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유 없는 결과 로써의 혼인잔치, 종말잔치) (1: 1- 3)

계 0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혼인잔치) (계 1, 1- 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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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 (계 1, 1- 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유 없는 혼인잔치, 종말잔치) (계 1: 1- 3)
  
(계 1:1, 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 1:2, 개역)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 1:3, 개역)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1:1, 새번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의 기록입니다'』
(계 1:2, 새번역)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계 1:3, 새번역)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라고 시작하시는 이유는
기존의 것 곧 처음 것이 다 지나간다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자 그렇다면 멀쩧이 기존의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준이 등장했다면
우리는 새 기준에 의해서 왜 기존의 기준들이 가짜가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가짜 곧 실상이 아니라 그림자이다는 거죠.
 
그런데 가짜가 실상 노릇을 하고 실상은 가짜로 취급받아 벌어진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이 십자가를 다 이루심으로써 새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이 새 기준을 말하기 위해서 처음 것이 지나가야 하는데
그 처음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첫아담이다 말이죠.
 
그럼 처음 아담은 지나가는 것이고
그저 산 자 곧 존재일 뿐이고
둘째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기 때문에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이 존재를 뛰어넘어서 지나가버리게 하는 새 아담,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곧 처음 아담을 지나가게 해 버린 둘째 아담의 계시이다는 겁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새번역)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 ㉭창 2:7(칠십인역)』
(고전 15:45, 공동)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 ㉠창세 2:7.』
 
(창 2: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히, '아다마' ㉢히, '아담'』
(창 2:7, 공동)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창 2:7, 쉬운)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창 2:7, 킹흠정)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 2:7, 현대인)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20, 개역)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3, 개역)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고전 15:24, 개역)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5, 개역)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고전 15:26, 개역)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자 그럼 첫 아담이 하는 것은 뭘 해도 죄가 됩니다.
존재이니까 지키는 것 밖에 못 해요
 
이것이 사망이 들어오는 이유입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사망이 격렬하게 왕노릇함으로써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의 존재 보다 더 나은 존재의 가치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저 존재만 없애 버리면 안식일 지키는 것이 의미로 남게 되는데
저 예수 라는 존재를 없애버리지 못하면 안식일 지키는 것이 무가치 무의미 무존재가 되어버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예수님을 존재로 본 겁니다.
칼로 죽이면
십자가로 죽이면
사망이 왕노릇하는 존재로써 사망으로 존재를 없애버리면 없어지는 존재로 본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은 바로 그런 존재의 속성을 끌여들여서
사망이 왕노릇한 것을 밝히 보여줌으로써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은혜가 왕노릇하는 마지막 아담의 살리는 영으로써 기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의 태도 곧 이 마지막 아담을 바라보는 시선인데요
마지막 아담 곧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라고 했을때에
나 라는 처음 아담은 기존의 처음것 곧 이전 것.
지나가는 것에서 못 벗어나는 죽은 자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보는 눈이 띄여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존재 또는 첫아담이다 라고 지나가는 이전 것을 주장하는게 아니라
새 몸 새 아담 마지막 아담에게 살려주세요 저는 죽은 자입니다 라고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 할 판국인
마치 심판의 주를 만난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존재로 보는게 아니라 기능으로 보는 자입니다.
 
심판 주 라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 의사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의사가 이리 저리 온갖 간섭을 하면서 잔소리를 합니다.
곧 심판 합니다.
 
이것이 의사 라는 존재가 아닌 기능 때문이다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의사를 기능으로 보는게 아니라
그의 칼에 찔리고 살이 째이고 바늘로 꿰메지고 하는 기능을 당하는게 아니라
의사를 존재로 보고 친하게 지내온 자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즉 의사를 자신들의 재주로 친구로 삼아버렸다 말이죠.
오히려 그 존재적인 의사를 통해서 자신의 건강함을 과시하더라 말이죠,.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큰 계명이 무엇이냐 라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친한 존재로 만들어 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큰 계명 두 계명을 잘 지키는 나를
절대로 심판하거나 또는 십자가의 저주로 못 박거나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큰 계명 곧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확증 받을려고 하더라 말이죠.

(눅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개역)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개역)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개역)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개역)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개역)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개역)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존재의 눈에 존재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기능으로 다가가니까
한번 수술 칼 로 째 보자 말이죠.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과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지 말이죠.
마치 부자청년에게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수 있는지 물으셨듯이
 
의사의 기능으로써 확 확 째 봅니다.
째 보니까
 
첫사람 아담이 들어가 있어서
처음 것이 지나가지 않은 채로
마치 살려주시는 영을 받은 양
새 것이 되었는냥
정직한 영이 있는냥
 
우기는 것을 의사의 칼로 확 마 잡아 째 보니까
 
정직한 영이 없고 새것이 없더라 말이죠.
 
그래서 가인처럼 또는 맏아들처럼
도저히 용납을 할수 없는
세상이 격분 격동 하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견딜수 없어 하는(잠언 3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 하시니까
곧 오늘 나온 용어처럼 계시 하시니까
 
이 계시 에 의해서 화를 내면서 저거 언제 죽일꼬 하더라 말이죠.
 
이게 기능입니다.
이게 주 라는 기능이다 말이죠.
 
이게 계시의 기능이다 말이죠.
 
계시란 멍청하게 가만히 인간 존재들이 이 계시를 지키기를 바라면서
바리새인 곧 마귀들을 타 넘어 오기를 바라는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내가 바리새인 곧 마귀들을 타 넘어서 너희에게로 가는 것이 계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시는 인물이요
자 놀라운 발언을 합니다.
또 이단이라고 공격해도 상관 없습니다.
계시는 인물이요 사람입니다.
즉 처음 것이 지나가버린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는
새 사람 곧 마지막 아담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마지막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글쎄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로 우리 처음 아담인 모든 사람들을
십자가로 쨉니다.
 
오늘 계시 로 쨉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라고 시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나 처음 아담인 처음 사람인 나를 짼다는 겁니다.
그렇게 쨀 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하는 이유는
당신만이 나의 병을 고치실 의사입니다 라고 기능을 본
제대로 본 자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환자는
곧 환자라고 여기지도 않고 건강한 자라고 우길 뿐이겠지만
환자입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고백이겠지만
만약 환자로 자신을 여긴다면
예수님의 의사 라는 기능 때문에
 
기존의 처음 것 곧 가짜 의사들에게 무지 시달렸다 라는 것을
그 환자 또한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격게 되는 거죠.
 
실로암 소경이 그 대표성입니다.
물론 현장에서 간음 하다 잡힌 여인도 마찬가지이구요.
탕자는 더더욱 그렇구요 그래서 자주 언급했습니다.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것은 동네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미 존재에서 벗어나 버린 겁니다.
 
수많은 소경이 있었겠지만 이 날 때부터 소경은 아예 손을 못 대니까
아예 단정 시켜버리는 것이
저 사람의 죄는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라는
존재로만 남아버린 거죠.
 
그것도 누가? 그렇게 이 존재를 장난감으로 다루느냐?
아까 말한 의사랑 친하게 지내서
자신의 건강함을 더더욱 이 불가능한 눈뜸이 불가한 단정시켜버린 자를 가지고서
자신이 건강함을 더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이용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그렇게 하는 판국인데
뭐 이까짓 실로암 소경 쯤이야?
의사도 자신들의 손아귀에 집어 넣어 마음껏 주물떡 다루는데 말이죠.
최순실이가 박그네를 마음껏 요리해 먹었듯이
자기가 의사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온간 마약 주사를 다 꼿으니까 말이죠.
 
바리새인이 최순실처럼 예수님을 가지고 놀 듯이
실로암 소경 쯤은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런 바리새인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박그네 나랏임금을 마음껏 주무른 최순실처럼
우리가 그런 짖을 하더라 말이죠.
 
아까 말한 한 율법사처럼 큰 계명이 뭐냐고 라고 하고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고 하고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고 하고
 
모조리 다 처음것 즉 다 지나가는 안개와 같은 것을 주장할 뿐이지
새것을 말하지 못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욕하고 있는
단정해 버린 그 실로암 소경 곧 날 때부터 죄인인
이 실로암 소경이
자신의 소경됨을 지나가게 하는 의사를 만나 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소경이 묻습니다.
저를 고치신 분이 누구죠 라고 말이죠?
저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누구죠 라고?
 
존재가 아닌 기능을 외치는 자로써 실로암 소경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소경이 되었다 라는 기능이 나타나는데
 
얼마나 구체적 보편성이였으면
 
바리새인의 입에서 실토케 만들어 버립니다.
 
너를 고치신 자는 예수이지만
나는 모세의 제자이고 너는 신참 예수의 제자이지 라고
 
그만 답을 가르쳐 주고 말았다 말이죠.
바리새인 자기들 입으로 그만 답을 말이죠.
 
참 기가막히게도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존재로만 남을란다 라고 역사성 곧 존재를 주장합니다.
나는 모세의 제자라꼬 천삼백년 묵은 산삼 존재이다는 겁니다.
너 실로암 소경 니는 예수의 제자이지? 겨우 삼년 묵은 산삼이지?
어딜 까불어 라고
 
자신들의 실소로 내 뱉은 것을 그렇게 주어담는 겁니다.
 
이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눈을 뜨면 존재가 보일 뿐이지 기능이 안 보여요
그런데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은 존재는 안보이고 기능만 보여요
 
천삼백년 묵은 산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눈을 띄게 하던가요?
내 죄를 대신해서 매 맞던가요?
모세가 그랬던가요? 오히려 화를 냄으로써 탈락했거든요.
그래서 모세 조차도 변화산에서 나타나서 주여 저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나의 소경됨을 눈 띄게 한 것은 천 삼백년 묵은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계시덩어리 이다 말이죠.
그 분을 실로암 소경은 정작 보고 있는데
존재는 때려죽어도 못보는 것이 바로 예수라는 의사기능이다 말이죠.
 
왜? 자신들의 가짜 의사노릇이 다 들통나니까 존재를 우기더라 말이죠.
 
존재는 우상이거든요.
 
지나가는 것, 곧 처음 것이다 말이죠.
 
살리는 기능이 없어요.
말씀 백날 지켜도 살리는 기능이 없으면 존재 곧 우상덩어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서로 니가 더 말씀 잘 지켰니 내가 말씀 더 잘 지켰다 라는 것만 우길 뿐이다 말이죠.
 
죄인이 없어요
환자가 없어요
예수님이 찾으시는 ~~~~
 
결국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인잔치 천국잔치 종말잔치이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 자신의 피로 피옷을 입혀 사신 신부가 있어야 혼인 잔치를 벌릴꺼 아닙니까?
 
그 신부의 기능을 나타내는 자들이 없어요 글쎄
 
이 천국잔치 혼인 잔치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 뿐이것이
오늘날 사단의 회 들인 종교집단들이더라 말이죠.
 
왜냐하면 신부란 원인 없는 결과를 입었거든요.
피 옷입니다.
 
십자가라는 용서의 옷이다 말이죠.
 
이것 때문에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어야만 했듯이
그래서 기능으로써
곧 죄인 됨 환자됨 왜? 기능을 말하기 위한
의사를 말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말이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야만 했듯이
 
계시록 21장에
이전 것 곧 처음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래서 실로암 소경은
슬픔의 기능
근심의 기능
잿더미가 되는 기능
곧 죽은 자죠
죽은 부정한 기능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갔다 라고 새것을 만난 신부로써
이제는 아픔과 고통이 없다 라고 외치는 새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실로암 소경은 그 새노래를
마귀 들으라꼬
 
바리새인 들으라꼬
 
바리새인 입에서 실소케 만들어 버리는
기능으로써 작용케 하는 겁니다.
 
(계 21:4, 개역)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랴서 저번에 어무이께서 이사야서를 보시고
목마른 자들아 와서 마셔라 값없이 마셔라 라고 그 부분을 읽었을때에
제가 일부러 목마르게 광야에 집어넣고서 목마른 자들아
배고프게 양식 없는 곳에 집어넣고서 주린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안 슬픈데 슬프게 만들어서 슬픔 대신 희락을
잿더미가 아닌데 잿더미로 불 다 태워버려서 재 대신 화관을
근심되지 않는데 근심되게 맹글어서 근심 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을 입히시는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주의 기능을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이것이 실제로 구약에 이렇게 나타납니다.
전능자 곧 나를 괴롭게 하는 자 로써 말이죠.
 
멀쩡히 남편 다 살아있는데
괜히 다 죽여버려서 새 남편으로써 오시는 겁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 아닙니까?
나를 나오미 기쁜자라 하지 마라 나를 마라라 하라 난 슬픈 자다
그 슬픈 자에게 글쎄 희락이 온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요 이유 없는 사랑입니다.
이유 있으면 그거 사랑 아니지요.
그 희락이 글쎄 새노래의 족보를 형성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곧 오늘 본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덮쳐버렸다 말이죠.
 
이유 없어요.
그런데 자꾸 이유를 만들려고 해요
막살지 마세요 라고 원인을 만들려고 해
의사랑 친하게 지냄으로써 건강한 자임을 주장하고픈 겁니다.
그렇다고 또 일부러 막살려고 해요
역시나 나는 죄인 아니다 라고
난 날 때부터 소경 아니다 라고
본다고 하니 역시나 소경이다 말이죠.
 
기생 라합이 창녀로써 개같은 이방인 나라로써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다 말이죠.
이 말은 이스라엘도 못 들어가는 예수님의 족보에
생명책에 들어갔다는 말은
그 반대로 기생라합의 민족, 가족의 족보에서는 짤린 자이다는 겁니다.
 
간담이 녹았다 말이죠.
자신의 나라와 민족과 가족으로부터 짤린 것 보다 더 벌벌벌 떨게 한 것은
여호와 전능자 하나님께서 애굽을 멸망시켰다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겁니다.
 
백날 인간들의 전쟁을 살펴보세요
사망을 이기던가?
죽음을 이기던가?
 
존재와 존재의 싸움에서는 역시나 존재가 나타날 뿐이지
이전 것이 나타나고
처음 것이 이겼다고 우기고
지나가는 것이 승리했다고 우기지
 
새것이 없어요.
 
사망이 죽지 않는 이상 새것은 없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지 않아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절대로 막살지 않겠다고
막사는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장난감 다루듯이 하는 겁니다.
 
막사는 자기 죄냐?
막사는 부모 죄냐?
 
이것이 존재들에게는 심각해요
이것을 알아내면 자기 존재성이 높아지거든요
 
거기에 태클 걸어서 다리 걸어넘어뜨리는 십자가 라는 기능이
수술칼이 마구 마구 찢으니까
의문의 증서를 막 막 마구 마구 막살 듯이 마구 찢어대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거리끼는 걸림돌에 넘어지는 겁니다.
 
존재가 되어야지 기능을 추구해서 뭐해? 하고 헬라인은
어리석은 지혜라고 취급하는 겁니다.
왜 지혜를 추구하냐 말이죠? 보다 높고 보다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 위함 아니냐 말이죠.
 
지혜를 추구했더니만 개죽음 당했다?
그게 무슨 지혜냐 말이죠? 미련한 것이지
 
그래서 모든 처음 것 곧 이전 것 또는 지나가는 것은
존재만 추구할 뿐이다 말이죠.
 
존재는 원인 있는 결과이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없어요
의문의 반복입니다.
마침이 없어요
챗바퀴 돌 뿐이다 말이죠.
 
존재를 위한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답 알아내기
답 알아내봤자 소용이 없어요
정직한 영이 없기는 마찬가지 이거든요.
남의 죄 알아서 뭐하게?
 
그런데 기능 곧 사건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유 없는 용서이다 말이죠.
 
분명히 그가 찔림을 당했는데
내가 나음을 입게 되더라 말이죠.
 
무슨 쌈 쌍둥이 입니까?
붙어 있습니까?
 
한 몸에 두 자아가 머리 붙거나 몸이 붙어서
한 쪽이 아프면 나도 아픈 쌈쌍둥이도 나음이 없는데
 
이상하게 말도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
곧 그가 상함으로 우리는 고침을 받는
 
이런 사건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왜 오늘날 교회가 다 사단의 회 이냐 하면
 
자꾸 유대인 곧 사단의 회처럼
원인 있는 결과를 추구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계시록도 원인을 찾듯이 계산기를 두들겨요 글쎄
 
혼인 잔치가 아닌 공포잔치로 만들어서 종말마케팅으로 장사를 해요 글쎄
그거 다 지나가는 것인데 부도난 수표 모아서 뭐하게?
 
유대인이 집요하게 죽는 그 순간 까지도 장사를 하는 장면을 2차대전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보잖아요?
그 의문의 반복에 집요하다 말이죠.
종교놀이에 얼마나 집요하냐 말이죠?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놀 듯이 말이죠.
 
원인 있는 결과
막살면 안된다는 그것을 노리더라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떨어져 있는데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냐 말이죠.
이거 설명해 봐라 말이죠.
 
해석불가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오늘 처음 하는데
해석 포기 합시다
해석 하지 맙시다
 
해석 할게 없어요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해석 한 적 없는데
결과가 덮쳐지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단의 회에게 물어야 합니다.
누구처럼?
 
실로암 소경처럼
그들 사단의 회인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물어야 한다 말이죠.
 
심심하면 나에게 날 때부터 소경으로써
날 때부터 막사는 자로써
날 때부터 미친놈으로써
날 때부터 탕자로써
 
자기 죄인지
부모 죄인지 라고 가지고 놀던 그 교회들에게
그 종교들에게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그 종교에게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나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누구시죠? 라고
 
누구 죄냐 라는 해석을 할게 아니라
실로암 소경에게 해석이 덮쳐버러니까
 
해석 할 필요가 없이 그냥 인물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마귀들 바리새인들 오늘날 종교꾼들 오늘날 삯꾼들
오늘날 사단의 회인 교인들에게 물어야 하는 겁니다.
 
누가 내 대신 십자가를 지신 분이죠 라고?
 
저들은
자신의 존재와 결부된 것만 말해요
존재만 말해요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다는 둥
 
그 하나님이 글쎄 원인 있는 결과 라는 우상이더라 말이죠
자기를 위한
 
우상
 
우상의 특징은
존재의 특징은 자꾸 해석 할려고 한다 말이죠.
 
 
기능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해석 당합니다.
해석하는 존재를 없애 버려요
해석 할게 없어요.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해석 합니까?
 
나의 존재성을 없애 버려요
 
오로지 나의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시죠를
마귀의 입을 통해서 실소케
 
어이쿠 내가 실수로 말을 헛 나오게 했네
그러나 나는 모세의 제자이지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따르지
수십년 수백년 된 교회 정통을 따르지
 
넌 겨우 이제 신앙을 가진지 3년빡에 안된 초짜이지?
 
이제 눈을 뜬지 3초 빠께 안된 초짜 예수의 제자이지?
 
라고 저들이 오히려 존재에서 못 벗어나도록 기능케 만드는 기능을 펼치더라 말이죠.
 
예수님도 두려워 벌벌 떠신다 말이죠.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봐 싶어서
휴~~~~ 다행이다 ~~~~~~~~~~~
 
 
절대로 처음 것, 이전 것, 지나가는 것
에서 못 벗어나도록
의문의 것에서 못 벗어나도록
율법 아래 가두는
의문의 것을 반복토록 만드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정작 실로암 소경처럼 날 때부터 소경인 우리들은
주여 뉘시오니까
저를 눈 뜨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내 대신 채찍질 맞으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 아니십니까 라고
 
이 분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모든 이전의 것
처음 것은 다 지나가게 하는 기능을
곧 죄인의 기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을 회개 라고 하는데
정직한 영이 없다 라고
그래서 심판 속에 놓여지는
심판의 주를 보는 기능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로써
 
저 분이 매맞았는데 내가 고침을 받는
 
나는 챗더미가 되어 불에 타버렸는데
화관으로 꽃단장 시켜서 새까만 구스여인을 아내로 삼듯이
이 기생라합같은 막사는 창녀인 나를 신부로 삼는
 
그 이유
그 원인은
 
찾을래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그래서 따라 할수도 없고
흉내낼수도 없는
도대체 무슨 수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생 라합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유 없는 결과로써의 계시가
 
이제 시작 되는 겁니다.
즉 이미 완료되었다는 겁니다.
 
이 완료 곧 십자가에 다 이루심
곧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뚱딴지 같은 물음에
베드로는 마귀에게 붙잡혀 온갖 긴장을 다 했건만
그 부드러운 음성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뚱딴지 같이
원인도 없이
앞 뒤 맥락 다 짤라버리고
이유 없이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물으심에
 
오히려 새깜디 구스여인을 아내로 삼는다고
저 천한 기집이 어떻게 왕비가 될수 있느냐 라꼬
우리 역사적인 약속 가문, 거룩한 레위지파 가문의 존재 가치가 다 떨어진다고 투덜대는
미리암이 격동하고 견디질 못하는
 
사랑이어야 하기에
온유함 이어야 하기에
 
그 정도로 이유가 없고
원인이 없이
그냥 결과만 덮쳐버렸기에
사랑만 덮쳐졌기에
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유 없는 사랑이기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원인 없는 결과
이유 없는 용서로써의
이 십자가
곧 모든 처음 것을 지나가게 하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십자가가 그렇게 다 이루었다 라고
이 완료를 외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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