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선지자(존재)에서 참선지자(기능)으로 바뀐 이사야의 환상(묵시) (사 1: 1)

 

 

(9:29, 새번역)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1:9(칠십인역)

(9:29, 공동) 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주시지 않았던들 우리는 소돔처럼 되었을 것이요, 고모라와 같이 되었으리라." / 이사 1:9.

 

(1:1, 개역)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1:1, 새번역)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1:1, 공동) 이사야가 받은 계시. 이것은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우찌야, 요담, 아하즈, 히즈키야의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를 내다본 것이다.

(1:1, 쉬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환상을 보여 주시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본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일어날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1:1, 킹흠정)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상 계시라.

(1:1, 현대인) 이것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유다 왕이었을 당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서 본 환상이다.

(1:1, 현대어) [표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환상이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으로 다스리던 시대였다.

 

 

오늘부터 이사야를 하겠습니다.

즉 시편의 연장선인데

말이 연장이지

뚝뚝 끊어진 단절로써의 연장입니다.

즉 역사가 아니다는 겁니다.

묵시서 이다는 겁니다.

 

끝에서 거꾸로 쳐들어 오는 방식입니다.

오히려 역사적 시선은 그 앞에서 바닥 뜯기듯이

하나 하나 철거 당하는 즐거움, 그 증상을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는 잠깐이요 그림자요.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 곧 묵시가 실제로 그 실상을 누리는 겁니다.

 

자 그래서

반드시 역사성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누구 누구 자식이다 라고 한다 말이죠.

 

역사적인 존재이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묵시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존재이기에

누구 누구 자식이다고

육체의 자식이다고 합니다.

 

자 그런 이사야가 이제 원인 없는 결과로 묵시적인 기능을 펼쳐야 합니다.

즉 애초부터 처음부터 육체적인 존재의 자식인 육체의 자식이 아닌

처음부터 묵시적인 자로 태어났다면

이것은 묵시가 되지 못해요

그렇게 되면 구체적 보편성이 되지 못한다 말이죠.

즉 세상이 격동하고 견디지 못하는 지혜가 되지 못한다 말이죠.

마귀가 전혀 반발하지 않는 묵시이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자들이 바로 유대인이다 말이죠.

유대인의 묵시문학이 다 이런식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묵시적인 존재로 태어났다고 우기면서 해석하는데

웃끼는 것은 그런 묵시적인 존재들이 말로만 묵시적인 존재로 태어났다고

선민이라고 태어났다고 저 개같은 짐승인 이방인과 달라 라고

거룩한 말씀을 지킨다고 우기면서도

단 한 개도 묵시적인 해석을 그런 안목을 가지지를 못하더라 말이죠.

 

그냥 가지지 못하더라 라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물증이 없어 그냥 말로 끝나는데

졸지에 증거를 잡혀 버려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사건

이 사건에 졸지에 모조리 다 걸려 넘어지는

선민이라는 바가지? 유리병?을 깨뜨리는

에게 에게 절대로 박살이 나지 않는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주먹인줄 알았는데

떨어뜨리자 마자 완전 와장장창 깨어지는 유리병이였다는 것이

탈로가 나 버리는

거리끼는 십자가에 다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묵시는 무슨 놈의 묵시? 역사였구만. 육체 였구만 하고 들통이 나더라 말이죠.

 

아니 인간 쪽에서 묵시를 눈치채고 그것도 참선지자 말 마따나

나라가 쫄딱 망해서 알았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거짓선지자말만 다 따랐다 말이죠?

아마 거짓선지자가 나라가 망하자 다 사라졌으니 망정이지

만약 죽지 않았다면

여전히 몰랐을 것이고

묵시문학이 발전하지도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그 묵시문학 조차도

결국 선민이라는 것을 포기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즉 육체를 포기 못하고

역사를

처음 것을

지나간 것, 이전 것, 사라질 것을,

처음 아담을 포기 못하고

오히려 그 연장선 상에서 놓고 그것을 잇고자 하는

단절이 아닌 잇고자 하는 목적으로 묵시문학이 발달 하다 보니

 

이것은 뭐 다른 나라 다른 개같은 이방민족에게 다 있는

난세에 영웅을 바라는 묵시문학과 다를바가 없는 겁니다.

독립운동을 펼치는 일제침략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고 외치는?

 

묵시문학 말이죠.

이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을 글쎄 가룟유다가 했다니깐요?

독립운동가 이다 말이죠.

하나님 나라 운동 한다고 하니까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그거 본능입니다. 본능

육체의 본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들 꿈꾸는 자기 가정을 차리고 싶다 라는 꿈

 

근데 문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고 묵시운동을 펼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서

독립운동을 펼쳐서

봄이 왔다 칩시다

 

그런데 봄은 왔는데

여전히 빼앗겨 있어?

 

박그네에게 빼앗겨 있고

친일파에게 빼앗겨 있고

 

봄이라는 민주주의 라는 이데아 망상은 여전히 달처럼 떠 있고

봄이 온 것 같은데 빼앗겨 있고

 

ㅋㅋㅋㅋ

 

이것이 의문의 반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짧은 세대 약 100? 길면 120년 짧으면 6-80

그 기간만 편하면 되고 나머지 200년 후 400년 후 천 년 후는 에라 모르겠다 ~~~~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게 솔직한 거예요.

뭐 천년 후까지 염두하고 행동하는 놈은 없어요.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기 바쁜데 ~~~~~

 

결국 인간은 에라 모르겠다 일 뿐입니다.

의식을 가져 행동 해도 결과는 에라 모르겠다 라는 의문이지

결과는 없어요

원인만 있고 그 원인만 붙잡는

그 원인 곧 자아

나 만 붙잡고 살 뿐이다 말이죠.

 

빅뱅의 노래 에라 모르겠다 제목에

FXXK IT 이라고 되어 있길래

무슨 새로운 그룹인가 했더니?

에라 모르겠다 퍽큐 그런 의미더라 말이죠.

엿먹어라 너 라고 욕인데

이제는 그 욕이 우리 꼬라지가 FXXK IT 내 인생이 조졌다 라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배고픈 가뭄의 시대가 되면

모든 문학이 시대를 반영하게 되는 투영하는 묵시문학이 된다 말이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이상화의 시나?

에라 모르겠다 FXXK IT 제목의 빅뱅의 노래 가삿말이나?

똑같은 묵시문학이 되는 겁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질 것은

나 자신 뿐이다 라고 말이죠.

아무리 퍽 조져 버린 내 인생이라고 할 지라도?

 

그래서 이런 운동들이

결국 내가 아니고 너 때문이야 라고 발생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두 육체의 대표성

하나는 로마 독재 체제 집단

말이 집단이지

말만 객관적이지

 

자아들이 모인 주관적인 모임들인 국가와

말만 묵시이지 여전히 역사와 이전 것, 처음것, 지나가는 처음 아담을 잇고자 하는

오늘날도 성화론자들이 개혁주의자들이 이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종교의 대표성인 유대인이라는 자아 하나 하나가 모인 주관적인 모임인 유대인

이 둘이 합쳐져서

여자(제사장 딸)와 짐승이 합쳐진

 

이들과 반드시 맞물려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자 그럼 이사야는 역사적인 존재물입니다.

기능이 아니다 말이죠.

 

그럼 무슨 수로 이 십자가 사건 곧 끝을 종말을 외칠수가 있냐 말이죠?

 

백날 원인 따져 보세요

되나??????

 

여기서 우리는 단절성을 느껴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단절성을 성령이라고 한다 말이죠.

 

오늘날 개혁주의가 외치는 개방성과 정반대죠???

 

개방성은 딴게 아니라

나는 원래 참선지자로 태어났는데

성령이 그것을 톡 하고 알을 깨어줌으로써

드디어 선민 드디어 참선지자가 되었다고 회심의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개방이 되었다고 성령이 그렇게 이용이 되는 성령론이다 말이죠.

나 라는 자아를 더더욱 돈도케? 만들어주는

발음 그대로 적었네 ㅋㅋㅋ 돈독하게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성령이지요

그러니 시다바리 성령이고

주인공은 결국 자아 곧 역경을 이겨내고 광야를 지나온 드디어 참선지자가 된

자아 이다 라는 거죠.

 

그런데 단절성은 그 반대로

아무리 봐도 아직도 나는 여전히 거짓선지자이지

참선지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설사 저들 말처럼 저들의 신학이 대세를 이루어서

판을 쳐도

아무리 봐도 참선지자가 아닌걸 왜 자꾸 참선지자가 될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아니 저들이 내세우는 참선지자도 아무리 봐도 참선지자가 아니고

남들이 내세우는 그 참선지자의 의미도 아무리 들어도 엉터리 이고

내 자신을 참선지자로 만들려고 해도 아무리 봐도 엉터리고

또 누가 나를 참선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도

아무리 봐도 아니다는 겁니다.

 

이 단절성이 저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이 단절성은 존재개념이 아니라

기능 개념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한 다리걸어 실족케 하는 거리끼는 기능만 하는 겁니다.

얼룩

아름다운 그림에 고춧가루가 묻어서 그 얼룩을 아무리 제거 할려고

달려들어도 지울수가 도저히 도저히 지울수가 없는

얼룩이

 

존재 보다 더한 존재인 비존재로써의 얼룩으로 작용하더라 말이죠.

백날 아름다운 그림을 봐도 그 얼룩 하나 구멍 때문에

시선이 모조리 다 빼앗기를 블랙홀과 같은 기능이 되어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얼룩을 어떻게 해 볼려고 달려드는 식이다 말이죠

 

이게 존재가 아닌 기능

얼룩

불편한 기능

다리 걸어 자빠뜨리는 실족케 하는 기능

 

이게 참선지자 라는 기능이지

존재로 해석이 안되요

해석 되는 참선지자는 참선지자가 아니무이다.

 

미래의 십자가 사건의 다 이루었다가 덮쳐져서

이사야가 졸지에 참선지자가 되었지

존재로 봐버리면

역시나 죽여버려요

 

우리 조상은 그런 짖 했지만

우리는 절대로 그런 짖 안한다고

역시나 선지자를 죽인 그 선지자도 존재로 보고

그런 나쁜 짖을 한 조상도 존재로 보고

그 조상의 후손인 나도 존재로 봐서

존재로 그런 짖 안하겠다고 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확 불을 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런 짖을 하도록 되어 있는

그 조상의 그 후손이야 라고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고

 

? 내가 너희 손에 죽으러 왔거든

이라고 미래에서 거꾸로 현재로 쳐들어 오는 해석을 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시간 순으로 해석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묵시에 곧 십자가 사건에

다 이루심에 말려든 것도 모르고 말이죠.

 

물론 저들은 또 반발할 껍니다.

나도 묵시 운동 하고 있잖아

하나님 나라 운동 하고 있잖아 자나 자나 있잖아 라꼬

가룟유다 개인의 확대가 유대인이거든요.

 

그럼 그 묵시가 십자가와 연결이 되어야 해요

안 되요

 

될려면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써

저 십자가가 누구껍니까? 제 껍니다.

그런데 저가 채찍질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라고

 

이 거리끼는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 묵시오

기능이요

셀프요

우리가 되는데

 

개개인의 자아라는 욕망덩어리가 모여져

집단성을 이루었지만

우리가 아니다 말이죠.

몸이 아니다 말이죠.

그게 국가 라는 짐승이다 말이죠

그러니 국가란 무엇을 소통 못한다?

 

우리를 소통 못해요

 

사도신경에

성령으로 교통한다고 되어 있어요

 

? 뭐뭐 신경을 만드는지를 모르겠는데?

내 소속은 저들 소속과 달라 라고

하도 하도 이단들이 많다 보니

저들과 구분짖기 구별짖기로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올무가 되어버리니

 

요즘은 더 심해져서

뭐뭐 신경이 더 많이 나오더라 말이죠.

백날 해도 어차피 성령으로 교통 안해요

좋은 의미 좋은 말 아무리 많이 끌어와도

 

성경에 다 있어도

뭔가 부족하다 싶어서 아무리 교리 교단 신학 교파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내가 거짓선지자이구나

내가 이단 이구나

 

여기서 빠져나올수 없구나 라고

정직한 영이 없구나 라고

 

성령이 알려주는 이 교통을

곧 단절성을

 

오히려 나는 개방적인 성령을 믿는다고 티를 낼려고 더더욱 맹글어요 글쎄

 

사도신경 하나만 봐도

백날 외워도 안되는 것을 봤다면

다른 것 백날 해도 역시나 안되요 ~~~~~

 

 

아무튼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사야가 거짓선지자 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던가요?

역사 속에서 없어요.

인간들이 벌리는 묵시문학 묵시운동도 결국은 다 역사운동이다 말이죠.

결과는 없고 원인만 반복하는

의문의 반복

번제와 제사의 반복 뿐이지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오던가요?

봄이 왔으면 빼앗기지 않은게 되잖아요.

이게 이상한게

봄은 왔는데

여전히 빼앗겨 있다는 겁니다.

일제치하에서 박정희 치하

전두환 치하

박그네 치하 로만 바뀌었을 뿐이지

봄은 여전히 유보상태?

아니 온건가?

안 온건가?

의문이더라 말이죠.

 

사울왕 치하에서

바벨론 치하

그리고 로마 치하

 

여기서 봄이 왔다 칩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치하 바로 직전에 있었으니

그 역사를 초월해서 수천년 뒤를 미리 봤다 칩시다

여전히 로마 치하로 있다면

아니 지금 현재?

지금 현재 이스라엘은 무신론 이거든요.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자들이 제일 많은 나라이다 말이죠

물론 국가 이념만

이론만 하나님만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 개개인으로 따지만

가장 무신론자들이 제일 많은 나라이다 말이죠.

 

자 불교처럼 신을 인간에게서 떼어내어서

자유라고 칩시다

봄이 왔다 칩시다

 

무신론자가 가장 많아서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객관적이다고 칩시다

주관적인 것이 가장 적다고 칩시다.

 

그런데 완료가 없어

여전히 의문의 반복이라

여전히 빼앗겨 있어

 

천국이 아니고

허허벌판인 광야

 

허 해요 허 ~~~~~~

 

개콘에서 봉숭아 학당 2017 코너에서

박성광이가 혼자 산다고 아무도 간섭하는 자가 없다고 자유 라고 막 외치는데

김대희가 가족들에게 들들 뽁이면서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좀 더 더 들려달라고 부러워 미치더라 말이죠.

 

 

존재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자기 이야기에 예수도 끌여들이고 십자가도 끌여들이고

자아를 중심으로 주변인들을 배치시키는데

 

기능은 정반대로 자아가 없어져 버려서

상실 당해 버리니까

우리만을 외치다거 말이죠

물론 그 우리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우리

곧 의사를 말하는 환자로써 의사와 환자의 관계성의 우리

언발란스한 기능인거죠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죄인

그 죄인과 구원자와 우리가 된

이 부조리 스캔들 부정함의 관계를 우리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거리끼는 불편함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자랑꺼리이다는 겁니다.

 

 

신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자랑할게 없는 존재는 맨날 맨날

봄이 온거 맞어?

구원받은거 맞을까? 구원 그 이후를 어떻게 해야 하지?

또 의문 속에 말려들어가는

존재일 뿐이다 말이죠.

 

빼앗긴 들 이라???

과거에는 저 놈 때문이다

다스는 누구껍니까?

저 놈 꺼다

내꺼 아니니까 라고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이라도 눈에 보이기라도 했지만

 

언제든지 남 탓할 수 있는 일본제국 놈들 때문이다고

대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대상이 없어요.

식민지가 아니야 ~~~~

독립운동 아직도 해야 하나?

 

대상도 없는데 여전히 빼앗겨 있어

여전히 빼앗긴 들이라

 

자본주의라고 탓 하지만

이 놈의 자본주의가 눈에 비이야지?

눈에 보이면 바로 당장 죽여 없애버릴텐데

이제는 자본주의 영향으로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

없앤다고 없어질 것이 아니다고 알았다 말이죠.

알아 버렸어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존재에서는 답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기능에서는 답이 그냥 와버렸어요

시험 친 적도 없이 무시험 합격으로 말이죠.

 

이사야가 거짓선지자에서 못 벗어나요.

그런데 십자가의 의가 덮쳐져 버렸어요.

 

 

그래서 의문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개방성을 외치는게 아니라

빼앗긴 들은 여전하고

봄은 왔고

 

그런데 여전히 빼앗긴 들이니

봄이 온건지 아니 온건지

의문을 외치는 것이 개방성인 반면에

 

이사야는 졸지에 단절성 곧 성령이 덮쳐져서

명확하게 선을 그어 버리더라 말이죠.

 

어떻게?

자신은 참선지자임을 외치는게 아니라

그래 되면 개방성이고

존재이고

자아이고

원인 있는 결과로써

의문의 반복이니

선이 분명하게 그어진게 아니다 말이죠.

 

선 그으라고 하니까

바리새인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구분 구별 짖기를 하더라 말이죠

요즘 말로 갑질

강도만난 자를 그냥 보고 지나치는 대제사장 갑질 레위인 갑질

? 거룩한 율법 수저 이니까

금수저 이니까

 

흙수저랑 못 놀겠다고

저 개같은 이방인과 못 놀겠다고 사마리아 구역을 안들어가고 삥 둘러서 가는

구별 구분짖기 갑질

요즘은 막살지 않기 라는 갑질을 펼치고 있죠.

마귀들 이다 말이죠.

 

철학자 이름 뭐더라? 부르디외

그 사람 책 제목이 구별짖기 이지 싶은데

선민사상 또는 구원론은 모든 종교의, 모든 민족의 최종목적이다 말이죠.

 

그런 선 긋기 말고

 

주님 쪽에서 넘어와서 선을 긋는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십자가 외에는 선이 안 그어진다 말이죠.

십자가 밖에 없어요.

 

어딜 감히 십자가가 뻔히 있는데

 

다른 것으로 선을 그어서 구분짖기를 해?

 

자아와 셀프를 명확하게 나누는

저런 구별구분짖기 갑질 놀이를 펼치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십자가로 선을 긋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사기를 쳐??

 

이 피로만 선 긋는

피로 사신 교회로써

 

원인 없는 결과물로써

그 피의 증상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4)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출애굽때)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

 

이 증상물로써 이사야가 외치는 겁니다.

분명 본인은 거짓선지자인데

거기서 못 벗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참선지자가 될려고 하는것도 아니고

저들 말마따나 참선지자의 존재가 되어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은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는 그런 존재로써의 참선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방금 말한 저 세리 매국노가 되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이스라엘을 바닥을 뜯어서

냅따 팔아 넘기더라 말이죠.

누구처럼?

기생 라합처럼 말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인간이 수긍하는 행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세상이 격동하고 견디지 못하는(잠언에서 말하는 지혜)

그런 행함인데 그게 바로 부정적인 기능으로써의

십자가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나는 거짓선지자입니다 라는 부정성을 담고서

그 등에 그 구름에 타신 심판주를 증거하는 구름으로써

부정성으로써 나타나는

존재가 아닌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를 아예 처음부터 없애 버리고

아예 처음부터 묵시를 언급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차이가 안 드러나요

구별 짖기가 안되요

선이 안그어져요

밝히 안보여요

누가 사기를 치는지 안 보여요

거짓선지자라고 외치는 자가 바르게 말하고

참선지자라고 우기는 존재들은 사기를 치고 있음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로써 누구 누구 자식이다 라고

1234 시간의 순서로 난 역사의 증상물이다고 언급하고서

그 차이로 이 이사야를 묵시로

오늘 나온 의미 환상으로

이상 - 꿈으로

계시로

 

멀쩡히 역사가 지나가지 않고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이 왔다 라고

이 이사야가 졸지에 두 개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역사의 증상물과

묵시가 덮쳐진 증상물

 

하나는 기존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역사를 추구하는 존재를 추구하는 유대인 소속의 이사야와

 

또 하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멀쩡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라고

역사가 아닌 묵시가 왔다고

유대인 이스라엘 소속이 아닌

새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소속인

자아 소속이 아닌 셀프 소속

그리스도의 몸 소속인 이사야가 졸지에 급하게 우연히 맹글어져서

기존의 이사야가 뻔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투입이 되더라 말이죠.

 

제가 요즘은 뜸했지만

한참 자주 언급했던 것이

과거의 어린이 동화 고전동화에 나를 잃어버린 도련님이라는 동화가 있는데

여러 버전이 있다고 했지요.

 

갑자기 부자 양반의 망나니 도령에게 자기랑 똑같이 닮은 도령이 나타나서

안방을 차지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심지어 자기를 낳은 부모조차도 그 사본을 원본 보다 더 좋아라 하더라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나랑 너무 똑같이 닮아버린 인공지능 로봇인줄 모르는 아무도 눈치 못채는 나의 복사물을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원본 보다 더 원본 같은 사본인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말이죠.

 

시뮬라르크가 처음에 편하게 입에 베이는 바람에

일부러 끝을 올려서 우효광 우블리처럼 눈썹 올려서 발음을 의식해야 겨우 고쳐서

 

시뮬 라 크 르

르 가 아닌

크 가 먼저 불편한게 먼저와야 한다고 의식적으로 발음을 끝을 올리듯 해야

겨우 겨우 어려운 단어를 익히곤 했는데

영어로? 패쓰 ~~~ ㅋㅋㅋ

한글도 안 되는 판국에 ㅋㅋ

 

졸지에 이사야가 두 개로 분절이 되어버린 겁니다.

원본 처음 아담 이사야와

사본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원본 보다 더 원본같은 사본 이사야 말이죠. 새피조물 이사야

 

그러니 이사야는

기존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게

졸지에 임마누엘을 외치는 겁니다.

 

하나님 조차도 분절이 되어 버렸어요.

그 증상물이 바로 이사야 라는 기능이니까

존재가 아닌

그것을 참선지자라고 합니다.

참이라서 참이 아니라

기능이라서 참이고 즉 새것이고

 

거짓선지자는 거짓말해서 거짓이 아니라

존재를 우겨서 이전 것만 외치고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만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새것을 못 외친다고 해서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럼 신상품 신상을 싫어하는 것까요?

아닙니다.

부정한 십자가를 못 외친다는 겁니다.

요즘 거짓선지자들 치고 십자가를 못 외치는 자가 있던가요?

현재 2017년도에?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정한 기능으로써의 십자가를 못 외칩니다.

이것만이 새것이거든요.

존재의 십자가는 잘도 외쳐요? 달인들입니다.

새 것이란 기존의 것을 지나가게 해야 새 것이지

중고에서 신상으로 옮기는게 새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것은 차이가 아니라 여전히 존재에서 존재로의 이동일 뿐이고

기존의 것을 다 사라지게 하는 기능을 못하면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못 펼치면

역시나 존재요 역시나 역사요 역시나 하라 하지말라 뿐이다 말이죠.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가 없다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에는 말이죠.

그런데 기존의 하나님의 말씀에거므 하라 하지말라 밖에 없어요

다른 것이 없어요.

 

알쓸신잡2

뇌과학자가 하는 말이

특정 뇌 부위를 자극하면

그 사람이 믿는 신을 체험한다 말이죠

불교인 부처를 체험하고

크리스찬이면 예수를 체험하고

 

즉 존재에서 존재를 체험하는 겁니다.

존재와 기능 사이에 큰 구덩이가 있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수가 없어요.

 

존재에서 기능으로 넘어갈수도 없고

기능에서 존재로도 넘어갈수도 없어요,

 

자 그럼 그 뇌과학자 말 마따나 그럼 이사야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사야든 욥이든 전혀 다른 하나님을 격습니다.

뇌 부의 자극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동안 바랬고 바랬던 하나님의 얼굴을 본게 아니다 말이죠.

졸지에 예수님의 얼굴을 봐야만 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싫어버린바 된 얼굴을 봐야 하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기존의 하나님을 보면 아무 탈이 없는데

졸지에 하나님인데 다른 하나님이라?

그것도 기존의 하나님에 정면적으로 도전하는 존재로 보이는

존재들에게 인식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전혀 다른 하나님을 보는

존재가 아닌 기능이

자아가 아닌 우리가 되어버린 거다 말이죠. 임마누엘을 외쳐요 글쎄

 

그럼 다들 눈치채도록 처음부터 예수 라고 이름을 알려주던가?

그렇게 되면 맹 또 존재 인데????

 

임마누엘이예요 글쎄

뜻이 뭐냐 하면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뜻입니다.

 

이게 기능이예요 글쎄

 

처음 기존의 것이 있고 그 멀쩡히 두 눈 시퍼렇게 있는데 새 것을 외치는 기능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도 우리, 셀프가 나오네요.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하시는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셔 라고

 

졸지에 하나님이 두 개로 분절이 되어요 글쎄

존재와 기능으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아니 유대인에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외치는게 말이 되냐 말이죠?

역사를 부정해 버리면 존재도 부정해 버린다 말이죠

 

모든 주변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한번이라고 충돌을 해 봤다면

그들 민족의 신은 하나님이다 라고 다들 안다 말이죠.

오히려 너희 하나님은 가짜야 죽었어 라고 외치던 이방 나라 민족치고

안 당한적 없다 말이죠.

한번씩 다 디여봤다 말이죠.

 

그렇게 이방민족도 이제는 그렇게 안 외치는 판국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외치는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눈을 띄게 하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천3백년 묵은 모세가 아니라

저분 예수 이다 라고 실로암소경이 외쳤듯이

 

지금 이사야가 그것도 역사적으로 가문적으로 뼛속까지 친하나님 친이스라엘 친여호와를

믿는 이사야가

졸지에 그것 다 버리고

마치 애굽 왕자 모세처럼

졸지에 기존 이스라엘, 기존 하나님에서 탈퇴를 선언 하더라 말이죠.

조직과 민족과 백성과 나라와 국가와 신을 배신하더라 말이죠.

어떻게?

난 이제 임마누엘을 외치는 자이다고 말이죠.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3일만에 짖겠다 라고 졸지에 외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 땜시 죽죠.

 

성전을 3일 만에 짖는 자여 라고 놀려먹죠

 

뻔히 눈에 보이는 기존의 성전이 있는데

헐래요 글쎄

 

이사야가 임마누엘을 외치는 것과 같아요.

기능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존재를 외치는게 아니라

그건 기존의 것이고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다고

이름을 외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기능을 외치더라 말이죠.

 

캬 이거 맞아 죽어도 당연한 일을 글쎄 해 버린 셈입니다.

 

아니 왜?

 

3일 만에 짖는 성전이 있데요 글쎄

어떤 성전인데? 건물 새로 짓는가?

더 좋게?

알고보니 자기래요 글쎄

 

이건 뭐 말 이 되어야지?

말 장난 하나?

그 성전에 어떻게 들어가는데?

그 속에서 어떻게 예배 드리는데?

안식일은 무슨 수로 지키냐 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다 사라지게 될 판국인데

그 성전 인정할까요?

아니 들어갈 수나 있으면 또 몰라?

 

 

이게 존재를 다 지나가게 하는 기능으로써 성전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기능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계시 이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사야가 졸지에 세상의 끝인 요한계시록을 외치는 셈입니다.

바벨론 포로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말이죠.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상황에서도 답을 못 찾아 헤메는 판국에

아예 완전 끝을 세상 끝을

역사의 끝을 확 마 잡아 쭈욱 땡겨와서 외치는

사본 이사야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톱으로 짤라야죠 ~~~~~~~~~~~~~~~

 

예수가 우리 집안에 태어나는 바람에

이 예수를 막고자 친척들이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야가 미쳤으니까

야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뒷수습을 하더라 말이죠.

 

존재에서는 기능을 곧 성령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정직한 영이 없거든요.

 

저 상한심령을 원하는 성령을 도저히 이해가 안되요.

이 불가능함에

이 단절에

 

인간들은 자꾸 가능한 것

번제와 제사

개방적인 것을 드리면 될 것 아니냐 라고 우겨요

 

예수님도 존재로 보니까

내 존재를 구원해 주는

이 땅의 나

이 처음 것의 나를

천국에서도 연장시켜주고 이어주고 다리를 놓아주어 연결 개방시켜주는

그런 존재 성령으로 인한

그런 존재 예수로 부터의 구원 받는 나 라는 존재

 

그런데 이사야도 마찬가지로 그것 외엔 답이 없으니까

그렇게 봤는데

졸지에 다른 이스라엘 사람은 못 보고

자기 혼자만

기생 라합 혼자만 봐 버린

존재 예수가 아닌

기능 예수를 졸지에

미래완료에서

세상끝에서

종말에서 덮쳐져 버리니까

 

자기 민족과 신(하나님)과 심지어 토지 땅도 다 너거꺼다 라고 다 팔아넘기더라 말이죠.

불의한 청지기처럼 말이죠.

이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반드시 행함이란 불의하고 불편하고 부정하고

기존의 것이 다들 반대하는 행동이어야만 하는 행함이지

남들이 다 수긍하는 행함이 아니다 말이죠.

 

남들은 못 봐요

혼자 이 심판성을 봐 버린

이 단절성을 봐버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혼자 화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성전에 비추는 해와 달이 없어요.

그것 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영광이 덮쳐져 버리니까

성전 곧 이스라엘이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이

참성전 어린양만 있어다 말이죠.

그럼 이사야가 저 해보다 저 달보다 더 밝은

아니 해와 달이 누락이 되어 사라져 버려

그 영광의 빛에 족히 비교가 안되니까 무대뒤로 빠져버렸다 말이죠.

성전을 비추던 해가 말이죠.

성전도 사라져요

어린양이 성전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사야가 졸지에 참성전 어린양 예수님을 외치겠습니까?

38년 동안 짖는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을 외치겠습니까?

 

남들은 못 본 성전을 미리 보고 외치는데 있어서

성전 없는 곳도 아닌

뻔히 기존의 성전이 눈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전 어린양 예수님을 외치게 되면

 

다른 이방인

블레셋

뭐 바벨론

애굽 이런 자들의 손에 죽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짖는 이스라엘 손에 죽겠습니까?

십자가를 외치면

하나님의 교회를 짖고 세우는 기독교에게 죽겠습니까?

독재자 그네언니에게 죽겠습니까?

 

다들 가룟유다처럼 자꾸 로마 손에 죽을 각오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요 글쎄

 

그 기특하기 짝이 없는 일에 예수님이 일체 수긍을 안해주니까 팔아넘기더라 말이죠.

 

그네언니와 손잡은 보수기독교 손에 죽지 않아요

그들과 독립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는

개혁주의, 성화론자들 손에 의해 죽는다 말이죠.

 

둘 다 마귀인데

누가 더 격노하게 견디질 못하는

십자가라는 기능이냐?

 

진보개혁주의 뿐만 아니라

촛불 집회로 탄핵하고 외치던

이런 자들의 손에

이사야는 톱으로 켜여 죽습니다.

 

아니 죽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거든요.

 

보통 양 떼 속에 늑대가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반대입니다.

늑대 우리 속에 양이 들어가는 겁니다.

 

? 양은 존재가 아닌 기능이기에

 

즉 아예 죽으라고 외치는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살라고 외치는게 아니다 말이죠.

아예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건이요 기능이다는 겁니다.

 

? 존재들에게 들어가니까

 

남들은 못 본 것을 혼자 외쳐야 하니까

 

둘이 되면 우리가 되어서

외롭지 않잖아요?

 

 

그런데 둘이 된 적이 없어!!!!!

이사야 죽으면 또 딸랑 한 명

 

그 한 명 죽으면 또 딸랑 한 명

 

한 명 한 명

 

이건 뭐 뚝뚝 끊어진 단절이요

지극히 우연이다 말이죠.

 

여기에 상대적인 존재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십자가를 의식하고서 어떻게서 해서든 막아 볼려고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소하고

5촌 살인사건처럼 죽여서 쓰레기 통에 버리더라 말이죠.

 

그런데 죽은줄 알았던 사도바울이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또 증거하고

또 죽여 쓰레기통 버리고

또 벌떡 일어나서 또 증거하고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이 사건 자체가 말이 안되는 불가능성으로만 펼쳐지더라 말이죠.

그 유대인들이 직접 죽여버리면 본인들이 살인자가 되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니까

반 죽도록 패서 이젠 죽었겠지? 라고 버렸는데

얼마나 존재 존재 나는 율법 지키는 존재

부정한 시체를 만질수 없는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될수 없는

거룩한 존재 존재

존재로 어떻게 해서든 잇고 잇고 이어볼려고 하는데

 

저 지독한

세상이 감당 못하는 저 찔기고 찔긴 사도바울이라는 저 얼룩을

저 부정함을

아무리 제거할려고 얼룩을 지울려고 해도

감당이 안되는 겁니다.

 

글쎄 그 결과물인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이 감당을 못했듯이

 

지금 이사야가 졸지에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이 덮쳐버렸넹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요?

 

이 이스라엘이 이 얼룩 이사야를 다루는 시선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배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져야만 하는지를

 

역사와 묵시의 충돌로써

존재와 기능의 대립으로써

자아와 우리(셀프)로 나누는

 

이 십자가가 왜 이런 사건을 벌리는지를 신나게 즐겨 봅시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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