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한 창녀 라합도 들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부러워 사로잡힌바 된 일곱교회 (1, 8-11)

정결한 역사에 거리끼는 부정한 행함이 있는 믿음인 예수그리스도의 세계

계 04 창녀 라합이 들어간 예수님의 족보를 부러워하는 일곱교회 (계 1, 8-1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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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1, 새번역)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둘째 아들입니다'

(21:31, 공동)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21:31, 쉬운) 두 아들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21:31, 킹흠정) 그 둘 중에 누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첫째 아들이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

(21:31, 현대인)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느냐?' 그들이 `둘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세무원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21:31, 현대어) 두 아들 중에 그의 아버지에게 순종한 아들은 어느 쪽이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물론, 큰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그 말씀하신 뜻을 설명해 주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분명히 못된 짓만 일삼는다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1:1, 새번역)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함 또는 '나심은'

(1:6, 개역)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새번역)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공동)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

(1:6, 쉬운) 이새는 다윗을 낳고, 다윗은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1:6, 킹흠정)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 현대인) 이새는 다윗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1:6, 현대어) 이새는 다윗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1:8, 개역)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9, 개역)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개역)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개역)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8, 새번역)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1:9, 새번역)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 ,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1:10, 새번역)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 , ''

(1:11, 새번역)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일곱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콕 찜 당해 버렸습니다.

지옥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

곧 피로 사신 교회가 이미 되어버렸습니다.

완료입니다.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는 당위 곧 증상만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간섭이요 책망이요 곧 자녀된 증거만 나타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교회는 마치 믿음의 세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가짜 믿음의 세계 곧 인간 쪽에서 믿음을 갖추는

미흡하지 짝이 없는 의문의 미완료의 사단의 회와

대조 대립 상대적인 증상을 나타내도록 그 차이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 비교를 하냐? 기분나쁘다 라고 할게 아니라

오히려 구분 구별짖기는 저쪽 사단의 회가 더 심합니다.

그 부정에 더한 부정의 부정으로

저들이 먼저 구별짖기에 더 나은 부정으로 보여주시는 차이성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아왔다고 이 배신자를 심판하라고
이 더러운 자가 얼마나 악하냐 라고 주장하는 마귀 앞에서
보란듯이 너끈히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나타내심으로써
모든 허물을 덮어버리는
강도만난 베드로
마귀만난 베드로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선한사마리아 곧
부정한 마귀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부조리 십자가를 나타내심 앞에서
부정의 부정으로써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시고 자랑하시듯이 말이죠.

이 둘의 차이성을 제대로 벌려놓으시는 겁니다.

저들의 차이성 곧 겨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이라는


되도 않는 차이성과 족히 비교도 되지 않는

 

심판주를 등에 업고 증거하는 허다한 구름같은 증인으로써

오로지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는 자들로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칩니다.

 

오늘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로 든 아브라함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아브라함은 바로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역사적인 믿음

곧 아버지가 곧 조상이 물려주는 자식에게 믿음을

두 조각이 나서

 

졸지에 조상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라

역사가 아니라

시간이 아니라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를 낳는 태어나게 하는

자식이 아버지를 구원하는

역사의 반대인 묵시

끝에서 온 종말에서 온 믿음이

인간의 역사적인 믿음을 거부하면서

그것을 찢어버린 흔적을 안고서 다가온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산

이삭의 믿음이 아버지를 살려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만든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을 언급했습니다.

 

이사야를 시작하면 육체로 낳은 육의 자식인 이사야가

졸지에 믿음이 낳은 영적인 이사야로

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마치 아브람과 아브라함으로 갈라지듯이

말씀의 운동력으로 인해 둘로 갈라지는 분절이 되는 겁니다.

이 분절로써 이사야는 둘로 나누어져서

저쪽 하나님의 말씀과

이쪽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엄기덕님 질문 따나 인간의 몸을 둘 로 나누는게 성경에 어디있냐 말이죠.

문자적으로는 없습니다.

철학자들이 발견해서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프로이드를 따라 라캉도 이드와 자아와 초자아로 나누었다 말이죠.

그런데 이들이 독자적으로 학문의 세계를 펼치는게 아닙니다.

반드시 철학자든 과학자든 예술가 문학 문화가들도

복음과 다 연관 되어서 활동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철학을 거부해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주님의 자녀가 아니다 말이죠.

그들의 연구내용들이 반드시 복음과 연관되어서

왜 이 복음과의 차이가 나느냐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보면서 그냥 지나칠게 아니다는 겁니다.

 

반드시 거짓선지자의 활동은 반드시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님과 그 십자가의 사랑에

대척점에 놓여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아로써 인간을 쳐다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복음은 인간을 독자적은 주체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독자적인 자아를 가지고와서

셀프 라는 우리 개념을 대립시켜서 복음의 기능을 보여주신다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성경은 그냥 라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 라합이다 말이죠.

그게 성경에 없어요.

 

그럼 뭐냐? 반드시 기생 라합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성이자 동시에 우리 라는 관계성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라는 찬양의 관계성

새노래의 관계성

시편의 관계성이다는 거죠.

 

왜 라합이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기생이라고 붙일까요?

유대인들이 기생 창녀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면

유대인들이 좋아라 할까요?

간따다 거리끼는 걸림돌 예수에 걸려 넘어질 판국에

기생 창녀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면

더더욱 거북 스럽게 저 더러운 족보에 어떻게 들어가냐 라고

등돌릴꺼 아니냐 말이죠.

 

아니 저 족보 창녀도 들어가는 족보에

저도 기생라합처럼 넣어주세요 라고

영광스러워 하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지혜요

지혜를 쫏는 헬라인에게는 소위 요즘으로 치면 인문학자들이지요. 거짓선지자들

그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인데

 

우리 우리 셀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창녀도 들어가는 예수님의 족보인 십자가의 지혜가

우리에게는 부러워 죽는 족보요 영광스러운 족보이냐 말이죠.

 

한국기독교가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다들 등돌리는 저 족보인데?????

 

그러니 기능은 반드시 부정성 곧 기생이라는 창녀라는

죄인이라는 기능으로써

구원자를 말하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고

 

반대로 존재는 자신의 정결성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저 창녀 기생라합처럼 토색하지 않았다는

독자적인 자아를 내세우도록 되어 있지

구원자를

의사를 말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거리끼는 십자가를 말 못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환자가 아니니까

건강한자가 의사를 자랑할 리가 있겠습니까?

의인인데 구원자를 자랑할 리가 없잖아요.

 

기능이 아닌데?????

 

인간의 몸을 자아와 셀프로 나누는게 없어도

이미 인간들의 학문들이 그렇게 고착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복음으로

그 시대의 의식으로

그 당시의 언어로써 즉 사고방식으로써

알려주심에도 불구하고

믿으라고 알려주시는게 아니라

거리끼는 십자가를 어떤 언어든 어떤 사고방식이든 다 동원해서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작용케 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실로암 소경에게

그 까막눈에게 이름을 쓸줄 알겠습니까?

문자를 적을줄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 라는 이름을 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작 그래놓고서 바리새인 곧 거짓선지자들은

우리 속에 못 들어오는 셀프 속에

기능 속에 못 들어오는

 

존재만 우기는

자아만 우기는

모세의 제자라꼬 우긴다 말이죠.

 

아니 모세가 실로암 소경을 고쳤던 가요?

너거들 말 마따나

바리새인들 말 마따나

날 때부터 소경이라메?

부모 죄인지

자기 죄인지? 물어봤잖아요

예수님에게 말이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즉 존재를 물었는데? 죄인 맞제? 지옥갈 놈 맞제? 라고 존재를 물었는데

자아를 물었는데

졸지에 우리 라는 관계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써 예수님이 실로암 소경을 말하니까

 

여기에 반발하도록 되어 있는 반드시 존재를 우기도록 역사적 존재라고 우긴다 말이죠.

묵시 앞에서 역사가 사라지고 지나가고 삭제 당해야 할 판국인데

실로암 소경을 삭제할려고 하다가

도리어 실로암 소경으로부터 삭제 당하는 판국에 놓여지니까

반발하더라 말이죠.

역사는 묵시 앞에서 찢어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역사는 존재요 자아고

묵시는 기능이요 셀프 곧 우리 라는 관계성으로

그 독자적인 자아라는 존재를

그 의문의 덩어리를 찢어버리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것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속일려고 하냐 말이죠.

 

차라리 소경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해야할 판국에

소경 아니다고 하니 소경이다는 겁니다.

 

즉 관계성 기능을 주님은 계속해서 언급하시는데

저들은 자꾸 역사성 사라질 것 삭제당할 것 지나가는 것만 이야기 할 뿐이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를 못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족보를 통해서 반드시

부정성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껄끄러워요

거북스럽고 불편한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이 부정성이

 

아브라함

기생라합

엘리야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이 부정성이 날 살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인 이 부조리한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사기를 치느냐 말이죠.

 

기생라합이 들어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부러워 죽는 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덮쳐진 부정한 십자가가 덮쳐진 겁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써 자랑꺼리이다 말이죠.

 

부끄러운 십자가로 본 자들이 바로 거룩을 아침저녁 밤낮으로 지키는 유대인들인데

거리끼는 걸림돌 더러워서 저 예수님의 족보에 안 들어갈려고 한다 말이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를 역시나 마찬가지로

기생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높디 높은 지혜가 될 수 있겠냐 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 곧 이 보다 더 나은 능력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라고

저절로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하는

아니 환 장 할 수 밖에 없는

자랑이 저절로

노래가 저절로 튀쳐 나오는 영광이요 능력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말이죠.

그 하나님의 저주 라는 더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가 말이죠.

 

유대인들은 창녀가 들어가는 예수님의 족보 더러워서 못들어갑니다.

왜 그럼 거룩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겠냐 말이죠?

저들 더러운 창녀와의 구별 짖기를 한거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세계에서는

창녀도 글쎄 천국에 들어간데요 글쎄

 

부러운 천국입니까?

부끄러운 천국입니까?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시기에

기생도 창녀도 들어간 천국을

아이고 기생라합아 너가 너무 너무 부럽구나 자랑스럽구나 라고

기뻐할텐데

 

? 창녀가 천국에 들어갔다고? 그런 천국 안들어갈래?

뭐 더러워서 우찌 들어가냐 라고

 

의도적으로 기능적인 천국

존재가 절대로 들어올수 없는 천국을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 되심으로써 만드셨다 말이죠.

 

인간들이 조작한 천국은

땅에서 마찬가지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이런 존재들이 지키고 행하고

자아가 실천한 것들을 찬양하는 천국이고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 되신 천국에서는

기생라합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수 있게 하신

그 십자가의 피 용서

하나님의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만을 찬양하는

셀프 곧 죄인과 구원자의 관계

환자와 의사의 관계성에서만 나오는

새노래만 불려지는 곳이 예수님이 완성하신 천국이다 말이죠

 

천국이 달라요 글쎄

하나님도 달라요

십자가만 노래해요

 

저쪽은 자아라는 존재를 노래하고요?

그런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노래하고요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게

십의 이조 드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성전에서 기도하듯이

천국에서도 그렇게 노래하는 자들이 존재들의 천국이고

 

반대로 십자가의 피 용서만 노래하는 자들이

기능들의 천국

 

서로가 서로의 천국에 안 들어갈려고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저쪽은 모세의 제자이다고 우기고

너는 예수의 제자이지? 어디서 3년 밖에 안 된 초짜냐 라고 거부하도록 되어 있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저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와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면 얼마나 또렷하게 드러날거 아니냐 말이죠.

 

오히려 저들이 그렇게 해 줘요 글쎄

 

저 창기에 세리가 들어가는 천국에 들어가기 싫다 라고

 

저들의 구별짖기라는

부정성에 부정

부정의 부정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너무나도 쉽게 그 차이를 알게 되는 겁니다.

 

저들의 구별짖기는 의문일 뿐이다 말이죠.

평상시 건강할때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가

십의 이조를 드린 것을 감사했다가

이레에 두 번 금식 드린 것을 감사했다가

 

세상에 바벨론 포로로 들어가게 되면

저런 기도도 못해요 글쎄

또 몸이 아프거나

나이가 들어 늙어버리면

저런 것도 못해요

못하면 감사를 안 할 껍니까?

왜 졸지에 저런 조건으로 감사를 만드냐 말이죠.

사랑이 아니라 법을 내세운

결국 조건으로 따지는

감사를 하겠다는 심뽀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성전에서 세리는 그저 그저 주님의 심판 앞에서

긍휼을 바라보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이 피 용서는

남녀노소 아프나 건강하나 부요하나 가난하나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오로지 사랑만을 긍휼만을 쳐다보는 마음인 상한심령이다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와 제사가 아닌

조건이 아닌

인애와 자비이다 말이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다 말이죠.

 

? 심판주를 봤기 때문이다 말이죠.

나의 부정함을 제대로 심판하고

나의 부정함을 제대로 제거해 줄 분은

 

십자가 이지

 

내 대신 십자가에 매 맞는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이지

 

나의 부정함을 제거도 못하는 심판도 못하는

나의 암덩어리를 제대로 수술도 못하는 모세가 아니다 말이죠.

역사가 아니다 말이죠.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자아가 아니다 말이죠.

 

오로지 기능

대신 매맞으러 오신 기능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는 기능

모든 허물을 다 덮고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기능

이것이 구원이라는 기능이지 곧 사랑이지

구원의 존재라는 조건이 아니다는 겁니다.

존재 곧 법이 아니다는 겁니다.

법 곧 자아가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알파요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다는 것은

처음도 사랑으로

나중도 사랑으로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 사랑의 기능에 대상물이 졸지에 원수이다는 겁니다.

죄인이다는 겁니다.

 

이 원수도

이 죄인도

이 기생도

이 창녀도

이 매국노 세리도

들어가는 천국을

 

자랑하는 자는

존재가 아닌

오히려 자아가 상실된

십자가의 족보

예수님의 피 족보를 자랑할 수가 있고

 

자아가 상실되지 않으면

저 기생이 들어가는 족보를 절대로 절대로 자랑할 수가 없는

더러워서

깨끗하지 못해서

부정한 존재의 족보라서

더더욱 못 들어가도록

스스로 발로 차도록 되어 있는 족보이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기생 라합 뿐만 아니라

부정한 다윗을 마치 더더욱 노골적으로 자랑하듯이 더 떠벌리듯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밧세바 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남의 남편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다윗을 누락 시키는

누락 당하는 다윗을 부각시키는 이 거리끼는 걸림돌로써 다윗을 기룩하더라 말이죠.

 

그리고 룻 곧 개같은 이방여자

심지어 다말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로 족보가 이어지는

그리고 결혼도 안하고서 아이를 임신한 처녀 마리아

 

5명의 ~~~~ 여자 에게서

이 더럽고도 더러운 여자가 아니면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질수가 없는

그래서 이 여자들 덕분에 머슴아들이 도리어 살게 되는

이 족보를

 

누가 자랑스러워 하고

누가 기뻐하겠으며

누가 부러워 죽겠냐 말이죠.

 

유대인에게 전하는 복음인 마태복음 11절부터

글쎄 행함이 있는 믿음의 족보를 들이대는 겁니다.

 

가장 깨끗하고 정결하고 거룩한 유대인에게

보란 듯이 들이내미는 족보

이 족보에 못 들어가면 지옥이다고

뭘 믿고 자랑하냐 말이죠

 

존재들은 곧 자아는 오히려 부끄러워서 숨기고자 하는 족보를

 

기능은 곧 셀프는 우리(죄인과 의사라는 관계)

오히려 자랑스러워서 노래하는 생명의 족보라꼬 ~~~~~

이 의사는 세상에 이런 죄악도 고쳤어요 라고

환자만이 외치는 기능의 언어를 마음껏 발설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기생라합은 이 예수님의 족보를 부끄러워 하겠습니까?

부끄러운 구원이라꼬?

아니잖아요?

기생으로써

부정성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이 이런 원수도 용서하시는 사랑이다고

사랑은 원수를 용서하는 기능이거든요.

 

사랑이 이웃을 용서하면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그것은 개같은 이방인도 다 하는 것 아니냐? 말이죠.

도저히 불가능한 원수 마저도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기능이고

이것만이 우리이다 말이죠.

부정성을 그래서 의도적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야

저쪽 존재들이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귀가 예수님을 부인한 그것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아왔을때에

그 원수 베드로도 용서한 예수님의 사랑을 말 못하는 이유가

십자가에서 모든 허물을 다 덮엇다고 말 못하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마귀가 꾀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라는 자아

존재 역사물을 잡을 줄 밖에 모른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피 발린 죄인 베드로를

그 원수를 오히려 기뻐하시는 겁니다.

자기 피 발렸다고

십자가의 피 용서가 발린 원수 라는 기능이 왔다고

마귀 보는 앞에서 그 코 앞에서

금가락지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피로 아에 베드로를 도배를 해요 글쎄

베드로에게 피가 발려서

죄가 안보여? 피가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렸다는 그 증거물이

그 증상물이 되어버렸기에

보고 싶어도 못 봐

죄 좀 보자 라고 해도 피 밖에 안보여

 

그 덮어버린 허물을

왜 마귀가 무슨 자격으로 들쳐 보냐 말이죠.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인데

왜 처음도 아닌 것들이

나중도 아닌 것들이

 

십자가의 용서도 말 못하면서

다 이루었다고

모든 허물을 다 덮였다고 말 도 못하는 사기를 치면서

뭐 거룩을 지켰다고?

배신자 베드로를 잡아왔다고?

 

어디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사기를 치냐 말이죠.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세계에서

왜 딴소리 하냐 말이죠?

 

오히려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님을 외치고 있는데?

 

그 앞에서 마귀가 까불다가 쭐꾸덕 미끄러져 자빠지는 굴욕을 당하는 겁니다.

 

미끼를 덮썩 물다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덮썩 깨물다가

갑자기 그 어떤 것도 씹어도 빠지지 않던 강한 이빨이 와장창장 다 부서지는

틀니쓰는 할머니 입모양으로 변해서

이빨 아파 죽겠다고 줄행랑 도망치더라 말이죠.

 

어딜 깨물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예수님을 왜 깨무냐 말이죠.

예수님의 증상물을 왜 깨무냐 말이죠.

왜 피 발린 피를 왜 깨무냐 말이죠.

 

(4:8, 개역)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16:5, 개역)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21:6, 개역)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2:13, 개역)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새번역)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8, 새번역)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11:17, 새번역)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크신 권능을 잡으셔서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1:17, 현대어) 그분을 뵙는 순간 나는 죽은 사람처럼 몸이 굳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살아있는 자다. 내가 죽었으나 부활하여 지금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자요,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다.

 

 

처음도 아닌 것들이

나중도 아닌 것들이

 

이 처음과 나중 그 사이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덮쳐지지 않을 것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 곧 대신 매 맞은 십자가의 흔적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것들이

 

어디서 사기를 치냐 라고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만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 바로

처음과 나중의 증상물

일곱교회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우리 라는 관계성 때문에

자녀에게는 징계 꾸지람 잔소리가 있지만

저 사생아들에게는 없는 것을

우리 자녀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그 매맞음의 부정성을

사생아들은 덮썩 물도록 되어 있는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을

차이성으로써 증거하시는 겁니다.

 

기생 라합도 들어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우리 자녀들은 찬양하지만

 

사생아들은 도저히 그 매맞음 속에

그 부정함 속에 들어갈려고도 하지 않는

거부성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인 이유입니다.

 

예수님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노래하는 증상물로써

실로암 소경이 노래하는 기능을 부여받았기에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서

신나게 노래하고

마음껏 자랑하고 또 자랑하고

다른 것은 족히 비교도 안되는 자랑꺼리라고 외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의 증상물로써

 

일곱교회처럼 말이죠

 

일곱이라는 완벽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이 사로잡은

피로 사신 교회가 노래하는 알파요 오메가 이신 예수님을 외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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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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