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라 이스라엘,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1, 1-12)

 

하늘이여 들으라(들으라 이스라엘), 땅이여(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귀를 기울이라

 

나를 제대로 저주, 심판 할 줄 모르는 자는, 나를 제대로 구원 할 줄 모르는 자이다.

 


(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1, 개역)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1:2, 개역)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3, 개역)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1:4, 개역)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5, 개역)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1:6, 개역)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1:7, 개역)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1:8, 개역)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1:10, 개역)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 새번역)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1:2, 새번역)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1:3, 새번역)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1:4, 새번역)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1:5, 새번역)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1:6, 새번역)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난 곳과 매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1:7, 새번역) 너희의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의 성읍들이 송두리째 불에 탔으며, 너희의 농토에서 난 것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방 사람들이 약탈해 갔다. 이방 사람들이 너희의 땅을 박살냈을 때처럼 황폐해지고 말았구나.

(1:8, 새번역) 도성 시온이 외롭게 남아 있는 것이 포도원의 초막과 같으며, 참외밭의 원두막과 같고, 포위된 성읍과 같구나.

(1:9,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될 뻔하였다.

(1:10, 새번역) 너희 소돔의 통치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 / 또는 '사사들아' 또는 '가르침' 또는 '교훈'

(1:11,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12, 새번역)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지난 시간에 이사야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이사야는 육의 출발로 누구 누구의 아들로 언급했습니다.

즉 그는 육에서 영으로 옮겨질수가 없다는 겁니다.

존재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고, 원인 있는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즉 의문에서 못 벗어나요

미흡한 번제와 제사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죠.

철저하게 갇혀 버린 겁니다.

? 역사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영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씨를 남겨놨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미래에서 쳐들어와서 낳았다는 겁니다.

피로 사신 교회처럼 말이죠.

 

즉 이사야 조차도 거짓선지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반전은 씨를 남겨놨기 때문에 참선지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은 시간의 순서대로 역사로 보게 되면

인간 쪽에서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또 말씀을 실천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에서 출발하는 육이다는 겁니다.

 

즉 거짓선지자에 대한 해석 자체가

미래에서 오는 해석 곧 남겨준 씨를 기준으로 하는 해석에서이기 때문에

이사야는 거짓선지자로 출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육에서

영의 투입 개입으로 인해서

이사야는 졸지에 두 개로 갈라져야 함으로써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의 차이성을 나타내는 기능이 덮쳐지게 되는 겁니다.

 

결국 참선지자는 미래에서 오지 않는 이상

기능이 될 수가 없어요.

참선지자라는 존재가 될려고 하는 것이 역사의 해석이거든요.

거짓선지자가 안 될려고 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묵시에서 오면

나야 말로 거짓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거짓선지자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라는 시선을

묵시에서 즉 역사의 끝에서 종말에서 온다 말이죠.

그러니 참선지자란 결국 없는 겁니다.

없으니까 있다고 우기는 놈들이 바로 참선지자가 될려고 하다 보니까

결국 다 거짓선지자이다는 겁니다.

 

묵시에서 성령을 선물 받아 버리면

나야 말로 거짓선지자이구나

그럼 참선지자는?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니 참 은 예수님 뿐이고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시선만

그 중에서도 나 라는 자아는 거짓 중의 거짓이라는 것이

성령을 선물 받은 자의 고백이 된다 말이죠.

 

쉽게 말하면 미래의 금가락지가 탕자를 우발적으로 발생시키는 겁니다.
탕자가 망나니 짖을 하니까 재산 달라고 보챘고
재산을 받고 다 말아 먹었으니까 빈털털이가 되고
빈털털이가 되니까 아버지에게 노예로 삼아 달라고 오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건 역사고
아버지의 맨발로 나가서 기다리는 인애와 자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탕자는 탕자가 되어야만 하는 기능
묵시가 낳은 우발성이 되어야만 하는 거다 말이죠.

우발성이니까 존재가 아닌 기능(당위)이지요.

교회란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기능이다 말이죠

교회를 자기가 가면 교회이고
안다니면 교회 아니게 되는 아닌 그런 존재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에 왜 가냐 말이죠.

자신이 교회됨이나 구원을 주장하는게 아니라

저분만 구원 받아야 합니다 라고 말이죠.

아니요를 외치는 기능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아니요를 외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는 시선을 자기자신에서 못 뗀다 말이죠.

성령이 아니면

선물이 아니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존재가 아닌 우발적이다는 겁니다.

기능이다 말이죠.

우연히 발생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말이죠.

미래에서 말이죠. 미래완료에서

 

그럼 탕자는 반드시 탕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아니 왜?

금가락지가 주체가 되어서

둘로 갈라서 그 차이성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럼 탕자와 또 뭘로 나누는데?

바로 맏아들로 나눈다 말이죠.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역사에서 보는 거짓선지자와

묵시에서 보는 거짓선지자의 해석이 반대입니다.

 

역사에서 보는 거짓선지자는 바로 탕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묵시에서 보는 거짓선지자는 바로 맏아들이 된다 말이죠.

 

즉 미래에 남겨둔 씨의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는 거짓선지자로 출발해서 참선지자로 바뀝니다.

그럼 반대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다들 참선지자라고 우기는 판국에서

졸지에 남겨진 씨를 말하지 못함에 있어서 거짓선지자로 판명이 납니다.

곧 다윗의 자손 예수님으로 인해서 말이죠.

 

오로지 유일한 참선지자 예수님 때문이지

인간 저거들끼리에서는 이런 두 패가 갈라지지를 않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일 뿐인데요 뭘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반발심을 믿는 자가 더한 셈입니다.

 

자 그렇기에 바리새인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참선지자죠

 

참선지자이니까 다들 존경 하더라 말이죠.

바리새인이 존경해 달라고 해서 존경한게 아니잖아요.

오늘날도 똑같잖아요.

모두다 자신이 바라는 것의 투영으로 타인을 판단 하거든요.
자 그렇게 참선지자로 출발합니다. 역사에서는 말이죠.

독립운동도 하고 독립운동 자금도 대주고

그야말로 불의함이 없다 말이죠.

 

문제는 예수님이 새롭게 거짓선지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거짓선지자가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개입 하는 바람에 말이죠.

 

자 이렇게 십자가의 개입이 없이,

굳이 개입하지 않는

 

육에서 출발해도 충분히

거짓선지자에 대한 해석은 누가 봐도 탕자이고

참선지자는 맏아들이 된다 말이죠.

 

이런 해석에서 모두가 다 동의를 한 이미 결정난 상황에서

동결된 해석

역사적 해석에서

 

그런데 졸지에 남겨진 씨로 인해서 팔을 어긋맞게 되더라 말이죠.

 

그럼 당연히 이렇게 질문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불의 하시뇨?

 

즉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 졸지에 펼쳐지더라 말이죠.

그럼 그 해석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야 이놈들아 지음 받은 피조물이

창조를 한 창조주을 해석 할 수나 있겠느냐? 라고 하더라 말이죠.

 

저거들은 지 마음대로 하는 권리가 있다꼬 하나님의 불의하뇨 라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은 토기장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냐 말이죠.

 

이게 인간의 신앙의 특징입니다.

지는 지 마음대로 하면서

하나님은 지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는

그게 맏아들이다 말이죠.

지는 지 마음대로 아버지 말씀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고 지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 마음대로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줄 권한이 없냐 말이죠.

 

어무이랑 말씀을 나누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안식일

자체가 올무인줄 모른다는 겁니다.

설마 하나님이 함정을 팔 줄이야?

 

속았네 속았어 ㅋㅋㅋㅋ

 

보세요 어무이! 안식이 뭡니까 쉬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안식일을 지켜버리면

지키니까 쉬는 겁니까 일하는 겁니까?

안식일을 지키는데 언제 쉽니까? 언제 쉽니까?

남들은 다 안식일 지키는데 혼자 쉰다 칩시다

참 마음 편하겠지요?

평안이 오는 겁니까? 도대체 언제 평안 한 겁니까?

 

안식일 자체가 평안에 대한 집착만 낳을 뿐이지

평안하지 않아요.

 

명령어 자체가

하라 하지말라 자체가

죄 아래로 넣는다는 겁니다.

 

역사가 그래요

시간이 그래요

행함이 그래요

인간의 믿음 곧 육의 믿음이 그래요

법이 되지

번제와 제사가 되지

인애와 자비가 안된다는

즉 죄 아래에 더더욱 가두는 겁니다.

 

답이 없어요.

 

이 단절성에

이 철저한 단절성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단절성이

역사에서 끊어지고

뚝뚝 끊어짐이

존재에서 뚝뚝 끊어짐이

 

알고보니 저 분이 그렇게 했더라 말이죠.

그 결과로 사도바울이 끊어짐을 느꼈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기쁜 겁니다.

끊어짐이

단절됨이

역사가 삭제 당하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존재가 삭제 당하고 (배설물 똥 덩 어 리)

 

이것이 기능이 벌린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느닷없이

앞에서는 울고서는 뒤에서는 기뻐하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5, 개역)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개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감에 있어서

그 어떤 연결점이 있더냐 말이죠.

없어요

 

있다고 주장하는 놈들이 개혁주의랑 성화론자들이다 말이죠.

없어요

있으면 또 존재가 되어요

또 의문의 반복이 되어요

그러면서 막살면 안된다고 존재를 자꾸 우려 먹어요 글쎄

의문의 반복을 하고 싶어서 환장해 있어요

미흡하고 모잘라는 666을 매매 해야

막살면 안된다고 외치는 자아가 의미가 있으니까

타인에게 그렇게 외치는 막살면 안됩니다 라고 외치는 자신을 각인 시키는 거다 말이죠.

 

믿는 예수님이 서로 달라요 글쎄

외치는 십자가가 서로 달라요 글쎄

 

자 그래서 도저히 해석 못할 남겨진 씨를 투입시키더라 말이죠.

거짓선지자는 존재이고

존재만 주장하고

너 나 구원

인간 구원을 주장하고

 

참선지자는 남겨진 씨에서 나왔기 때문에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인간 구원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키면서

저 분만 구원 이고

저 분만 남은자 라고 외친다 말이죠.

그래서 심판을 등에 업고 외치는데

그 심판 니만 당해라 라고 오히려

심판을 퍼부었는데 본인이 오히려 심판을 받아 글쎄
~~~

 

즉 아무도 못 믿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지가 심판 외쳐 놓고 지가 심판 당해

아무도 심판 안 당하는데!!
자기 혼자만 십자가를 져요 글쎄 ~~~
 

만약 믿어 버리면 원인 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믿을수 없게끔 행동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참선지자의 기능이고

 

거짓선지자들은 참선지자의 존재가 될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믿도록 만들어 줄려고 환장한다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게 해 줄려고 말이죠.

영화 쉰들러 리스트처럼 쉰들러 같아 ~~~~

 

자 이렇게 되니까

모든 해석이 달라집니다.

곧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해석 자체가

나쁜짖을 자꾸 하게 되고

시간 순으로 역사 순으로 자꾸 죄악을 쌓아서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는 해석이

기존의 모든 해석이다 말이죠.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의 요소를 다 제거한 것이 교회 아닙니까?

아무도 교회를 소돔과 고모라 라고 하지 않아요.

최근 한국에서 만든 쿼바디스 라는 영화를 보면
아참 최근이 아니다 몇년 전에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의 요소를 제거하자 라고 외치는 개혁주의의 영화이다 말이죠.


그러니 나 보다 나쁜 큰 교회가 소돔과 고모라이고

나는 그 큰 대형교회의 소돔과 고모라의 요소를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이다고 주장하는데

 

졸지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에라이 강도의 소굴아 라고 외친다 말이죠.

 

아니 소돔과 고모라의 요소를 제거 하는데 있어서

가장 소돔과 고모라와 거리가 먼 존재로 그런 교회로

대형교회까정 비판하면서 저 세리와 같이 되지 않은

저 소돔과 고모라 같은 대형교회와 같이 되지 않은

가장 소돔과 고모라 와 먼, 거리가 먼 작고 작은 교회, 개혁정신의 교회를 갖추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이 에라이 강도의 소굴아 라고 하신다 말이죠.

 

아니 왜?

 

남겨진 씨에서 출발하지 않고

끝에서

역사의 끝에서

종말에서

존재의 끝인 기능에서 출발하지 않고

기껏 비교하는 것이

존재와 존재끼리의 비교인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도진개진

그 놈이 그 놈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그 구별짖기라는 노림수에
저 로마, 세속적인 세상과 같지 않다고 우기는

 

어디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속일려고 하냐 말이죠.

 

예수님이 외에는 모조리 다 소돔과 고모라 이다 말이죠.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에서 출발하는 것이

예수님 곧 심판자를 본 거 아니냐 말이죠.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

 

졸지에 남겨진 씨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이

오히려 거꾸로

소돔과 고모라 같은 탕자 짖

저 세리와 같이 매국노 짖

토색하는 짖을 하는 자가 졸지에

 

남겨진 씨 곧 금가락지로 인해서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에서 벗어나고

 

반대로

나는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다 라고 우기는
나는 소경이 아니다고 우기는
나는 병든자가 아니라 건강한 자요
죄인이 아니라 의를 쫏는다고 우기는

소돔과 고모라의 짖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이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던 맏아들이

졸지에 금가락지 곧 남겨진 씨와 연관이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해

졸지에 오히려 그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자로 들추어지더라 라는 겁니다.

가버나움이 그랬거든요.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서 가장 기적을 많이 베푸니까

그래 고맙다 잘 받을께 라고

입 싹 다시고 자기 갈길로 가더라 말이죠.

 

누가? 가버나움이 말이죠

아니 가버나움이 소돔처럼 고모라처럼 동성애가 활성화 된 도시였습니까?

그런 타락한 도시였던가요?

전혀 아니잖아요

지극히 평범한 도시였다 말이죠.

 

아니 예수님 보고 딴 도시 딴 마을 보다 더

이 마을만은 기적을 많이 베풀어 주소서 라고 요구를 했던가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기적을 자기마음대로 베푸셨다 말이죠.

불쌍해서 문둥병자도 고쳤다 말이죠.

 

아니 그런데 왜 소돔과 고모라와 거리가 가장 먼 도시가 왜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하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왜 입 싹 딱고 자기 갈길로 갈까요??

 

아니 왜? 자기 하나님이 있거든요.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그 경계선을 지나가게 됩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서

 

이미 다 나았다고

그러니까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다 나아야 제사장에게 보이는게 아니라

이미 선언 자체가 다 나았다는 선언이기에

원인 없는 결과를 보여주라고 말이죠)


나 이제 다 나았어요?(김국진 버전) 라고 보이라고 검증 받으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너무 기뻐서 예수님 예수님 정말 다 나았어요 라고 하니까

고침 받은 자가 열명 아니였니?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니?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돌아온자는 이방인 너 하나 밖에 없구나 하시더라 말이죠.

 

문둥병 안에서는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구분이 없습니다.

어차피 저주이거든요.

어차피 심판이라서 같은 죄인이다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고치니까

그 속성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씨를 뿌리니까 땅의 속성이 드러나듯이 말이죠.

 

물론 사마리아인의 저주 곧 문둥병은 다들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유대인이 문둥병은 그야말로 얼마나 수치스럽겠냐 말이죠.

선민인데 저주 받았으니 재수 더럽게 없었는데

졸지에 고침 받아서 졸지에 재수 있게 되어서

다시 저 거룩한 선민의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말이죠.

그 정도로 깨끗하게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야 당연히 사마리아인이 가겠다고 하니까 안 돌아가는 겁니다.

 

즉 구분 구별짖기가 졸지에 생겨버린 겁니다.

 

바로 이게 악마들이다는 겁니다.

저들의 하나님이 마귀라는 겁니다.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유대인을 장악한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만 몰라요

가장 마귀와는 거리가 먼 생활과 신앙과 말씀 지키기 실천으로 똘똘똘 뭉쳐진

온 몸에 말씀으로 도배를 한 것이

도리어 마귀가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밝히 보여주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일려고 한다 말이죠,.

아니 저 예수만 아니였다면 안 들통 났을 텐데

저 예수 때문에 들통나 버렸으니 말이죠.

 

그렇게 문둥병이 깨끗하게 된 것을

그것을 다시 예수님께서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으로써 벌리시는 겁니다.

 

이미 벌써 말이죠.

 

문둥병 아래에서는 똑같았다 말이죠,

그런데 병고침을 받으니까

그 엉터리 하나님으로 구분짖기를 하더라 말이죠.

 

아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이니까 안고쳐주고 유대인이니까 고쳐주는

구별짖기를 하던가요?

 

그게 불만 이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였다면

절대로 사마리아인을 고치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고쳤으니까

예수님에게 영광 돌리러 올 필요가 없다는 거죠.

분명 본인이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아도 말이죠.

 

이것이 역사가

예수님 보다 위에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모세라는 1300년 정통을 우려먹고 있지

 

딸랑 3년 예수 라는 신참은 믿음이 안 간다 말이죠.

혹 잘못 되면 우짤려고? 저 우발적인 자에게 갔다가는

이단으로 찍힌다 말이죠.

 

안그래도 예수님도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 했다 말이죠.

고쳐줘도 고침이 소용이 없게 되는

그 정도로 우리는 마귀에게 속해 있지

건짐 받을 자격 조차도 없다 말이죠.

 

? 구별 짖기를 하니까 구별 짖기를 당하는 겁니다.

나 구원받았어요 나 고침 받았어요 라는 것 자체가

구별짖기 라는 역사로

존재로 빠져 버리니까

나 만 구별짖음 곧 금가락지를 껴야 하는데

저 세리도 같은 금가락지를 꼇네? 에잇 금가락지 막 집어 던지더라 말이죠.

 

나만 빨간 신상품의 고가 브랜드 비싼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데

저 개같은 이방여자가 똑같은 빨간 드레스를 입으니까

신경질 나서 자기가 입던 옷을 막 찢어버리더라 말이죠.

구별짖기 하기 위해서 빨강 드레스를 쌋는데

어떤 누구도 저 드레스는 못 입을 거야 나만 입는 옷이어야 해 라고 했는데

대량생산으로 지나 개나 다 입고 있으니까

구별 짖기가 안돼 ㅋㅋㅋㅋ

 

흔하게 드라마나 광고에 나오잖아요

한껏 멋을 부린 여자가 자기랑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를 보고

잔뜩 찌푸리는 모습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성전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더라 말이죠.

 

경제심리 용어로 속물효과 스놉효과 snob effect 이다 말이죠.

 

그런데 세리는 심판의 주 앞에서는

인간의 구분 짖기가 다 의문이요 다 헛되고 헛된

번제와 제사일뿐이더라 말이죠.

곧 허구이다 말이죠.

 

그러니 인애와 자비만을 바라는

저주와 심판 속에 있을 뿐이기에

긍휼을 바라더라 말이죠.

 

구별짖기가 이 심판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배설물끼리 도토리 키 재기인데

오로지 긍휼 밖에 용서 밖에 없는데

 

그 용서가 바로 이사야 서 에서는

남겨든 씨 이다는 겁니다.

 

미래완료에서 오는데

누가 보았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놀라는 겁니다.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떠억 ~~~~~

 

말이 안되는 겁니다.

 

말 되는 것이면 성경에 없어요

말 안되는 것만 성경에 있어요

 

셀프(초자아)는 관계성이거든요.

지체다 말이죠.
우리 라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이게 시편 아닙니까


피로 사셔야만 우리가 되지

 

자아가 모이면 객관이 되는게 아니라

역시나 국가 라는 자아만 모일 뿐이다 말이죠.

그게 육육육 이다 말이죠.

 

우리는 피로 사심으로써

거꾸로 형성이 됩니다.

즉 심판 받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는

그 우리입니다.

 

이 우리를 증상물 곧 즐겨라 막살아라 라는 초자아의 명령

자체의 증상물로 등장해요

 

창기 세리는 역사물이 아니라 묵시물이예요

우발적으로 거꾸로

역사라는 존재에서 나올수 없는

묵시에서 종말에서 거꾸로 기능하는 존재가 아닌 기능적인 우발물인데

 

무식하게 역사존재물이라고 보고 있더라 말이죠.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다시는 죄 짖지 말라고 했으니까

다시는 죄 안 지어야 한다고

막살면 안된다고

뻘건 글씨로 확대 확대 막 확대를 하는 미친짖을 하더라 말이죠.

어떤 목사 사모가 ㅋㅋㅋ

참 이웃사랑실천 참 잘한다 말이죠.

그런 자를 포주라고 한다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하는 여자를 통해서 뒤에서 돈 챙기는 배후세력

 

아무튼

 

그 유명한 초자아의 명령

즐겨라

막 살아라 말이죠.

곧 자유 이다 말이죠.

 

무엇을?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를 즐겨라 막 즐겨라 라는 겁니다.

 

자 그러니 그럼 누가 즐긴자 입니까?

아홉명의 유대인 문둥병 고침 받은자 입니까?

여전히 번제와 제사를 이제 드릴수 있게 되었다고

저 세리 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그 아홉명입니까? 아니면

 

너무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외치는 자

그냥 외치는 자가 아닌

사마리아인 한 사람 입니까?

 

누가 안식을 평안을 누립니까?

안식일 지키러 유대조직으로 들어간 자 입니까?

안식일 날을 어기면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돌아온 자 입니까?

 

이것이 미래완료에서의 구분짖기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구분짖기가 먼저 벌어집니다.

씨를 뿌렸으니까 말이죠.

그 차이로 묵시의 구분짖기가 저 역사의 구분짖기의 차이성으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심판이라고 해요

이 심판 앞에서 모든 인간은 소돔이요 고모라요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이것을 밝혀내는 십자가가 감사한 거죠.

그런데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자부하는 자부 곧 믿는

잘 믿었다고 믿는 자가

더더욱 반발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평상시 구분짖기의 달인들이였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미래에서 오는 십자가로 갈라지게 하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시간으로 육으로 역사로

번제와 제사로

이미 번제와 제사 자체가 구분짖기이니까

그 구분짖기를 한다는 것을 염두하고서

 

그 부정에 부정으로써 남겨진 씨에 의해 구분이 되더다 말이죠.

 

이것이 이미 남겨진 씨의 등장으로 인해 이미 벌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자 이러니까 더더욱 이 씨가 미운 겁니다.

더더욱 십자가가 미운 거예요

 

십자가가 낳은 것이 창기와 세리이거든요.

미래에서 낳았어요

자꾸 역사의 존재로 태어난게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존재이지

미래에서 낳은게 아니게 보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구분짖고 싶어서 안달이 나요 글쎄

 

말려듭니다.

미끼를 덮썩 물도록 되어 있어요

 

너무 너무 잉여적이라서

너무 너무 무능해서

마음껏 남녀노소 모두가 돌삐 던져도 상관 없을 정도로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는

개같은 이방인이요 여자요 어린아이 이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창기와 세리는 부정성입니다.

누가 봐도 부정성이다 말이죠.

절대로 고개를 다 돌리도록 되어 있지

절대로 주목하면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반드시 싫어버린바 되었다 말이죠.

아니 왜? 곧 심판의 증상물이다 말이죠.

심판 주의 증상물이다 말이죠.

구름 같이 허다한 증상물 ~~~~

 

마치 희년을 유대인들이 스스로 발로 차버려야

이방인에게 넘어가도록 되어 있는

 

결국 결과적으로는 희년은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왔던 겁니다.

 

아니 이스라엘 아니였나요?

그래?

그럼 이스라엘 줄게 받아라

받아라 라고 주니까 이스라엘 때려죽어도 안 받겠데요

그럼 이방인에게 넘어가니까

그 이방인이 새이스라엘이 되어버리네 글쎄

 

! 아이 타임 아이 타임, 멈춰 멈춰 (어릴적 동네에서 배운 용어)

다시 다시 처음부터 다시, 타임 리셋 부팅

물론 리바이벌 없지만

다시 해도 결국 안 받겠데요 글쎄

백날 리셋 해도 말이죠.

미래에서 곧 남은 씨에서 오는 원인 없는 결과인데

자꾸 결과를 안 쳐다보고

원인을 바꾸면 결과가 달라질수가 있다고 보더라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묵시가 아니라 역사이지

말라꼬 남겨뒀겠냐 말이죠.

 

끝까지 존재를 우기더라 말이죠.

존재는 없어요.

무식한 놈! 창기와 세리를 자꾸 존재로 보넹 ㅋㅋㅋㅋ

기능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글쎄

 

지옥간 부자가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나사로를 자꾸 존재로 보니까

이 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서 거지 나사로를 심부름 보낼수 있다고 보더라 말이죠.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못 건너가요

큰 구덩이가 있어서 푹 빠져요 글쎄

함정에 빠진다 말이죠.

 

그러니까 지옥에 가 있는거다 말이죠.

존재로 보니까

기능으로 안 보이거든요.

의식 자체가 기능으로 못 넘어와요

그러니 거지나사로는 영원히 지옥간 부자에게서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겁니다.

 

걸림돌로 작용하는 기능인데

자기를 넘어뜨리는 기능으로 안보이고

미끼로 안 보이고

언제든지 걸림돌 빼버릴수 있는 존재로 보더라 말이죠

버렸더니 머릿돌로 와 있어도

여전히 몰라요

 

자기를 잃어버린 도련님이라는 도령처럼

쌍둥이가 갑자기 되어서

사본 도령이 안방 차지하고

원본 도령은 쫏겨나더라 말이죠.

사이보그 인공지능 도령이 안방 차지하고

쌍둥이 동생 야곱이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쌍둥이 형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원본 도령은 쫏겨나는

맏아들 이스라엘은 쫏겨나는 가짜 이스라엘 사단의 회로 드러나더라 말이죠.

 

단 한번도 사랑을 용서를 쳐다보지 않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라는 용어만 따오더라 말이죠.

사랑이나 용서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다 다 같은데

자신을 구분짖기 하기 위한 용도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니까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옳다고

거기에 속아넘어가는 자들도 웃껴요

저 뻔한 사기꾼에게 다들 넘어가고 있으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인간 구원을 외치고 있으니까

막살면 안된다고 보는

인간 구원 없다니깐 ~~~~~~

 

예수님 구원 밖에 없어요.

이것이 부정성 이다 말이죠.

 

그래서 부정성으로써의 기능인 창기와 세리는

희년의 증상물로 나타나야만 하듯이

즉 즐겨라 막살아라 이듯이

 

그래서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바리새인의 해석인 구분짖기가 아니라

거룩신학이 아니라 그 엉터리 구원신학이 아니라 역사 정통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저들에게 이 부정성에 동참을 못하거든요.

거리끼거든요

얼룩을 빼버려야 하는데

얼룩이 되어야 한다니 말이 되냐 말이죠.

부정성을 제거해야 거룩한 신학하는 재미를 누리는데

부정성을 제가하기는커녕 본인이 부정적이어야 한다는데 있어서

거부감을 싫어버림을 노골적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자동적인 구분짖기가 벌어지는 겁니다.

본인의 꾀에 본인이 걸려 넘어지도록 말이죠.

 

하나님의 영광의 증상물로써

소경으로 살아온

소경으로 자유한

소경으로 즐겨온 거다 말이죠.

 

그러니 저들은 이 소경됨을 못 즐기는 겁니다.

 

아니 왜?

차라리 소경입니다 라고 했으면 고쳤을 것을

소경 아니다고 하니 고침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의 증상물이 되지 못하더라 말이죠.

 

못 즐겨요 글쎄 ~~~~

막살지를 못해요 글쎄 ~~~

 

그러니 창기 세리 라는 막사는 자들의 이들 증상물을

또 신학으로 성경 지식으로 구분짖고 나누고 하는 이유가

나는 저 들과 다르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더라 말이죠.

 

바로 그 하나님 그 엉터리 하나님관을

이사야가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 남겨진 씨 만 우리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 외에는

마귀죠.

마귀 자식.

 

마침 오늘 본문이 그런 내용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된 것이

죄가 쌓여 쌓여 시간이 지나 더더욱 쌓여서 소돔과 고모라가 된게 아니라

정반대로

 

남겨진 씨 때문에 거꾸로 소돔과 고모라가 된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로 출발해야 한다 말이죠.

거짓선지자로 출발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왜?

미래의 남겨진 씨가

나를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시간으로 따지면

아무리 봐도 소돔과 고모라가 될만한 짖을 한 적이 없다 말이죠.

맏아들이 그랬거든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 말이죠.

그런 시선에서는

탕자가 미워 죽는 겁니다.

 

간따나 미운데 더더욱 금가락지를 씌우니까

이건 뭐 미쳐 버리죠.

 

세상이 견디지 못해 격동케 하는 십자가의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이다 말이죠.

 

저 탕자는 금가락지의 증상물이거든요.

창조물이거든요. 피조물이거든요.

 

그런데 맏아들 본인이 자신을 주체로 보니까

? 나는 말씀을 지켜야 하는 자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 말씀을 어기면 안되는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아버지 말씀을 대상물로 삼아서 자신의 실천여부에 승부를 걸고 있는 반면에

그런 주체인 반면에

 

이놈의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의 증상물

곧 남겨진 씨의 증상물로써

누구 말 마따나

누가 봐도 소돔과 고모라 인데

그것이 원인 있는 결과의 해석인데

아무리 봐도 소돔과 고모라 인데

자기가 봐도 자기가 소돔과 고모라인데

누가 봐도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 인데

저 남겨진 씨 때문에

졸지에 이스라엘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거꾸로 쳐들어 온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말도 안되기에

말 안되기 때문에 반발 격렬한 반발이 펼쳐지더라 말이죠.

 

말 되면 반발 안하거든요.

맏아들이 금가락지 끼는 것은

아무도 반발을 안 해요

 

도저히 용서 받을 가망 조차도 없는

원수 중에 원수

죄인 중의 괴수가 글쎄 십자가의 용서의 증상물로

즐기고 기뻐 노래하고 씹고 뜯고 마시고 즐기면

 

스스로 그 동안 구별짖기를 했던 자는

그 앞에서 돌아버리는 겁니다.

견디지 못하는 격동이 그런 반발이

십자가의 용서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둘 다 다른 하나님을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맏아들의 아버지는

번제와 제사를 원하는 아버지로써

맏아들은 그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 아무도 반발 할 수가 없는

금가락지는 누가 봐도 맏아들이고 살진 소는 맏아들 차지이고

 

반대로 탕자의 아버지는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아버지로써

말이 인애와 자비이지 이것이 바로 반칙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반칙이거든요.

사랑 보다 부조리 한게 어디있겠냐 말이죠.

 

우리는 원래 다 마귀걸린 정신병자인데

그래서 용서를 바랄 뿐인데

 

마귀는 그 용서에 반발하는 겁니다.

그 용서를 시비걸어요 글쎄 ~~~~

그 피를 시비 걸어요 글쎄 ~~~

 

저 더러운 창기와 매국노 세리에게 용서를 베풀면 안된다 것이

마귀의 특징 아닙니까?

딴 사람은 몰라도 저 창기 저 세리 저 개같은 사마리아인

저 탕자

저 원수에게

십자가의 용서를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마귀죠.

 

탕자는

아버지의 인애와 자비의 증상물이다 말이죠.

반칙의 증상물

 

반대로 맏아들은 번제와 제사를 원하는 아버지의 증상물이다 말이죠.

자식이다 말이죠.

 

결국 같은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가 달라요 글쎄

 

이것이 인간이 가르는 방식이 아닌

주님 본인이 두 아버지로써 분절이 되어서

자식을 각각 다르게 두는 방식이다 말이죠.

 

결국 주님 본인이 이런 반칙을 벌리는 겁니다.

 

실컷 맏아들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법을 알려줘놓고서 지키라고 해 놓고서는

 

탕자에게는 사랑을, 용서를 줌으로써

탕자인 이방인을 구원하는 식이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마귀가 돌아버립니다.

맏아들이 미쳐버려요 글쎄 ~~~

 

그러니 다윗이 부랴 부랴 이스라엘 왕이 아닌

개같은 이방인의 왕이 되어서

번제와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의 아버지로 옮겨타면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남겨진 씨로 인해서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게 아니라

자손이 조상을 태어나게 하는 거다 말이죠.

역사에서는 시간에서는 행함에서는 말도 안되요

이것을 처음 당한 자가 조상 곧 첫 빠다 1번 타자로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벌린 결과물

원인 없는 결과물 1

 

번제와 제사로 구원 받을 인간이 없으니 말이죠.

막살지 않기로는 구원 받을 인간이 없어요 글쎄

 

막사는 인간만 구원 받아요

그것이 바로 선물

곧 종말의 영이

끝에서 온 영을 받은 자이다는 겁니다.

즉 죽은 자이다는 겁니다.

죽은 자가 다시 3일 만에 사니까

얼마나 막 살겠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사망의 몸에서는 막살지도 못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얼마나 막 살겠냐 말이죠.

 

막살자 라고 하니까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지도 못하는 자들이

막살자가 또 명령어가 되어버렸어 ㅋㅋㅋㅋㅋ

막살기를 지키는 자들이 막 생겨요 글쎄

그거 따라 하다가 아 속았다 싶어서

바로 막살지 말자로 또 돌아서 ㅋㅋㅋ

 

몸이 안 따라 주거든 ~~~~

 

몸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못해요 글쎄

다른 몸을 쳐다 봐야 하는데

자기 몸을 늘 염두하더라 말이죠.

? 구원 받아야 하니까

 

인간 몸 구원 안 됩니다.

받아본들 의문 덩어리 인데 왜 받을려고 하세요

딴 몸

예수님이 구원 받았으면 이제 끝 게임 오바 끝났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 말이죠.

 

예수님 보세요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주가 되셨잖아요

얼마나 또렷합니까?

나의 구원은 그런게 없어요

아예 기대하지 말자 말이죠.

 

오죽하면 얼마나 더 또렷하냐 하면

너희가 죽인 예수를입니다.

내 손으로 죽인 예수를 다시 살렸으니 이 보다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그래놓고 나의 구원을 왜 바라냐 말이죠.

오히려 심판 받아 마땅하기에

제발 용서해 주세요 해야 할 판국인데

그러니 주님이 다시 살아났으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나의 구원은 안 기뻐요

예수님 다시 산 것만 기뻐요.

내가 죽였거든요.

 

내가 구원 받고 싶어서 죽였던 그 예수님이 말이죠.

 

곧 끝에서 다 이루었다 가 낳은 증상물이 창기와 세리이다 말이죠.

시간의 거꾸에서부터 온 묵시에서 태어나더라 말이죠.

 

그러니 아브라함은 자식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겁니다.

자식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다 말이죠. ㅋㅋㅋㅋ

말이 되냐 말이죠.

 

탕자에 대한 반발이 그렇거든요.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이유도 그래요.

막살면 안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구요.

 

즐겨라 라는 향유 향락은 주이상스는

이 관계성이 아니면 나올수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래 글쎄 ~~~~

저들이 더 싫어하는 용어만 골라서 해요 글쎄 ~~~

그 정도로 자유로와 ~~~

그 정도로 막 살어 ~~~

 

나 보다 많이 탕감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라고

그 정도로 자유를 주신 주님에 대한 감사가 넘치고 있음이

남 눈치 안보고 자신만만 막 나와요 글쎄

 

저들은 또 별명을 붙여요 글쎄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꼬

또 구분짖기 ~~~~

저 세리와 저 사도바울과 저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 예수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꼬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구요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주시지 않았다면

미래완료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서 오는 피로 사심이 물어봐 주지 않았다면

그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번제와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그 추궁에서

왜 막살았냐 라는 추궁에서

왜 제대로 사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는 삶을 살지 못했냐 라는 그 추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말이죠.

 

마귀의 특징이 뭡니까?

십자가의 용서를 말을 못해요 글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말을 못해요 글쎄

 

그저 구분 구별 짖기를 해요

십자가의 용서와 십자가의 다 이루심과 다르다 라꼬 ㅋㅋㅋㅋ

마귀죠 마귀니까 그래요

 

갑질을 해요 글쎄

너는 흙수저 너는 부정한 개같은 이방인 수저

나는 선민 수저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구원수저

 

웃끼고 있네

십자가 수저가 아니면

금수저든 흙수저이든

이방인 수저이든 이스라엘 수저이든 다 지옥인데????

 

구별짖기를 인간 쪽에서 한다는 것은

곧 힘을 과시하는

나 너보다 성경 지식 많아

나 너보다 십자가 더 많이 알아

 

등등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심판의 불 앞에서

 

일곱 앞에서는 다 미흡하기 짝이 없는

모잘라 모잘라 함량 미달의 666일 뿐인데

왜 그런 666을 주장하는고 하니

다른 것은 안 통하거든요.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것은

유일하게 매매 가 되는

666 뿐이다 말이죠.

의문의 것일 뿐인데

 

십자가는 소통이 안돼

단절 뿐이야

그래서 심판 밖에 없어

심판 앞에서 무슨 놈이 소통이 통하겠냐 말이죠.

단절을 아직 못 보니까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

구별짖기를 하더라 말이죠.

 

아직 제대로 된 저주와 심판을 못 받아서 그렇다 말이죠.

되도 않는 심판과 저주를 퍼붓기만 할 줄 알았지

죽이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저주를 받아 본적이 없으니까

 

누가 안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이 안 보이더라 말이죠.

 

문둥병 누가 줬냐 말이죠?

사람들이 준게 아니다 말이죠.

자기 잘못으로 받는게 아니다 말이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은 거다 말이죠.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 된 것이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런 묵시적인 해석을 인간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실로암 소경의 부정성을 존재로만 파악하는 겁니다.

역사로만 해석하기에

그 원인을 자꾸 찾아요

원인이 없는데 원인을 찾네 글쎄 ~~~~

자기 죄니

부모 죄니

날 때 부터이니까

자기 라고 하기에도 무리수 이고

부모 죄 라고 하기에도 그럼 왜 부모는 소경이 아니고 야만 소경이냐 라는 것에서

죄인으로 뒤짚어 씌우기에 애매한 겁니다.

신학이 정립이 안돼

 

원인을 따져야

자신들의 구별짖기가 빛을 발하는데

아 너무 어려운 문제라 ~~~~~

 

헷갈려 ~~~

심판을 할려고 하니 조심 스러워 ~~~~

잘 못 정죄 했다간 뒷 수습이 안되니까 유보

마침 예수가 옆에 있네

옳치 시험해 보자

이용해 먹자

이것이 심판 주 앞에서

심판 당해야 할 자신의 처지를 못 보고

그저 남을 제대로 판단해야 하는 그 재미에

666 종교에

예수님까정 끌여들이네

그 종교오락에

포주 짖에 말이죠.

 

나를 제대로 심판 못하는 것이

어떻게 나를 제대로 구원하겠냐 말이죠.

 

꼴에 심판 퍼붓다가 저주 퍼붓다가

되레 죄책감에 걸려

일곱 귀신이 씌여버렸다 말이죠.

 

본인이 귀신인데 귀신을 쫏아낼려다가 귀신으로 들통나더라 말이죠.

 

이것은 시간의 순으로 해석을 해서 귀신으로 해석하고 쫏아낼려고 목숨 걸고 덤벼들지

남겨진 씨가 귀신으로 만드는 것은 못보는 거다 말이죠.

 

항상 귀신들린 자를 뒤에서 조종하는 멀쩡한 자들이 자신의 손익에 따라서 활동하더라 말이죠.

귀신들린 점쟁이 여자를 통해서 뒤에서 삥 뜯는 놈들 말이죠. 사도행전에서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독자적으로 그런 짖을 못해요

다 뒤에서 움직이는 배후 세력이 있다 말이죠.

그 배후세력을 밝혀내지 못하고

곁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죄인을 정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말이죠.

머리는 냅뚜고 꼬리를 잡아서 뭐하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꼬리 잡기에 미쳐있다는 것은

그 놈이 머리이다는 거죠.

 

그래서 땅에 쓱 SGG 쓰시는 내용은

배후세력 곧 머리가 냅따 도망치는 내용을 적으시는 겁니다.

앗 들켰다 ~~~~

마귀가 베드로를 그렇게 확신하면서 잡아왔는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 하다 잡은 여자를 말이죠.

 

왜 도망칠까요?

앗 들켰다 ~~~

도망 칠 꺼면 왜 법을 주장하냐 말이죠.

 

아니 여자로써 이런 여자를 보면

돌삐 던질게 아니라

같은 여자로써 알 것인데

저는 남자로써 모르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약한 여자가 약한 여자를 더더욱 정죄를 하는 거 보고 놀랬다 말이죠.

 

알고보니 그 목사의 아내가 포주라 ㅋㅋㅋ

오늘날 목사들은 포주들이거든요.

같은 포주라

대제사장이 옷을 찢으면서 참람한 말을 들었다고

귀를 씻고 옷을 찢고 난리가 아니다 말이죠.

 

예수님을 죽이고 싶으면 그냥 죽이면 되지

왜 가만히 있는 옷을 찢냐 말이죠

포주이거든요.

자신의 손님들을 의식한다 말이죠.

에헴 에헴 자꾸 헛 기침을 하면서 자꾸 보래요 글쎄 ~~~~

나 대제사장이니까 그 의무를 다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해야 한다 말이죠.

야들아 나 옷 찢었어

옷 찢었다니깐 ~~~

 

회개를 했다니깐 ~~~

 

저 예수가 싸 질러 놓은 죄악을 내가 대신 회개 했어 라꼬 ~~~~

예수가 내가 그로라 라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래 글쎄

나 옷 찢어야 대제사장 맞는 거지?? 라꼬

봐라 봐라 나 옷찢는다 ~~~~~

리마리오처럼 나 옷 찢는다 ~~~~~

 

남을 의식하는 소비를 한다 말이죠.

이게 글쎄 매매가 되요 소통이 되더라 말이죠.

 

내 옷 하나 사줘야 해 ~~~~~

 

결국

 

하나님이 달라 ~~~~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유통 시키는 거다 말이죠.

이게 666 이다 말이죠.

 

처음 기존의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이런 자들을 바로 소돔과 고모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속에서 빼내임을 당한 자가 바로 이사야입니다.

즉 이사야가 거짓선지자였다는 거죠.

쉐마 쉐마 기도하는 그런 거짓선지자 였다 말이죠.

 

참선지자란 인간 쪽에서 될 수가 없어요.

건널수 없는 강이 큰 구덩이가 있거든요.

 

거짓말해서 거짓선지자가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참말만 해요

왜냐하면 역사로 시간적으로 나오는 언어이거든요

몸 자체를 실천의 달인으로 만들어 놨으니

거짓말이 나올수가 없지요.

 

오늘날 인문학자들 봐요 거짓말 하던가?

그들의 비판 대상들은 늘 거짓말 하는 정치꾼들이라

비판하기 딱 좋거든요.

그런데 그게 글쎄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이라 ~~~

 

그럼 왜 거짓선지자냐

바리새인이 거짓말 하던가요.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바알세불 걸려서

이상한 기적으로 사람들을 다 유혹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마귀 대 마왕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듯이

 

이 예수님이 안 보이면 무조건 다 거짓선지자 이다 말이죠.

 

지금 당장 심판 받아 마땅한 심판 주 예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 판국인데

 

용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따지겠데~~~~

십자가의 용서를 바라보지 않는 놈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바라보겠습니까?

왜 구분 시킬까요?

평생을 구분짖에게 미쳐있거든요.

번제와 제사의 달인이라 ~~~

존재로 보고 존재로 끝난다 말이죠.

 

즉 나의 하나님이 따로 있으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안 보이거든요.

 

피 용서 하시는 예수님이 안 보여요

그것 마저도 신학으로 따져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더 맞다고

더 옳다고

 

본인이 용서를 받지 못하니까

자꾸 더 옳은 것 주장하면

너 보다 더 옳다 라는

너 보다 더 바르지 않냐 라고

주장한다 말이죠.

 

얼마나 다행입니까?

십자가의 용서 조차도 시시하게 보니

 

그 정도로 무시 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피 용서이기에

 

피가 그렇게 벌려놓는 거지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나오는게 아니다 말이죠.

주님이 하신 거다 말이죠.

남겨진 씨에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나오는 증상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잘잘못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

그놈이 맨날 인간의 잘잘못을 맨날 따지거든요.

 

그게 거짓선지자 이다 말이죠.

 

맏아들의 아버지는 가짜다 말이죠.

 

탕자의 아버지만이 진짜다 말이죠.

 

열매로 알리라 말이죠.

 

열매 곧 탕자

막사는 놈

이 자를 통해서 아는 겁니다.

 

누구를? 아버지를

어떤 아버지?

 

인애와 자비의 아버지

 

즉 번제와 제사의 아버지가 아니다 말이죠.

 

우와 저런 원수 중에 원수 놈도 용서하시는 분이 진짜 나무 이구나 라는 겁니다.

 

사과열매는 사과나무에서만 나거든요.

막사는 자는 막사는 나무에서만 나거든요.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에게서 나오는 막사는 탕자다 말이죠.

 

그런데 다들 열매를 어떻게 해석을 하는고 하니

선하고 착하고

알고보니 맏아들이라 ㅋㅋㅋ

맏아들 이스라엘 이라 ㅋㅋㅋ

 

둘째 아들 탕자가 아니라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라는 열매와

그야말로 도저히 용서 못하는 망나니 중에 망나니 다 털어먹고 그저 긍휼만 바라는 탕자라는 열매

 

어느 열매로 아시겠습니까?

 

대부분 기독서점에 나오는 열매와 관련된 책들이 맏아들 이야 글쎄

 

탕자를 말하는 열매는 단 하나도 없어

다들 이스라엘 이래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 는 단 하나도 없어 ㅋㅋㅋㅋ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 되는 것을 매매 해야 돈이 되거든요.

 

탕자를 열매로 말하는 책은 팔리겠냐 말이죠?

매매가 안돼 ~~~~

 

아니 같은 성경을 봐도 이렇게 되니

참 기가 막히죠

결국 다른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문자로 보고, 지킬 법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지킬게 하나도 없는 향유 즐기기 막살기로 보고 ~~~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는

인간과 하나도 맞는게 단 하나도 없어요 글쎄

 

아무리 인간 쪽의 최고의 믿음이 와도

용서와 다 이루심이 다르다 라고 인간 최고의 믿음이 와도 말이죠.

 

하나님이 달라서 그렇다 말이죠.

 

그래서 일부러 일부러 마귀에게 물리게 해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게 하신다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 만들어서 남겨진 씨를 보게 하신다 말이죠.

 

기존의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벌리지 않거든요.

두 패로 가르지 않거든요.

이런 부정의 부정을 하지 않거든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를 않아요

즉 부조리 반칙을 하지를 않아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아요.

? 그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이니까

 

맏아들의 하나님은 곧 아버지는

자기가 상상해낸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을 금가락지 끼우는 하나님 곧 아버지를 만들어 내었으니까

 

이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그런데 사마리아인의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나의 눈을 띄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듯이

지금 이 순간 나의 문둥병을 깨끗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아니요

바리새인의 1300년 묵은 모세 산삼도 아니요.

지금 이 순간 내 눈을 띄게 하신 예수님이다 말이죠.

그 분의 이름도 몰랐어

바리새인이 알려줬어

그런데 바리새인은 싫태 글쎄

 

바리새인이 싫어하는 분이 나의 구세주

아니 왜?

바리새인은 저 사마리아인을 고쳤다는 자체가 거부스럽거든

껄끄럽거든

거리끼거든

 

그들의 신학과 교리와 성경지식은

저 사마리아인을 고쳐주면 안되는 하나님이거든

 

이것을 글쎄 이사야 선지자가

그 하나님을 마귀라고 라고

이사야 본인이 글쎄 저 사마리아 곧 개같은 이방인

더럽기 짝이 없는 비거룩한 사마리아인을 고쳐주시는

남겨두신 씨를 외치면서 이 남겨둔 씨만이 하나님이다고 하니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서

처음 듣는 하나님을 외치고 있으니

죽어 마땅 하다 말이죠.

 

교회 안에서 이런 사건들이 벌어져야

살아계신 주님이다 말이죠.

조용하다면 그거 마귀집단인 거다 말이죠.

 

즉 번제와 제사에 빠져있다는 증거이거든

가짜 하나님

 

인애와 자비가 펼쳐진다면

십자가로 인해서 막 싸움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사야 같은 똘아이 하나가 나타나서

온 우물을 흑탕물로 만드니까 말이죠.

 

그러니 늑대우리 속에 양을 보낸다 말이죠.

가짜 하나님을 그 배후세력을 들통내라꼬

 

이사야가 그래서 나라와 민족과 신을 배신하고 외치는 겁니다.

기생라합처럼

성령을 입어서

심판의 주를 외친다 말이죠.

아무도 심판 안 받아요

지 혼자 받아요.

 

예수님을 심판의 주로 보는 자 없어요.

오히려 십자가의 저주와 심판은 예수님 자기 혼자 받아요.

12제자도 다 도망쳤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를 보고

소돔과 고모라인 자신을 심판해 달라고

고쳐달라고

하는 자는

심판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것이 일곱에게 사로잡힌 일곱교회이고

 

자신은 소돔과 고모라 가 절대로 아니다 라고

내가 왜 심판 받아야 해? 라고 하는 자는

고쳐달라고 할 이유가 없기에

? 난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니까

 

그래서 심판 주로 예수님을 볼 리가 없으니

그저 문둥병 고침받고 입 싹 딱고

저 사마리아인과 구별짖기 놀이하는

유대사회로 다시 입성해서

소돔과 고모라와 멀어지는 삻을 살게 해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이 열매의 나무가 가짜 임을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어리석고 미련하고 거리끼는 지혜이기에

열매를 통해서 나무를 드러내는 배후세력을 들추어내는 십자가의 피 용서다 말이죠.

 

결국은
아니 결과적으로는
아니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사야는 이 십자가의 증상물로써 활동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

 

원인 없이
역사 없이
시간 없이
공간 없이
이스라엘 없이
참선지자 없이

남은 씨 예수님만을 외치는 자로써
죄인 중의 괴수로써
거짓 선지자 중의 거짓 선지자로써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헤를 외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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