 딸로써 거룩의 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마다의 개인적인 거룩실천 곧 율법이라는 거룩을 실천한 것에 비해

예수님의 율법 완성이신 사랑 앞에서는

모조리 배설물로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럼 은혜를 쳐다봐야 할 입장입니다.

즉 율법은 결국 난 불뱀 물린자입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 곧 몽학선생이고

이 몽학선생이 저 분이 낫게 하신단다 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안내표지 화살표 이정표이다는 겁니다.

 

네비게이션이다 말이죠.

 

저 분이야 라고 말이죠.

 

저 분이 통치자야 구원자야 라고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구원이 졸지에 숙제가 되어버렸어

조건이 되어 버렸어

그래서 열심히 숙제를 하더라 말이죠.

 

맏아들은 열심히 숙제하는데

탕자는 숙제도 안하고 탱자 탱자 전재산을 날려먹어요

 

그런데 구원자가 누구냐 라는 인물을 말하는데 있어서

탕자를 용서해 주니까

 

인물이 아닌 숙제로 보고 있는 맏아들에게서는

그 용서가, 그 거룩한 율법 완성을, 이유 없이 거부하더라 말이죠.

 

이게 진짜 거룩이다 말이죠. 분리 차단 단절

마귀 스스로가 이 십자가의 용서를 거부하도록 단절하는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는

 

때려죽어도 십자가의 용서 속에 못 들어오는 겁니다.

줘도 싫다고 해요

줘도 안 먹어요

줘도 거부한다 말이죠.

 

자연스럽게 거부 단절 차단 분리가 되는 것이 거룩이다 말이죠.

아니 왜? 맏아들과 마귀는 또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이 십자가를 거부할까요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길까요?

 

성경에 나옵니다.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이다고

 

사랑이라는 것은 행함이나 실천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냥 덮쳐지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항상 사랑에는 뭐뭐 보다 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빛 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사랑 보다 정치적인게 없어요

정치란 플라톤에 의하면 간택의 문제이거든요.

선택의 문제다 말이죠.

 

즉 빛 보다 어두움을 택했다는 겁니다.

강요된 선택이지요.

아무리 봐도 더 좋아 보이고

아무리 봐도 십자가는 싫어요 그냥 싫어요

그래서 거리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싫어버린바 되었다는 겁니다.

선택하기 싫다는 겁니다. 저쪽이 저쪽이 훨씬 좋다는 겁니다.

사울왕을 세울때에

하나님이 왕 됨을 싫어했다 말이죠.

이방 나라의 왕 제도를 누가 그럼 보여줬겠습니까?

 

자 이렇게 모든 인간은 사망이 왕노릇하는 가운데

죽음이 통치하는 가운데서 마귀 에게 잠식당한 상황입니다.

불뱀에게 물려 다 죽은거다 말이죠.

 

그 속에서 율법을 가입시켜서

죄 아래 가두는 겁니다.

그럼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가 나와야 겠지요.

 

놀랍게도 아무도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가 없어요.

 

이것이 불뱀에게 물린 증거입니다.

불뱀에게 물렸다면 주여 저 불뱀에게 물렸어요 저를 고쳐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정상인데

놀랍게도 불뱀에게 물린 자들의 특징이

나 십의 이조 했고요

어릴적부터 시편 율법 다 지켰고요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요

저 매국노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이렇게 살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모든 종교가 다 이래요

불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모든 종교가 바로 이런 666을 짐승으로부터 받아서

이것만을 소통시키고 있어요

왜 이건만 매매 하느냐

이게 좋거든요.

싫어버린다 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소통이 되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소통하면 다들 싫어해요

탕자가 용서받은 것을 소통시키면

왜 금가락지를 끼웠냐 라고 반박하는 자들만 생겨나요.

 

율법이 가입됨으로써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최초로 고백하는 자가 다윗 오늘 시편 146편이다 말이죠.

 

저 희년 선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놓여진자

흑암의 백성들

개같은 이방인 갈릴리 백성이다 말이죠.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 이다 말이죠.

 

이런 자들에게만 이 희년이 기쁜소식 복음이 응했다 말이죠.

 

다윗에게만 희년이 응한 겁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뭘 해도 다 죄 뿐입니다 라고 고백했거든요.

 

아 그까짓 고백 나도 하겠다.

해 보세요 되나?

그렇다면 완료 즉 미래완료 율법의 완성을 다 봐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 나 다윗에게 미련 두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 왕 후배들이 나타나서 말씀을 잘 지키고

이스라엘을 잘 이끌어 갈 것이다 라고 기대할까요?

안합니다.

이미 완성이 되었는데 뭘 기대합니까?

할게 없다는 것이 기쁜 소식인데

 

이것이 음녀들에게는 거리끼는 소식으로 들린다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다윗과 다윗언약에 따른 참선지자들은

이 이스라엘을 망하라고 물에 빠뜨린다 말이죠.

 

반대로 음녀를 따르는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 망할 리가 없다 라고

물에 안 빠지도록 도와 주고 있다 말이죠.

 

베드로처럼 물에 빠져 봐야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새롭게 본다 말이죠.

저 큰 성 바벨론도 큰 파도 풍랑 조차도 죽음의 권세도

잠잠케 하시는

주여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고

 

비로소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구원자로 보이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보더라 말이죠.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죄인에게

바벨론 보는 앞에서 제사장 나라로 삼아버린다 말이죠.

 

탕자에게

맏아들 보는 앞에서 금가락지를 끼우고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해 버린다 말이죠.

 

누가 반발하겠습니까?

탕자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탕자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에 대한 반발

피 흘리심에 대한 반발이다 말이죠.

 

그럼 너가 이 피를 마셔라

그럼 또 안 마실려고 해요

나는 어릴적부터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식인종도 아닌데 주님의 살과 피를 먹습니까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럼 탕자에 대한 용서는 무조건 이유없이 싫고

그럼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 라고 하면

난 식인종 죄인이 아니다 라고 안먹을라고 하고

뭐 이런게 다 있냐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다 이래요

식인종은 아니다고 하고

탕자에 대한 용서는 미워죽을라고 하고

뭐 종교를 통해서 선함을 추구한다고요?

그 선함이 악함인줄

선과 악이 하나인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소통되는 곳이 짐승의 나라이다 말이죠.

짐승이예요 짐승

음녀입니다.

 

탕자가 음녀가 아니라

맏아들이 음녀다 말이죠.

 

오히려 창기와 세리 매국노가 먼저 천국에 간다 말이죠.

 

아 그럼 나중에라도 천국에 가겠구나? 가 아니다 말이죠.

먼저 라는 말은 아주 아주 반발성을 극도로 표출하겠끔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지옥가는 거야 당연한 것이고 말이죠.

 

자 그럼 오늘 다윗의 찬양은

맏아들 입장에서의 찬양일까요?

탕자의 입장에서의 찬양일까요?

 

당연히 탕자라는 죄인입니다.

 

누가봐도 창기요 세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천국 가요.

 

맏아들 보란 듯이 약을 이빠이 올려요

당연히 맏아들 반발합니다.

 

이게 음녀입니다.

진짜 거룩에 대한 반발성

 

그것도 자기가 지숨지숨 찔끔 찔끔 지켜온 거룩이 있다고 여기니까

더더욱 그러하다 말이죠.

차라리 안 지켰으면

차라리 난 소경입니다 라고 했으면 고쳐주실텐데

 

누가 나를 고쳐 난 건강해

난 의인이야

거봐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거든

혹시 빠뜨린 것 있으면 지적해줘 그럼 다 지킬께

얼마나 이런 자세가 겸손하지 않냐 말이죠.

 

그런데 다 타버린 잿더미가 아니다 말이죠.

슬픔이 아니다 말이죠.

근심이 아니다 말이죠.

(마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3, 개역)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4, 개역)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5, 개역)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6, 개역)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았다 말이죠.

마음이 가난한게 아니다 말이죠. 어설픈 겸손한 척 하더라 말이죠.

애통하는 자 우는 자가 아니다 말이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지 않더라 말이죠.

온유한 자가 아니다 말이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줄 마음이 추호도 없더라 말이죠.

어릴적부터 지켜온 그 율법 지킨 마일리지를 나누어줄 마음이 없어요.

긍휼이 여기는 자가 아니더라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할 생각만 하지 남으로부터 77번 용서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다고 여기지 않더라 말이죠.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니더라 말이죠. 나는 원수입니다 주여 이 원수도 용서해주소서 라고

원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이 십자가의 원수사랑을 안 쳐다보더라 말이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아니다러 말이죠.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면 미움받거든요.

그 미움을 받기는커녕 십자가를 거부하는 반발성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이게 음녀예요 거룩을 거부하고

자신의 거룩으로 단절 시키는 겁니다.

십자가는 음녀를 단절 시키고

음녀는 십자가를 단절 시키더라 말이죠.

 

이게 거룩의 기능인데

뭐 거룩은 곧 성령은 개방이요 합일이라고?

단절도 된적이 없는데 어떻게 원수가 하나가 되냐 말이죠.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원수 된 적도 없는데

죄인 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의사를 만나게 되었냐 말이죠.

 

원수에게만

죄인에게만 보이는 십자가인데

 

그럼 일부러 죄 지으란 말이냐

용어도 이젠 다 까먹었네

방종 하란 말이냐

 

죄를 지으란 말이냐 라고 말하는 자는 다 의인이다 말이죠.

여전히 율법이 가입된 것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는 말이 무슨 말인줄 모르는 겁니다.

 

죄란 지을수 있는게 아니다 말이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짖겠냐 라는 말은

일부러 지을수 있는 죄란 없다는 뜻이지

은혜를 일부러 죄지어서 만들 수 있겠냐 라는 말이 아니다 말이죠.

 

죄를 인간이 지을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인간 하기 나름이 되는게 죄이거든요.

그 정도로 죄는 죄 답다 말이죠.

인간 하기 나름이다 라고 생각하게끔 숙주로 삼아버렸으니

 

죄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죄가 아 그럼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지어야지 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거죠.

죄가 인간 보다 셉니다. 죄가 인간을 조종하고 있어요

인간은 죄가 시키는대로 하는 리모콘이다 말이죠.

 

그래서 다윗이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말이죠.

율법 못 지킨다는 겁니다.

 

아 나는 죄 아래 갇혔구나 라고

죄를 인간 보다 높이 높이 띄워주게 된다 말이죠.

그것을 통치

또는 왕노릇이다 고 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써 알려준 결고 압니다.

 

율법에게 나사주세요 고쳐주세요 라고 이야기 하면

율법은 안 고쳐주고 저분이 고쳐주신다 라고 저분을 가리켜 주는 손가락

이정표 화살표 이다 말이죠.

그 화살표 방향에 누구를 쳐다 보라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린 나를 고쳐주실

죄인을 부르시는 그 구원자가 바로 오늘 다윗이 부르는 찬양하는 분이다 말이죠.

 

아 이것이 이미 구원자가 먼저 있고 그리고 죄인을 발생 시키고

그래서 불뱀에게 물리도록 하신 거다 말이죠.

 

구원자를 보라꼬

찬양하라꼬

 

이 예상치 못한 기쁨에

아니 찬양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윗은 탕자로써

원수로써

죄수 복을 입고서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죄수복에 피 발린 이 피를 자랑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들 시끄럽다 라고 거리끼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이 돌삐인 다윗이 찬양하지 않으면 누가 찬양하겠습니까?

돌이 되어서라도 이 피를 만방곡곡에 찬양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 다윗에게 피 발린 피의 왕노릇 피 통치

십자가 정치의 피날레 나팔소리 뿌뿌뿌 입니다.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어린양 나라의 통치입니다.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케 하려 함이라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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