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사신 교회 (1: 4- 8)

계 02 피로 사신 교회 (계 1, 4- 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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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개역)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1:5, 개역)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개역)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7, 개역)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개역)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4, 새번역)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5, 새번역)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 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맨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요'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씻어'

 

(1:6, 새번역)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1:7, 새번역)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 7:13 12:10

 

(1:8, 새번역)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의미를 종교에서는 천국과 같은 좋은 곳으로 간다 라고

구원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기준으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정반대입니다.

 

마치 지난주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멀쩡히 있는데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펼쳐진다는 것은

바로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그 사람은 천국 간다 라고

다들 그렇게 구원을 알고

다들 그렇게 천국에 가고

다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기존의 것이 뻔히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따로 세워졌다 말씀하신다 라는 것은

그 기존의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또렷한 차이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차이성을 거룩 또는 구별이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으로 곧 심판으로

완벽한 거룩이기 때문에 심판이다는 겁니다.

조금이라고 미흡하면 그 불에 의해 다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는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단 한 개라도 누락되는

모자라고 부족하고 미완료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완벽한 거룩이 안된다면

이 심판을, 이 불을 통과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를 통해서 다 걸러내버리는 거였죠.

 

광야교회를 통해서 다 걸러내는 겁니다.

광야교회가 바로 일곱교회이거든요.

 

 

자 그렇다면 구원은 구원받는 자 입장에서 나열이 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에 의한 입장에서 나열이 되는 겁니다.

 

오히려 구원받는 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는다는 것이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사람이 받는 구원의 입장에서 구원을 논할게 아니라

아니 아예 단절이 된 구원으로써

 

구원을 논할때에 구원이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되는 겁니다.

 

아니 구원자가 죽어버리면 구원은 날라가 버린 것이잖아요?

 

바로 이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종교에서는 이 모순을 못 넘어서요
그래서 모순을 제거하는 노력을 펼쳐서 나온 결과가 바로 교리 입니다.
모든 종교는 교리 플러스 실천 입니다.
모순 됨이 없으니까 말이죠 결국 행하느냐 못 행하느냐가 되는 겁니다.

모순을 없애버린 그 교리를 실천여부로 따지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자가 죽는 것이 없어요.

구원자가 죽는 것이 없기에
즉 모순 되는 것이 없기에
구원자가 죽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거짓인 겁니다. 모든 종교는 666인 이유 입니다.

구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가짜 구원이다 말이죠.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구원자가 죽어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여기에다가 더 모순 점을 더 붙이면
의인을 위해 죽는게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죽는 구원이 진짜 구원 입니다.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즉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었도다 이렇게 됩니다.

 

이 모순을 무슨 수로 종교가 풀겠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철학 조차도 못 풀어요.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구원 받아도 찝찝하다는 겁니다.

찝찝한 구원은 깔끔하지가 않아서

다들 싫어버린바 되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싫어버린바 된 구원이 진짜 구원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구원이

헬라인 곧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지혜자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구원이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구원과 헬라인의 지혜로운 구원

이 모두를 뛰어넘어서지 못하는 구원

구원을 넘어서는 구원이 아니면 가짜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구원을 가지고서 더 나은 구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존의 계시를 가지고서 다 나은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두 구원의 차이를 구별 시키시는 겁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의 구원은 인간이 없으면 구원이 헛것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 받아야 구원 베푸는 자가 의미가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의 구원은

구원 받는 자가 없어도 구원의 의미가 더더욱 풍성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종교는 반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종교의 대표성이 바로 유대인이다 말이죠.

그래서 거리끼는 말씀이 되어버리는 것이

유대인에게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에게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유대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 예가 시편 하나를 놓고서

유대인과 예수님의 해석이 아주 최전방의 전투처럼 긴박하게 드러났다는 겁니다.

완전 정반대

 

그러니 구원도 완전 정반대 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은 곧 하나님이 말씀에서는 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인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켜서 구원을 못 받는 인간인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식이 되는 겁니다.

 

죄인은 죄의 나무에서 나왔고

의인이라는 열매는 의의 나무에서 나왔다는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는 겁니다.

 

부모죄냐 자기 죄냐 라고 원인을 따졌던

실로암소경 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났듯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은 정반대로

구원받는 인간은 아예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구원 받을 인간이 없으니

구원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라는 거죠.

 

즉 원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쪽은 원인이 있어요.

 

나 라는 자아가 말씀을 지키냐 못 지키냐 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기존의 것, 처음 것 으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세계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나 라는 자아는 없어요.

 

원인이 없어요.

 

결과 뿐이다는 겁니다.

 

구원받을 인간을 없애 버린채

누락 시킨채

배제 시킨채

 

구원을 이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죽음이 구원이예요 글쎄

 

결국 유대인이 왜 이것이 거리끼냐 하면

구원관이 내가 말씀 지키냐 못 지켰느냐의 여부인데

오늘날 현재의 교회가 이렇게 따져요

사단의 회입니다.

 

이건 전혀 안 거리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는 그런 구원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세계에서의 구원은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그의 죽음이 구원이 된다는 것에 의해서

유대인이 거리껴 한다는 점입니다.

 

안 거리끼면 구원이 아닙니다.

 

자꾸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에 초점이 있는게 아니라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즉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남의 목숨이 나의 죽은 목숨에 들어와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유대인에게 왜 거리끼냐

일단 살인이라는 죽음이 발생하는데 있어서

십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 어기면 다 어긴거죠.

 

말씀 지키냐 못 지키냐 라는 기준이 날라가 버린 겁니다.

 

새로운 기준으로 인해 죽느냐 사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된다는 겁니다.

 

이 새 기준에 못 마땅한 겁니다.

기존의 처음 기준 곧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도 맞는게 없어요 글쎄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도 안 맞아요.

문자적으로 행함적으로 말이죠.

시공간적으로 말이죠

역사적으로

정통적으로

 

단 하나도 아귀가 맞는게 없어서

다 어긋난다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적으로 다 맞아버리더라 말이죠.

원인 없이 결과적으로 말이죠.

 

한글수업

영어수업

역사수업

정통수업 단 한 개도 들은 적도 없고

글자도 모르고

심지어 시험장에 오지도 않아서 시험을 친 적도 없는데

무시험 합격이더라 말이죠.

 

저들은 원인은 갖추었는데

결과가 없어요.

그래서 계속 미루어 버립니다. 유보시킵니다.

합격 통지서가 날라오지 않고 계속 계속 미루어지면서 유보가 되는 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합격인지도 불합격인지도 알수가 없는 의문의 반복 뿐

끝에 가봐야 안다는 식입니다.

열매가 나야 알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끝에서 미리 와 버린 겁니다.

결과가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만이 구원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전혀 새로운 구원의 의미입니다.

멀쩡히 기존의 구원 개념이 있는데

새로운 구원을 세워버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이냐 아니냐 라는 기존의 기준이 있는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라고 새로운 기준이 서버린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죽냐 안죽냐로 판결났지만

신약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는 지키냐 안지키냐가 아니라

주를 사랑하냐 안사랑하냐로 결정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또 사랑하기를 지키면 살고

사랑하기를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게 아니라

 

인간 쪽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주님쪽에서 결정해 버렸다는 의미에서

원인이 없는 결과로써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 자체가 이유가 없어요

원인이 없어요.

 

자 그렇기 때문에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매 맞는 주님 따로

고침 받는 나 따로가 아니라

 

채찍질 맞음에서 나온 증상물이 우리 라는 겁니다.

 

즉 피의 증상물이 교회라는 겁니다.

심판받음의 결과물이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원인을 아예 갖출수가 없는 결과물이다는 것이지

그것을 기능이라고 하지

존재라고 하지 않는다 말이죠.

 

존재는 다 지나갔다 말이죠.

처음 것은 다 지나간 겁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이죠.

 

새 기준의 증상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 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증상물이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이 죽음을 이루기 위해

즉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기존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이죠.

곧 율법이지요.

전남편이지요

이것을 글쎄 마귀가 쥐고 있어서

그 마귀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 마귀를 통해서 증명되기 때문에 구체적 보편성이 되는 겁니다.

 

계시록을 보면서 놀라운 점이

시편을 통해서 꿈에도 몰랐던 그 연관성을 보고 놀랐다는 겁니다.

시편과 계시록이 무슨 상관이 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시편을 마치 150편부터 거꾸로 시편 1편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바로

계시록의 느낌이다 말이죠.

 

그냥 제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즉 결과로

끝을 미리 앞당겨서

반칙으로 답을 보고서 문제를 푸는 식이다 말이죠.

 

시편 150편에서는

원수로 부터의 구원입니다.

그 원수들이 땅의 임금들입니다.

 

그런데 시편 149편에서는

그 땅의 임금들도 찬양하여라 구원의 주이다는 겁니다.

 

결국 찬양사건에 동원이 되는 것도 마귀이다는 거지요.

 

문제는 유대인이 이 원수가 누구냐 라는 해석에서

예수님을 지금 자신들의 원수인 로마, 로마 치하에서 말이죠.

우리로 따지면 일제치하에서의 친일파가 원수가 되는 거죠.

그래서 친로마 친일파를 원수로 취급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더라 말이죠.

 

놀랍게도 유대인의 원수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바알세불 걸린 대 마왕이다 말이죠.

그래서 죄목을 몰아가는 것이

 

일본인 손에 친일파를 죽이는 것이다 말이죠.

로마에 의해 세리의 친구를 죽이는 겁니다.

 

이게 구원이예요 글쎄

원수를 사랑한 증거

 

원수가 있고

그 원수를 사랑한 사랑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사랑이 원수를 발생시켜요 글쎄

존재의 원수가 아닌 기능의 원수 말이죠.

의사가 환자는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그럼 의사 입장에서는 다들 환자인데

불뱀 물린 마귀들인데

원수인데

 

자꾸 인간들은 자신을 친일파냐 하나님의 백성이냐로 따지더라 말이죠.

그놈의 족보 땜에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처음 것으로

기존이 것으로 인해 말이죠.

 

유대인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면 뭐합니까?

예수님을 미워하는데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데

아니 하나님의 백성이라메요?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 모순을 무슨 수로 푸실래요?

 

구원받은 민족이라면서 구원자를 구원받은 자들이 죽여요 글쎄

이게 구원이예요 글쎄

그냥 구원이 아닌

거리끼는 구원

 

한국교회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

부끄러운 구원

이게 진짜 구원이다 말이죠.

한국교회는 이것을 도리어 가짜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ㅋㅋㅋ

오히려 가짜 구원을 진짜 구원이라고 붙잡고 있고

 

그러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아무도 구원이 안된다는 사실

인간 쪽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냐 말이죠.

 

그러니 피로 사셔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에게 달려있지

주님 마음대로이지

인간 쪽에서는 손 쓸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어요.

저 봐요 한국교회 엉터리소리만 하는 거

 

어느교단인지 몰라도 이미 모든 교단이 다 수용한 입장이라는 것 보면

교단은 왜 갈라졌노?

어차피 예수님을 죽이는데는 그렇게 갈라지던 자들이

합심으로 죽이는 것은 똑같은데

왜 갈라졌남 ㅋㅋㅋㅋ

 

뭐 합동에서 태어난 것을 영광으로 안다고 했던 자들이

한둘이가 아녀 글쎄

 

사도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 교단을 차렸는뎅 ㅋㅋㅋㅋㅋ

 

얼마나 안 맞아요.

단절입니다 단절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인물 누구를 말하고 있지

 

교단 교리 따지더냐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합당하심이 아니라

자기 구원의 합당함을 찾고자 만드는 것이 교리 신학 철학이다 말이죠.

다 거짓선지자입니다.

 

자기가 심판 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교리 신학 철학은

없어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뿐이다 말이죠.

하나님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뿐이다 말이죠.

나를 제대로 찌르는 자가 나를 제대로 낫게하는 자이다 말이죠.

인물이다 말이죠.

 

니를 제대로 심판해서 지옥 보낼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겠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냐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쥐고 있는 놈들은 다 거짓영을 받은 자들 뿐이더라 말이죠.

 

그래서 마귀를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욥은 그 마귀가 들어간 세 친구가 추궁하는 회개를 하지 않는다 말이죠.

 

회개하는 존재가 될려고 미친놈들이니까 말이죠.

 

회개하는 기능이 와야 한다 말이죠.

그것도 외부에서

 

나의 회개는 안 통합니다.

통할 것 같았으면

벌써 했다 말이죠.

 

그러니 이 세친구는 마귀가 들어간 입장에서 마귀 짖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존재가 되는게 아니라

원인이 되는게 아니라

 

구원은 기능으로써

어떤 사건 구조를 형성한다 말이죠.

 

원수가 있어야 하고

그 원수로부터

핍박받는 신부가 있어야 하고

그 신부를 원수로부터 구원시키는 원수와 싸워 이기는 구원자가

이 모두를 배치시켜서 자작극으로써 펼쳐

찬양케 하고자 이 사건을 벌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원수가 있는 척 했지만

결국 로마와 손잡고

빌라도와 손잡고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그 로마로 부터의 구원과 독립과 해방은

모호해요

독립해봤자 또 포로 되는

모호함 뿐이다 말이죠.

의문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아니 왜?

인간 자기가 원수이니까 그런 겁니다.

 

누구의 원수

원수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를 죽이는 원수 말이죠.

 

그러니 그 죽음이 구원이라는 겁니다.

 

나를 원수로 밝혀내지 못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무이다.

 

그 구원자의 채찍질 맞음으로 나 원수가 나음을 입더라 말이죠.

누가 때린 채찍질 입니까?

남이 아닙니다.

유대인도 아닙니다.

나 입니다 나

 

십자가는 역사 속의 표층 표면에만 나타난 것만 따지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2천년 전의 예수님을 죽인 적 없고

십자가에 못 박은 적 없으니

결국 나는 그 사건과 무관하다 말이죠.

역사의 표층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들만 재수 더럽게 없어서 걸려들었으니까

나는 2천년 전으로 돌아 갈수가 없으니까 말이죠.

 

그게 과연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겁니까? 아니면 속이는 꾀를 오히려 더 잘 펼치는

핑계로 활용하고 있는 겁니까?

 

십자가는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첫아담으로 다 묶어 버립니다.

1300년 전의 모세도 불쑥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구원해 주세요 라고 했고

동시에 900년 전의 엘리야도 불쑥 나타나서 살려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아니 죽음도 안 본 불마차 타고 올라간 엘리야가 뭐가 아쉬워서 살려달라고 하냐 말이죠.

죽음도 안 본 양반인데?????????????

 

그것이 모조리 그림자

곧 처음것

지나가는 것

사라지는 것이다는 겁니다.

 

실상을 보여달라는 겁니다.

실체

마지막 아담으로써 새 것을 보여달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는 나타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들도 십자가의 증상물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증상물이지

하나님의 말씀의 증상물이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가 아니라

흐릿하고 의문의 반복에 마침이 없이

지나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그 그림자에 갇히는 꼴이다 말이죠.

 

물론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들이 그때 그때 배치가 되어서 십자가의 증상물로써 나타냈었으니까

원인 없는 결과로 나타냈었으니까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까

그들 걱정 할 것 없지요

 

문제는 우리 이니까 말이죠.

 

에이 모르겠다 뭐 어차피 죽으니까 나중에 죽나 지금 죽나 다를바 없다고

내팽계치듯이 자살했다 칩시다.

난 눈 감아서 안 볼란다 나와 무관하다 라고 우겨도

문제는 둘째 사망이 있다는 사실

 

뭐 잠은 아무나 주는 줄 아는데

사랑하는 자에게만 잠을 주시고

쉼은 사랑하는 자에게만 평안을 주시지

아무에게나 평안과 쉼, 잠을 주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를 끌어들이는 기능으로써의 구원은

저들에게는 없더라 말이죠.

그저 존재로써 구원을 따진다 말이죠.

 

그런데 시편의 다윗은 그런 구원을 깨더라 라는 겁니다.

원수가 있어요

그 원수가 글쎄

존재로써 구원을 따지는 세력으로써 등장함에 있어서

그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노래하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로부터 원수 취급 받은 겁니다.

예수님이 그랬듯이

참선지자가 그랬듯이

 

오늘 나오는 피로 사신 교회가 그래요 글쎄

 

반드시 사단의 회가 다수를 이룹니다.

즉 존재를 추구한다 말이죠.

 

그런데 일곱교회인 어린양에게 속한 교회

피로 사신 교회는 기능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에

졸지에 무존재로 비존재로

무가치한 존재로만 취급받도록 되어 있어요

 

아니 왜?

이것이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피로 사신 교회의 머리인 일곱을 말하기 위한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증상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말이죠.

 

이 피를 즐기는 겁니다

 

이 피를 노래하기 위한 악기들이거든요.

 

그러니 저들 사단의 회는 일곱 교회가 될려고 하고

이들 일곱교회는 사단의 회로 몰리는 거죠.

 

쪽수로 밀어 붙어요, 뭐 꼭 쪽수가 많아야 존재인 것은 아니기에

존재로 밀어 붙이는 겁니다.

요즘 소수자가 졸지에 다수가 되어서 밀어붙이듯이

다수는 이 소수자들에게 밀려 버리는 거죠.

그러니 소수자 운동 또한 역시나 마찬가지로 존재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모든 상황 정황이 다 그렇게 움직이도록 되어 있어요

이것이 존재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어쩔수 없어요

기능은 피로 사신 예수님만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피로 사신 교회는 이 또렷한 십자가를 또렷하기에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또 나타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든요.

 

다 이루었다

미래완료만 반복해요

 

상대적으로 저들은 의문의 것을 반복하고요.

 

피로 사신 교회는

770이라는 일곱이라는 완벽한 거룩을 반복한다 말이죠.

심판을 제대로 된 심판을 완벽한 거룩만이 하니까 이 심판을 반복한다 말이죠.

 

그런데 저들은 상대적으로 남을 7번 용서하리이까? 라는

의문만을 반복한다 말이죠. 늘 모잘라는 666만 반복하는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인 존재만을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우상만 반복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그랬거든요.

 

이 속에서 빼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바울을 말이죠.

우리도 저 세계에서 빼내주셨으니

빼내임을 당하고 보니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이 하셨는데

그게 바로 피로 사셨다는 겁니다.

채찍질 맞았다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나를 그 속에 집어 넣지 말라 말이죠.

구원은 채찍질 맞으신 그 분만 말하고 있는 기능이지

존재인 나를 언급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 십자가의 사건은

유일한 밝히 보이는 유일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다 흐릿한 것이기에

 

이 십자가 사건이 무한반복으로 뻥뻥뻥 터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됩니다.

 

피로 사셨다

그 정도로 귀한 피를

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교회를 사셨다는 것은

교회가 죄인이다는 것이지

의인이다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의인이면 피를 흘릴 이유가 없잖아요

 

존재이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자신의 증상물

피의 증상물을 부르러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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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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