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있어도 호흡이 없는 자들아, 새 호흡을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조리한 용서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시편 148)

 

일곱[심판(일곱번 똥물에 빠뜨리시는)-십자가(완료된 거룩)] 속에 들어가는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 

14-148 호흡이 없는 자들아, 새 호흡을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조리한 용서를 찬양하여라! (시편 148편).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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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개역)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6:3,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6:4, 개역)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6:5, 개역)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148:1, 개역)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148:2, 개역)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148:3, 개역)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148:4, 개역)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148:5, 개역)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48:6, 개역)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148:7, 개역)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148:8, 개역)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148:9, 개역)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148:10, 개역)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11, 개역)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148:12, 개역)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48:13, 개역)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148:14, 개역)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148:1, 새번역)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148:2, 새번역)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모든 군대야, 주님을 찬양하여라.

(148:3, 새번역)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빛나는 별들아,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148:4, 새번역) 하늘 위의 하늘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에 있는 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148:5, 새번역) 너희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니, 너희는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148:6, 새번역) 너희가 앉을 영원한 자리를 정하여 주시고, 지켜야 할 법칙을 주셨다.

(148:7, 새번역) 온 땅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바다의 괴물들과 바다의 심연아,

(148:8, 새번역) 불과 우박, 눈과 서리, 그분이 명하신 대로 따르는 세찬 바람아,

(148:9, 새번역) 모든 산과 언덕들, 모든 과일나무와 백향목들아,

(148:10, 새번역) 모든 들짐승과 가축들, 기어다니는 것과 날아다니는 새들아,

(148:11, 새번역) 세상의 모든 임금과 백성들, 세상의 모든 고관과 재판관들아,

(148:12, 새번역)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들아,

(148:13, 새번역)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만이 홀로 높고 높다. 그 위엄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다.

(148:14, 새번역) 주님이 그의 백성을 강하게 하셨으니, 찬양은 주님의 모든 성도들과, 주님을 가까이 모시는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할 일이다. 할렐루야. / 또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뿔을 높이셨으니'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오늘 본문 시편 148편에서는 부정적인 단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찢으셨다 라는 의미와

일곱이 심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와서

시편 148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의 의미는 상대적인 짐승의 수 666에 대비된 의미입니다.

미흡하고 부족한 666과는 반대로

일곱은 완료입니다.

즉 완벽한 거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완벽한 거룩의 영광 앞에서

비로소 심판받아 마땅한 부정한 입술을 가진자라고 고백케 됩니다.

그 심판의 주가 옳았다고 외치는 겁니다.

이 완료 앞에서는 더 이상의 미흡한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일곱이 또렷히 보이는데

마귀는 속이는 겁니다.

흐릿하고 모호한 짐승의 수라는 의문의 반복과

함량미달의 번제와 제사를 가지고 오게 되면

또렷한 완료 앞에서는 꾀는 속임수에 불과함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대비 시키는 겁니다.

일곱만이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심판주이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또렷하거든요

 

일곱 번 똥물에 담겨줘야 할 정도로 심판 받아 마땅하다 말이죠.

마귀는 자꾸 똥물 보다 너가 더 깨끗하다 라고 하지만

정작 일곱은 내가 똥물 보다 더 더러운 자임을 제대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겁니다. 부정함을 제거해 주시는

그 심판의 주 만이, 나를 제대로 심판 하시는 분만이 나를 제대로 구원하실 분임을 말이죠.

 

그러니 남을 일곱 번 용서해야 합니까 라는 마귀의 속임수가 아닌

도리어 내가 칠에 칠십번 무한대로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임을

또렷하게 밝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결국 이 다 이루심만이

이 십자가의 심판만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타 죽어야 마땅한 입장에 놓여졌음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개인만이 아니라 천사 조차도 여섯 날개로 가려야 할 판국으로 또렷하다 말이죠.

그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해서

일곱만이 거룩해서

도리어 이 일곱으로부터 용서 받아야 할

나에게 정죄받은 그 다말이 나를 도리어 구원하는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진짜 거룩 진짜 나 보다 그가 옳았다 라는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일곱만이 나를 제대로 심판하고 제대로 건져낼 자이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미흡한 것을 들이댔다가는 타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일곱을 거부하는 666 이거든요. 의문의 제사와 번제의 반복 말이죠.

나를 제대로 불태워 버리는 일곱을 거부하는 666이다 말이죠.

 

너는 똥물 보다 깨끗해 라고 일곱 번 똥물에 담굴 필요가 없어

너는 문둥병자가 아니야 라고 속인다 말이죠.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 창조주이자 심판의 주이신

일곱을 만남으로써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보게 됨으로써

아니 이미 타 죽어야함을 마땅히 알고서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스라엘 중에 거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나는 타 죽어 마땅한 자이구나 라고

 

제대로 된 거룩 앞에서

제대로 된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보게 됩니다.

나를 제대로 심판 하는 자가 유일한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찬양이란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원인 없는 결과로 누리게 되듯이

 

우리를 제대로 찢는 분만이 우리를 제대로 낫게 하시는 구원자로써

 

이 분 만을 찬양해야 한다는 겁니다.

 

찬양이란 원인 없는 결과이거든요.

예상치 못한 찬송의 옷이다 말이죠.

심판인데 왠 구원이냐? 말도 안되는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찬송

곧 원인 없는 결과, 예상치 못한 것이 찬양이다는 겁니다.

곧 칠에 칠십번의 용서인 예상치 못한 인애와 자비인

말도 안되는 용서이다는 겁니다.

 

예상된 용서

예상된 구원은 가짜입니다.

 

말도 안되는 것이 용서입니다.

마귀들이 반발하지 않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무이다

말도 안되는 구원이 진짜 구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도 구원하냐 라고

적개심을 유발케 못하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가짜 십자가이다 말이죠.

마귀 보란 듯이 너끈히 용서하시는 것이 진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속이냐 말이죠.

 

 

자 그렇다면 부정적인 단어가 하나도 없는 시편 148편에서

해도 산도 달도 모든 피조물들이 찬양을 하는데 있어서

어디 속에서 찬양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찬양하는 내용들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디 속에서 찬양하는가? 곧 일곱 속에서 찬양한다는 겁니다.

일곱은 똥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 속에서 찬양하는 겁니다.

큰 물고기 입 속에서 찬양하는 겁니다.

생전 이스라엘 예루살렘 시온 땅에서는 배불러서 안 부르던 주의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을 곧 예수님의 이름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비로소 부르게 됩니다.

 

그 일곱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심판 주입니다.

 

심판의 주를 만나지 못하면

엉뚱하게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키고 시편대로 지켰다는 둥

번제와 제사 라는 의문의 반복을 주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귀죠.

 

지음을 받은 피조물, 일곱 날 동안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들은

바로 예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찬양하는 겁니다.

이 분이 심판 주이시다는 겁니다.

이 완벽한 거룩인 십자가가 옳았다 라고 심판의 주를 찬양하는 겁니다.

 

이들의 찬양 내용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이거든요. 즉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이름은 사건이거든요

어떤 사건 곧 기능

나를 찢으셨다가 나를 도로 낫게하시는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주가 바로 나의 구원자라고

해도 달도 산도 바다도 찬양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들은 찬양군대입니다.

이스라엘이 찬양군대이듯이

이들 피조물들이 이스라엘처럼 찬양군대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지막 날에 지음을 받았습니다.

제일 처음 첫째날에 지음 받은게 아니라

여섯째날 마지막날에 지음 받아서 앞에 지음 받은 피조물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치는 자로써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지음 받는 겁니다.

 

마치 구약의 레위인 곧 제사장처럼

분리 구별 구분 된 거룩을 나타내시는
주님의 성전의 종사자가 아닌 주님의 거룩 종사자들처럼 말이죠.

 

그래서 맏물처럼 십의 하나로 따로 구별된 것처럼 분리가 되어서

하늘에 속해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거룩을 증거하는 자로써 따로 구별이 되는 겁니다.

 

제일 마지막에 지음 받은 인간이 먼저 지음 받은 피조물들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인간의 외침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반발하는 자들이 바로 짐승의 수를 받은 666표를 받은 자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찬양군대로써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외치는 겁니다.

이미 승리한 십자가에서 다 이룬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을 찬양하라 라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호흡이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외치는 겁니다.

만약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인애와 자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왜 하필이면 돌입니까?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3:9, 개역)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돌은 건축물의 가장 근원적인 재료입니다.

돌 위에 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허무신다고 했듯이

가장 기초이다 말이죠.

그런데 가장 무시꺼리입니다.

 

진짜 건축물 곧 허물어지지 않는 진짜 건축물인 집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는 집을 말하는 겁니다.

 

찬양이란 바로 이런 역설성으로써

마치 건축물처럼 가장 무시받는 돌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방식이

찬양이다는 겁니다.

근심인데 어떻게 찬양이 됩니까?

심판 인데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일곱 앞에서의 심판인데 어떻게 잿더미인데 어떻게 화관, 신부의 머리에

씌여지는 꽃화관이냐 말이죠?

 

어떻게?

원인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원리인 인애와 자비인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러니 찬양자는 이 버림받는 무시받는 일곱만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 일곱(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라는 심판)이 기촛돌로써 빼버리게 되면

마치 마귀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일곱을 빼버리면

그 건물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말이죠.

머리 인데 말이죠.

유대인들은 이 십자가가 라는 일곱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었고

헬라인은 이 십자가 라는 일곱을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무시하는 겁니다.

 

사랑이 없는데 안식일 지켜서 뭐하게요?

사랑이 없는데 천국가서 뭐하게요?

사랑이 없는데 지혜로우면 뭐합니까?

사랑이 없는데 구원받아서 뭐하게요?

 

울리는 꽹과리일 뿐인데

주여 저는 사랑없습니다. 사랑을 주세요

일곱에 칠십번 용서해 주세요.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있으면 그거 사랑 아닙니다.

 

조건입니다. 법이 됩니다.

남을 일곱 번 용서하겠다는 것은 조건입니다.

마귀가 좋아라 하는 번제와 제사인 우상숭배이다 말이죠.

그런자가 거리끼는 십자가를 쳐다보겠습니까?

남을 7번 용서하는 그 공로를 배설물로 만들어 버리는데?

 

과연 법이냐? 사랑이냐? 말이죠

 

일곱째날 동안 지음을 받은 모든 피조물들은 바로 사랑으로

곧 주의 인애와 자비로 지음받았지

 

조건으로, 법으로 지음 받은게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해와 달과 별과 바다와 험한 산들 모든 피조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지음받아서

새호흡을 심어버리심으로써

금가락지를 끼우심으로써

그의 음성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음성으로 새롭게 지음받아서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창조되어서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여호와를 법 대 법으로 찬양하는게 아니라

이유없이 원인 없이 결과로 사랑 대 사랑으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찬양하는 겁니다.

 

그 찬양의 내용이

여호와의 이름이 하신 일입니다.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찬양군대로

마른 뼈가

이미 말라 비틀어진 뼈가 군대가 되어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군대가 되듯이

 

찢김을 당한 우리가 도로 낫게 하시는 여호와의 이름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군대로써

 

칼도 없이 무기도 없이 오로지 예수의 이름만으로 원수에게 외치는 겁니다.

이미 승리했기에 무기를 가질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무기를 가지게 되면 원인 있는 결과이니까 찬양이 아닌 거죠.

 

즉 무기가 없다는 것은 복수심이라는 원수갚기가 아니다는 겁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지 인간의 숙제가 아닙니다.

 

이미 다 이루셨는데 뭘 새삼스럽게 원수 갚겠다고 한다는 것은

웃끼는 소리다 말이죠.

또 인간에게서는 원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입니다.

곧 예수님의 원수이다 말이죠.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십자가를 거부하는 자들이 원수이다는 겁니다.

다시 원점으로 의문의 반복으로 되돌려 놓겠다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법으로 따져서 밀까부듯이 조사해서 송사할 뿐이지

정작 실상 실제상황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때려죽어도 말을 못하는 겁니다.

 

몸을 죽일려고 사기를 칠 뿐이지

영혼을 심판하시는 십자가를 두려워 할 줄 모르기에

말하지 않고

무시하는 겁니다.

 

말해 버리면 자신이 법으로 따지고 따지는 밀까부듯이 조사해서

정죄하고 송사하는 것이

다 헛짖이 되거든요.

 

물론 자기들도 지키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놓고 무거운 짐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자기도 천국 안가도 남도 천국 못가게 가로막는 겁니다.

 

그 의문을, 그 허구를 그들은 반복해야만 하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빼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사들이 다 이런식입니다.

그저 종교만 유통시킬 뿐입니다.

사기꾼들이지요.

삯꾼들입니다.

그러니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 의문의 반복인 돈만 목적으로 한다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한다고 하신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6:14, 개역)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1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16, 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17, 개역)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돈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소통이 됩니다.

아무리 언어가 달라도 말이죠.

 

즉 누구든지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못 섬기는 이유는

십자가라는 것은 아무리 인간의 믿음이 어떻고 저떻고 해도

그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절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십자가이거든요.

단절이다 말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다 말이죠.

 

그러니 버릴 수밖에 없다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돌이 유통이 안되거든요.

돌은 매매가 안된다 말이죠.

 

하나님의 심판인 일곱은 단절이지 소통 유통 매매가 안됩니다.

십자가는 절대로 종교에서 심지어 기독교에서도 소통 안되요

성화론(인도종교)는 무지 무지 소통이 잘 되요.

막살면 안된다는 말은 누구든지 다 알아먹고

증거해도 이유없이 두들겨 맞지 않아요.

666이 국가요 종교입니다. 짐승의 수이다 말이죠.

 

오로지 666만이 소통이 되는 세상이다 말이죠.

이 짐승의 수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를 할 수 없어 죽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면 사도바울처럼 등에 째찍질만 있을 뿐입니다.

죽은 줄 알고 쓰레기 통에 버린다 말이죠.

또 일어나면 또 버리고 또 일어나면 또 째찍질로 쓰레기 통에 버린다 말이죠.

즉 단절입니다. 유통. 매매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소통되는 것은 오로지

황금 곧 돈 만이 언어의 장벽을 너끈히 넘을수 있다 말이죠.

돌은 외국은커녕 내국에서도 아니 시골동네에서 조차도 유통이 안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무시꺼리입니다. 희소가치성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그 돌들을 통해서 소리 지르게 한다

찬양케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찬양이라는 사건은 벙어리를 통해서 찬양케 한다는 겁니다.

누가 봐도 호흡이 끊어진자 단절된자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소경 곧 끊어지고 단절된자

누가 봐도 고아 과부 나그네라는 단절된 자에게

희년이 찾아와서 금가락지가 찾아와서 찬양케 찬송의 옷을 기쁨의 옷을 입히시는

희년을 완성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스스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스스로 옳다고 여김 받는 것이

 

하나님의 미움 대상 저주 대상 심판 대상이다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 아니다고 하니

호흡이 있다고 하니

죽은자가 아니다고 하니

벙어리가 아니다고 하니

매국노가 아니다고 하니

 

오히려 고쳐줄 이유가 없어서, 의사가 필요가 없어서

지옥 백성임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그것이 돌들이 증명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가장 무시하고 천하게 여기는 돌삐 조차도

주님의 찬양군대로써 이미 다 이루신 십자가를 찬양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지으신 피조물인 돌로써

호흡이 없는데도 어떻게 돌들이 찬양하냐 말이죠

그런데 너는 호흡이 있다고 우기는데 왜 찬양 못하냐 말이죠.

그것을 돌들이 증명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 곧 예수님을 찬양한다 말이죠.

 

소경이 된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찬양하기 위해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고

돌들이 되었던 겁니다. 찬양케 하기 위해서

 

 

누구를?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왜 너는 못하냐 라는 겁니다.

호흡이 없어서?

햇빛을 못 받아서?

달빛이 없어서?

바다 산 공기가 없어서?

 

이렇게 밝히 또렷하게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꾀었길래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

아직도 법 법 띠라라 ~~ 따리리 리 리 라라 법 법 그러느냐 말이죠.

 

가장 비천하다고 취급하는 돌들도 찬양하는 판국에

왜 입이 있어도 부르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냐 말이죠.

 

비밀이라서 그런 겁니다.

 

모든 것이 한 인물에서 나와서 한 인물에게로 돌아가는데

마귀가 꾀어서 없는 자아를 심어버려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린 자아를 심어서

없는데 가짜인데

허구인데

우상인데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을 위해 살도록 꾀어버렸다 말이죠.

 

없는 자아가 그 한 인물 곧 일곱 나는 제대로 심판하는 심판의 주에게 주목케 하는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장대 높이 달려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그 인자를 주목하는게 아니라

 

졸지에 나 라는 존재만 나만 바라보기 때문에

졸지에 그 한 인물이 거리끼는 걸리적 거리는 돌삐로만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럼 버려야지요?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렸다 말이죠.

나 라는 몸을 구성하는 존재물에 건축물에

허구의 건물에

자아라는 몸에

하등 쓸모가 없어서 버리는 겁니다.

 

그 버림받은 돌이

나에게 전혀 안 맞는 돌이

부른 적도 없는데 부르신바 되고

찾은 적도 없는데 찾은바 되듯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머릿돌이 되는 겁니다.

 

나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엄연히 뻔히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우겨도

이 주체 주인이라는 기능을 이길수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넌 허구야 라고 허무야 라고 헛되고 헛되며 다 헛된

허구인 자아만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고

 

일곱이 지적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심판이 너는 허무야 라고 지적한다 말이죠.

 

나 라는 천국에

침노하여 침략하여서

허물어 버리고

삼일 만에 짖는 겁니다.

 

이것만이 창세전에 생명책에 유일하게 기록된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헐라 라고 하는 겁니다.

 

허물어라 즉 허구이다는 겁니다. 의문이거든요.

또렷한 밝히 보이는게 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중분열로써 내 속에 나를 분열시켜서

또 다른 나로써의 주체로써의 예수님이

나를 허물고 다시 삼일 만에 세우시는 겁니다.

이것을 일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곱교회는 숫자 일곱이라는 역사나 공간의 건물 교회가 아니라 숫자 일곱이 아니라

십자가의 저주로 그 부정함을 심판 받아서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제거했다 라는

예수라는 이름에 사로잡힌

일방적으로 사랑한다 라고 사랑을 받은 신부를 일곱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관계성이라는 기능의 표현이지

존재론적인게 아니다 말이죠.

그리스도의 몸을 일곱 교회라고 하고

머리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렸다는 겁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심으로써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일방적으로 편파적인 사랑을 퍼부음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 일곱교회가

예수님의 허리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일곱이 먼 나라 딴 나라 말의 언어의 용어가 아닌

신화 곧 확인 할 길이 없는

그저 동화 속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상황으로 나에게 쳐들어와서

나를 허물고 곧 심판하는 일곱으로써 다시 새 몸으로 창조하는

직접적인 체험적인 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일곱이다 말이죠.

 

너무 너무 너무 구체적이여서 너무 너무 또렷하다는 겁니다.

 

따로 국밥이 아니라 내 속에서 분열하는 겁니다. 깨고 깨는 겁니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말이죠.

 

(1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십자가는 매일 매일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퍼부어주시는 겁니다.

 

갈라지고 단절되고 분리되고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거룩은 나의 대상물이 될수 없다는 겁니다.

그 정반대로 거룩의 대상물이 되는 것이 나 라는 겁니다.

 

그 진짜 완벽한 거룩인 일곱 앞에서

허물어지는 겁니다.

 

이 나 라는 자아를 어떻게 심판하고 없애버리시고 다시 세우시는

창조를 펼치는지? 그 실제로 체험 당하는 창조이다는 겁니다.

 

오래전의 옛날 옛날 옛적에

 

몇천년 수십억년 전의 창조가 아닌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창조가 눈에 실제적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12:4, 개역)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12:5, 개역)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12:4, 새번역)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12:5, 새번역)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 , '게헨나'

 

(12:4, 현대어) [마땅히 두려워할 분;10:28-31] 사랑하는 친구들아, 너희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그들은 몸만 죽일 뿐 너희 영혼을 죽일 능력은 없다.

 

 

(10:2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10:29, 개역)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0:30, 개역)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10:31, 개역)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바로 찬양은 이 창조를 하시는 일곱(미흡한 가짜 거룩인 666을 허무는)이신

나를 허무시는 그 이름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호흡이 없었던 죽은자에게 새호흡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정직한 영이 없던 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십자가의 피흘려 모든 허물을 다 덮으신 그 사랑을

그 일곱에 칠십번의 무한대의 용서를

찬양케 하시도록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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